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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흥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조철형
제1회 시흥문학포럼
2017년11월6일 오후7시, 시흥예총 희의실
오이도, 헤테로피아, 그리고 시흥
임동확
1.오이도, 섬이 아닌 섬, 지역문학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간의 가속성을 정지시키고 인간의 경험을 반추케 함으로써 삶을 통합시킨다. 이러한 의식의 작용이야말로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특히 장소로부터 비롯한 친밀감의 기억은 인간의 삶에서 안정적 기능에 얼마나 큰 것인지 말해준다. 따스하게 안전하게 느껴졌던 구체적 장소에의 기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고유성과 정체성, 그리고 삶을 구성하게 된다. 경험에 기록되어 있지만 부재하는 장소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가 된다. 장소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광포한 시간성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자 부정에 해당한다.
오이도(烏耳島), 이제 섬이 아니면서 여전히 섬이라 불리는 곳. 하지만 오이도가 섬이었을 때보다 섬이 아닌 지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오이도’를 통해 사람들은 일하는 세계에서 휴식의 세계로, 밝고 환한 곳에서 어둡고 숨겨진 곳으로, 일상적인 것에서 특별한 곳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건너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건너감’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내면성을 구축하고, 고유한 세계를 경험하고자 ‘오이도’를 찾아 들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 시인들은 구체적인 시공간을 근거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다양하게 변주해 왔다. 시간의 축으로 보편적 삶의 가치와 발전에 대한 믿음, 공간의 축으로 중심에 의해 소외된 주변과 보편의 관점에서 밀려난 개별적 차이에 주목하려는 인식론적인 전환을 꾀해왔다. 특히 지역 문학인들은 80년대 이후 중심으로 수렴될 수 없는 지역의 개성과 역사를 내세우며, 근대적 문학 담론에 포섭된 한국문학사에 이의를 제기하여 억압되거나 지워진 차이를 복원하고자 했다. 우리의 삶을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관점에서 재편하려는 폭력적 구별 짓기에 대항하는 담론을 마련하며 지역 간의 연대와 교류를 시도해왔던 게 지역문학의 역사다.
하지만 지역문학은 표층적 차원과 심층적 차원의 로컬리티(locality)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먼저 표층적 차원의 로컬리티의 경우 특정 지역어 또는 삶의 풍속들이 작품 전면에 등장하며, 보편이나 본질 차원의 문학적 접근보다는 시공간적 특수성을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경우다. 반면에 심층 차원의 로컬리티의 경우, 지역의 풍속이나 사투리 등 언어 차원의 접근보다 그 심층에 흐르는 원리나 구조를 찾아내려 노력한다. 작품의 배후에서 작용하면서 작품의 중요한 특성을 결정짓는 로컬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시적 공간의 하나로서 ‘오이도’는 고정되고 단수적인 특징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오이도’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고 중층적이며 복수적인 장소다. 설사 고향 사람들에게조차 하나의 고정되고 고립된 기원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꿈틀대면서 늘 변화하는 공간이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실체라기보다 항상 그 속에 있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물의 특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공간적 사유는,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와 배치의 속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오이도를 배경으로 하는 시들은 서로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문학을 공간적으로 사유하는 태도를 환기하며, 공간을 점유하는 인간들의 삶의 실상에 주목하고 그들의 관계맺음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끈다.
표면상 ‘오이도’는 보잘 것 없는 현실을 초월하도록 이끄는 이상향, 일종의 유토피아로 기능하고 있다.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신성하기까지 한 비루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가 ‘오이도’다. 하지만 ‘Utopia’란 단어가 어원상 ‘No place’라는 의미가 담겨 있듯이 유토피아는 없다. ‘유토피아’가 처음부터 ‘없는 곳’이자 불가능한 지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오이도는 결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장소이기에 ‘오이도’를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순간, ‘오이도’는 그야말로 ‘없는 곳’으로 증발한다.
2. 반(反) 공간, 헤테로피아, 아스나야폴라냐
그러나 부재하는 ‘오이도’는 현실에 존재한다. 특히 많은 시인들이 그 명목상의 ‘오이도’를 찾거나 노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도’는 일상적인 시공간이 아니다. 분명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시간과 장소의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곳이다. 마치 어린 날의 다락방이나 골목 끝 빈집 같은 공간으로서 헤테로피아. ‘오이도’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라져 없어져버린 금기의 특권적 공간. 잠시나마 자본주의 도시생활이나 사회규범에서 일탈 또는 초월한 자를 위하여 준비된 특수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은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통로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의 현실공간에서 다른 공간을 만드는 길이다. 특히 지역문학은 모든 공간에 편재한 지배 권력과 문학들의 네트워크나 배치에 작용하는 크고 작은 권력에 맞서는 거점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든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일종의 반(反)-공간(contre-espaces) 또는 대안 공간으로서 유토피아 중의 한 곳.이 ‘오이도’다
시흥출신 권현지 시인의 시 「라푼젤」을 살펴보자.
아스나야폴라냐*의 숲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빈 오두막 하나, 유배된 성처럼 내게 이름을 물어옵니다
고독을 통과한 원숭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파란 눈 안으로 태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소설가의 무덤을 찾아 호수 위를 맴도는 산책자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습니다 양동이를 든 손 위로 얼굴을 비춰봅니다
수염 난 사내는 나를 보고 미소 짓습니까
나는 긴 머리를 풀어 길을 더듬어봅니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들, 어둠을 따라 길게 펼쳐집니다
나는 죽은 시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기억합니까
피 흘리는 갈고리 손은 비명을 지르며, 내 앞을 추월하고
구원처럼, 누가 내게 노래를 불러줍니까
무너진 성벽과 탈출한 도적들의 칼부림으로 꽃들은 더욱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악령들의 입김으로 활엽수들은 가공을 부풀립니다
촛불을 들고 계단 위를 걸어갑니다
나무 위로는 온통 수배 전단지가 붙어 있습니다
얼굴은, 왜 얼굴을 더듬습니까
―권현지, 「라푼젤」 전문
권현지 시인의 각주에 따르면, ‘아스나야폴라야’는 러시아어로 ‘밝은 숲 속의 초지’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북쪽에는 침략에 대비하는 큰 숲이 있어 툴라를 방위하는 역할을 하였고, 톨스토이 무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이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그저 유토피아처럼 순수한 중립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모든 것이 충만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니라 ‘유배된 성’과 같은 ‘빈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파란 눈’에 ‘태양의 무늬가 새겨’진 괴기스런 ‘원숭이’가 기다리고, 죽은 ‘죽은 소설가의 무덤’과 ‘피흘리는 갈고리 손’들의 ‘비명’과 마주칠 뿐이다. ‘무너진 성벽 탈출한 도적들의 칼부림’이 시간을 넘어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어 오는 게 ‘아스나야폴라냐’다.
그런데도 ‘나’는 왜 ‘악령들의 입김’이 여전한 거기서 ‘죽은 시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기억’하려고 했던가? 아니면 여전히 ‘온통 수배전단지가 붙어있는’ 그곳에서 ‘누가 내게’ ‘구원’의 ‘노래’를 불러주길 갈망해야 했던가? 바로 그건 ‘아스나야폴라냐’가 현실의 공간 속에 격리되어 있는 환영의 공간. 복잡하고 소란스런 한국의 대도시나 자본주의 사회와는 구분되는 절대적 지점을 의미한다. 자기의 존재와 차이를 지우는 모든 권력과 지배 장치에 맞서는 절대적 장소가 바로 헤테로피아로서 ‘아스나야폴라냐’인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각 시인들에게 특정한 장소는 생의 위기나 슬픔을 극복하는 특권적 장소이다. 예컨대 고은의 시 「문의 마을에 가서」의 ‘문의’,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의 ‘사평’, 안도현의 시 「북항」에서의 ‘곰소항’ 등이 그렇다. 이는 여행자의 시선에 비친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들은 잠시 일상의 규범에서 일탈하거나 초월하려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특정한 장소에 해당한다. 각 시인들이 선호하는 특정의 극장이나 영화관, 골목길이나 공동묘지, 사찰이나 포구, 정원이나 숲길 등 모든 장소들은 생의 내밀한 의미를 환기시키는 매개지자 세계 전체를 집약한 저만의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지역은 그런 점에서 시인들에게 유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피아의 보고다. 시인으로서 우린 일상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시간과 단절을 꾀하며 그 단편화된 헤테로피아 시간을 향유한다. 미처 아무도 주목해보지 않는 장소를 통해 비루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을 얻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각 시인들에게 특정한 한 장소는 단지 추억과 향수의 자리가 아니다. 모든 시대의 아픔과 문명의 시간을 봉인해둔 비밀창고다. 그러면서 그곳에 한없이 계속해서 시간의 조개무지를 쌓아올리는, 엄청난 시간의 조개무덤이다. 그저 무색무취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파편들이 뒤섞이고 서로 파고드는 상감(象嵌)의 세계. 우린 이러한 헤테로피아가 주는 풍요로움에서 영혼의 삶을 살찌운다. 그걸 망각하면 그 속에 사는 인간의 꿈은 황폐해지고 경찰에 의한 관리 국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푸코는 말한다.
3. 공창조성, 고양해석
우린 흔히 시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를 쓴다고 생각하기 싶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시는 파블로 네루다가 말한 대로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시가 내게로 왔”을 때 시작된다. 시인은 이러한 스스로 출현하는 자가 생성 혹은 생기사건에서 단지 산파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내게로 온 시’는 실상 ‘문득’ 그렇게 다가온 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 적은 것만이 아니다. 적극적이고 면밀하게 주시한 결과다. 순간적으로 시인의 눈길을 끌거나 관심의 대상이 된 사태에 대해 집중적이고 주도면밀한 관찰의 결과가 한 편의 시다. 그야말로 관찰이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다.
특히 시인과 작품과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시인은 시작품으로부터 출현하며, 시 작품 또한 시인으로부터 출현한다. 시인과 시작품, 그리고 이 작품의 고유한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낳는 공창조성(共創造性, Konkreativität)(롬바흐)를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이러한 공창조성은 그저 우연히 이뤄지지 않는다. 세계의 연관관계를 실제로 이루어졌던 것보다 높은 수준에서 재구성하는 ‘고양해석(Hochinterpretation)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공창조성은 일단 사물을 주의 깊게 보는 관찰을 요구한다. 온갖 종류의 감각정보와 지식 정보를 활용하며 놀라운 발견 또는 위대한 통찰에 이르기 위한 관찰이 필수적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들은 바로 이러한 관찰행위로부터 시작되며, 그 기초적인 행위를 통해 각 사물과 사건들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감지한다.
예컨대 시인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변형함으로써 그 속에서 일정한 패턴이나 삶의 근본원리를 이끌어낸다. 눈앞의 대상을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일정하게 정해진 양식이나 형태 또는 유형을 의미하는 패턴(Pattern)을 이끌어내는 것이 시쓰기 첫 번째 작업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행동의 패턴’을 구분하고 원리를 추출하는 것을 넘어, 각기 다른 사물들이 가진 특징들에서 유사성을 이끌어내고, 행위모형과 독창적인 발견을 창출해낼 수 있다.
고양해석은 이걸 바탕으로 이뤄진다. 뉴톤의 ‘만유인력’ 발견에서 보여주듯이 한 알의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과를 땅으로 떨어지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면 이 힘은 하늘 위로도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달까지도 끌어당길 것”라는 대담한 가설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과감한 추론과 유추의 상상력을 동원하는 고양해석이 요구된다. 한 장소 또는 한 세계의 근본경험과 원리는 보다 높은 수준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고양해석을 통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고양해석은 그저 얻어지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데”서 얻어진다. 특히 위대한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달리 말해, 우린 ‘지역’과 ‘문화’, ‘민족’과 ‘인류’이라는 특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해도 세계문화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외면할 수 없다. 특히 한 작가의 개성과 작품적 성과는 그 특수성을 자각하면서도 그것을 횡단하는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확보된다. 좋은 의미의 작품, 위대한 작가는 어느 장소나 시대에서든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당대권력이나 윤리와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사회적 자아(persona)로 포장된 가면을 벗고 무의식적 충동의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근본적인 존재 전환 속에서 탄생한다.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문학적 보편성 역시 그렇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관류되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으로서 보편성은, 진정한 의미의 단독자 또는 개체적 인간의 내면의 고유하고 섬세한 움직임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개별적인 자유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인간의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 바로 그 개별자적 성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획득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개별성을 갖고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문학적 개성은 각자의 개별성 속에 내재된 모든 인간의 근본적 동일성에 그 뿌리를 둘 때 성공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4. 시흥: 始興, 時興, 詩興
시흥 출신 시인 박영만은 첫 시집 『始興詩篇』을 통해, ‘시흥’을 글자 그대로 ‘처음 始, 일어날 興’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그건 한 장소의 지명地名의 자의字意에 곧이곧대로 해석한 경우이다. 글자 그대로 따져보더라도 ‘始興’은 뭔가를 ‘처음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온갖 위험이나 박해를 감수하며 ‘처음 일을 벌린다’는, 일견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게 첫 번째의 ‘시흥’이다.
하지만 시흥은 한편으로 ‘時興’이다. 두 번째 ‘시흥’은 ‘시의적절時宜適切’ 또는 ‘시중時中’이라는 단어들을 연상시킨다. 주변의 여건과 그 시기의 정황 등을 고려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지시하고 있는 지명이다. 두 번째 의미의 ‘시흥’ 속엔 상황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심적 주체의식을 갖고 대처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무조건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거나 앞장서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 때에 맞춰 일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 번째의 의미의 ‘詩興’은 사전적으로 시흥(詩興)은 시를 짓고 싶은 마음, 혹은 시에 대한 흥취(興趣)를 가리킨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인 『시경詩經』에 따르면, 먼저 ‘시’의 참된 근본은 ‘사무사思無邪’에 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보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시’다. 또한 ‘興’은 단순히 마음의 즐거움이나 흥겨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의탁해서 하고자 하는 말을 끌어 일으키는 기법’을 의미한다. 어떤 이념이나 철학에 앞선 개념화 이전의 ‘그릇됨 없는’(思無邪) 순수마음의 상태에서 ‘그릇됨 없는’ 새롭고 참신한 시의 내용과 형식을 일으키는 곳이 진정한 의미의 ‘시흥’이라고 할 수 있다.
딱히 이러한 ‘시흥’에 거주하는 시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시인들의 눈길은 일견 화려하고 위대한 것보다 작고 소박한 세계에 더 오래 눈길이 머문다. 그저 보잘것없고, 한편으로 덧없기까지 한 사물이나 사건들이 그들의 시적 주요 소재나 주제로 삼는다. 특히 그것은 인간으로서 논리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소외감이나 고독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나 도덕적 규범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공허감 또는 결핍감이 시인 스스로를 주변자로 만들며, 주변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상황 자체를 문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을 둘러싼 주변세계나 타인과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 시인으로 하여금 어떤 실재와의 만남을 간절하게 추구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시 속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개별적인 어떤 깊은 상처나 아픔,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들은, 필시 그러한 간극과 공허를 메우려는 노력이다. 그야말로 시인은 언어에 의해 추상화되기 이전의 한 유기체로서 행복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 본연의 향수를 지닌 자이며, 시는 그 가운데 언어를 통해 잃은 것을 언어를 통해 얻으려는 모순적 시도의 일종이다. 언어를 통해 언어 이전의, 언어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가장 구체적인 경험이나 느낌의 대상 자체를 직접 드러내려는 불가능한 시도 중의 하나가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가 주목하는 주변성이나 지역성은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자연과 사회 또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떤 논리나 이념으로써 이해하거나 해소할 수 없는 예외적 사건 또는 잉여의 현상을 가리킨다. 언어와 욕망 사이, 무의식적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작은 틈새에 겨우 존재하는 주체성의 영역이 바로 시인이 탄생하는 자리이다. 자연을 정복하면서 창조되기 시작한 인간의 문화와 역사, 이념과 실천만으로 여전히 해결하거나 해소할 수 없는 미결정의 세계, 즉 혼돈과 장벽을 그 자체로 자각하고 수용하는 주변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시적 창조 작업은 여전히 통제 불가능하며 실체화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그 무엇을 향하여 대화와 공감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운동의 하나이다. 어떤 중심 또는 체계 밖에서 상징계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그 무엇, 즉 그 어떤 특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성이 시인들이 곧잘 주목하는 시적 주변성이다. 그 어떤 집합적 내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만의 고유한 내면성이 시인의 시선을 거의 본능적으로 중심보다 주변세계로 이끌며, 결국 스스로를 중심적인 가치나 이념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주변자로 만들어 간다.
‘오이도’는 차이의 가치를 드러내는 로컬‘들’의 기점이다. 즉 지역문학 또는 로칼리티 미학은 로컬‘들’의 차이를 노래하고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으로서 ‘오이도’를 바라볼 때 새로운 문학이 시작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이제 중심부의 눈이 아니라 푹푹 빠져드는 갯벌에 서서 중심부를 바라보는 지역문학인이자 개별자의 눈으로 지역문학을 대할 때 새로운 문학세계가 열린다. 우열을 가리는 폭력적 시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감각할 수 있는 다른-눈으로 지역문학을 바라본다면 은폐된 지역문학의 가능성과 함께 새롭고 독자적인 미학의 시학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시흥문학 활성화 방안 토론문1
임경묵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 ‘진달래꽃’ ‘먼 후일’,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한용운 시인의 ‘인연설’….
위에서 제시한 시인의 시는 시흥시에서 오이도 관광단지 방파제 위에 200미터 간격의 청동구조물로 견고하게 만든 시화(詩畫)의 일부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김소월은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기는 하나 오이도 허허로운 고잔갯벌을 바라보며 ‘산유화’,‘진달래꽃’을 읽는 시민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또는 방파제와 횟집이 즐비한 오이도에서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조사한 오이도 방파제 위에 설치된 10개의 시화에는 ‘오이도’ 또는‘바다’에 관한 시는 단 한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민들과 소통하지 못한 일방적인 행정의 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소월의 ‘산유화’,‘진달래꽃’이라는 시를 소래산 등산로 쉼터에서 만날 수 있다면 오히려 시민들의 위로와 위안이 되지 않았을까요? 시가 가진 상징성은 그가 탄생했던 유사한 배경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또는 그와 유사한 공간을 확보했을 때 읽는 이로 하여금 문학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푸른 서해와 고잔갯벌의 풍광을 간직한 이곳, 오이도를 찾는 시민들을 위해 어떤 풍경을 만들어 줄 것인지는 시의 행정뿐만 아니라 문학인들도 함께 고민해야할 일입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습니다. 시민들이 오이도에서 가장 먼저 찾고,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빨간 등대입니다. 그런데 오이도 상징조형물인 빨간 등대를 사이에 두고 오른편에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민족시인 윤동주의 ‘서시’가 바다를 보고 쓸쓸히 서 있고, 왼편에는 일제의 침략 전쟁을 동조 및 찬양하고 한국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몰아넣는데 일조한 시를 12편 이상 쓴 친일반민족행위자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가 아이러니하게 바다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인 제가 이런 상황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우리 시흥을 사랑한 시인은 참 많습니다. 故 김종철 시인이 1984년에 발간한 시집 『오이도』는 1980년대의 오이도의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집으로 순전히 ‘오이도’를 위한 ‘오이도’만을 위한 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날아다니는 섬을 본 적이 있는지’로 시작하는 시인의 시에서 늠내길 제4코스 바람길의 이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김종철 시인은『烏耳島』시집 서문에 외롭고 추운 마음을 안고 한 번씩 자신으로부터 외출을 하고 싶을 때 찾아가는 섬이 ‘오이도’이며, 이 섬이 내 속에 들어와 자기와 함께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며 시집 제목을 ‘烏耳島’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종철 시인의 오이도 연작시는 본격적으로 오이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1988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작인 이효숙 시인의 ‘오이도’는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밖에도 임영조, 이재무, 박몽구, 이승하, 윤의섭, 유미애 시인 등이 섬 아닌 섬 오이도와 오이도 주변 풍광을 빛나는 시로 빚어냈습니다.
한때 서해를 끌어들여 소금을 생산했던 포동 옛염전을 시로 빚어낸 시인들도 있습니다. 2000년 《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한 신용목 시인의 첫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바로 포동 옛염전에서 팔할이 쓰여진 시집이라고 작가는 고백한 적 있습니다. 관찰의 단일한 효과에 머물지 않고 포동 옛염전이라는 풍경의 배후까지 줄기차게 탐색한 의미 있는 시집입니다.
천상병문학상(2005)과 노작문학상(2006)을 수상한 바 있는 시단의 은둔자 김신용 시인은 현재 시흥시 장곡동 ‘섬말’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최근 시집 『바자울에 기대다』에는 “섬말 시편”이라는 동일한 제목 밑에 Ⅰ부와 Ⅱ부, Ⅳ부로 나뉘어 총 44편의 주옥같은 시편을 보여주고 있는데 ‘섬말’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가 바라본 모든 풍경 속에 이미 그의 육신과 기억이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섬말’은 한편으로는 그의 육체적 거처이고 그의 정신과 감각이 온전히 깃들어 있는 ‘몸’ 자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김종철 시인의 ‘오이도’를 읽으며 바닷바람 부는 방파제 위를 걷고, 저물녘 허허로운 포동 옛염전에서 신용목 시인처럼 ‘그 바람을 다 걸어’보고, 갯골길 입구 섬말에서 김신용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나간 ‘세월의 그늘’을 읽어내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구체적인 풍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시흥시와 지역의 문학인이 함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의 아름다움이란, 모든 걸어온 길들의 기억을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의 빛이나 노래로 빚어내 들려주는’일이라는 김신용 시인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얼마 전 이웃 광명시에 요절한 천재시인 기형도를 기리는 문학관이 건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고 부러웠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은 왜 광명시에 생길까요? 광명은 시인이 유년·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입니다. 5살이던 1964년부터 요절하기 전인 1989년까지 그는 광명에 줄곧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광명의 지명은 1981년까지 행정구역상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입니다. 그가 살던 곳은 광명이 아니라 사실 시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시흥은 이웃의 광명을 비롯한 다른 시와 구분되는 뚜렷한 장소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흥의 문학인들은 시흥의 중요 문젯거리를 작품 속에 담아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가치를 부여하여 문학작품에 치열하게 담아낼 때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지역의 시민들이 다양한 문학작품을 향유할 수 있도록 시민의 입장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 부천시는 얼마 전 동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가 선정한 문학창의도시에 선정되었습니다. 군포시는 ‘책으로 사람을 키우고 책으로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을 오래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민이 삶의 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행정과 시민과 소통하려는 낮은 자세가 만들어낸 멋진 합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흥의 각각의 문학단체들도 자신만이 가진 정체성과 다양성에 기반을 둔 적극적인 문학 활동을 통해 시민의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문학이 자기 혼자만 향유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뚜렷한 장소 정체성을 가진 특별한 시흥, 그리고 시흥을 사랑하는 문학인이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노력한다면 시흥시민헌장에도 제시되어 있듯이 ‘높은 수준의 문화가 시민의 일상’이 되고, 새로운 생명력으로 자신의 삶에 구체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흥문학 활성화 방안 토론문2
조철형
미래의 ‘시흥문학 활성화를 위한 방안’주제를 기획하고 지역문학 사업으로 추진한다고 해놓고 많은 고민에 빠졌다. 지역문학의 발전방안이라는 주제가 쉬운듯하면서 결코 쉽지 않은 주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내문학은 중앙문학과 지역문학의 이중적인 태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문학은 문단권력이라는 미명아래 많은 문학청년들에게 접근이 결코 쉽지 않은 어떤 성역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낀다. 많은 문학신인 및 문학 지망생들은 중앙문학의 진입이라는 것은 어쩌면 ‘끈’이라는 연결이 없이는 진입불가의 성(城)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문학인들의 문학적 지식 및 능력여부와 상관없이 일부 권력을 누리려는, 또는 누리고 있는 중앙문학인의 행태에서 비롯된 문단의 현 상황일 것이다.
지역문학의 발전을 위한 논의와 관련 저서도 국내에 일부 출간된 것으로 안다. 지역문학이라는 명제를 제시해놓고 보면 시흥이라는 지역에 한하지 않고 국내 어느 지역이나 다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역문학의 발전이라는 명제로 시작을 하면 점점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지역문학의 테두리 안에서 시흥문학이라는 울타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래의 시흥문학의 발전을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현재 시흥문학의 위치는 어디인 것인가? 문학인들이 생각하는 시흥문학의 위치와 일반시민들이 느끼는 시흥문학의 위상, 지역문화인, 지역행정가들에게 느껴지는 시흥문학의 위상은 어디인가 재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한걸음 더 발전시킬만한 구상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여 시작한 것이 문학포럼이다.
시흥문학은 신생도시로의 형성이 진행되는 현재의 ‘시흥시’와 그 이전의 ‘시흥군’으로서 위치적 장소를 가지고 있을 때의 시흥문학으로 나눌 수도 있겠다. 시흥문학은 일부 시흥지역을 다녀간 문학인 등이 시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역사적, 장소적인 문학창작 지역으로서 시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드러난 시흥에 관한 창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오로지 시흥은 작품 속에 내재된 시흥으로서 인식이 될 수 있다.
시흥은 오이도, 호조벌, 소래산, 물왕저수지, 시화호, 시화공단, 연꽃단지, 갯골 염전, 월곶 포구, 군자산, 소래포구, 관곡지 등 대표적인 문화관광지가 예전부터 혹은 최근 형성되었다. 유수한 풍광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시흥을 읊는다’는 것은 방대하다. 어떠한 문학가나 시인, 소설가, 수필가도 시흥을 완전히 이해하고 탐방하고 오롯이 느낌을 작품 속에 많이 승화시킨 이는 별로 많지 않다. 무한한듯하기도 하다가 유한한 환경으로 바뀌는 갯벌, 염전, 소금창고 등이 있으며 여기저기 개발의 모습으로 지역문학 환경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결국 어느 날엔 우리가 생각했던, 또는 기억하고 있던 시흥은 사라지고 월곶포구 앞, 소래포구로 들어가는 어부들의 귀환하는 모습(月串歸港船)도 예전의 모습이 아닌 아파트 밀집지대속으로 들어가는 바닷길로 남는 것이다.
주제에서 약간 비껴난 듯하여, 다시 시흥문학을 들여다본다. 시흥문학의 국내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일까, 반문해보았다. 시흥문학의 국내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일군의 지역에 거주하는 또는 지역 문학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하는 시인, 작가들에 의해 문학계 내에서 중앙이든 주변문학이든 알려져 있다. 시흥문학이 본격적으로 국내문학계에 알려지고 호응을 받았던 때는 시흥문학상을 실시하여 국내에 기성작가, 문학 지망생 등이 작품응모를 하게 되면서 시흥문학이라는 지역문학을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을 본업으로 하는 문학가들은 유수한 시흥의 문학적 배경을 매력으로 느끼고 이곳을 배경으로 창작을 하거나 안주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생산을 하려고 한다. 일련의 유수한 풍광을 자신만의 세계로 끌어들여 작품 속에 승화시키는 작업은 숭고하다. 지역문학인으로서 그러한 창작활동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중앙문단에 연결성을 갖고 있는 문학인들은 다만, 시흥을 창작의 모티브로서 작품의 상상력을 창조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이 대부분이지 시흥문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열정을 갖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결국엔 지역문학을 넘어선 시흥문학을 발전시키는 방안은 지역에 거주하며 지역문학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지역의 유수한 풍경과 문학적 배경을 상대로 문학작품을 의도적으로 누군가 생산해 내야 하는 것이다. 바라만 보고 창작하지 않는 것은 지역문학인으로서 직무 유기다.
시흥에 뿌리를 둔 문학인이라면 작품의 우열을 떠나서 많은 지역에 관한, 지역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작가 등의 작품이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 또는 생산해 내기 쉽게 문학적 환경, 시설 등을 자치단체 등에선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지역문학을 책임지고 있는 문화예술관계자, 문학회원, 문학단체의 열정적인 참여가 절실하다. 또한 지역문학인 스스로 주마간편의 열정으로 서로를 북돋아야 할 때이다.
시흥문학 활성화 방안 토론문3
이연옥
그동안 시흥문인협회에서는 시흥을 어떻게 해서든지 문학이 활성화되는 지역이 될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는 시흥문학을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번 포럼을 통하여 시흥의 문학을 심도 있게 살펴주셨습니다. 교수님의 발제문을 보는 순간, 아, 시흥을 몸으로 익히듯 살피신 발제문이구나 하는 감탄을 했습니다. 마치 오이도 방파제며 그곳 빨강등대며 곳곳을 거닐며 이야기를 하시듯 했습니다.
우리 시흥문학의 화두인 시흥문학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 우리 문학을 널리 진출시키고 시민들 속에서 사랑을 받게 할 수 없을까하는 저희들의 문제 해결방안을 발제문에서 네 가지 즉 ‘1.오이도, 섬이 아닌 섬, 지역문학 2. 반(反) 공간, 헤테로피아, 아스나야폴라냐 3. 공창조성, 고양해석 4. 시흥. 始興, 時興, 詩興’으로 나누어 이야기 해주셨는데, 저는 먼저 시흥지역의 문학을 소개하면서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
시흥문학은 1990년대 초반에 몇몇 문인들이 시흥문인협회를 창립하고 적은 인원이지만 꾸준히 맥을 이어왔습니다. 문학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문학이 척박한 시흥 속에서 문학을 알리는 활동을 해 오다가 전국공모 ‘시흥문학상’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회가 거듭될수록 전국 문인들에게 ‘시흥의 문학’과 ‘시흥’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2015년 제16회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국의 문학인들 관심이 시흥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공모의 맥이 끊기게 된 2016년도 이후 지금까지 시흥시의 정책 상 전국공모를 할 수 없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시흥문학상이 언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흥의 문학인들은 꾸준히 문학에 정진하여 소수의 문인들이 각종 문학상에 수상을 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흥의 문학인들은 참다운 문학을 하고자 발돋움하고자 하고 있는데 정작 역량 있는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으로 지역의 문인들과 합류하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발제문에서 서문을 열어주신 오이도는 아름다운 섬입니다. 지금은 유토피아를 떠 올릴 만큼 잘 정리된 아름다운 ‘섬이 아닌 섬’입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오이도는 그 속에서 생을 이어가는 삶이 진흙 속의 조가비처럼 바다 속에서 생명줄을 찾는 곳입니다. 지금은 많은 상점들이 서로 손님을 맞느라고 호객행위를 하며 손님들을 부르지만 그 또한 갯흙에서 조개를 캐는 일과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이도는 유토피아가 아니며 생활입니다. 우리의 시흥문학도 오이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섬이 아닌 섬의 문학을 하고 있는 시흥의 문학입니다. 유토피아가 아닌 생활 문학을 하기 위해서 시흥문인들은 거듭나려고 머리를 싸맵니다. ‘오이도는 유토피아가 아니다’라는 교수님의 의견에 공감을 합니다. 행여 오이도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대상이 될까 걱정을 하는 오이도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전선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제1회 시흥문학상 대상을 한 윤세은님의 시에서 나타납니다.
막다른 삶의 터전이라 한숨 지었네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서녘 하늘가
삭막하게 반듯한 도시의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소리 울려 퍼지는 고향, 이곳
서툴지만 더불어 사는 지혜를 나누고
텁텁한 막걸리 두어 잔에 시름을 쉬어가는
시화, 시화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또 내일 희망을 붉게 품는다
- 윤세은 시, 「시화의 곡」 일부
위 시는 오이도와 함께 자리한 시화에 대한 시입니다. 시에서 나타났듯이 오이도가 있는 시화는 고단한 삶이 있고 희망을 갈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발제문에서 시흥 지역의 문학은 오이도다. 섬이 아닌 섬인 셈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흥문학은 수도권에서 가깝지만 뚝 떨어진 ‘섬이 아닌 섬’이라고도 읽혀집니다. 철새들이 살수가 없어서 지역을 떠나듯이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시흥에 안주하려다가 전업 작가로 살수가 없어서 지역을 떠난 작가들이 있습니다. 이는 시흥문학인으로써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은 인재를 내친다는 것은 지역에 얼마나 큰 손실인지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시흥문학이 개성적인 문학, 개별적 문학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는 우리 지역에 대한 애정이 든 이상적인 구사로 지역적 인간형의 탐구 발전, 문학관 또는 지역의 색깔이 든 문학정신을 바탕으로 기층적 사고에 대한 충분한 탐구와 자기반성과 노력이 절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교수님이 중점을 두신 것은 시흥 특정지역에 둔 문학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다 슬그머니 사라지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문학생명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힘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문학의 활성화라는 명제로 내놓으며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시흥이라는 작은 지역에 민예총이나 한국작가회의 같은 단체가 생기는 형편입니다. 하나로 뭉쳐서 지역의 문학을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둘로 갈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문학이 아직 발돋움하고 있는 이때에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문학인들이 한데 모여 시흥의 문학을 바로 세우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좋은 글을 쓰는 역량 있는 작가들이 문학에 대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념 같은 것는 잠시 뒤로 미루고 오로지 시흥을 사랑하는 문학정신으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 고민하면서 함께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시흥을 떠난 작가들이 시흥이 그리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문학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끝으로 발제하신 논지에 전적으로 감사드립니다. 거론하신 始興, 時興, 詩興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만 짧은 지면이라서 깊이 숙고하기로 하고 그 외 반(反) 공간, 헤테로피아, 아스나야폴라냐, 공창조성, 고양해석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소견으로 발제문에 정확하게 부합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시흥문학의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고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