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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생활을 합시다.
창세기 41:46~57
우리가 창세기 41장에서 발견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팔려간지 13년이 경과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이 젊은이는 결국 그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애굽 왕 바로에 버금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그 당시 태어난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므낫세였는데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용서와 망각이라는 요셉의 결심을 상징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왕이 꿈을 꾸게 될 때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꿈은 모든 세상의 사람들을 큰 흉년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꿈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다가올 흉년과 재앙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을 믿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꾼 꿈을 해석해 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겸손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대답을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비밀한 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나는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에게 말씀해 주실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특별한 메신저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이처럼 겸손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뽐내지 않습니다. “나는 특별한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일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여 영광을 도둑질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 사역 성공의 비결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좋아하며, 그 자신의 능력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자세입니다. 했다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지, 자랑하고 과시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어떤 영적인 사업 정신을 얻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그가 준비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많은 생명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셉은 바로에게 그의 꿈 해석에 대해 내기할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에 오는 7년간의 흉년을 대비해서 식량을 저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는 풍년이 계속되는 때였고 창고마다 식량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계획은 어리석고 필요 없는 것처럼 들렸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음식과 식량의 창고로 인해 당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요셉이 바로 왕에게 요구한 것은 식량의 저장이 어리석게 보일 앞으로의 7년 동안 자신을 믿어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백성들은 앞으로 있을 일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왕이 요셉의 정책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고 뒷받침해 주는 것에 반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로와 요셉 사이에 맺은 계약은 오랜 기간의 복종과 오랜 기간의 모험이 동반하는 계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있을 7년간의 세계적인 기아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요셉을 통해 예비하시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류의 온갖 문제에 대해 이처럼 창조적인 해결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서 창조적인 능력으로 이 세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주 안에 일어날 일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상황과 문제를 연구할 수 있으며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와 음악을 만들 수 있으며, 다리와 빌딩을 세울 수 있으며, 생을 더욱 풍요롭고 고상하게 하며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고상한 피조물입니다. 그 이하가 되는 것은 죄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어제보다 오늘, 지난 주보다 이 주간, 지난 달보다 이 달에 더 잘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년도 그랬으니 금년도 그렇게 하겠다는 삶의 자세는 잘못된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우리가 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전수 받은 기술과 방법들을 반복만 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창의성을 억압하고 있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요엘 선지는 예언하기를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꿈을 꾸며 환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낡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며, 축복의 새로운 길을 찾으며, 이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과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와 같은 꿈과 환상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개발하고 발휘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메리어트 호텔 체인을 가지고 있는 윌라드 메리어트(J. Willard Marriot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지은 적이 있었던 건물에 대해서 만족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불만이 진보의 기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업에서 만족할 때 퇴보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을 때 더욱 진보하고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존 칼라일은 “모든 훌륭한 일은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데 이유는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믿음의 간증입니다. 요셉은 그의 환상을 실제로 믿을 만한 것으로 확신할 수 있기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주었던 선구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그의 이론의 대부분이 프린스턴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되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들은 처음에는 번뜩이는 통찰 속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칠판에 자세히 정리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이론들은 창조적인 비전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작가나 발명가나 과학자들은 그들의 영감의 대부분이 잠을 깨기 전에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꿈을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꿈과 비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출발점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거룩한 불만족입니다.
우리는 항상 해 왔던 것을 하는 것, 그래서 그 방법이 정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과 방법을 받아들여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에 여러분을 깨울 때 떠오르는 생각을 찾아 기록해 두십시오. 그리고 낮의 냉철한 빛 속에서 정리하십시오. 만일에 그것이 아직도 새롭고 창조적인 것으로 보이면 그 비전을 계속 진행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진행하는 동안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닥칠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인내하십시오. 아마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까지는 7년의 긴 세월이 걸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꿈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이 사람에게 갈보리 교회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비전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려움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도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버리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놀라운 교회의 성도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 우리가 꿈꾸는 놀라운 교회를 이룩하는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창조적인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 속에 희망을 가득 채우고 삽니다. 여호수아 3장 5절에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큰일을 베푸시리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일을 베푸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캄캄하게 구름 덮인 밤하늘에서도 구름 사이로 비치는 별빛을 찾는 것이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희망은 우리 영혼의 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나는 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루의 일을 시작할 때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희망에 찬 생각으로 마음에 가득 채우십시오. 그리하면 이 커다란 가능성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생동감에 넘치는 희망에 찬 기도를 드림으로 하루를 시작해 보세요. 하시는 일이 힘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긍정적인 기도를 드릴 때 우리를 좀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게 합니다.
더구나 이와 같이 건설적이며 만족스러운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찾게 될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억누르는 긴장으로부터 열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계획과 생각에 열중한 나머지 우리의 게으른 마음 속에 긴장을 야기시키는 일이나 조그만 문제 같은 것은 자연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희망에 찬 마음은 우리에게 활기를 안겨 줍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 이 꿈을 가진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생활을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못 살겠다.” “죽겠다.” “큰일났다.” “이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말만 듣게 됩니다.
여러분, 실망이란 적이 우리에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치고 왜 그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이유를 들을 때 우리 자신도 부정적인 큰 혼란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에 항상 밝은 소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부정적인 생각의 화살을 막기 위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낙심과 좌절에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꼭 믿습니까? 능력 있게 창조적으로 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일 닥쳐오고 큰 산이 가로막힐 때 포기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말고 믿음으로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리고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자기 자신의 부정적이고 추한 생각들을 고상하고 긍정적인 그리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요셉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요셉의 생애는 파란곡절의 일관이었습니다. 부모와 헤어져서 13년간의 생활은 너무 고생이 많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생애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억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낙심하거나 좌절되지 않으며 그에게 주어진 환경을 최선을 다해 활용했습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했습니다.
추하고 보기 싫은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창조적인 생활입니다.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고난에 눌려 쓰러지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이용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날개를 펴고 공중에 떠 있는 새를 봅니다. 그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바람에 기대어 그 기류가 주는 압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새 있는 쪽으로 불어오면 새는 거기에 의지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가는 대신에 바람에 의지하며 편히 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고난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활력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빌립보서 1장 12절 이하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악조건을 오히려 복음 전파에 선용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쓴 편지들은 그가 자유로운 몸으로 평생을 복음 전파해도 다 할 수 없는 많은 성과를 오는 세대에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적인 생활은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28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욥이 지은 적도 없는 죄목으로 욥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길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들이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하는 고난을 그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련받는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영예롭고 유익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단련에는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기간이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도 13년간의 단련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정금처럼 깨끗하고 귀한 것으로 되어 나옵니다.
우리 성도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성도로서 합당치 않은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난의 용광로, 고통의 용광로, 시련의 용광로를 거치는 동안에 괴롭긴 해도 믿음 아닌 부분이 다 타 버리고 정금보다 귀한 믿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험한 세상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은 꿈입니다.
꿈이 있어야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을 선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협력해서 놀라운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니라”(엡 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