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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2022년 애지 여름호
----임봄, 강정이, 권혁재, 김늘, 박설하,
풀
임봄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
드러낸 송곳니 휘날리는 갈기
완벽하게 전투태세를 갖춘
굶주린 초록의 호랑이들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낮게 몸을 웅크려
은밀하게 눈알을 굴리다
구름에서 스미는 피 냄새에
두 팔 벌려 뛰어오르며
포효하는 소리
사방 들썩이는 땅에
화단에 모인 꽃들
일시에 숨을 멈춘다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에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이고, 이 봄을 주재하는 것은 가장 작고 가장 나약한 풀이라고 할 수가 있다. 풀은 가장 작고 나약하지만, 이 풀이 자라지 못하는 곳은 사하라 사막과 시베리아 등의 극북지방이라고 할 수가 있다. 꽃도 풀이고, 약초도 풀이고, 오곡백과도 풀이고, 울창한 나무들도 풀이 진화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풀이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고, 가장 작고 가장 나약한 풀이 모든 생명체들을 먹여 살린다.
봄은 풀의 계절이고, 이 풀의 기운이 백수의 왕인 호랑이처럼 퍼져나간다.
마당에는 호랑이가 산다. “드러낸 송곳니 휘날리는 갈기/ 완벽하게 전투태세를 갖춘/ 굶주린 초록의 호랑이들”이 살고, “보호색으로”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낮게 몸을 웅크려/ 은밀하게 눈알을” 굴린다. 모든 생명체들의 젖줄인 비구름 속에서 피 냄새를 맡고, 두 팔 벌려 뛰어오르며 포효를 하면 사방 들썩이는 그 포효 소리에 “화단에 모인 꽃들”이 “일시에 숨을 멈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상상력이고, 이 상상력의 힘은 언제, 어느 때나 모든 사물들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그 역할들을 새롭게 부여한다. 풀은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는 천하무적의 백수의 왕이 된다. 으르렁 으르렁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 늠름한 갈기를 휘날리는 호랑이, 언제, 어느 때나 주도면밀하게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 비구름 속에서 피냄새를 맡으며, 모든 꽃들을 제압하는 호랑이----.
모든 시인은 상상력의 대가이며, 이 상상력의 혁명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일어난다. 잠을 자는 것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고, 눈을 뜨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들숨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고, 날숨은 자기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잠을 자고 깨어나는 것도 혁명이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도 혁명이다. 늘,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자는 혁명가이며, 그는 이 상상력의 혁명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마당에는 호랑이가 산다”라는 말 한 마디로 ‘풀의 공화국’은 ‘호랑이의 공화국’이 되고, 이 호랑이의 야수성과 생명력을 통하여, 그의 언어들은 천둥 번개처럼 봄비를 뿌리게 된다.
모든 생명체들의 젖줄인 봄비는 그냥 저절로 쏟아지는 봄비가 아니다. 임봄 시인의 언어가 풀들의 잠을 깨우며 “마당에는 호랑이가 산다”라고 울부짖으니까, 하늘의 구름이 깜짝 놀라 그 수문을 열어제친 것이다.
풀이 호랑이가 되고, 호랑이의 울음이 천둥 번개가 되는 기적은 임봄 시인의 천하제일의 업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바퀴들에 대하여
강정이
주차장에서 바퀴들이
감아온 길들을 풀고 있다
어떤 바퀴는 지쳐보이고
어떤 것에서는 풀냄새가 난다
장애자 봉사 다녀온 길
시어머니 요양병원 다녀온 길
고단한 바닷길을 풀고 있다
워커힐 단풍길 걷던 그녀와의 애틋함을
거꾸로 돌려보는 바퀴
바퀴들에 감겨 온 길들
밤새워 수런댄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린다
새벽이다
바퀴들은 오늘을 달릴 것이다
햇살이 그렇게 흘러들 것이고
탑이 그렇게 생길 것이다
높게 높게 바퀴들을 쌓아 올린다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바퀴들이 꿈을 꾼다
주차장은
저 숱한 길들이
순하게 풀려주길 비는 듯
숨을 고른다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에서
기나긴 겨울이 다 지나간 듯 봄비가 쏟아지고, 곧 매화와 진달래와 개나리와 벚꽃들의 꽃소식이 들려올 것도 같다. 세월의 바퀴는 변함이 없고, 하루바삐 세계적인 대유행병 코로나를 퇴치하고 희망의 새싹들이 봄꽃처럼 활짝 피어났으면 한다.
세월은 바퀴이고 운명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저마다의 행복을 연주한다. 대선에서 패배한 자의 바퀴는 너무나도 지쳐 보이고, 머나먼 남쪽 나라에서 꽃소식을 갖고 온 자의 바퀴에서는 풀냄새가 난다
수많은 장애자들을 위해 봉사를 다녀온 바퀴도 있고, 시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을 다녀온 바퀴도 있다. 그 옛날 “워커힐 단풍길 걷던 그녀와의 애틋함을/ 거꾸로 돌려보는 바퀴”도 있고, “밤새워” “귀뜨라미”처럼 저마다 다녀온 길을 수런대는 바퀴도 있다. 황금왕관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다고 사생결단식의 권력투쟁에 나섰던 바퀴도 있고, 수많은 간신모리배들의 중상모략과 이전투구에 환멸을 느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바퀴도 있다. 권력은 짧고 물리학은 영원하다던 아인시타인의 바퀴도 있고, 자기 자신의 사상의 왕국을 위하여 대학교수의 길을 마다했던 데카르트의 바퀴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현모양처의 길을 걸어갔던 어머니의 바퀴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아내와 처자식들을 위하여 더없이 슬프고 비겁한 자의 길을 가야만 했던 바퀴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식에 다녀온 홀어머니의 바퀴도 있고, 느닷없이 독사에 물린 듯한 해고 소식에 머나먼 길을 다녀온 바퀴도 있다.
바퀴는 생명이고 삶이고, 바퀴는 운동이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바퀴는 개성이고 자유이고, 바퀴는 행복이고 평화이며, 우리 인간들은 이 바퀴를 위해서 살고, 이 바퀴를 위해서 죽는다. 수많은 바퀴들은 저마다의 운명과 그 목표에 따라서 오늘도 달릴 것이고, 내일도 달릴 것이다. 쉽고 편안한 길도 있을 것이고, 온 산천을 구경하며 저절로 시와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길도 있을 것이다. 차마고도와도 같은 어렵고 힘든 길도 있을 것이고, 온갖 진흙과 자갈뿐인 ‘길 아닌 길’도 있을 것이다.
삶은 바퀴이고, 우리들은 높게 높게 바퀴들을 쌓아 올린다. 우리들도 꿈을 꾸고, 바퀴들도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꿈을 꾼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냈던 모세, 영원한 숙적인 영국으로부터 프랑스의 승리를 이끌어냈던 잔 다르크,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 독일통일을 이룩하고 오늘날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독일인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아픔을 극복하고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는 중국인들, 한자문화에 맞서서 세계 최초로 한글을 창제하고 오늘날의 한류문화의 효시가 되어준 세종대왕 등----. 이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의 바퀴는 꿈의 바퀴이며, 역사의 바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꿈의 바퀴이자 역사의 바퀴들이 오늘도, 내일도, 달리고, 또 달리다가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치면, 잠시 주차장에 멈춰 숨을 고른다.
강정이 시인의 [바퀴들에 대하여]는 ‘바퀴의 철학’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 자체가 바퀴의 역사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강정이 시인의 [바퀴들에 대하여]는 그의 삶의 체험과 그 지식이 담겨 있고, ‘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부분’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선이 각인되어 있다. 강정이 시인은 우리들의 마비된 의식과 잠을 일깨우며, 우리들의 꿈과 희망을 싣고 갈 바퀴들을 끊임없이 미화하고 찬양한다. 아름다움은 장대하고 크고, 아름다움은 완전하고 이 ‘무결점의 총체’로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서정시로 울려 퍼진다.
강정이 시인의 서정시는 바퀴이고, 우리와 늘 함께 있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이 아름다운 시([바퀴들에 대하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개마중
권혁재
어미가 빨래를 하는 사이에
월자 남동생은 우물에 빠져 죽었다
돌보지 못한 제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울던 어미의 눈 밑에
까만 눈물점이 돋아났다
어미의 눈물을 받아
저승 가는 빛으로 새긴
월자 남동생의 검은 점
그믐밤을 빌려
남모르게 씨앗을 뿌렸는지
우물가마다 개마중이 열렸다
어미를 마중나온 듯 까맣게 맺혔다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것이고, 따라서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부모의 가슴은 무덤이 되고, 그 무덤 속에서는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 수선화도 피어나고, 장미도 피어나고, 모란도 피어난다. 동백도 피어나고, 불두화도 피어나고, 국화도 피어난다. 이때의 수선화와 장미와 모란과 동백과 불두화와 국화는 저승으로 떠나간 자식의 초상이 되고, 이 꽃들은 사랑하는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까마중은 가지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며, 마을의 길가나 밭둑에서 아주 흔히 볼 수가 있다. 어린잎은 식재료로 쓰이기도 하고, 줄기와 잎과 뿌리는 해열과 산후복통과 이뇨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까마중이란 까맣게 익은 열매가 스님의 머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이 까마중은 오늘날의 백혈병과 신장염과 치질과 습진과 아토피 피부병에 아주 효능이 있다고 한다.
권혁재 시인의 ‘개마중’은 사전에 없는 이름이며, 시적 내용이나 그 의미로 볼 때 ‘까마중’의 방언이 아닌가 싶다. “어미가 빨래를 하는 사이에” “우물에 빠져” 죽은 월자 남동생, 그 월자 남동생이 “우물가마다” “어미를 마중나온 듯 까맣게” 맺혀 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가슴을 치며 울던 어미의 눈밑에 까만 눈물점이 돋아났을 때, “월자 남동생의 검은 점”은 “그믐밤을 빌려” 남모르게 까마중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어미의 울음은 통곡이 되고, 그 슬픈 통곡의 소리는 망각의 기능을 파괴시킨다. 너무나도 기가 막히게 떠나간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다가 묻고, 그 사랑의 힘으로 “그믐밤을 빌려” 까마중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믐밤은 칠흑의 어둠이고 단절이지만, 그러나 어미의 슬픈 울음은 저승의 아들을 불러내어 우물가마다 까맣게 그 열매를 맺게 했던 것이다. 어미의 사랑은 하늘을 감동시키고, 그 결과, 저승으로 떠나간 아들이 환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랑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의 무덤(가슴) 속에서 그토록 오래되고 영원한 기억의 역사를 기록해나간다. ‘아들아’하고 부르면 어미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엄마’하고 부르면 아들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사랑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기다림에 지쳐서 마을의 길가에, 우물가에 흔하디 흔한 까마중으로 맺힌다.
까마중, 까마중은 어머니와 아들의 영원한 초상이며, 따라서 권혁재 시인의 [개마중]은 이 어머니와 아들을 위한 찬가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시는 삶의 찬가이며, 이 삶의 찬가가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이 세상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시는 삶의 찬가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르시소스는 수선화가 되었고, 아폴로 신의 친구이자 호적수였던 히아신스는 히아신스꽃이 되었고, 아프르디테와 페르세포네가 쟁탈전을 벌였던 아도니스는 짙은 심홍색의 아네모네가 되었다. 인간이 죽어서 수선화, 히아신스, 아네모네, 까마중이 되었다는 것은 그 죽음들을 인간화시킨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하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수선화 축제, 히아신스 축제, 아네모네 축제, 모란축제, 벚꽃축제, 국화축제 등이 있듯이 모든 축제는 추모제이며, 이 추모제는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축제는 삶의 절정이고, 최고급의 격세유전이며, 역사의 발전법칙인 것이다.
Surfer
김늘
파도와 다음 파도 사이
그 막간의 기다림으로
나는 벅차올라
일렁임을 딛고 울렁임을 딛고
다시 올라서야 하지
호젓한 응시는 다만
해변에 몸을 기댄 자의 몫
변화무쌍한 물때는
오랜 숙명이자 버릴 수 없는 습관
솟아오르고 고꾸라지며
지구의 리듬에 조응하는
나의 오후는
빛나는 파란만장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에서
‘서핑’이란 타원형의 보드를 타고 파도를 따라 즐기는 놀이이고, ‘서퍼’란 이 파도타기의 전문가라고 할 수가 있다. 파도란 바람의 에너지가 물에 전달되어 해면을 변형시키는 것을 말하고, 아주 잔잔하고 부드러운 물결에서부터 매우 사납고 거센 물결까지 이 파도의 종류들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가 있다.
파도타기는 놀이이고 스포츠이며, 따라서 파랑주의보나 풍랑주의보 같은 사납고 거친 파도를 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물결의 높낮이에 따라서 인간의 자기 한계를 돌파하는 스릴 만점의 쾌락을 가져다가 주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천하제일의 풍경 속에서 그처럼 사납고 거친 파도를 탄다는 것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물리치고 백년 묵은 체증을 다 뚫어버리는 스릴 만점의 쾌락을 가져다가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은 천하제일의 풍경이 되고, 스릴 만점의 쾌락은 삶의 정점이 된다. 시간은 멈춰서고 공간은 무한대로 확대되고,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파도타기란 모든 외풍과 장애물과의 싸움이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하려면 파도를 타고 파도를 다스리며, 이 파도를 충견忠犬처럼 데리고 놀 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변화무쌍한 물때는/ 오랜 숙명이자 버릴 수 없는 습관”이고, “솟아오르고 고꾸라지는” 것은 가장 위험하고 힘든 파도타기를 천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파도를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최고급의 상승욕망이며, 이 상승욕망만큼 매력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것도 없다. 파도타기란 모든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향유하는 방법이며, 궁극적으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가 되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계는 나의 소유가 되고, 나의 발걸음과 함께 세계의 역사는 전진한다.
“나의 오후는/ 빛나는 파란만장”----. 그렇다. 서퍼는 쉽고 편안한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파란만장을 지배하는 주인공이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자유인의 초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파도타기는 삶의 기쁨이고 행복이며, 이 스릴 만점의 쾌락을 향유할 줄 모르면 김늘 시인의 [Surfer]가 될 수 없다.
무한히 넓고 넓은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자는 천하제일의 자아 도취자이자 아름다운 풍경과 하나가 된 [Surfer]라고 할 수가 있다.
오오, 파란만장이여,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황홀이여!!
수정유리 계과장
박설하
나를 그을 수 있는 건 없다. 해고수당을 올릴 수 있다면 잔업쯤은 밀어부칠 거다. 이주노동자 노라와 사장의 불법 사생활을 움켜쥐고 컨테이너 휴게실에서 쨉쨉 샌드백을 간 보는 나는 계과장. 기세등등한 공장장의 배짱을 벤치마킹하지. 근면한 밴딩 벨트를 노려보며 내부고발! 중지를 날린다. 아무도 못 쓰는 월차를 쓰고 야근 따윈 뒷전이다. 하하하. 목청을 뚫고 들어오는 경고는 짧고 굵게, 내일 뱉을 독설을 예고한다.
나는 들개. 허기는 참을 수 없다. 세치 혀로 김대리의 새가슴을 교란 작전에 끌어들인다. 달군 강화로에 손자국 없는 뒷담화를 굽는다. 유리가루 덮인 불법을 들먹이고 하극상을 대리한다. 현장을 휘젓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 독설은 나직할수록 먹힌다. 파유리를 쥔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놓치지 않을 거다. 묵은 작업복을 갈굴 때까지.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에서
인간은 본디 무서운 야수이며, 이 무서운 야수들이 사회적 계약형태로 모여 살게 된 것이 국가라고 할 수가 있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도덕과 법률의 질서를 강제하며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지만, 그러나 이 국가라는 강제의 힘이 약화되면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이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돈과 명예와 권력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이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은 어느 특정계급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은 거의 사라진 것 같지만, 그러나 국가라는 권력 자체가 소수의 강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그 야수성을 사실 그대로 보호해 주고도 있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국책사업의 이익을 대재벌들에게 몰아주고 있는 것도 그렇고, 특정한 산업을 육성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플랫폼 기업에 온갖 특혜를 다 몰아주고 있는 것도 그렇다. 대재벌들이 천문학적인 국책사업의 이익을 다 쓸어갈 때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구조’는 더욱더 심화되고, 대재벌들이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꾀할 때, 수많은 영세상인들의 상권은 다 무너진다. 소위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정보를 독점한 금융사기꾼들이 손을 털고 나갈 때쯤이면 수많은 개미들은 다 깡통을 차게 된다. 국가란 본디 무서운 강도집단이며, 군대와 경찰과 검찰은 물론, 사법부와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을 다 장악하고 수많은 국민들 위에 군림을 하게 된다. 수많은 전쟁과 내란과 분쟁을 일으켰던 것도 국가이고, 언제, 어느 때나 수많은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다 움켜쥐고 무차별적인 희생을 강요했던 것도 국가이다.
국가란 전투체제로 편성된 강도집단이며,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전쟁과 침략과 약탈을 자행할 수가 있다. 국민은 이 국가의 전투대원이며,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숙지하고 있다. 이 세상의 삶은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움켜쥘 수가 있다. 상승장군이라는 대통령은 더없이 자비롭고 친절한 미소로 그 선거전쟁에서의 피비린내를 은폐하고, 문어발식 기업확장의 대재벌들은 겨우 푼돈에 불과한 기부금으로 수많은 영세상인들을 잡아먹은 피비린내를 은폐한다.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사제는 인간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그 신도들의 재산을 가로채 가고, 인재육성이라는 특권을 움켜쥔 학자들은 소위 학부모들의 피를 빨아 먹는다. 이 세상은 수많은 전략과 전술이 부딪치는 싸움터이며, 소위 승자가 모든 영광을 독식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설하 시인의 [수정유리 계과장]은 악마 중의 악마인 야수성이 폭발한 시이며, 그것은 [수정유리 계과장]의 전략과 전술로 나타난다. “나는 들개. 허기는 참을 수 없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싸움의 목적(전략)은 사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고, 그 전술은 “사장의 불법 사생활”과 “유리가루로 덮인 불법을 들먹이며” 너무나도 잔인하고 타락한 사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는 것이다. 사장의 불법 사생활과 유리가루로 덮인 불법이라는 내부고발의 카드를 쥐고 있는 이상, “나를 그을 수 있는 건” 없는 것이다. “기세등등한 공장장의 배짱을 벤치마킹”하고, “아무도 못 쓰는 월차를 쓰고 야근 따윈 뒷전이다.” 나는 피에 굶주린 들개이고, 나의 허기는 참을 수가 없다. “세치 혀로 김대리의 새가슴을 교란 작전에 끌어” 들이고, “달군 강화로에 손자국 없는 뒷담화를 굽는다.”
이 지구촌의 모든 생물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으면 대부분이 놀이를 하거나 잠을 자며, 그 평화로운 삶을 즐긴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먹고 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해 환장을 하며, 타인들의 목숨을 빼앗고 지구촌의 모든 천연자원들을 다 고갈시킨다. 오늘날의 문명의 이기들은 대부분이 인간의 생존과는 무관한 사치품들이며, 이 사치품들의 이익을 둘러싸고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물론, 승마, 도박, 골프, 운동, 낚시, 여행, 음악, 영화 등의 문화산업을 위해서 수많은 생명체들의 목숨을 유린한다.
박설하 시인의 [수정유리 계과장]은 무서운 잔혹극의 최정예 전사이며, 그의 세치 혀의 독설에 굴복하지 않을 자가 없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한 악마의 전략과 전술, 더 큰 악마의 전략과 전술을 물리치기 위한 더 큰 악마의 전략과 전술, 모든 인간은 악마이고, 이 악마들에게 따뜻한 말과 부드러운 말과 사랑스러운 말 따위는 필요조차도 없다. 인문주의, 평화주의, 천사주의, 이상주의 등, 모든 최고급의 지혜는 다 가져다가 버리고, 일년내내, 사시사철 타인들의 목숨을 비틀어 버릴 독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살면 네가 죽고, 네가 살면 내가 죽는다. 모든 인간들은 나의 적이고, 나는 이 ‘만인 대 만인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천하무적의 독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비무한有備無患’은 [수정유리 계과장]의 전투정신이며, 그의 독설, 즉 ‘내부고발’은 천하무적의 대량살상무기이다.
무섭다. 끔찍하다. 탐욕이 최고의 미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무섭고 끔찍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이제는 금욕주의와 근검절약이 미덕이 되고, 자연을 숭배하며 살던 지난 날의 역사와 전통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시는 노래이고, 노래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모든 싸움을 종식시킨다. 하루바삐 수정유리의 사장과 계과장, 고용자와 피고용자,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대립 갈등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날들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박설하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오오, 우리 인간들의 시여, 노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