요린이 = 요리 초보 + 어린이
등린이 = 등산 초보 + 어린이
자린이 = 자전거 초보 + 어린이
...
문제 시작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 그냥 써도 괜찮을까요?
이는 어린이를 서툴고 실력이 낮은 존재로 설정한 뒤, 무언가 처음 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의 의식에는 어린이를 낮게 보는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어린이를 미숙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해야만 사용 가능한 말입니다.
이런 말을 처음 사용한 이에게 어린이를 낮게 보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재미있었을지 모르고, 참신했을지 모릅니다. 귀여운 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듣다보니 문제를 느꼈고, 불편해지기까지 하니 이 말의 사용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른만이 정상이고 완전한 존재라면, 어린이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린이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존재일까요?
사회사업에서 어린이
사회사업에서는 당사자가 누구이든 그를 인격적 존재로 여깁니다.
어린이, 뇌인지증(치매)노인, 지적 약자, 외국에서 온 사람….
그가 누구일지라도 자기 삶을 살고 둘레 사람과 어울리게 돕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시선에서 만남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는 이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사계절, 2021)
‘요린이’와 같은 말은 학교사회복지사나 교육복지사, 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사가 쓰는 걸 보았습니다.
짐작 컨데, 그런 말버릇이 있다면
작은 일도 아이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지 않고 사회사업가가 일방적으로 이뤄갈 겁니다.
처음부터 어린이를 수준 낮게 보았으니, 그 아이들의 역량과 가능성을 보았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어린이를 서툴고 미숙한 존재로 여기면 사회사업가는 어떤 일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계획합니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참여하게만 하고, 이를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어린이에게 배운다
제 아이는 고등학생입니다. 아이와 십수 년 함께 사는 동안에 배운 바가 적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 낯선 이에게 먼저 인사하는 모습에서 인정을 배웠습니다.
작은 일에도 쪽지까지 써서 답장하는 모습에서 도리를 배웠고, 작은 것에 감동하는 모습에서 감사를 배웠습니다.
자전거를 가르칠 때도, 몇 번 넘어진 뒤 거뜬히 타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게 '보람'을 느끼게 한 존재가 어린이입니다.
미숙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힘이 빠질 때 신나게 뛰어노는 놀이터 아이들 모습에서 힘을 얻기도 하니,
어린이는 그 존재가 강점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시인들 같은 태도로 결코 쓰지 않는다. (…)
생활 현장에서 그때그때 얻은 감동을 대체로 소박 솔직하게 토해내듯이 쓰면 시가 되는 것이 아이들의 시다.
아이들은 어른과는 달리 현실 속에 무한한 감동의 원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을 시인라고 한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이오덕, 양철북, 2017)
나는 예전에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라는 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린이를 대상화하다 못해 신성시하는 듯해서였다.
어른이 어린이를 잘 가르치고 이끌 생각을 해야지, 어린이한테 길 안내의 책임을 떠맡기다니.
그리고 어린이가 길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 그런데 어린이에게 할 말을 고르고, 그 말에 나를 비추어 보면서 '길잡이'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사계절, 2021)
귀여워서 쓴 말일뿐?
‘요린이’란 말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쓴 말일뿐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것도 조심스러운 건, 아이는 귀여워야 한다는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 글에서는 ‘남자답다’ ‘여자답다’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다움’을 규정하는 순간, 그 밖에 있는 이들은 비정상이 되어버립니다. 존재를 상실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명확하게 선 긋는 ‘답다’라는 말은 개개인을 다양한 존재로 보는 사회사업가에게 조심스러운 표현입니다.
왜 어린이는 꼭 귀여워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엽다’는 말은 상대를 내 아래로 보았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보다 권세가 있거나 힘이 센 사람 앞에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귀여운 아이에게 귀엽다고 말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린이는 귀여워야 한다는 틀에 가두는 게 문제입니다.
당사자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당사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사회복지사는 상대가 누구이든,
어린이일지라도 그렇게 만나고 존중할 뿐입니다.
어떤 일에 어설프거나 미숙한 이를 '~린이'라 부르는 모습을
당사자인 어린이들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몇몇 말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왜 이런 말이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표현만 다른 비슷한 말을 하거나,
말이 아니라도 시선과 행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말이 왜 모욕이 되는지 알아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당사자게에 물어보면 된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창비, 2019)
어린이
‘늙은이’는 나이가 많아 중년을 지난 ‘사람’을 뜻합니다.
‘젊은이’는 나이가 젊고 혈기 왕성한 ‘사람’을 뜻합니다.
‘어린이’는 나이가 어린 이, 나이가 어린 ‘사람’을 뜻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미숙하게 본다면 누구나 기분 상할 겁니다.
어떤 일에서 자기보다 실력이 낮거나 서툰 사람을 어린이에 빗대어 표현하기 시작하면,
이런 말버릇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인종과 지역과 종교를 차별하는 말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미숙한 존재로 보았던 사회 속에서 자란 어린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존중과 사랑의 말 속에 있어야 넉넉한 어른으로 자랄 겁니다.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행동을 통제하니 자꾸 이런 말을 고치지 않아 쓴다면 치우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모인 사회는 온갖 갈등이 가득할 겁니다.
갈등을 화해로 만드는 사회사업가라면, 이런 말을 진지하게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회사업가라면 어린이를 존중하는 말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용길 바랍니다.
어린이를 부족하고 미숙하게 여기며 조롱하듯 부르는 사회에서
아동학대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학대 없는 사회를 원한다면 당장 우리의 말버릇부터 돌아봅니다.
교육을 하는 사람이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지만,
특히 글쓰기로 교육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이를 높이 보고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어린이의 마음과 삶을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의 세계에서 배울 것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글쓰기 교육을 해낼 수 없다.
어린이의 글을 멋대로 깎고 보태거나 어른의 생각대로,
글 버릇대로 씌어지도록 바라는 사람은 글쓰기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이오덕, 보리, 2004)
말과 글, 그리고 의식, 삶 이것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삶이다.
그 다음이 의식이고, 다음이 말이고 글이다.
즉, 삶->의식->말->글 이렇게 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역행하는 수가 있다.
삶<-의식<-말<-글 이렇게 말이다. 분명히 우리의 역사에서 이 역행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역행은 잘못된 사회, 병든 역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문화의 역행 속에서 사회와 역사를 바로잡으려면 역시 이 역행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즉 글과 말을 바로잡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바로잡고 삶을 바로잡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오덕 일기 3> (이오덕, 양철북, 2013)
첫댓글 어린이날을 생각하며 지난가을 쓴 글을 조금 다듬어 다시 올렸습니다.
<'요린이' 유감, 언어는 실천의 수준_슈퍼비전 글쓰기 모임> 2021.10.12.
https://cafe.daum.net/coolwelfare/RpOF/49
선생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련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생각나눔 하겠습니다.
저도 귀여운 느낌이라고 생각해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언어가 주는 힘을 느낍니다. 글을 쓸 때 신경 써서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