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통일, 정서의 회화화
- 서정춘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정서란 무엇인가?
일찍이 루이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음미해 보면 정서가 무엇인가를 해석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고고성을 지르고 태어난다. 그 울음소리가 고통의 소리이건 불만의 표시이건 울음 자체가 감정의 표출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천부적으로 감정을 부여받고 태어났다는 뜻이 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었다는 것은 문학의 발상근저가 감정에 있다는 뜻과 통한다고 하겠다.
먼저 정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보자. 정서란 사상에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의미한다. 이를 보다 구체화하면, 대충 심리적인 해석과 문학적인 해석을 곁들일 수 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일어나는 강한 감정으로서 신체적 변화가 현저한 것, 이를 테면 자극이 되는 대상의 지각, 또는 상기에 따라 현저한 신체적 변화와 강한 감정이 일어나며 그것이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과정을 정서라 한다. 문학적 해석으로서의 정서는 문학의 주요 요소인 지적 요소, 상상적 요소, 기교적 요소에 더하여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이 정서를 강조하는 것이 낭만주의이고, 이것이 극단에 이르면 감상주의, 그리고 억제하면 고전주의, 조절하면 주지주의가 된다.
2. 이론적 접근
정서의 객관화와 문학적 성취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쉽다는 시가 왜 어려울까? 그것은 시의 장르적 이해에 이른 작가들이 시를 좀 알만 하면, 곧장 ‘주관적인 정서를 어떻게 객관화시키느냐?’하는 문제와 부딪치기 때문이다. ‘객관화’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방식이다. 주관의 객관화, 정서의 객관화 등은 문학적 성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설득을 생명으로 하는 문예창작에서의 성공은 자신의 관점만이 아니라 독자의 관점이 어떨지를 생각하고 독자와의 공감에 대한 전략이 필수적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정서에 객관성을 획득해가는 지난한 과정에서 겪는 작가들이 내는 비명, “시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다.”라는 소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인칭 시점의 시쓰기는 기술이 용이한 장점이 있지만, 자기 합리화나 자기 과시화에 빠질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문학적 성취의 판단 기준은 뭘까? 바로 ‘감수성의 통일’을 이루었느냐 하는 점에 있다. 직정을 회화화하여 새로운 정서로 환기시켰을 때 비로소 미적 감동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는 정서가 문학을 성립시키는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지만 정서 자체가 문학이 되게 하는 게 아니라 정서를 보다 미적 감동을 수반하는 정서로 환기시켰을 때 비로소 문학이 성립된다는 이치를 말해준다. 이 이치는 정서의 직접적이고도 직정적인 노출이 아니고 정서를 객관화함으로써 보다 정서다운 정서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서 ‘정서의 구조화’, 즉 정서가 물화되는 과정이 없는 시는 실패작이다. 왜냐하면 ‘감수성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시인은 항상 문학 창작시, 문학은 ‘구체성’을 기반으로 해서 ‘보편성’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구체성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 감수성의 통일이며, 정서의 객관화라고 하겠다.
객관화는 정서를 언어화하는 것으로, 혼란한 정서에 대해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정서가 언어로 표출될 때 정화가 발생함과 동시에 그 폭발적 힘은 약화되고 의식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거나, 시적 표상으로 그려내거나, 감각화를 통해 감정을 보다 풍요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상징화 작업은 구체적인 언어활동을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정글 속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혹은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힌 억울한 죄인 같아요.”와 같은 은유적인 표현은 정서의 상징화에 많은 도움이 된다. ‘정글’ ‘내동댕이쳐짐’ ‘구타’ ‘감옥’ ‘죄인’ 등은 일종의 상징들로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처럼 정서에 단어를 부과하여 재경험할 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예술은 비가시성의 가시화라는 점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정서의 객관화는 예술 아닌 것을 예술이게 하고, 일상적 사건 단계에 머무는 것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적 장치다.
3. 어떻게 정서를 객관화할 것인가?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 구체적인 정서의 구조화작업이 필요하다. 추상적 관념을 이미지로 만들고 정서를 체계화하기 위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찾아내야 한다. 또한 1차적 정서를 2차적 정서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쓴다. 이것을 ‘정서적 객관화’ ‘감수성의 통일’ 등으로 부른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예시를 가지고 어떻게 주관적 정서가 객관화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나는 매일 아침 고향 후배,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시인으로부터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받고 있는데, 정서의 객관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2월 11일에 온 시 한 편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생’을 ‘대나무’와 ‘기차’에 비유한 5행 37자로 된 명시 서정춘의 <죽편>인데, ‘죽편’은 가객 장사익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초고는 25행이나 되었는데, 시인은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실감의 유리와 보수’를 통해, 다시 말해 오랜 시간을 들여 감수성의 통일을 위해 정서를 객관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 죽편竹編 1 –여행, 전문
‘칸칸이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너무 닮았다. 대나무 마디마디가 기차의 칸칸이고, 대나무의 칸칸은 텅 비어 있고 어둡다, 시인은 어둠을 ‘밤이 깊은’으로 보수했다. 푸른 기차는 대나무를 비유한 것이다. 기차의 수평과 대나무의 수직을 교직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수직과 수평에 담았다. 인생의 종착역을 ‘대꽃이 피는 마을’로 표현한 대목도 기가 막힌다. 대나무가 꽃을 피워내기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 또한 성공적으로 살아내기 힘들다는 의미가 아닐까. 첫 행에서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 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쉼표와 하이픈이란 문장부호를 절묘하게 이용하는 전략도 성공적이다. 첫 행의 ‘멀다’를 마지막에 가서 ‘백 년’으로 구체화한 마무리도 좋다. 한마디로 압축미의 극치를 보여준 시다. 그는 혼자 여관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등등 온갖 상념으로 일곱 시간을 뒤척이다,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시구가 번개같이 떠올라 그걸 여관방 벽에 썼다고 한다.
원래 초고에는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고 한다. 25행의 시는 객관화가 안 된 그야말로 주관적 정서로 쓰인 시였을 것이다. 시인은 순간 떠오른 직정을 객관화하기 위해 4년 동안을 다듬었고, 80번 이상이나 고쳤다고 한다. 정서의 객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1941년 전남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해서 독학으로 시의 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신문배달을 하다 우연히 집어든 영랑과 소월의 시집을 밤새 필사하며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까지 한시와 선시를 탐독하며 앞선 이들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고두현 시인의 인생여정과 많이 닮았다. 그도 초중은 집이 없어 절간에서 보냈고, 대학은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어 나왔다. 고향의 풍광을 묘사한 <남해시첩>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신문배달이란 ‘궁’의 상황이 신춘문예를 관통하고 명시를 낳는 데 기여하는 것을 보면, 동양시학에서 말하는 ‘시궁이후공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4. 정서를 문학적으로 변용하자
같은 대상, 같은 소재, 같은 장소, 같은 공간, 같은 분위기를 두고도 주관적 해석은 각기 개인화될 수 있다. 감수성의 분산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정서의 전이나 이동에도 불구하고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시들은 예외 없이 개인적 내면체험을 빌어 정서적 환기를 언어로 표출하는 데 동질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동질성은 각기 다른 발상에도 불구하고 시가 정서에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때 환기하는 정서가 촉촉이 가슴에 젖어오는 진솔하고도 소박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19세기적 낭만주의 한계를 극복해주지 못하고 있다. 문학적인 글은 정서를 발상차원으로 하면서도 정서의 직접적인 표출이 아닌 문학적 변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