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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별 < 제5회-마지막 >
환청일까. 아이의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한 환청이었다.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아이는 보이지 않고 어둠만 가득했다. 그러므로 환청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잠이 들었던 것도, 정신을 잃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너무 탈진한 상태여서 마치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가물가물 아득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죽음의 세계인가 싶기도 했었다. 그런 상태에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
일어나야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해 놓고 여기서 이렇게 있다가 그냥 죽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몸은 아직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옆에서 부르는 듯이 들려왔던 아이의 목소리. 그것은 어쩌면 지금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자신을 부르고 있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어 온 것이 아닐까. 순간 그는 아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저 보고 싶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달려가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가슴팍을 가르고 심장 한 가운데에 집어넣고 싶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었다. 아침부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여름 방학 중이라서 아이는 늦잠을 자곤 했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어판장에 나가 일을 보고 들어오니 그 사이에 아이가 없어진 것이었다. 물론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판장에서의 시간이 꽤 걸렸으니 저도 일어나 혼자 있기가 심심해 어디 놀러 나간 것이겠지 싶었다. 그리고 워낙 작은 동네인데다가 제 또래의 아이들도 몇 명 되지 않아서 어디쯤에 있을 것인지, 누구와 있을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침도 먹지 않고 나간 아이가 점심때가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내내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여기 저기 일을 보고 다니는 사이에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저 혼자서 밥을 꺼내 먹곤 했는데 차려놓고 나갔던 밥상이 그대로 있었다.
친구네 집에서 한 술 얻어먹고 노는 데에 정신이 팔린 거겠지. 그렇게 믿으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안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일을 보느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자주 어울리곤 하던 아이들을 모두 본 것 같은데 자신의 아이만 보지 못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 만나는 아이들마다 물어 보았지만 누구도 보았다는 아이는 없었다. 아침부터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좁은 지역에서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 학교 운동장에 갔을 리도 없었다. 오귀도에는 학교가 없었다.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드넓은 매립지를 지나 삼십 분 정도나 달려야 했다. 그러니 만큼 방학 중에 저 혼자서 학교에 갔을 리는 만무인 것이다.
그래도 역시 좁은 지역이었다. 누가 보아도 아이를 보았던 것이다. 마을에서 제일 넓은 30번 버스 종점 마당 한쪽켠의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조그만 슈퍼마켓 주인 남자는 열 시가 넘었을 즈음 아이가 찾아와 빵과 과자와 음료수를 사 갔다고 말했다. 늘상 하는 일 없이 손님도 별반 없는 가게나 지키고 있는 남자였다. 게으름을 타고 나서 워낙에 일하기를 싫어했지만 그래도 숫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그리하여 가끔씩 이러저러한 일거리가 있으면 나가곤 했는데, 한창 방조제가 쌓일 무렵 잡역부로 일을 나갔다가 허리를 삐긋 하고는 두어 달 가량 고양이도 고아 먹고 하더니 그걸 핑계로 이제는 아예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게에 달린 방에 길게 드러누워 있다가 손님이 오면 그제서야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오곤 하는 게 고작이었다.
빵과 과자와 음료수? 과자 한 봉지라면 몰라도 한번에 그만한 것들을 살 아이도 아니고, 또한 그만한 용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짚이는 게 있었다.
그는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며 박 노파의 집을 살폈다. 마당가에 잡초가 자라고 토벽에 입힌 석회는 군데군데 헐려 나가서 마치도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와도 같은 박 노파의 집. 마룻장 아래 집에서 신는 고무 슬리퍼 한 켤레가 놓여 있고, 그 마루 위 기둥과 기둥 사이에 매어 놓은 빨래 줄에 겉 바지 한 장과 때에 전 타월 한 장이 널려져 말라가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누구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짐작했던 대로 박 노파의 집은 비어 있었다. 아마 그의 아이를 데리고 갯벌에 나갔을 것이다. 물론 한쪽 구석에는 허벅지 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가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날씨가 더워 그냥 나간 모양이었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갯벌에 들어갈 때면 대부분 고무장화를 신곤 했다. 그것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펄 흙이 아무리 밀가루 죽처럼 부드럽다 하더라도 죽어서 부서진 조개껍질들에 살갗이 베이고 벗겨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노파는 발이 시린 계절이 아닌 이상 고무장화 같은 것은 신지 않았다. 답답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발이 베이고 망가지는 것에 상관치 않고 허벅지까지 옷을 훌훌 걷어 부치고 맨발인 채 들어가곤 하는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젊었을 때부터 그래왔었다.
박 노파의 집을 나선 그는 그 길로 군부대가 있는 고개 마루로 올라서서 재 너머로 넘어갔다. 오귀도 전체라고 해 봐야 손바닥 만 하고 그쪽에 따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한 이름도 없이 사람들은 그저 ‘재너머’라고 불렀다. 오래 전부터 있어 온 인가라고 해 봐야 산비탈 아래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두 채의 집뿐이었다. 이쪽과는 달리 경사가 급하고 고개를 내려서면 바로 백사장이어서 마을이 들어설 만한 입지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귀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안으로 휘어져 들어온 원호 모양의 백사장 가장자리에 가건물이 들어서고 횟집들이 생겨났다. 그 가건물이라는 것은 원두막이나 수상가옥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깔고 지붕과 바다를 내다볼 수 있도록 전면을 온통 유리창으로 장식한 것이었는데, 바닥인 백사장과 마루의 높이가 높은 곳은 사람 키로 한 길도 넘어서 갑작스레 소나기라도 만나게 되면 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고, 또한 그 근처에는 이렇다 할 그늘이 없었으므로 그 아래에다 돗자리를 펴고 여름철 한낮의 땡볕을 피해 들기도 했다.
그가 횟집들이 들어선 그 아래 백사장으로 내려갔을 때는 마침 빠져나갔던 물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완만한 원호를 긋듯 이루어진 백사장은 그뿐이었고, 백사장 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갯벌이었다. 그러니까 물이 차면 갯벌은 보이지 않고 백사장만 보이는 터라 그 아래에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이 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백사장이면 그 아래도 모래가 깔려 있으려니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갯벌 저 너머 아득한 곳에서는 가물가물 물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두 척의 고깃배도 점처럼 떠 있었다. 그 배들은 물이 차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밀물과 함께 밀려오는 셈이었다.
그는 갯벌을 한번 휘둘렀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멀지 않은 갯벌 가운데서 아이와 박 노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생을 갯바닥만 헤치며 살아왔다고 해도 박 노파는 이제 멀리 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힘이 부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양식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렇게 깊은 곳 까지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소리쳐 아이를 부를까 하다가 그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부르지 않아도 이제 곧 나와야 될 시간이었다. 물이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면 아직 한참 먼 것 같은데도 삽시에 망망하게 들어차곤 했다. 따라서 가끔씩은 갯벌에 들어갔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를 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박 노파는 거의 본능적이랄 만큼 그 어떤 감각으로 그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햇빛을 피해 횟집 건물의 마루 아래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검게 펼쳐진 갯벌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어찌 보면 그 자체가 꿈틀 꿈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 자체가 문어나 낙지 등과 같은 하나의 거대한 연체동물의 몸통이었다. 그 번들거리고 꿈틀대는 갯벌 가운데서 연신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몇 걸음씩 옮겨놓고 있는 아이와 박 노파의 모습이 반사되는 햇빛에 시린 눈 속으로 잡혀왔다. 갯벌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먼 거리였다. 언뜻 보아서는 누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아이와 박 노파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물이 꽤 들어왔다 싶었을 때에야 아이와 박 노파는 갯벌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횟집의 마루 밑 그늘에서 나와 천천히 백사장을 가로질러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시 아이와 박 노파가 갯벌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렸다.
아이와 박 노파는 완전히 개흙 범벅이었다. 손발은 말할 필요도 없고 옷이며 머리칼 까지 개흙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박 노파 보다는 아이가 더욱 심했다. 토인이 따로 없었다. 두 눈과 치아만 빠꼼하고도 하얗게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별 생각 없이 갯벌을 나오던 아이와 박 노파는 문득 그를 보자 너무 뜻밖이어서인지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움과 멋쩍은 표정이 동시에 그 얼굴 위로 지나갔다.
“아빠……!”
반가워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제 모습을 살펴가며 말꼬리를 흐리는 아이를 향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물었다.
“많이 잡았니?”
뭔가 야단이라도 맞을 줄 알았던 아이는 그가 다른 말없이 그렇게 묻자 얼굴이 활짝 피어나서 말했다.
“응. 많이 잡았어. 이것 봐. 바지락, 달랑게, 모시조개도 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망둥이도 잡았는데 그놈은 불쌍해서 놓아 주었어. 할머니도 그놈은 놓아 주어야 된다고 했고,”
그러면서 아이는 동조를 구하듯 박 노파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나서 망사 천으로 된 조그만 자루를 흔들어 보였다. 자루는 꽤나 묵직해 보였다.
“내가 갯벌에 가자구 했구마. 헌 옷을 입고 나오라 했는디 그냥 나와서 옷을 다 버려서 워쪄.”
박 노파는 마치 큰 잘못을 하기라도 한 양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내내 헌 옷인걸요 뭐. 아이가 밥도 안 먹고 보이지 않기에…….”
“밥은 멕였어. 아무러면 밥을 굶기면서 데리고 다닐까.”
그러면서 박 노파는 다시 아이를 데리고 백사장 오른쪽 끝에 있는 바위께로 갔다. 제법 커다란 바위가 서너 개 모여 있는 그곳은 물이 찰 때면 밑 부분이 잠겨 파도가 철썩거리곤 했는데, 그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흐르는 것이었다. 많은 물은 아니지만 파도에 쓸려나가 평평해진 모래를 둥그렇게 파내면 금세 물이 고여 손 발 정도는 충분히 씻을 수 있었다.
그는 아이가 씻는 것을 도와 준 뒤 바위에 걸터앉아 박 노파가 마저 씻기를 기다리며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내가 서연이 허고는 정이 담뿍 들어서 말여. 자네가 듣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인자는 하루만 보지 못혀도 허전혀서 못견디겄어. 꼭이시러 내 친 손녀딸 같구마. 아니, 나는 서연이 요것을 내 친 손녀딸이거니 생각하고 있구마. 자네 듣기 서운혀도 어쩔 수 없어.”
“원 별 말씀을요. 저도 어르신을 믿거니 하잖아요.”
그는 그렇게 대꾸하며 멀리 시선을 던졌다. 바닷물은 어느새 저만큼에 까지 들어와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매우 빠르게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벌써 저편은 방조제 밑바닥 까지 들어와서 철썩대고 있었다. 바위에서 보면 저편으로 길게 이어진 방조제가 보였다. 방조제 한 가운데는 사람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저쪽 건너편과 이쪽 편에서 각각 뻗어나간 방조제가 그 무인도에서 서로 만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나간 방조제. 그 위로 승합차 한 대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이 쬐그만 게 얼매나 의지가 되는지 모르겄어. 자네도 내나 똑같은 심정이겄지만 이거 없이 어찌 살꼬.”
다리에 묻은 개흙을 씻어내며 박 노파는 혼잣말처럼 계속했다. 쭈글쭈글하고 앙상한 박 노파의 두 다리가 설핏 눈에 들어왔다.
“근데 야가 말여 불가사리를 잡아 달라는 거 아니겄어. 불가사리가 꼭 별처럼 생겼다고 말여. 불가사리가 갯벌에서 나오는감. 불가사리 하나 말려서 갖다 줘. 그런디 야가 뭔 별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모르겄어.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지만 종알종알 쉬지 않고 잘도 혀.”
박 노파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할머니는 맨날 옛날에는 갯벌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만 하구선. 나야말로 쾌쾌 묵은 옛날 갯벌 이야기를 도통 알아먹지 못하겠더라 뭐.”
그랬다. 아이와 박 노파는 서로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각자의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는 가끔씩 박 노파를 따라 갯벌에 나가고, 박 노파는 또한 여름밤 아이가 별을 관측(?)하느라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함께 올려다봐 주곤 했다.
방조제 위를 미끄러져 나가던 승합차는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가운데쯤의 조그만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멀어져서 가물가물 손톱만큼 작아 보였다.
물체는 왜 거리가 멀어질수록 작아 보이는 것일까? 너무도 당연하여 되지도 않는 그 물음. 하지만 거기에는 바람이 부는 이유처럼 과학적으로나 이치적으로 증명되는 어떤 현상이 존재할 것이다.
멀어질수록 작아 보이는 물체들. 물론 그것은 거리와 시각(視角)이라는 함수관계에 의해 성립될 것이지만 거리가 멀면 그만큼 시야도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지구의 몇 백 배에 달하는 혹성들도 우리가 말하는 한 점의 별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도 아이는 별 이야기를 했다.
“아빠! 아빠도 별자리마다 별자리 꽃이 있다는 거 알아?”
“별자리 꽃?”
“별자리 마다 행운의 별자리 꽃이 있대.”
“글쎄, 아빠는 잘 모르겠는 걸. 별에 대해서는 아빠 보다 네가 더 잘 알잖니. 앞으로 천문 과학자가 될 사람하고 아빠하고 비교가 되겠니?”
“그럼 아빤 뭐를 잘 알아?”
“아빠? 글쎄……. 그래, 아빠가 잘 아는 게 있지.”
“그게 뭔데?”
“용달차.”
“용달차?”
“웬만큼 고장이 나도 밑에 들어가 뚝딱뚝딱 하면 고칠 수 있잖니.”
“치이. 웃집 할머니하고 똑같애. 아니야. 아빠는 그래도 처녀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잖아. 견우성하고 직녀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그것뿐이잖니.”
“그래도 웃집 할머니 보다는 나은 거지. 음, 그리고 별똥별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그러고 보니 아빠도 꽤 많이 알고 있네. 근데 아빠가 좋아하는 처녀자리의 별자리 꽃이 무엇인지 알아?”
“글쎄…….”
“카라래, 카라.”
“카라? 그런 이름의 꽃도 있었니?”
“나도 아직 어떤 꽃인지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그 꽃은 무척이나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꽃꽂이를 할 때도 항상 가운데에 꽂는데. 그리고 아주 하얗고 깨끗하고 질리지 않아서 처녀자리의 맑고 순수함을 나타낸데.”
“그렇구나. 아빠가 시장에 가면 꽃집에 들러 어떤 꽃인지 물어봐야 되겠는 걸.”
“그래, 아빠. 그리고 그 꽃이 있으면 나 한 송이만 사다 줘.”
그러면서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들어갔다.
이제 초등학교 이 학년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그렇게 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은 한 때 아이의 엄마로 있었던 여자가 없어지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한 때 아이의 엄마로 있었던 여자. 그렇다. 지금은 어디 살고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그 여자는 한 때의 엄마였을 뿐이었다. 만약 그 여자가 아이의 생모였다면 어디론가 떠나 버렸어도, 혹은 죽었어도 아이의 영원한 엄마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한 때의 엄마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단정짓는다는 것이 어리석고 지나친 감이 없지 않겠지만 그건 그 여자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생모의 관계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지만 그 여자는 아이를 상점에서 과일을 고르듯 선택하여 스스로 아이의 엄마 되기를 원했다가 모든 것들을 팽개치고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운명적인 관계에서는 책임의 소재도 자연스레 숙명으로 맺어져 다소 불분명한 감도 없지 않으나 선택적인 관계에서는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책임을 휴지조각처럼 내던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그 여자를 엄마라는 이름으로 간직하고 있었고 제 엄마가 별나라에 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별나라에 간다느니 하는 따위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 스스로도 깨달았을 것이지만 애써 그렇게 믿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 여자가 떠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이는 정말로 제 엄마가 별나라에 간 것이라 믿었고, 그리하여 자주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이가 맨 처음 그렇게 믿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아이에게 달리 어떻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저녁이 되면 더욱 가중되어 오는 외로움에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게 되었고, 또한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 옛날 오천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목동들이 어둠이 내리면 외로움에 떨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별자리를 만들며 별자리마다의 전설을 지어냈듯이. 그러니까 아이는 오천여 년 전 목동들이 지어낸 전설을 들으며 그들의 외로움으로 별자리 아래 서 있다가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서 잠들곤 했던 것이다.
다시 또 환청이 들려왔다. 환청인 것이 분명하지만 너무도 뚜렷한 목소리였다.
“아빠!”
아이는 그렇게 어둠의 허공에 떠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일어나야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 끝내놓고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아니, 죽어도 좋았다. 하지만 죽더라도 단 몇 발작만이라도, 단 몇 미터만이라도 가다가 죽어야 되었다. 그러면 환청일망정 아이의 목소리도 더욱 가까이,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뚜렷하게 들릴 것이다.
환청. 그러나 그것은 이미 환청이 아니었다. 아이가 외쳐 부르는 소리가 공기 중을 뚫고 그 어떤 빛처럼 전이되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분명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별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듯 아이의 목소리도 어둠을 뚫고 그렇게 다가와 그를 일어나라 하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약간의 힘이 모아졌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 다시 잭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몇 점 남아 있는 근육과 살 껍질 한 조각. 거의 다 잘려진 무릎 관절. 전주에 깔린 종아리와 몸통에 붙어 있는 허벅지는 이제 각기 따로 놀았다. 그리고 거의 다 잘려나간 종아리는 이제 그의 다리가 아니라 남의 다리였다. 이미 떨어져 나간 다리. 문둥이가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손가락 한 마디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두고 돌아서듯 그도 아픔이긴 하지만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런 따위를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아픔이니 미련이니 하는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단 하나 살기 위해 이럴 수 있는 자신이 그는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는 잭나이프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남아 있는 근육에 칼날을 대고 긋고 또 그었다. 찌익찌익 살이 베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음(音)이기도 한 동시에 감(感)이기도 했다. 무릎 위를 묶고 완전히 비틀어 버렸음에도 그것은 고무장감을 낀 것 같은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자신의 살이 자신의 손에 의해 베어지는 소리. 하지만 이제 그것은 새삼스레 전율할 그 무엇도 없이 남의 살을, 더는 포식을 위한 짐승의 살을 베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몇 번의 칼질이면 끝날 것 같은데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헛손질이었던 까닭이었다. 힘은 쫄쫄 고이는 물을 퍼내 쓰듯 밑바닥이었고 손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금방 떨어질 것 같아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잡아당겨도 보았지만 그것은 질기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남의 살이, 남의 다리가 아니라는 말인가?
“이런 빌어먹을! 끊어져! 끊어지라고!”
그는 도리어 화가 나서 그렇게 소리치며 칼날을 마구 그어댔다. 긋는 게 아니라 거의 찍어대다시피 했다. 헛손질에 엉뚱한 곳이 찍히기도 했지만 그에 상관치 않고 찍고 찍고 또 찍어댔다.
그런 어느 순간 마지막 남아 있던 그것은 뚝 떨어졌다. 이제야 말로 다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었다. 아니, 끊어졌다기보다는 분리, 그것이었다.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었던, 목숨을 앗아갈 덫이었던 그것이 이제야 떨어진 것이었다.
“이제 됐다, 이제 됐다고! 가자! 가는 거야! 가다가 쓰러져 죽어도 가는 데 까지는 갈 수가 있는 거라고!”
그는 소리치고 다시 이를 물었다. 그리고는 남아 있는 한쪽 무릎과 두 손으로 엉금엉금 흙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길가에 세워둔 용달차는 여전히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놈도 오랜 시간 동안의 공회전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엔진 소리. 하더라도 엔진이 꺼지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용달차 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몇 미터였다. 하지만 그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가도 가도 닿지 못할 것만 같았다. 땅은 꽝꽝 얼어서 울틍불퉁했고, 그 땅을 짚은 팔에는 힘이 빠져 그대로 풀썩 풀썩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무리 버둥거려도 거의 제자리일 뿐이었다.
“가야 돼! 용달차 까지만 가면 돼! 용달차 까지만!”
그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거의 제 자리일망정 조금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떻게 용달차에 닿았는지 모른다. 그는 손톱으로 할퀴다시피 차체의 어느 부분인가를 잡고서 남아 있는 한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카 도어를 열었다. 훈훈한 공기가 그 안에서 훅 끼쳐왔다.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용달차 안으로 끌어올리며 이제는 사는구나, 했다.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나는구나, 였다.
-6-
어둠은 뒤로 휙휙 밀리고 있었다. 저 앞으로 매립지의 지표면 위에 일정한 높이로 떠서 평행을 이루며 직선으로 이어져 있는 두 줄의 불빛들이 보였다. 이제 그곳에 닿아 왼쪽으로 꺾어져 그 불빛들을 따라 달리면 오귀도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오귀도의 집. 아이는 밤새 어떻게 지냈을까?
용달차는 마구 요동을 쳤다. 하지만 그는 남아 있는 한쪽 발로 계속해서 가속 패달을 밟았다.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는 아주 익숙한 길이었다. 하루에 한두 번씩은 지나곤 했던 길. 그 길을 오로지 달리기만 할 뿐인 것이다. 어떻게 출 발을 했는지, 얼마만큼 달렸는지 그런 건 기억에 전혀 없었다. 그저 저편의 불빛만 보고, 그리고 거기에 이르러서는 그 불빛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용달차가 요동을 침에 따라 운전석 옆에 놓아두었던 커다란 곰인형도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쳤다. 워낙에 큰 놈이라 의자와 앞의 돌출되어 나온 부분에 걸려서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한 채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라성시장에서 친구 영섭을 만나 음식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커다란 곰인형을 끌어안고 들어갔었다. 차에 두고 가는 것이 당연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게 마련인데 왜 음식점에 가면서 그것을 끌어안고 갔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자신도 음식점 문을 밀고 들어설 때 거기 종업원이 와, 곰 한 마리 엄청나게 크네, 하고 다소 과장된 감탄의 소리를 내서야 자신이 곰인형을 끌어안고 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때, 정작은 곰인형보다도 종업원의 그 감탄의 소리가 더 컸었다.
종업원은 물 컵을 가져다 놓고 또한 음식을 나르면서도 옆에 놓아둔 곰을 한번씩 툭 툭 쳐 보곤 했었다.
“곰이 아저씨보다도 더 크네요. 들어올 때 사람이 안 들어오고 웬 곰이 들어오나 했어요.”
눈 코 입만 빼놓고 온 몸이 온통 하얀 백곰이었다. 아니, 눈 코 입 말고도 다른 색깔의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곰의 목에 걸려 있는 금빛의 별 목걸이였다. 손바닥만한 별이었다. 노점상에는 같은 크기의 곰 인형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그 곰인형들은 각각의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었다. 하트 모양도 있었고, 축구공 모양도 있었고, 다이아몬드 모양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빛 별 모양의 목걸이 장식을 하고 있는 곰인형에게로 손이 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거 보다 더 큰 놈이 있었으면 그걸 샀을 거요.”
“아저씨, 딸이 있어요?”
“딸인지 아들인지 어떻게 알아요?”
“사내 녀석들이 곰인형 같은 걸 갖고 싶어 하나요? 총이나 로봇 카 같은 걸 사 달라고 하지. 근데 어디서 샀어요? 나도 하나 사게.”
“아직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딸이 있어요?”
“어머, 이 아저씨가. 난 아직 미혼이에요. 밤에 잘 때 외로워서 나도 하나 사서 끌어안고 자려는 거지.”
“나야 말로 정말 곰 중의 곰이 아니겠소. 마누라도 없이 딸 하나만 데리고 사는 곰. 곰이 필요한 밤이면 언제든 말해요.”
“어머, 아저씨가 농담도 지나치셔.”
그러면서 종업원은 곰의 콧등을 몇 번이나 톡톡 건드리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아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곰인형은 밤새 공회전하는 용달차 안에서 그 용달차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이놈을 안고 들어가면 아이가 깡충거리며 좋아할 것을 생각했었어. 그래서 빨리 가려고 했었는데 그만 너무 늦어졌군. 너무 늦어졌어! 아이가 잠들었다면 그 머리맡에 놓아두어야 할 텐데. 그러면 늦어진 게 아니라 너무 일찍 가져다주는 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야.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될 테니까.”
이윽고 직선으로 뻗어 있는 큰 도로에 이르렀다. 그는 속력을 전혀 늦추지 않은 채 핸들을 구십 도 왼쪽으로 홱 잡아 꺾었다. 그에 따라 곰인형도 반대편에 가 부딪쳤다가 다시 그의 몸에 와 부딪치며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라! 잠시면 돼!”
어쩌면 그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떻든 속히 병원에 가야 할 것이고, 병원에 가자면 오른쪽으로 꺾어져야 했다. 그런데 그는 왼쪽으로 꺾어져 오귀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귀도에는 병원은커녕 약국조차 없었다. 구멍가게에서 소화제나 진통제, 파스 정도를 파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병원 같은 건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오직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병원은 그 뒤의 문제였다. 아니, 그는 더 이상의 어떤 희망도 갖지 않았다. 사실상 죽음이 바로 목전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죽기 전에 아이를 보아야 된다는, 그 곰인형을 아이의 품에 안겨주어야 된다는 그 한 가지 생각이었을 뿐이다.
곧게 뻗어 있는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낼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력을 내어 달렸다. 지평 위에 일정한 높이와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는 두 줄의 가등(街燈)들이 뒤로 쏴아 밀렸다. 시계는 어느덧 다섯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주에 깔린 것으로부터 열 시간 가까이 된 셈이었다. 열 시간. 그것은 참으로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다. 죽음의 끝에서 만난 그 시간. 그러나 아직도 죽음의 끝자락은 그를 놓아 주지 않고 끈질기게 붙잡아 당기고 있었다.
초겨울의 새벽 다섯 시. 평행으로 달리는 두 줄의 가등 불빛만 떠 있을 뿐 그 광활한 매립지는 아직도 온통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은 거짓말처럼 단 한 대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시간에 그곳을 달리는 차량은 오직 그의 용달차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있으면 오귀도의 버스 종점 마당에서 출발하는 첫 시내버스가 지나가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달렸을까? 시야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눈꺼풀에 먼지 같은 것이 내려앉아서 떨어지지 않고 풀풀 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시야는 점차 더 흐려지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눈꺼풀에 내려앉은 먼지도 아니고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눈(雪)이라는 것을.
차창 밖은 여전히 바람이 세찬데 그 바람을 타고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아이는 벌써 오래 전부터 첫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첫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꽤나 늦은 첫눈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적어도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히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았었는데 눈발이 날리고 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바람을 타고 눈구름이 몰려왔다는 말인가. 아니면 먼 곳의 구름이 쏟아내고 있는 눈발들이 세찬 바람을 타고 여기 까지 날려 오고 있는 것일까.
눈발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립지 위를 사선으로 그어지며 날렸고 또한 그의 용달차 앞 유리에 와 부딪치곤 했다. 물론 보이는 부분은 가등과 그의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닿는 범위였지만 온 매립지 위에 눈발은 그렇게 쏟아져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지면에는 벌써 하얗게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두고 온 한쪽 다리는 문둥병자가 그러하듯이 굳이 양지바른 곳을 골라 묻지 않아도 저절로 하얀 눈 속에, 이 광활한 매립지에 묻혀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전면 유리가 눈발에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와이퍼도 작동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내달렸다. 사선으로 그어지고 있는 눈발 저편에 몇 점 불빛으로 떠 있는 오귀도가 보이고 있었다.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오귀도. 그곳이 가까워지면서는 길이 이리 저리 구부러져 어찌할 수 없이 속력을 늦추어야 했지만 그는 달릴 수 있는 한 최대로 속력을 내었다.
얼마지 않아 그는 눈발을 헤치고 시내버스 종점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역시도 종점 마당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조그만 슈퍼마켓도, 저 위쪽의 어판장도, 허름한 음식점이며 낮은 지붕을 얹고 있는 주변의 집들도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이제 마악 운행을 시작하려는 시내버스 한 대에 불이 켜져 있었고 시동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잠을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한 운전기사 하나가 담배를 빨며 시동이 걸려 있는 시내버스로 다가가다가 용달차를 몰고 들이닥치는 그를 놀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쑤셔 처박듯 용달차를 멈추고 문을 덜컹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더 이상은, 이제 죽어도 더 이상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바닥은 차가운데, 눈은 더더욱 쏟아지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신이 가물가물 아득해지고 있었다. 마치도 스르르 몰려오는 잠 같은, 시간의 깊은 수렁 속으로 그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가물가물 아득해지며 시간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볼 수가 있었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푸르고 가느다란 한 줄기 빛.
그리고 대지는―,
그 긴 겨울 동안을 오직 봄의 여신인 페르세포네가 지하로부터 나오는 봄을 기다리며 모든 것을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믿었다. 봄이 오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난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겨우내 얼어붙었던 흙들을 부드럽게 하고, 그 위에, 보다도 더 푸르고 향그러운 풀들을 돋게 하며, 더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리도록 대지의 모든 기운을 주관해 주리라는 것을.☆
- 끝 -
▣ ▣ ▣ 한 가지 사실을 밝혀두자면 소설 속의 '오귀도'는 바로 지금의 전철 4호선의 종착역이기도 한 경기도 시흥시 소재의 '오이도'란 섬을 말한다. 그리고 소설 속의 풍경은 적어도 10여 년 전의 오이도와 당시 황량했던 매립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처음 집필할 때는 '오이도'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10여 년 전의 풍경이 지금은 너무도 많이 달라져 버려서 '오귀도'로 바꾸어 발표했다.오이도란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현재의 오이도와 작품 속 섬의 이미지가 서로 배치된 채 겹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서였다. ▣ ▣ ▣
첫댓글
그러게요
부자가 나눔하는 대화가...
이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 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아들은 천문학자 아버지는 용달차의 전문 기술자...
수국이 아름 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