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안평대군의 풍류
세조 재위시절,
평양에 명옥이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미색이 많기로 유명한 평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아름다운데다 가무는 물론이고 시문 서화에도 뛰어나 그녀를 한 번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고 말았다.
소문을 듣고 온 남자들이 명옥을 한 번 취해보고자 안달이었으나.
그녀는 최소한 자신과 시문 서화를 겨룰 만한 실력을 갖춘 양반정도는 되어야 겨우 자리를 같이하였다.
이런 명옥의 소문은 멀리 한양에까지 퍼져 당대 제일의 풍류남아 안평대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평양에 그런 기생이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내가 않볼 수 없지.’
안평대군이 한참 평양 갈 생각에 잠겨있던 어느 날 문밖에서 최성달이라는 사람이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이 왔다.
“들게 하라.”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갓 스물이 넘은 듯 보이는 젊은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인 최성달이라 하옵니다.”
최성달은 안평대군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소인 익히 대감의 필명을 듣고 한번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런가? 잘 왔네. 우리 글이나 지으며 사귀어 보세.”
안평대군은 문갑에서 지필묵을 꺼내 먼저 글을 썼다.
“자, 자네도 한번 써 보시게.”
“소인은 그다지 잘 쓰지 못하옵니다.”
이렇게 말하며 최성달은 붓을 받아 글을 써 내려갔다.
안평대군은 최성달의 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으흠, 그다지 신통하지 못하군.’
최성달의 글씨는 정갈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실망한 안평대군은 그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작별을 고했다.
“내 급히 갈 곳이 있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구려, 아쉽지만 다음에 또 오시겠소?”
“예,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최성달은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안평대군은 최성달이 나가자 다시 붓을 들었다. 이왕 간 먹이라 한 자 더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정도야 누구나 쓸 수 있지.’
안평대군은 최성달이 글을 써놓은 종이를 걷어내며 생각했다.
“아니! 이게 뭐지?”
기묘하게도 그 밑에 깔린 종이에 최성달의 글씨가 또렷이 박혀 있었다.
‘거 참, 먹이 배인 모양이군.’
안평대군은 다시 종이를 걷었다. 그런데 그 밑에 있는 종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너덧 장에 최성달의 글씨가 한 판에 박은 듯 또렷이 박혀 있었다.
“이런 내가 사람을 자못 보았군. 여봐라! 지금 나가신 손님을 어서 다시 뫼셔 오너라.”
하지만 최성달은 이미 멀리 떠나고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최성달이 다시 찾아왔다. 안평대군은 그를 보자 마루까지 나가 반갑게 맞이 했다.
“자네야말로 진정 명필일세그려, 내 전날은 자네를 몰라보고 그만 결례를 범했네. 미안허이.”
“아닙니다 나리, 소인이 어찌....”
이렇게 해서 안평대군은 최성달을 가까이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벼르던 평양유람에도 그를 데리러 갔다.
안평대군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그의 행차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평양감사까지 마중을 나왔다.
안평대군은 평양을 두루 둘러보았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그 무엇보다도 보고 싶었던 것은 조선 제일을 자랑하는 평양의 경치가 아니라 바로 기생 명옥이었다.
‘알아서 연회를 준비하겠지.’
안평대군이 기대했던 대로 평양감사는 그들을 연광정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음식과 기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어디 누가 명옥인고....’
안평대군은 연광정에 오르며 기생들을 죽 살폈다.
‘오호, 저 아이로구나!’
안평대군의 눈길은 단번에 기생에게 멈추었다.
“역시 듣던 대로다. 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안평대군은 흡족한 마음에 저절로 잎이 벌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안평대군이 마음껏 풍류를 즐기니 연회는 점점 재미를 더해 갔다.
기생들은 그런 안평대군을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작 안평대군이 마음을 두고 있는 명옥이만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평대군은 명옥이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자 초조해졌다.
그 때 최성달이 연광정에 올랐다.
안평대군은 최성달을 이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자, 여기 최공의 글씨가 범상치 아니하니 우리 같이 즐겨 봅시다.”
안평대군은 최성달 앞에 지필묵을 대령케했다.
최성달은 먹을 간 뒤 연광정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단번에 글을 써 내려갔다.
안평대군은 살며시 명옥을 바라보았다. 과연 명옥은 최성달의 글씨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최성다이 글을 다 쓰고 나자 명옥은 미소를 지으며 아예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서방님의 글을 보아하니 악기에도 능숙하실 것 같사옵니다.”
명옥이 밝은 목소리로 최성달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잘하지는 못하오만....”
최성달이 말끝을 흐리자 명옥은 안평대군에게 말했다.
“대군 나리, 나리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소녀 최 서방님의 거문고 장단에 맞춰 노래 한 곡 하고자 하옵니다.”
명옥이 쌩긋 한 번 웃어보이자 안평대군은 넋이 나간 듯 흔쾌히 허락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리해 보겠소. 허공?”
“그럼, 미련한 솜씨나마 해보겠습니다.”
이에 명옥이 먼저 소리를 시작하자 뒤이어 최성달이 거문고 줄을 당겼다.
명옥의 노랫소리는 애원하는 듯했고 최성달의 거문고 소리는 그것을 청아하게 반기는 듯했다.
두 사람의 소리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연광정을 가득 채웠다.
지나는 구름도 그 소리에 멈추는 듯했다.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그곳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한동안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의 연주가 끝났다.
“대군 나리, 제가 이렇게 절경을 자랑하는 평양을 구경하고 연광정까지 와서 실컷 놀아 보았으니 제가 원하는 바를 다 이루었습니다. 모두 나리의 은덕임을 평생 잊지 않겠사옵니다.
다만 제 갈길이 바빠 한양으로 돌아가실 때는 모시고 갈 수 없으니 예서 먼저 물러감을 용서해 주옵소서.”
최성달은 안평대군에게 절하더니 돌연 연광정을 내려가 뒤도 안 돌아보고 저만치 사라지는 것이었다.
최성달의 뒷모습을 보는 명옥의 기색이 좋지 않더니 그녀는 황급히 안평대군에게 말했다.
“소녀 일전에 앓았던 병이 아직 났지 않았는지라 지금 다시 통증이 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뢰옵니다. 황공하오나 소녀 먼저 물러남을 용서하옵소서.”
명옥은 안평대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일어나 연광정을 내려가 치맛자락을 쥐고 최성달의 뒤를 쫒아갔다.
이에 안평대군은 기가 막혔지만 어쩌지 못하고 그저 명옥의 뒷모습만 노려볼 뿐이었다.
명옥을 안아 보고자 한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명옥이 조선 제일의 명필이자 호방한 풍류를 자랑하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가 데려온 최성달에게 빠져 그를 따라가니 안평대군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안평대군은 노기로 얼굴을 붉힌 채 앉아 있었다.
“아니! 저 아이가....”
갑자기 사람들이 소리쳤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부벽로 아래 꽃 같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연인즉 명옥이 정신없이 최성달을 쫓아갔으나 부벽루에 이르러 최성달이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명옥은 최성달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발자국조차 찾지 못하자 그만 절벽 아래로 뒤어내려 세상을 버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명옥과 최성달의 인연을 괴이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이런일이....., 괴이하도다. 괴이해.”
안평대군의 귓가에는 아직도 명옥과 최성달이 어우러 낸 가락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