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락(金應洛)은 평북 의주군 고관면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세례를 받고, 19세에 용천 덕흥교회 집사가 되었다. 김 집사는 돈을 벌어 일신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학생들을 돕다가 서울로 이사한 후 종로5가에서 포목점을 경영했다. 운영난에 빠진 <기독공보>를 인수하기도 했던 그는 1944년 안동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공산당을 피해 신의주에서 서울로 온 교인들은 김 장로와 합류한다. 그해 12월 2일에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27명이 베다니 전도교회를 시작한다. 북한에서 피난 온 교인들은 친지를 만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밀려왔다. 1950년 6월 4일 1천 2백만 원의 정성 어린 헌금으로 350평의 석조 예배당을 건축했다. 교회를 헌당한 지 20일 만에 6.25가 터졌는데 김응락 장로는 교회를 버리고 피난을 갈 수 없었다. “어떻게 지은 교회인데!”
▲영락교회 본당
공산군은 영락교회의 예배당을 무기고로, 사무실은 연락 사무소로 사용하였다.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9월 21일 아침 김 장로는 교회당이 걱정되어 집을 나섰다. “아니, 이 전쟁에 어디를 가시려고요?” 부인 박순도 권사가 묻자 “아무래도 좀 나가 봐야겠어” 하며 그 길로 영락교회당에 이르렀다. 다행히 교회당은 피해가 없었고 보초도 보이지 않았다. 공산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알고 도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장로는 교회당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고픈 마음이 들어 정문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그때 예배당 구내에 살고 있던 고필용 장로의 부인이 황급히 뛰어나오며 “빨리 돌아가세요! 그 사람들 아직도 예배당 안에 있어요.” 말할 때 김 장로의 뒤에서 공산군이 “당신 누구야?” 총구를 앞세우고 김 장로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교회 장로요” “여긴 왜 왔소?” “기도하러 왔수다.” 그러자 공산군은 “정신 나간 예수쟁이군. 자 갑시다.” 김 장로는 연행되어 공산군이 본부로 쓰는 중부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김인모 장로의 아들 김만(金滿)이란 청년도 교회가 걱정되어 왔다가 잡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왔다.
▲영락교회
김만(金滿)은 온갖 고문을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처참한 김장로를 만났다. 공산군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 위해 오후가 되자 두 사람을 교회로 끌어내었다. 김 장로는 죽음을 예견하고 돌계단을 오르며 찬송을 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그때 예배당 계단 옆 2층에 살고 있던 전성천 목사의 장모가 뛰어나와 “어떻게 된 일이요?” 물었다. 김 장로와 백 여사 사이에 대화가 계속되자 공산군은 화를 내면서 빨리 올라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공산군이 김만을 놓아둔 채 김 장로를 향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바로 그 순간 김 장로는, 김만에게 뛰라는 눈짓을 했다. 김만은 수갑을 찬 채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김응락 장로 순교비
김 장로는 당장이라도 총을 쏠 듯 흥분한 공산군에게 사정하여 교회당에 들어가 5분간만 기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한경직 목사는 김 장로의 마지막 기도에 대하여 “이때 드린 김 장로의 기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바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담대한 자세로 간구하였을 것이다.” 말했다. 김 장로는 기도 후 양손을 벌리자 공산군이 총으로 사살하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자신의 목숨보다 성전을 더 귀하게 생각하고 순교한 고귀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