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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4) 우리 영혼의 선성(善性)과 일그러진 모습 동시에 관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를 동시에 바라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에서 나온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인류(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을 상징함과 동시에 우리의 일그러진 영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상징해준다.
클라라는 「아녜스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거울의 맨 끝을 보시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관상하십시오. 그분은 이 사랑 때문에 십자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이 거울 친히 십자 나무에 달리셔서 행인들에게 여기에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여, 살펴보고 또 보십시오. 내가 겪는 이 내 아픔 같은 것이 또 있는지.’(애가 1,12) 그러므로 ‘이것을 내 마음에 깊이 새기고, 내 영혼은 내 안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리이다’(애가 3,20) 하시며 외치시고 울고 계신 그분께 한목소리, 한마음으로 응답합시다.”(23-26)
클라라는 우리 죄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하느님에 의해 각인된 우리 영혼의 선성(善性)과 우리 영혼의 일그러진 모습을 동시에 관상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프란치스코가 어느 나환우와의 만남에서 연약함과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의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과 흡사하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에 그려져 있는 식탁 앞쪽에 네모난 상자 모양의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해 예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곳에 거울이 붙어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다고 한다. 거기에 정말 거울이 붙어 있었을지도 모르고, 또 붙어 있었다면 이것을 본래 작가 본인이 붙인 것인지 후에 어느 누가 붙인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거기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면 그 거울이 지닌 의미는 너무도 놀라울 뿐 아니라 엄청난 은총의 초대가 된다. 왜냐하면, 그 거울을 통해 그 식탁에 네 번째 사람(그림을 보는 이)이 이 삼위일체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영원의 신비에 초대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를 큰 그림 안에서 보게 되면 하느님은 인간 의식 주변을 영원히 도시며 우리 인간이 당신과의 일치를 위해 준비되기를 바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히브리 예언자들과 가톨릭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수피 신비주의자들은 결혼이나 신방, 혹은 신랑과 신부와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61,10; 62,5)와 시편,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페 5,25-32) 그리고 요한 묵시록(19,7-8; 21,2) 등에서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한결같이 얘기하는 바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신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는 인간의 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과 일치하고자 하시는 의지를 표현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복음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계시고,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까지 묘사하고 계신다.
이것을 동방교회 쪽에서는 과감하게 신화(神化-divinization 혹은 theosis)라는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결합 혹은 일치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께서 가능케 해 주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서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이런 일치 혹은 결합이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진리를 믿고 받아들일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 결합은 나중에 (그것도 우리가 선하게 산 이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신다. 이 결합은 우리가 출발했던 기원이고, 또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야 할 현실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인류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곱게 단장한 신부”(묵시 21,2)가 되는 하느님의 때인 것이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혼인 잔치를 위한 제단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시는 영원한 신적 신랑이 되신다.(마태 9,15; 요한 3,29 참조)
성경 계시의 분명한 목표이자 방향은 충만하고 완전하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격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육화의 영원한 신비는 결국 여기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시작될 것이다.”(묵시 19,7-9) 이렇게 될 때 역사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공허함이 아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을 잡게 된다.
이 관점은 건강하고 행복하며 희망 가득하고 생명력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의 이 시대는 참으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때다.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태초의 당신과의 일치로 되돌리시면서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창출해 내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 ‘거울’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현실, 즉 본래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된 모습을 제대로 보고 하느님과 우리의 일그러져 있는 모습을 고쳐가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과 분리되어 하느님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인간 자신의 이미지도 망가트려 버린 우리 인간이 자기 인식과 자아의식을 통해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아름답고 온전하게 존재케 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조금씩 고쳐나가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5)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대안을 ‘거울 영성’으로 살다
하느님께서는 서양 문명이 합리성과 기능성, 소비문화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전쟁의 상황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던 때에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그 당시의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800년 이상을 지속해 온 이런 지배적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비평을 내놓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체제(당시의 사회와 교회 모두)와 직접적으로 투쟁하고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한 거울의 이미지가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였다. 그가 모범으로 보여준 사고와 행동 방식은 나쁜 것에 대한 최선의 비평은 더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거울의 이미지는 그 거울을 바라보는 이의 본래의 온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전체에 연결된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지금의 흐트러진 모습도 함께 보여주어 본래 모습을 회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클라라 성녀가 거울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존재는 이 거울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하느님과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비추어 준다.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창조된 존재의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 쓰신 첫 번째 책이 바로 창조된 세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2020년에 귀천한 오스트리아의 신학자 아돌프 홀(Adolf Holl)이 말하듯이, 프란치스코는 ‘성당의 탑에 시계를 설치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에 출현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셈을 하기 시작하던 때에 프란치스코는 셈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경제를 버리고 하느님께서 셈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거리낌 없이 내어주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은총의 경제를 살았던 사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주도하에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때에 프란치스코는 실제로 “훨씬 더 좋은 길이 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 공동의 가정인 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생산과 소비의 문화를 시작하던 바로 그때 그는 이 땅을 사랑하며 그곳에서 맨발로 단순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것과 우리에게 확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결국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최고의 매력을 지닌 실천가였다. 그리고 그는 에고(가짜 자아)를 내려놓을 때 오는 ‘참된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클라라는 비록 봉쇄의 삶의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의 이 복음적 대안을 ‘거울 영성’으로 살았고, 지금도 우리 모두를 이 거울 영성의 복음적이고 대안적인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클라라 성녀의 ‘거울 영성’은 앞서 나누었던 ‘바라봄의 영성’이 좀 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거울이라는 것은 먼저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그 대상의 이미지를 진실하게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경심을 갖고 바라볼 때, 즉 언뜻 보이는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가치를 내면의 눈을 통해 다시 심오하게 바라볼(re-spicere: respect) 때 거울 역할을 하는 모든 존재는 우리의 그런 존경심 어린 존재성을 비추어 주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이런 비추어봄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3,18)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서로를 이렇듯 겸허하고 존경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서로를 비추어 줌으로써 완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런 삼위일체의 자취를 심어주셨다는 것이 성 보나벤투라의 주장이다.
이렇듯이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비추어 주는 삶의 여정을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존경심을 갖고 상대를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존재로부터 ‘나’의 지극히 아름답고 통합된 삼위일체적 본질을 비춰볼 수 있게 된다. 클라라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상을 통해 이런 수양에 정진할 것을 프라하의 아녜스와 더불어 우리 모두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십자가를 존경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먼저 그런 사랑과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우리가 아니라 결국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존경 가득한 시선과 그 시선을 통해 오는 은총을 깨닫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 시선이 그분의 시선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당신 사랑 안으로 완성해 가시는 모든 존재를 바라본다면 그 모든 존재가 우리의 참 자아, 아름다운 자아, 하느님 모상인 우리의 참모습을 비추어 주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6) 그리스도 부활의 삶 사는 구세주는 지금도 존재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다른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긴 하지만, 앞서 나누었듯이 이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가는 과정일 뿐이다.
리처드 로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랑과 선, 그리고 거룩함은 모두 반사된 선물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존경심을 갖고 이 선물들을 바라봄으로써 이 모든 것을 갖게 되며, 이것이 사랑의 순환을 완성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창조된 세계가 여러분을 바라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은 모든 피조물의 외적인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방송매체나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증오 범죄나 ‘묻지 마 폭력과 살인’과 같은 어이없고도 슬픈 사건들을 전에 없이 더 많이 마주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주로 내 불행의 이유를 내 바깥쪽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사이코패스)’를 지닌 이들에게 매우 강하게 있는 정신구조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이 아닌 ‘악’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정신세계는 자연스럽게 그런 악의 논리로 형성돼 간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우리 사회와 세상에는 이런 범죄나 미움보다 더 큰 사랑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훨씬 더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다. 그래야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또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시고 ‘참 좋다!’라고 말씀하신 곳으로서 회복해 갈 가능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건강하고 긍정적인 정신구조만이 하느님께서 더 건강한 세상, 즉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 선의 힘은 현시대의 문제보다 훨씬 더 크다. 이 둘은 비교나 대결 구도에 들 수도 없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요한 1,5)라는 복음서 저자의 선언은 이를 대변해준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번역해 놓았는데, 「200주년 신약성서」에 이 두 개의 번역이 다 가능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번역이 더 강한 표현이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에 비교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정신구조를 지니고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방향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가.
거울에 비추어진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선하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방향을 잡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반대로 방향을 잡은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분께서 혼합된 세상, 즉 인간성과 신성이 함께하는 세상이며 한 편으로 부서져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참으로 온전한 세상에 사시기 위해 지불하신 대가였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비록 세상이 늘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일관되지 않더라도 세상의 현실이 의미 없거나 어이없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당신 선의에 따라…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분을 머리로 삼아 한데 모으신다.”(에페 1,9-10 참조)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칸 그리스도론 전체를 요약해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십자가와 더불어 온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분은 십자가가 당신을 변모(부활)시키도록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그렇게 변모하고 부활하게끔, 우리도 그렇게 굳은 믿음 안에서 관계성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것을 당부하셨다.
그 당부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당신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은 이런 당부와 절대 깨지지 않을 당신의 약속을 잘 드러내 준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분은 아버지께 대한 신뢰심 안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끝없이 다른 어떤 곳(존재)에 투사하거나 그저 그 안에 갇혀 있는 세상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온전히 부활한 삶이고, 행복과 자유, 사랑의 길이며, 결국은 구원되는 길이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이런 부활의 삶을 받아들인 또 다른 구세주들이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얼마 전 미얀마 미치나 지역에서 군부 세력의 폭력적인 시위대 진압 현장에 젊은 수녀 한 명이 몇 명의 군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상에 올라왔었다. 그 수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 백성이 아니라 나를 죽이시오!” 이 수녀가 또 하나의 구세주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사진과 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클라라 성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클라라의 전기를 보면 이슬람 군인들이 산 다미아노 수도원으로 공격해 왔을 때 병중이었던 클라라 성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성체를 모신 작은 성광을 든 채 창가 쪽으로 가서 성체를 이슬람 군인들에게 보여주며 예수님께 “이 자매들은 당신의 자매들이니 이들을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이야기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7) 이 세상 불의까지도 하느님 선에 맡겨드려야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불완전함과 심지어는 불의까지도 끌어안아 이를 하느님 선의 힘에 맡겨드려야 할 때를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성 보나벤투라나 다른 여러 사람(릴의 알란이나 쿠사의 니콜라스 등)이 강조하듯이, ‘반대들의 일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선한 힘이 더욱더 강력하게 현존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가장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 인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 가톨릭교회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런 우를 범한 적이 있으며, 이런 예들을 우리는 우리 역사 안에서 다분히 찾을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 전쟁과 학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선과 방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내전 등이 그런 것들이다.
20세기에 들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과정 중에 많은 전범이 자신들의 무고를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대표적인 나치 학살자는 전쟁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이스라엘 비밀정보 요원들에 의해 체포될 때까지 15년간 피신해 살다 재판에 넘겨졌을 때 무고를 주장했다고 한다.
아이히만에 대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쓴 한나 아렌트는 그 책의 부제로 ‘악의 평범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우리 시야의 사각지대일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거나 아예 악을 의로움으로 뒤집어 놓기까지 하는 현시대의 우리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한 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 책의 소개 글에서 아모스 엘론은 이렇게 말한다. “나치 정권은 잘못된 악을 새로운 의로움의 토대로 세움으로써 법질서를 그 머리로부터 뒤집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뒤집힌 세상 안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저질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반면 이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많은 예가 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 선과 사랑을 보는 데 게으르거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앞서 강조했듯이 우리가 선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우리 정신은 자연스럽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불만족한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중 한 예를 들자면,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29세의 나이로 짧게 생애를 마친 에티 힐레숨(1914~1943)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형을 당하기 얼마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즉 죽음의 현실이 분명하게 내 삶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 내가 죽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소위 말해 이 파멸의 순간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의 현실을 거부하는 데 내 에너지를 쏟지 않음으로써 내 삶은 거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우리 삶에서 죽음을 배제하고 잊게 될 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지만,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삶을 확장해가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우리는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랑을 매일매일 풀어주어 그 사랑이 살아 움직이게 함으로써 전쟁과 전쟁이 만들어내는 온갖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러운 것들과 싸울 수 있었다.…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충만한 선을 동원하여 다른 이들에게 자애와 친절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여는 유일한 길은 이런 잔혹한 순간에도 우리 가슴으로 그 사랑을 사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몹시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나는 하느님 당신의 그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평화의 넓은 영역을 되찾고 다시 구축하는 일이다. 더더욱 큰 평화를 말이다. 그리고 그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투사해주는 일이다. 우리 안에 평화가 더 있으면 있을수록 이 험난한 세상에도 더 큰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연결된 존재가 서로를 비추어 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의 자취를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 그 내면 깊은 곳의 핵심을 보게 된다면 서로에게 하느님의 본성, 즉 선을 드러내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창조된 존재 전체 서로가 한 운명을 지닌 유기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혹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스러운 생명력으로 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만은 이를 함께함의 삶과 그 삶에 있는 관계성 안에서의 질곡을 통해 이를 깨닫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 때문이라고 한다면 역설이나 억측일까?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고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로 사람은 선을 향해 나아가 모든 존재가 함께 사랑과 복을 나누며 하늘나라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은총을 버리고 선에서 악을 끄집어내 다른 존재들에게 투사하는 이원론적이고 비판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8)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은 교회의 구성원
13. 프란치스코의 교회관과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체들의 모임 - 형제공동체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2번에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열매는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들을 관계성 안에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중요성과 자신 외에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다른 존재들과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려는 가짜 자아인 에고의 허상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을 에고와 악마의 허상 혹은 꾐이라는 의식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 이것이 앞서 언급했던 대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함’의 실체인지 모른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의식 없는 생각과 행동이 밀약(야합)을 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집단 따돌림이나 다른 모든 범죄 혹은 독재 억압과 인권유린, 전쟁과 같은 사회병리 현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자그마한 무의식적 생각들을 의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함께 이런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철학이나 도덕적 가르침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많은 가톨릭 신자마저도 쪼개어진 이원주의적 세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태 우리보다 열등하고 별로 가치 없다고 여기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신성한 이미지를 보지 않으려 했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단순히 죄인들이나 우리가 꺼리는 이들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이득을 위해 오용하는 피조물과 우리의 공동 가정인 지구도 포함된다. 존재의 위대한 사슬이라는 의식이 끊어지고 난 이후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이미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후 오래지 않아 우리 인간은 계몽주의와 현대의 세속주의를 통해 하느님(생명)마저 거부하는 문화(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말하는 ‘죽음의 문화’)를 창조(?)해 내고 있다. 존재들의 사슬이 산산이 부수어지고 만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 규칙」 22장에서 교회의 구성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톨릭적이고 사도적인 거룩한 교회 안에서 주 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 교회에서 품을 받은 모든 이들, 곧 사제들, 부제들, 차부제들, 시종들, 구마자들, 독서자들, 수문자들과 모든 성직자 그리고 모든 남녀 수도자, 모든 소년, 모든 어린이, 가난한 이들과 빈궁한 이들, 왕들과 왕자들, 노동자들과 농부들, 종들과 주인들, 모든 동정녀, 금욕하는 여인들과 부인들, 평신도들과 남성들과 여성들, 모든 유아, 청소년들, 청년들과 노인들, 건강한 이들과 아픈 이들, 모든 왜소한 이들과 건장한 이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 세상 어디서나 현재 있고 앞으로 있을 모든 국가와 모든 사람 ….” 이 내용을 보면 프란치스코는 이미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을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구성원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서 「함께 꿈을 꿉시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Let Us Dream: The Path to a Better Future)」에서 우리가 개인적인 해방은 물론이고 불의하고 유해한 제도로부터의 공동의 해방이 둘 다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불행히도 많은 이가 구원이라는 것을 단순히 저세상을 향한 개인적 탈출 정도라고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우리 사회의 모습은 절대 해방된 사람들이나 건강한 체제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모든 코로나 사태 즉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정체 상황’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적 자유의 결핍, 우리가 섬겨온 우상들, 우리가 믿고 살아온 이념들(이데올로기들), 우리가 소홀히 해온 관계성들….”
사람들 대부분은 진정한 현실을 보려 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자유롭고 의식적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몽유병 환자들처럼 삶을 겉돌면서 살아가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변모할 수 있는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부처님과 같은 영적인 스승들이 “깨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에고 혹은 자그만 자아가 우리를 통제한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때 우리는 그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호불호에 따라 선호하는 것에 의해 명령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과 우리가 정말로 모든 것을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고 믿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정말로 해방일까?
우리가 관상적 기도의 삶을 충실히 살고 위대한 사랑과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경험하면서 하느님께서 변모시키도록 한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래의 연결성을 깨달을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하느님을 포함하여 다른 어떤 존재나 다른 사람들과는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참으로 해방되는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교회는 세상 전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소유 방식으로 소유하지 않으시지만,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59) 내면에 계신 하느님 만날 때 진정한 신앙의 삶 가능
14. 프란치스코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관과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보편적 성소와 구원
프란치스코가 가톨릭교회 안에 머무를 것을 당부한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넓은 관점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가톨릭 신앙과 교도권에 순종하여 살아갈 것을 다른 누구보다 훨씬 더 강하게 강조하였다.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제도상의 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catholicus) 교회의 본질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우리가 참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면 하느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절대성을 띨 수 없다. 오직 한 분의 절대자 하느님만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하나의 교회가 아닐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이 그렇다는 사실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 이 교회의 중심은 우리나 우리 문화가 아닌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되신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내면 깊이 계시고 우리 주변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참 자아가 하느님의 한 부분이며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랑과 자유의 위대한 원천이신 분과의 관계성 안에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피부색이나 민족, 문화, 국가, 혹은 이념을 넘어서는 진정한 가톨릭 신앙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삶의 자세가 요즘 프란치스코 교황이 계속 강조하는 성직주의를 벗어나는 길이고, 또 교회 일치와 세계평화를 위한 자그맣지만 위대한 걸음이 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 교회인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예수님의 협력자요 참 제자의 의미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과 신앙의 자세는 심지어 교회의 성소조차도 성직자나 수도자와 같은 전문적이고 좁은 의미에서만 보지 않도록 한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거룩함을 실현하는 모든 일이 진정한 의미의 성소요 이런 이들의 선이 합심하여 더 큰 성소를 이루어나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라 코 엔터나쇼날(La Crox International)」이라는 가톨릭 인터넷 뉴스 2019년 6월 19일 자 기사에서 피에르 소뜨뤼(Pierre Sauteruil) 기자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성소에 대한 접근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에게 영적 동반이 꼭 필요하며, 이제는 축성생활(봉헌생활-수도생활)을 포함하여 우리 삶에 주어진 성소를 실현해 가기 위해, 즉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세례’의 투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속화의 증대와 투신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교회는 더 넓고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성소의 문제를 얘기해야 한다. ‘거룩함을 이루는 길’이 다양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교회는 성소자 수의 부족을 겪으면서 수도 성소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오히려 교회의 중요하고도 다른 일반 성소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런 노력은 이미 한계점에 달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성 성소 계발 담당자로 일해 온 엠마누엘 바뉘이(Sr. Emmanuel Vannier) 수녀의 말을 인용하였다. “교회의 미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제들이 필요합니다만, 고객들이 여러분의 상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물건을 팔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피에르 기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런 모습은 성소에 대한 교회의 생각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자명한 이미지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특별 성소에 대한 부르심의 느낌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을 두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해 왔다. 젊은이들이 이런 질문에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이제는 다른 형태의 ‘성화의 길’을 제시하며 강조점을 새롭게 두는 것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권리로서 결혼 생활과 직업을 하나의 성소로 보는 더 넓은 전망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축성생활을 포함하여 젊은이들이 진지하게 성소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해야 한다고 바니에(Vannier)는 말한다. 이런 새로운 개념은 2018년 10월 로마에서 젊은이와 신앙, 그리고 성소의 식별을 주제로 모인 세계주교시노드에 주어진 더 넓은 성소의 개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시노드의 최종 문헌은 이렇게 선언한다. ‘광범위하게 펼쳐진 성소의 다양성은 모두 거룩함에로의 불림이라는 보편적 성소에서 기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수 개월간 땀 흘려 일하는 전문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에게서 이런 자유를 인식하셨다.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의료진들과 봉사자들은 우리 가슴 안에 중요한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우리의 이웃 성인들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설교로 사람들 마음에 심어주고자 하는 것을 재삼재사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무관심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삶이 선물이며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