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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4편 1절-5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사람들이 인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세권, 지권, 재권, 학권, 무력권, 정권 등등이 있다. 이런 세상에 속한 것을 기준 삼아서 인간을 판단한다. 세상에 속한 임시적인 요소들을 인간의 힘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주님의 힘은 어떤 것이냐? 주님은 만능의 능력자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죽지 않고, 못하심이 없고, 세상의 우주만물을 법칙과 이치를 넣어서 만드셨고, 또 섭리 보호하시고, 역사를 진행하는 힘이 있으시다. 또한 이적과 기사와 징조를 베풀어서 성도에게 행하시고, 천천만만의 천군천사를 거느리시고, 인간들이 아무리 옳다고 떠들지라도 하나님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은 심판을 해버릴 힘이 있으시다.
성도 다윗은 인간들의 힘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진리말씀대로 살아온 진리성도는 주님의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을 심사한다. 첫째는 성격적으로 바로 살았는지? 열심히 적극적으로 바로 살았는지, 아니면 게으름을 피면서 소극적으로 헐렁하게 살았는지? 예를 들면 교회에서 처녀 총각이 교회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아주 조심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니 결혼 전에는 교회에서 교사 일을 열심히 했는데 결혼을 한 후에는 이 일에 서서히 게을러질 수 있다. 이건 슬슬 미끄러지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결혼을 했으면 두 부부가 항상 주님의 일을 놓고 의논을 해야 한다.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주님의 일을 놓고 여기에 맞춰서 해 나가야 한다. 믿는 우리가 믿다가 보면 부자도 되고 가난하게도 되는 건데, 가난할 때는 잘 믿다가 부자가 되면 제대로 믿지 않는다거나, 부자일 때는 잘 믿다가 가난할 때는 제대로 믿지 않는 식으로 나가면 안 된다. 항상 같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부자가 되었을 때 더 부지런해야 한다. 안 그러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면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슬슬 느슨해지면서 세상에 빠져 들어간다. 이랬다가 다시 바로 서려면 참으로 힘든 거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일상생활을 바로 할 수 있게 지혜를 구하라.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생각해서 교통 면이나 직장이나 집도 정하라. 남의 아래서 일을 하게 되면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주일날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직장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사장을 예수 믿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최고 직원이다’ 할 정도로 성실히 일을 해서 사장의 눈에 들어서 주일날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허락을 받도록 하라.
두 번째는 성질적인 면에서 바로 살았는지 심사를 하라. 자기의 신앙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에 맞추려고 했는지, 아니면 자기 성질대로 살았는지? 세 번째는 성분적으로 바로 살았는지 심사를 하라. 얼마나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을 하며 살았는지?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옳은 판단을 받을 자로 살아야 한다.
인간들이 판단하는 것은 전부가 외모와 외형에 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와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힘에 판단을 받게 된다.
2절-3절: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진리성도의 입장에서 보는 외인이란 현재 믿지 않는 자, 그 다음에 생명 길 좁은 길로 가지 않고 사망 길 넓은 길로 가는 자. 그러니까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안에 들어있지 않고 그 밖에 있는 자.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의 본질적인 신앙이 아닌 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걸 분리할 줄 모른다. 예수 믿으면 다 자기 같은 줄로 안다.
그 다음에 진리성도 속에 들어있는 이방인. 불신자. 그 다음에 옛사람 주격으로 사는 자. 이룰구원 운동에 끼어 들어서 시비를 걸고 있는 자. 영운동을 하고 있는 곳에 끼어 들어서 육운동을 하는 자.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것을 주장하는 자. 육운동에 수종들고 따라가는 자. 이 외에도 많지만 이 전부가 외인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님과 같이 하지 않는 자가 외인들이다. 본문과 연결해서 보면 사울 왕이나 십 고을 사람들이나 도엑이 외인이다.
이 외인을 크게 나눠서 존재적으로 보는 외인이 있고, 성질적으로 보는 외인이 있다. 존재적 외인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비진리를 따르는 자와 진리를 따르는 자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성질적으로 보는 외인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일반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존재적으로 보면 사울 왕도 이스라엘이요 다윗도 이스라엘인데, 이걸 존재적으로 보지 않고 정신 사상의 성분적인 면으로 보면 다윗을 따르지만 정신 사상적으로는 사울의 정신을 가진 자도 있고, 사울을 따르지만 정신 사상적으로는 다윗의 정신을 가진 자도 있다.
십 고을 사람들이 다윗이 자기들 고을의 어느 곳에 숨어있다고 사울 왕에게 보고를 하니까 사울 왕이 군대를 이끌고 십 고을로 와서 다윗의 생명을 찾고 있다. 다윗은 이 사울을 피하여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다니고 있다. 다윗은 영의 생명이 있고 육신 생명이 있는데, 이 때 자기의 어느 생명이 안 죽으려고 도망을 다니는 거냐? 영의 생명이다. 우리가 다윗을 볼 때 이 면을 잘 봐야 한다.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데도 도망을 다니는 것이 영의 생명을 위해서임을 알지 못하면 다윗의 신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를 않고 일반화 돼버린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육신의 목숨을 죽이려고 한 것처럼 사울 왕은 다윗의 육신의 목숨을 찾는 건데, 이 때 다윗이 이 사울 왕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 것이 육신의 목숨이 죽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니는 것으로 보면 안 되고 영 주격으로 살고 있는 다윗 속에 들어있는 신앙사상을 봐야 한다. 다윗이 영 주격으로 살다가 사울에게 잡혀 죽는다면 순교가 되는 거다.
사울 왕이 지금 어느 영의 감화를 받고 있는 거냐? 악령의 감화다. 사울 자기 입장에서는 다윗의 육신의 생명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만 사실은 사울 속에 들어있는 악령이 다윗의 육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마음을 이용해서 다윗의 영의 생명을 죽이려는 거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사울 왕이 무슨 신앙이 있어서 다윗의 영의 신앙생명을 죽이려고 하겠느냐? 이건 생각도 못하는 거다. 이 생각을 한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도 않는 거다.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육이 주격이 되고 옛사람이 주격이 된 신앙사상은 항상 세상과 합세가 되어 진리생명 길을 가는 사람의 영의 생명이던 육의 생명이던 생명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옛사람이 주격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육의 생명이던 영의 생명이던 죽이려고 찾아다닌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성화구원의 도를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거다. 우리가 이걸 안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자기의 부하들과 도엑을 이끌고 십 고을 사람들과 합세를 해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결사적으로 찾아다니는 사울 왕은 강포한 자임이 분명하다. 강포한 자는 늘 폭도들과 같이 다니는 거다. 그러면 악한 자들에게 휩쓸리고 그들과 짝을 짓고 사망운동을 하고 있는 이게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신앙이냐, 없다고 하는 신앙이냐? 성령의 감화의 역사인가, 악령의 감화의 역사인가?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쫓아다닌 이것을 지나간 역사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지금도 비진리적 이질적 육적으로 된 거짓 된 신앙사상들은 폭도들과 합세를 해서 진리 신앙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찾아다니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성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운동을 하면서 신앙이 어린 성도들을 온통 둘러엎는 것이 보이느냐?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얼마나 얻어맞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육적 이질적 신앙사상을 가진 자들은 이런 이치를 시인을 하지 않는다.
4절: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하나님은 누구를 돕고 계시느냐? 다윗을 돕고 있느냐, 사울 왕을 돕고 있느냐? 다윗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도 다윗과 같은 신앙 믿음을 가진 성도가 있다면 그를 도와야 한다. 그게 신앙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신앙사상으로서 성령의 감화가 들어가 있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돕는 거냐? 다윗은 평소에 자기 생명을 내대고 하나님을 섬겼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았고, 자기 육신의 목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신 사상이 세상과 육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고, 성도들의 영을 염려하며 하나님의 구원운동 위해 기도를 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돕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주께서는 다윗을 돕고 있는데, 다윗의 생명을 누가 붙들고 있느냐? 하나님이다. 주께서 붙들고 있는 것은 근원적 최종적인 것이고, 당시로 보면 다윗과 함께 하는 600명의 백성들이다. 이 600명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고, 주께서 장차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이 다윗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거다.
600명의 이들은 행여나 다윗에게 해가 미칠까봐 모든 면에서 다윗과 함께 하고 있다. 다윗과 함께 동거, 동행, 동락, 동사를 하며 모든 것을 같이 하고 있다. 악한 자들에게 다윗이 잡히지 않도록 망을 본다든지, 파수를 선다든지, 모든 물질을 나눈다든지 하며 함께 하고 있다. 다윗은 이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돕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다.
주께서 다윗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붙들고 있는데, 원수 대적들의 생명은 다윗과 그들에게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고 난 후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거다.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을 주격으로 삼고 사는 다윗인데, 사울은 이런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볼 때 누가 누구에게 이용물이 되는 거냐? 사울 왕과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다윗의 구원에 이용물이다.
믿는 우리에게는 ‘누가 붙들고 있느냐? 누가 주격이냐? 어느 분이 붙들고 있느냐?’ 이게 있는 거다. 이 신앙의 주격을 잘 봐야 한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우리는 덩어리가 크니 같이 일을 하자느니, 신학교를 같이 하자느니’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지 않는구나’ 하는 게 보인다면 그런 자들과는 무슨 일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이 이걸 보는 눈이 없다.
사울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자들에게 마치 부지깽이처럼 이룰구원 면에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한 후에 예정된 그 날에 가서 심판을 당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 부지깽이는 밥을 할 때 사람의 손에 붙잡혀서 이용을 당하다가 밥이 다 되면 남은 불 속에 집어 넣어버리듯이 신앙의 이치가 그런 거다. 우리는 이 신앙의 이치를 볼 줄 알아서 이용만 당하다가 심판을 받을 자로 살면 안 된다. 울고불고 하며 펄펄 뛰는 게 신앙이 아니다.
부지깽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한 자는 결과적으로 불속에 던짐을 당한다. 불속에 던짐을 당할 때는 이방인들과 믿는 사람이 같이 당한다. 왜냐? 똑같다 그 말이다. 속이 똑같다. 그래서 같이 불에 집어넣는 거다. 지옥 천국에 가는 것은 나중 얘기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똑같이 들어가는 거다. 도매금으로 같이 들어가 버린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고 있고, 생명 길 좁은 길을 정직하게 가는 자를 헐뜯고 해치려고 하는 자가 다윗의 원수다. 그러면 다윗의 원수관이 어떤 거냐? 다윗 자기 개인을 헐뜯고 죽이려고 하는 자를 원수로 보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을 인간 자기 앞에 두지 않고 살면서 진리 길로 바로 가는 성도를 헐뜯는 자를 원수로 보는 건지? 후자다.
우리는 원수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걸 볼 줄 모르면 자기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으면서 상대방이 자기를 헐뜯으면 이 사람을 자기 원수로 만들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본질의 길로 걸어가야 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걸어가도록 하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을 헐뜯고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원수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원수 된 그 자를 자기의 원수로 삼고 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원수 된 자를 자기의 원수로 삼고 있으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떠나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자기는 하나님 앞에 원수이고, 또한 자기가 원수로 삼고 있는 사람과도 원수다. 그러니까 제 마음에 안 맞는 원수가 있고, 하나님의 단일성에 안 맞는 원수가 있으니 우리는 원수관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남이 밉게 보이고 싫게 보이면 그 사람을 원수로 삼기 전에 자기 신앙부터 하나님 기준에서 봐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상대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일을 한다면 그 자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나도 그 자를 원수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가 지나치게 나가면 서로에게 고통이 가중된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 해당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인인관계적인 면에서 멀어지게 되고 서로에게 고통이 된다. 우리는 이런 면도 잘 살펴야 한다. 믿는 우리는 사건에 있어서, 인인관계 면에 있어서, 물질을 쓰는 면에 있어서 매사에 바로 하려니 다각적으로 깨달음이 예민해야 한다.
성도를 해치려고 찾는 원수들이 불어나고 커지면 진리성도들의 목숨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만드셨느냐? 그리고 성도들에게 무슨 역사를 하시느냐? 인간창조의 목적이 무엇이며, 성도들의 영원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진리성도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도전자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도전자가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꾸 대적을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원수들에게 무슨 축복을 하겠느냐?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주의 성실’이 진리의 성도들에게는 큰 축복으로 작용이 되지만 악한 자들에게는 앙갚음이 되어서 돌아온다. 마치 깨끗한 물이 시궁창의 더러운 벌레들에게는 악재로 작용이 되는 것과 같다. 구원운동에 반대자에게는 재앙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