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谿谷先生集卷之六 <우이와 동표에 대하여>
谿谷先生集卷之六 序 二十三首 送謝恩兼奏請副使吳肅羽朝京師序 吳侍郞肅羽甫將以貳使朝京師。造維而
계곡선생집권지육 서 이십삼수 송사은겸주청부사오숙익조경사서 오시랑숙우보장이이사조경사 조유이
請曰。是役也。不可 無子文。維曰諾。自遼左陷而浡海之路通。浡海者。東海 也。三韓在東海之東。故我
청왈 시역야 불가 무자문 유왈락 조요좌함이발해지로통 발해자 동해 야 삼한재동해지동 고아
國以浡海爲西海。古稱三神山皆 在東海。秦皇,漢武巡遊海上。彷徨眺望於成山,之 罘之間。若將有遇焉。
국이발해위서해 고칭삼신산개 재공해 진황 한무순유해상 방황조망어성산 지 부지간 약장유우언
徐福,盧敖迂怪之士。往來惝怳者。極其所至。要不出我國西界外。歸墟之壑。沃焦之洲。若果 有之。大都
서복 노오우괴지사 왕래창황자 극기소지 요불출아국서계외 귀허지학 옥초지주 약과 유지 대도
必在此中。誠天壤間宏曠闊大之區也。羅,麗以 來千有餘年。夷夏往來者。皆由此焉。自燕都定鼎。此路遂
필재차중 성천양간굉광활대지구야 라 여이 래천유여년 이하왕래자 개유차언 자연도정정 차로수
廢。歷二百載而復通焉。豈亦關於氣數者非耶。耽羅稱絶 遠。然乘風一日而至。涉登萊者。順風揚帆。 不浹
폐 력이백재이북통언 기역관어기수자비야 탐라칭절 원 연승풍일일이지 섭등래자 순풍양범 불협
旬不止。此何減數千萬里。維試於靜中。默想肅羽行色矣。高檣如 虹。大帆如雲。凌洪濤撇巨浪。一瞬千里。
순불지 차하감수천만리 유시어정중 묵상숙우행색의 고장여 홍 대범여운 능홍도창거랑 일순천리
但見蛟鼉出沒。魚龍儵忽。天水相盪。晝夜冥茫而已。經過之際。有以想田 橫義士及魯連,子管,幼安之遺風。
단견교타출몰 어룡숙홀 천수상탕 주야명망이이 경과지제 유이상전 횡의사급노련 자관 유안지유풍
而安期,羨門得仙靈而 遊汗漫者。今果在否。則亦足以娛憂暢懷。忘履險之危懼 矣。捨筏而登岸則登州也。
이안기 선문득선령이 유한만자 금과재부 즉역족이오우창회 망리험지위구 의 사벌이등안즉등주야
登州古嵎夷。所謂東表絶域。乃 今歷數千里滄溟而始躡其地。斯行也可不謂遠乎哉。自是而 行海岱燕齊之境
등주고우이 소위동표절역 내 금력수천리창명이시섭기타 사행야가불위원호재 자시이 행해대연제지경
千有餘里而後。達于帝京。其間山河之雄 壯。民物之繁阜。城郭宮室之宏麗。禮樂文采之煒煌。皆得 以覽觀
천유여리이후 달우제경 기간산하지웅 장 민물지번부 성곽궁실지굉려 예악문채지위황 개득 이람관
而采訪焉。於以發舒其胸襟。恢廓其聞見。開廣其知 識。不啻若出涯涘而觀大海。昔人稱司馬子長爲壯遊。
이채방언 어시발서기흉금 회곽기문견 개광기지 식 불시약출애사이관대해 석인칭사마자장위장유
觀之。子長之遊。何足稱焉。沿洄大瀛海之中。彷彿領略乎 蓬萊,方丈之勝者。以視登會稽窺禹穴。 以今
관지 자장지유 하족칭언 연회대영해지중 방불영략호 봉래 방장지승자 이시등회계규우혈 이금
不幾於培塿蹄涔 乎。斯遊也亦可謂極天下之偉觀矣夫。或曰是則然矣。獨不 念肅羽使事之重乎。靡盬之懷。
불기어배루제잠 호 사유야역가위극천하지위관의부 혹왈시즉연의 독불 념숙우사사지중호 미고지회
迫於內飮氷之勤形於外。亦 何暇於耳目之觀哉。維曰否否。肅羽何難於使事乎。今茲我 東彝倫之斁敍。
박어내 음빙지근형어외 역 하가어이목지관재 유왈부부 숙우하난어사사호 금자아 동이륜지두서
昏明之廢興。天人向背之理。聖天子靡不洞 燭。封號旣已錫矣。勑諭旣已頒矣。所謂冊命也冕服也。特其儀
혼명지폐흥 천인향배지리 성천자미불통 촉 봉호기이석의 래유기이반의 소위책명야면복야 특기의
物禮數已爾。安有許其大而靳於其細。擧其實而略於其 文哉。然則是行也。猶之決流抑墜。何患於竣事之不
물예수이이 안유허기대이근어기세 거기실이략어기 문재 연즉시행야 유지결류억추 하환어준사지불
易哉。抑維所婾快於肅羽者。從王事執玉帛。而得兼乎奇絶壯偉之 觀。足以償丈夫四方之志。爲降有焉耳。
이재 억유소유쾌어숙우자 종왕사집옥백 이득겸호기절장위지 관 족이상장부사방지지 위강유언이
肅羽曰善。是足以 送吾行矣。
숙우왈선 시족이 송오행의
[편-001]之 : 芝
사은 겸 주청부사 오숙우가 경사에 가는 것을 전송한 글[送謝恩兼奏請副使吳肅羽朝京師序]
오 시랑 숙우(吳侍郞肅羽)씨가 장차 이사(貳使 부사(副使))의 자격으로 경사(京師)에 가려 할 즈음에 나
에게 와서 청하기를,“이번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대가 글을 하나 지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기에, 내가 응하여 승낙했다.
요좌(遼左 요동(遼東))가 함락되면서 발해(浡海)를 경유하는 길이 개통되었는데, 발해란 바로 동해(東海)
를 말한다.
그러나 삼한(三韓)이 동해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발해를 서해(西海)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곳도 모두 동해에 속해 있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가 해상(海上)을 순유(巡遊)할 적에 성산(成山)과 지부(之罘) 사이
에서 방황하고 바라보면서 신선을 만나기라도 할 것처럼 부산을 떨었고, 서복(徐福)과 노오(盧敖) 등 터무
니없이 허풍치던 사람들이 경황없이 쏘다니며 안 간 곳이 없지마는, 요컨대 우리나라의 서쪽 경계 밖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귀허(歸墟)라는 골짜기와 옥초(沃焦)라는 모래톱이 만약 실제로 있다면 큰 도회지도 필시 그 속에
있을 것이니, 이 지역이야말로 하늘과 땅 가운데에서 엄청나게 넓고 큰 구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로부터 1천여 년 동안 중국과 왕래할 때에는 모두 이 길을 경유했었는데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 이 길이 마침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2백년을 거친 뒤에 다시 개통이 되었으니, 어쩌면 이것도 기수(氣數)와 관계되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탐라(耽羅)를 두고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들 하지만 바람이 순조로울 경우 하루만 가면 도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등래(登萊 중국의 등주와 내주로 산동(山東)을 뜻함)로 건너가려면 순풍(順風)에 돛을 띄운다
할지라도 10일이 경과하지 않는 한 이르지를 못하니, 이 거리가 최소한 천만 리(里)는 되지 않겠는가.
내가 조용히 지내는 동안 시험삼아 숙우의 행색(行色)이 어떠할지 묵상(默想)해 보았다.
높이 솟은 돛대가 무지개처럼 휘어지고 큰 돛폭이 구름처럼 펼쳐진 가운데 거센 파도를 뛰어넘고 거대한
물결을 부수면서 한순간에 천 리를 내달릴 텐데,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언뜻 나타났다 삽시간에 사라지는
교타(蛟鼉)와 어룡(魚龍)뿐,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낮이고 밤이고 간에 어둑하여
종잡을 수가 없을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바다를 지날 즈음에 전횡(田橫)과 그 의사(義士)들 및 노련자(魯連子)와 관유안(管幼安)의 유풍
(遺風)을 회상해 보고, 안기생(安期生 진시황(秦始皇)이 찾았던 선인(先人))과 선문(羨門 상동(上同))처럼
선도(仙道)의 비결을 터득하여 까마득한 시공(時空) 속에서 노닐던 자들이 지금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본다면, 근심스러운 생각도 풀려 즐거워지고 험한 길을 건너가는 두려움도 충분히 해소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배에서 내려 해안에 상륙하면 거기가 등주(登州)인데, 등주는 바로 옛날의 우이(嵎夷 해가 떠오
르는 곳)로서 이른바 동쪽 방향으로 가장 끝 쪽에 있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 수천 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가 비로소 그 땅을 밟게 되었으니, 이 여행길이 참으로 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다시 해대(海岱 동해에서 태산까지의 지역으로서 산동(山東)을 말함)와 연(燕)ㆍ제(齊)의 지경
(地境)을 1천여 리쯤 더 간 다음에야 제경(帝京)에 이르게 되는데, 그동안에 웅장한 산하(山河)와 풍요
로운 생활상과 으리으리한 성곽ㆍ궁실과 휘황한 예악(禮樂)ㆍ문채(文采) 등을 모두 관람하거나 탐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슴속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가운데 견문이 넓어지고 지식이 발전하게 될 것이니,
이는 조그마한 강 물줄기에서 빠져 나와 대해(大海)를 보는 것 같은 정도일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司馬遷))이 장유(壯遊)하였다고 일컬었는데, 지금의 경우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자장이 유력(遊歷)한 것쯤이야 어찌 족히 칭할 것이 있겠는가.
큰 바다 가운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야말로 봉래(蓬萊)와 방장(方丈)의 경승(景勝)을 영략(領略)하는
것과 방불하다 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혈(禹穴)을 탐색했던 일을 비교해 본
다면 차라리 야트막한 언덕이나 길가의 고인 물 정도에 비유해야 근사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번의 여행길을 통해 또한 천하의 기가 막힌 구경거리를 다 보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이다.
이런 나의 소견에 대해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기를,
“그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숙우가 맡은 사신의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독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미고(靡盬)의 생각이 안으로 절박하게 다가오고 음빙(飮冰)의 수고로움이 밖으로 드러날
테니 비록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다 한들 그럴 겨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숙우가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번에 우리 동방에서는 인륜이 무너졌다가 다시 펼쳐졌으며 혼주(昏主)가 물러나고 밝은 임금이 다시
일어나셨다.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이 등지고 좇는 그 이치를 성천자(聖天子)께서 모두 환히 아시고 봉호(封號)를 벌써
내려 주셨으며 칙유(勅諭)를 이미 반포해 주셨다.
그러고 보면 소위 책명(冊命)이니 면복(冕服)이니 하는 것들은 단지 의물(儀物)이나 예수(禮數)에 불과한
것들일 따름인데, 큰 것을 허락해 주고 나서 작은 것을 아낄 리가 어디에 있겠으며 실질적인 내용을 인정
해 주면서 그 형식을 소략하게 할 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만큼 이번의 사행(使行)이야말로 비유컨대 흐르고 싶어하는 물을 터 주고[決流] 떨어지려 하는 물건
을 밀어뜨리는 것[抑墜]과 같다고나 할 것이니, 일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나는 숙우의 입장에서 유쾌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나랏일을 수행하기 위해 옥백(玉帛)을 가지고 가면서 기막힌 장관(壯觀)을 동시에 구경하게 되었으니,
이는 사방을 원유(遠遊)하고 싶어하는 장부의 뜻을 보상받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숙우가 이를 듣고서 말하기를,
“훌륭하다. 이 정도면 나의 여행길을 전송해 주기에 충분하다 하겠다.”하였다.
[주C-001]오숙우 : 숙우는 오숙(吳䎘 1592~1634)의 자(字)이다.
[주D-001]삼신산(三神山) :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洲)의 3산(山)으로, 발해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선이 살고 있는데, 새나 짐승들도 모두 흰 빛을 띠고 있고 황금과 은으로 된 궁궐이 있으며
불사약(不死藥)이 있다고 전해진 이상향(理想鄕)이다. 《史記 封禪書》
[주D-002]성산(成山)과 지부(之罘) : 모두 바다 위에 돌출한 산의 지명인데 사실은 반도(半島)를 형성
하고 있는 곳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발해 동쪽으로 가서 성산을 샅샅이 뒤지고 지부에 올라가 돌을 새겨
세웠으며, 한 무제 역시 지부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史記 秦始皇紀》 《漢書 武帝紀》
[주D-003]서복(徐福)과 노오(盧敖) : 서복은 일명 서불(徐市)로서 진시황(秦始皇)의 명에 따라 동남동녀
(童男童女) 수천 명을 이끌고 불사약을 찾으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노오는 진시황(秦始皇)의 부름을 받고 박사(博士)에 임명된 뒤 신선을 찾으러 갔다가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史記 卷118》 《淮南子 道應訓 注》
[주D-004]귀허(歸墟)라는 …… 모래톱 : 귀허는 발해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큰 골짜기의 이름으로 밑바
닥이 없어 물이 빠져 나간다고 하며, 옥초는 동해의 남쪽 3만 리 지점에 있다고 하는 언덕 이름으로 물이
쉴 새 없이 흘러 들어온다고 한다. 《列子 湯問》 《郭璞 江賦 注》
[주D-005]전횡(田橫)과 그 의사(義士)들 : 전횡은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동생으로서 한신(韓信)이
제 나라 왕인 광(廣)을 사로잡자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즉위하자 무리 5백여 인과
동해의 섬에 들어가 살았다.
한 고조가 전횡을 부르자 낙양(洛陽)에 가던 도중 30리 못 미친 지점에서 탄식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
(漢王)과 남면(南面)하여 고(孤)라고 칭했는데, 이제 와서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길 수는 없다.” 하고
자살하였는데, 섬에 있던 5백여 인도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卷94》
[주D-006]노련자(魯連子)와 관유안(管幼安) : 노중련(魯仲連)과 관령(管寧)이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고사(高士)로서 “진(秦) 나라가 만약 방자하게 제(帝)를 칭한다면 동해
에 빠져 죽겠다.”고 하였다.
《史記 卷83》 관령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서 황건(黃巾)의 난을 피해 요동(遼東)으로 옮겨
왔는데 이때 바다 건너 피난온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금세 촌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관령이 바다 건너 돌아온 뒤 늘 나무 걸상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무릎이 닿은 곳의 나무 부분이 닳아
없어졌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三國志 卷11 注》
[주D-007]사마자장(司馬子長)이 장유(壯遊)하였다 : 사마천이 20세 때에 남쪽으로 강회(江淮)ㆍ회계
(會稽)ㆍ우혈(禹穴)ㆍ구의(九疑)ㆍ원상(沅湘)을 유력하고 북쪽으로는 문사(汶泗)를 건너고 제노(齊魯)의
땅에서 강학(講學)하고 양초(梁楚)를 지나 돌아왔다고 한다. 《史記 卷130》
[주D-008]회계산(會稽山)에 …… 일 : 우혈은 회계산의 지맥(支脈)인 완위산(宛委山)에 있는 우(禹)
임금의 유적으로서 사마천이 20세 때에 유력했던 곳이다. 《史記 太史公自序》
[주D-009]미고(靡盬)의 생각 : 나랏일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하려는 각오를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모(四牡)에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마는 나랏일을 완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내 마음이 서글퍼지기만 한다.[豈不懷歸 王事靡盬 我心傷悲]” 하였다.
[주D-010]음빙(飮冰)의 수고로움 :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내가 오늘 아침에 사신으로 가라는 명을 받고는 속이 뜨거워져 저녁에
얼음물을 마셨다.” 하였다.
[주D-011]흐르고 …… 밀어뜨리는 것 : 《한서(漢書)》 공우전(貢禹傳)에 나오는 말이다.
*계곡谿谷 선생 장유(張維)[1587~1638]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등이다. 조선 후기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공신에 책봉되었다.
양명학자이며, 이정구(李廷龜)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장유는 1635년 1월에 자신의 만록(漫錄)을 모아 『계곡만필(谿谷漫筆)』2권으로 편차해 놓았다.
이어 1635년 6월에 그 동안 자신이 저술한 글들을 26권으로 분류, 편차하여 『계곡초고(谿谷草稿)』라는
정고본(定稿本)으로 만들고 자서(自敍)를 지었다.
신라(新羅)와 '--羅國', 고창국(高昌國)
신라(新羅),새로찾은 땅 '羅'.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떠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 원래의 '羅'는 어디일까?
그럴듯한 사서는 미뤄두고,'羅'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여
찾아든 것이 648년 변기(辯機)가
편찬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이다.
당나라 때 승려 현장이 629년 8월부터 645년 2월에 걸쳐서 17년 동안 서역지방 을 비롯하여 인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서역기행문으로서 그 가치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는
문제의 '--羅'와 '--羅國'들이
등장한다.
가돌라국(珂咄羅國),도화라국(覩貨邏國),니파라국(尼波羅國),구시나게라국(拘尸那揭羅國),구절라국(瞿折
羅國),안저라국(安咀羅國)
......
마치 무슨 국가연방체이듯, 수많은 '--羅國'들.
여기에 또 다른 연방체인듯 한 나라들도 보이는데
바로'--那國'들이다.
신라의 고향이 대륙이라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대륙신라는 과연 저 '羅國'연방체의 주도세력이었을까?
아니면 일개 일원에 불과 했을까?
그 답을 쉽게 찾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대당서역기를 참고로 하여 작성된 지도가
있으니,
남첨부주만국장과지도(南瞻部洲萬國掌菓之圖)라는 것이다.
이 지도는 보영7년(寶永七年;1710년)일본의 승려
랑화자(浪華子)가 제작하고 대헌우평(臺軒宇平)이 서문
을 썼는데,불교적 세계관에서 세상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있고, 수미산에서 아득히 먼 남쪽 바다중에 사람
이 거주하는 대륙을 첨부주(瞻部洲) 또는 남첨부주(南瞻部洲)라고 하며, 장과(掌菓)란, 끝없는 세계를
손안의 과일처럼 샅샅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지도에는
지도작성시 참고로한 자료목록이 좌상단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록 중 관심이 가는 것은 고려도(高麗圖)와 조선비록(朝鮮秘錄)이다.
고려도는 현재 실체를 볼 수 없는 지도이고, 조선비록은
진단구변국도 등과 함께 단군에서 유래한 사서로
알려져 있으나, 역시 현재 실체가 없는 서책인데,지도작성 당시(300여년전) 참고자료로 삼았다는 것은
현재도 일본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다.
아래 지도는 남첨부주만국장과지도의
일부로 원본(대영박물관 소장)에 채색을 가미한 것으로 일본 쓰쿠바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 있는것이다.
신라와 '--羅國'과의 관계와 함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고창국(高昌國)(파란 원)의 존재다.
1926년 9월,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연수'(延壽)라는 연호가 적힌 은합(銀盒. 은그릇)이 금관등과 함께
발굴되었는데,연수(延壽)라는 연호가 신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어느 왕조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연호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 오던차, 작년 여름 상명대 박선희 교수가 '연수'라는 연호는 고창국 국왕 국문태
(麴文泰)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기존의 중광(重光)이라는 연호를 대신해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봉총은 진평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를 백산학회 학보를 통해 발표 한 것이다.
서봉총출토은합우(瑞鳳塚出土銀合杅) 명문.
(蓋 內)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杅用三斤六兩」
(外 底)
延壽元年太歲在辛」
三月▨太王敎造合杅」
三斤」 --출처,韓國古代金石文(1992).
高昌故城
624년 이라면 소위말하는 '통일신라'이전으로 저 먼 동쪽끝 작은 나라에 불과한 신라에 고창국은 무엇
때문에 선물 보따리를 보냈을까? 신라의 고향이 고창국과 '--羅國'연방체내 어디쯤 있진 않았을까?
애석하게도 남첨부주만국장과지도는 수많은 사서,자료등을 참고로 하여 제작되었음에도 청나라(제작당시)
의 지역은 너무나 말끔하다.
수경주,산해경등을 참고했음에도 큰물길의 이름조차 거의 표기하지 않았고,행정구만 단순하게 표기해
버렸다.
제작자가 청나라의 눈치를 본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일 청의 지역을 서역쪽처럼 각 나라의 크기등 제대로
표기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향고도)
부여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
<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魏略》曰: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
有身, 王欲殺之, 婢云:[有氣如?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 中, 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
<夫餘>之地.}
부여왕의 선대는 망명인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삼국지 오환선비전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또한 위략의 윗문장을 보면 아주 놀라운 진실이 드러난다.
부여인은 선대로 부터 망명집단이며 그들이 예맥의 땅에 들어와 정복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워 살았다는
내용이다.
고조선과 관련된 역사가 기록된 최초의 중국사서인<관자>,<염철론>등에 나오는 족명 리지(離枝) ,영지
(令支),예(穢)등이 보이는데 중국발음으로 본다면 리지,링지등으로 불리운다.
이 족명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한에는 마한,진한,변한이 있는데 (삼국지 위지 한전) 최치원은 변한이 백제라 했고 신라는 변한의 후예
이다 (삼국유사)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의 초기에는 신라가 백제에 부용(附용)했으며 백제는 변한이고 변한은 낙랑땅에 있었다(삼국
유사)는 기록이 되는것이다.
우리역사서를 해석하는 사가들의 논리를 빌자면 백제가 낙랑땅에 있었다면 평양지역을 말하는데 그곳에서
발굴되는 기원전 2세기의 유물들은 변한,백제유물이 되어야 하며 재야의 이론을 빌자면 낙랑은 하북 서남
지역이 되어야한다.
삼국지 한전에
마한은 辰王이 월지국에서 다스리고 ..臣智를 우대하여 臣雲遣支保安耶蹜支墳臣離兒不例拘耶秦支廉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이 호칭에서 不例拘耶 (불례구야)를 이루는 명칭에서 그 근원을 추정할 수가 있다.
이것을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부리쥐야>로 할 수 있으며 고대 음가로 한다면 <퓨리기아>이며 이것
은 바로 기원전 12~8세기의 고대의 중근동국가 프리기아에서 왔다고 유추 할 수 있다.
신라와 가야가 기마민족이며 이 나라가 철문명을 주도하고 일본열도에 말과 철문명을 전파한 부여족의
일파였다고 하는것은 이미 미국의 고미술사가 코벨 박사가 고미술및 문화학적 측면에서 이를 증빙하였고
한편으로 이란의 고고역사학자 데락샤니는 고대 이란과 한민족과의 연원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가야(加耶)가야의 명칭은 바로 不例拘耶 (불례구야)에서 온것으로 프리기아의 이름을 축소시킨것에 불과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의 중근동국가 프리기아는 어떤 역사적 연원을 갖는지 알아보자.
http://en.wikipedia.org/wiki/Phrygia
프리기아는 기원전 12~7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근동 왕국으로 터어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발생하였다고
전하며 당시의 철기문명의 발생국 히타이트,앗시리아,페르시아등 강력한 왕국과 대적할 만큼 힘을 갖추었
으나 기원전 6세기경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프리기아의 유명한 왕으로는 미다스왕(MIDAS)으로 손에 닿으면 황금으로 변하게 한다는 전설의 왕으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우리나라 옛전설의 주인공이다.
언어적으로는 이란어등을 사용하고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존속하였던 국가의 지배층의 일부가
동진하여 후기고조선 일부세력을 형성하고 이들이 부여를 일으킨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을리 없는것이다.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위략,삼국지 한전
그 나라는 대대로 부유하고 선대 이래로 패해본적이 없는 강국이었다....
터어키 아나톨리 지방에서 흥기했던 히타이트(BC2000~1200)의 철제검과 고조선 청동검과의 양식적
차이는 없는가? (사진 아래)
요녕박물관에서 수장 전시중인 부여 철검은 전통적인 환두대도가 아닌 다마스쿠스검의 형태를 띄고 있어
이미 운영자는 그 검의 주인공인 부여족이 서쪽에서 이주해온 민족이라고 추정한적이 있다.
동아시아와 수천킬로 떨어져있어 우리와 상관없을것이라고 믿었던 중근동 아시아 역사..
그러나 단군세기의 기록중 22대 색불루왕의 즉위를 전후로 하여 커다란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는것과 부여
라는 나라가 등장하는것으로 보아 정치적 주체세력의 변동과 전기고조선이 끝난것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히타이트,킴메르,앗시리아,프리기아.... 뭔가 시기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속에서 맴돌고 있음을 볼수
있다.
참고문헌- 정형진, 고깔모자를 쓴 단군 ,백산자료원, 2003.등 다수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