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경칼럼]을 옮겨 싣습니다. ]
최근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167명, 회장 이계진)채팅방에 소개된 1980년대 유명 KBS 뉴스앵커 신은경교수의 칼럼을 옮겨 싣습니다.
런던 유학시절 신세졌던 하숙집 할머니 추억담으로서 삶의 향기가 잔잔히 스며드는 고은 수필입니다.
물론 신은경교수의 경쾌한 승락을 얻었지요...^^
우리 단원 가운데에도 힘들게 유학하며 목표 학위를 받고 금의환향한 인재가 많지요...
기회가 되면 옛 추억을 되살리며, 유학시절의 에피소드를 글로 적어 여기 카페에 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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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칼럼] 나의 영국 엄마, 루이스 할머니
신은경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기억을 추억하고, 저장하고…
먼저 살다 간 여성의 삶은 나중에 살아가는 여성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사는 모습에서 존경과 감탄을 자아내고, 취할 것과 버릴 것 또한 많이 느끼게 한다.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물론 나의 친정엄마이고, 두 번째로는 우리 4남매를 키워주신 외할머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인생과 친정엄마의 삶을 보고 배우며 살아왔고, 때로는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이고 강인한 그분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또 한 사람, 나의 기억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 여성은 내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묵었던 하숙집 주인 할머니다. 내가 방송 12년 차에 유학을 간 1992년에 루이스 할머니는 70대 중반이었다.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혼자 오래된 2층 테라스 하우스에서 살고 계셨다.
그곳은 원래 B&B (Bed and Breakfast)로, 유학 오는 학생들에게 단기간 아침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나는 영국문화원의 추천으로 일주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일주일 내내 장기간 머물 거처를 찾아 헤맸지만,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매일 저녁 지쳐서 돌아오는 나를 보고 주인인 루이스 할머니는 제안을 건네셨다. 1층 본채의 뒤쪽에 붙어 있는 플랫(Flat)에서 하숙하면 어떻겠냐고. 그곳은 본채와 통하는 복도의 문만 잠그면 독채로 쓸 수 있었고 작은 응접실, 침실, 주방, 욕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주방 문을 열고 나가면 뒷마당도 있었다. 기숙사비의 두 배 가까이 비쌌지만, 안전하고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한 그곳에 나는 짐을 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루이스 할머니와의 영국 생활이 시작됐고, 할머니는 나의 두 번째 엄마가 되었다. 혼자서 식사를 챙기며 공부하는 내가 딱했던지 어느 날 할머니는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며 초대하셨다. 영국 웨일즈 지방엔 양고기가 흔했다. 양고기 램숄더를 오븐에 굽고, 감자, 완두콩, 브로콜리 삶은 것을 한옆에 놓고, 고기가 익으면서 나온 육즙에 밀가루를 넣고 끓여 그레이비를 만들어 고기와 야채 위에 뿌린 요리를 만들어 주셨다. 후식은 밀크티에 초콜릿 쿠키를 내주셨다. 단 것을 후식으로 먹어야 소화가 된다고 하시며.
그렇게 몇 차례 저녁 식사 초대가 있고 나서 어느 날 할머니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셨다.
“내가 이렇게 계속 저녁을 해주고는 싶은데, 비용이 드니 계속 무료로 할 수는 없다. 네가 공부하느라 요리할 시간이 없을 테니, 요리는 내가 하고, 채소는 무료로 하되 고깃값만 1파운드씩 내면 어떻겠냐?”
곧장 대답할 수가 없을 만큼 무척 당혹스러웠다. 내가 부탁한 것이 아니고 할머니가 선의로 나를 초대한 데다 사실 할머니와 식사하면 나는 시간을 더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준비할 때부터 부엌에 가서 좀 거들어야 하고 먹고 나면 디저트까지 함께해야 하고, 설거지도 좀 거들어야 했다. 나 혼자서 먹을 때는 간단히 먹고 공부에 들어갈 수 있지만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는 셈이다. 할머니는 어찌나 말씀이 많으신지 노인의 말 상대가 되어드리는 걸로 치면 나는 돈을 받고 놀아드려야 할 판이었다. 유학생이었으니 시간이 금 아닌가.
그들의 경제관념에 놀라 그저 알았다고 하고 1파운드씩 계산해서 저녁을 함께 먹었지만,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이후 나는 내 생각을 고쳤다. 할머니의 생각이 너무나 당연했고, 선의, 호의, 인정이라는 단어로 계산이 불분명한 내 한국식 사고방식에 좀 더 정확성을 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2년 이상을 그 집에서 머물면서 점차 할머니와 나는, 내 것 네 것 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저녁 식사는 물론 아침도 같이 먹는 날이 늘었다.
루이스 할머니로 인해 추억의 먹거리가 된 바나나 토스트
할머니의 아침 식사는 바나나 토스트와 밀크를 넣은 블랙티였다. 루이스 할머니는 다리가 퉁퉁 붓는 병이 있어 약을 먹는데 그 약을 먹어 빠져나가는 미네랄을 보충하려고 의사 지시대로 하루 바나나 한 개를 꼭 드셨다. 빵 한쪽을 굽고 버터를 듬뿍 바른다. 그 위에 바나나를 칼로 툭툭 이기듯 얹어 오픈 토스트를 만든다. 그리고 밀크티를 완성하기 위해 먼저 따뜻하게 온도를 맞춘 찻잔에 밀크를 붓는다. 그 후 진하게 우려낸 홍차를 살살 부으면서 원하는 진하기를 만들어 낸다. 밀크티와 어우러진 바나나 토스트는 지금도 나의 추억의 먹거리다. 아침나절 구운 빵 냄새와 버터와 어우러진 바나나 토스트를 먹을 때마다 루이스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오후 1시쯤이면 화려하게 단장하고 나들이에 나선다. 금발을 단정히 빗고, 가장 예쁜 옷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고 나선다. 어디로? 바로 빙고 게임을 하러 가는 것이다.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계산도 밝고 기억력도 뛰어났다. 서너 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온다.
아무도 할머니의 나이를 모른다. 물으면 늘 “서른두 살”이라고 답했다. 아들들과 손주들 얘기를 들으면 대략 할머니 나이를 짐작할 수 있건만 할머니는 줄곧 서른두 살이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신분증을 내보이면 차비가 무료인 나이인데, 혹시 운전기사가 매력적인 남성이거나 멋진 남자분이 버스에 타고 있으면 그냥 차비를 내고 내린다고 한다. 재미로,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기엔 참 진지했다. 할머니는 정말 서른두 살처럼 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쯤엔 동네 시장에 나간다. 그날 먹을 신선한 채소를 고르고, 고기 요리 재료를 사들고 집에 들어와 요리를 시작한다. 보통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먹는다. 늦어도 6시 전에 저녁 식사를 모두 마친다. 저녁을 먹고 나면 이층 침실로 올라가 그동안 그곳에 머물던 세계 여러 나라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9시 뉴스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 심플하지만 규칙적이고, 행동 하나하나 자기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한 번 이혼을 한 뒤 예순 살 때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재혼해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돼 혼자 지낸다고 하셨다. 혼자지만 쓸쓸한 기색 없이 늘 씩씩했다. 나에게도 서른두 살이라고 우기던 할머니와 정이 듬뿍 들 무렵,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쓰고 있던 금빛 가발을 훌렁 벗어 버렸다. 안에 새하얀 할머니의 본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자신은 일흔두 살이라고 말하며, 이제 손녀딸 같은 너에게 가릴 것이 뭐가 있겠냐고 하셨다. 꼿꼿하고 거만하기까지 해 보이던 할머니의 연약한 모습이 보였다. 이후 나는 서툰 솜씨로 할머니의 흰 머리를 커트해 드리기도 했다.
처음엔 할머니의 요리를 내가 배우고 먹은 편이었다면, 점차 나의 한국 요리를 할머니가 맛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름하여 ‘코리안 베지터블 누들’은 할머니가 아주 좋아하는 요리가 되었다. 먼저 당근, 양배추, 호박, 가지, 버섯, 양파 등 여러 채소를 큰 팬웍에 볶는다. 채소에서 물이 꽤 배어 나올 때쯤 고추장, 마늘, 생강가루, 소금, 고춧가루, 참기름, 깨소금 등 완전 한국식으로 양념을 만든다. 그리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중국식 에그 누들을 팬에 버터를 두르고 바싹 굽다시피 볶는다. 볶은 국수 위에 먼저 볶아 놓은 채소를 올린다. 채소에서 나온 국물이 어느 정도 흥건한 게 좋다. 할머니는 나의 매콤한 한국 요리를 처음엔 코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흘리며 먹었는데, 나중엔 그 얼큰함이 자꾸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저녁때가 돼도 이층에서 내려올 기척이 없었다. 올라 가 보니 몸이 안 좋아 식사도 거르고 누워 있겠다고 하셨다. 나는 베지터블 누들을 만들어 할머니를 불렀다. 잠옷 차림으로 내려오신 할머니는 매운 볶음국수를 드시고는 아픈 게 다 나았다고 웃으며 땀을 닦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할머니와 편지와 전화로 소식을 나누었다. 우리 딸이 태어나자 해마다 아이 생일이면 어여쁜 드레스를 선물로 보내 주셨다.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 루이스 할머니. 2년 8개월 동안 머물렀던 할머니 집에서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고, 우울하고 비 많이 오는 영국 날씨에도 날씬한 몸과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고 생존해 돌아올 수 있었다.
루이스 할머니, 고맙습니다.
신은경
전 KBS 앵커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 3개월 연수 후 KBS 9시 뉴스 앵커 발탁돼 12년간 뉴스 진행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등 지음
첫댓글 에세이에서 묻어나오는 여성특유의 섬세함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네요~
세상을 너머
엄마들의 모습은 달라도
살아가며 보여지는 본성 Mom의 가치는
통하나봅니다
나에게 엄마는?
내 딸에게 나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