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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세와 더불어 ‘대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최초로 수도 생활을 체험한 교황이자 라틴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이전의 어느 교황보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전례 분야에서도 로마 양식 미사 전례를 개혁하여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들었고, 각 지방에서 제각기 불리던 성가들을 재정리하여 전례와 전례력에 알맞게 맞추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겨 ‘기독교 전례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는 교황이자 학자입니다. 그는 사후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즉시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도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의 상징물은 교황관과 비둘기 모습을 한 성령, 책 등이며, 음악가와 가수, 교사, 학생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대 격변기인 서기 540년경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에서 아버지 ‘고르디아누스’와 어머니 실비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으로, 훗날 이름의 어원을 연구했던 중세 작가들은 그의 이름에 담긴 뜻이 교황 본인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었다며 “그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문은 교회와 상당히 가까운 관계였는데, 이는 그의 고조부가 바로 교황 ‘펠릭스 3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펠릭스 3세’가 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추대로 교황이 되었던 것에 반해 그는 교황 선거에서 직접 선출되어 교황이 되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기 542년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바다 건너 이탈리아에까지 번지면서 나라 전체를 기근과 공포로 몰아넣었는데, 몇몇 지역에서는 3분의 1이 넘는 주민이 쓰러지거나 사망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이탈리아인들에게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고트족 왕들이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점차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다시 되돌려지고 있던 시기로, 당시 전투는 주로 이탈리아 북부 쪽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그레고리오는 전쟁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정계에서 은퇴하자 그의 가족은 ‘고르디아누스’ 황제의 시칠리아 사유지로 이사했다가 549년에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547년 ‘토틸라(동고트 왕국의 6대 왕)’가 로마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내쫓으면서 거의 파멸 상태에 놓였다가 549년부터 시민들의 귀환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는데, 이후 고트족과의 전쟁은 토틸라가 죽으면서 552년에 종식되었고 이어진 프랑크족의 침입도 554년에 격퇴하면서 554년 이후 이탈리아는 드디어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물론 제국의 정부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으나 그렇게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 제국의 모습으로 조금씩 재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이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어에는 문맹이었으나 라틴어를 정확히 구사하여 라틴 문학은 물론 자연과학, 역사, 수학, 음악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법률에도 능통하여 그의 학식과 덕망은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서기 570년, 그는 부모의 권유로 공직에 들어가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며 한때 로마 시장의 자리에까지 올라 로마의 재정과 방어, 보급 등 모든 일을 주관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책임감은 물론 공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성적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수사가 될 결심으로 ‘키르쿠스 막시무스’ 맞은편 ‘첼리오’ 언덕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축하고 ‘성 안드레아’ 사도를 수호성인으로 모신 뒤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훗날 수도원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산 그레고리오 마노 알 첼리오’ 성당으로 개축되어 성인으로 시성된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평소 그는 자신이 이해한 관상 기도를 “하느님 안에 쉼”이라고 표현하면서, 관상 생활은 “관상하는 동안에는 마치 모두 잠들어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이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침묵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수도 생활 시절, 그는 항상 너그럽거나 상냥하지만은 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한번은, 낡은 방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던 한 수사가 얼마 전 자신이 금화 세 닢을 훔쳤다고 고백하자 다른 수사들이 그의 방을 뒤져 숨겨놓은 금화 세 닢을 찾아내었고, 이를 본 그레고리오는 다른 수사들에게 교훈이 되게 한다며 모두 방을 나가게 해 결국 수사는 홀로 고독하게 임종을 맞고 말았으며, 장례도 외딴곳에다 무덤을 파고 관 위에 그 금화 세 닢을 던지며 수사들과 함께 “이 금화와 함께 너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는, 비록 임종을 앞둔 사람이라도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엄격한 행동은 그 수사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일 뿐, 수사를 탓하거나 죄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장례식 이후 연옥에 있을 수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루속히 그가 보속을 모두 기워 갚고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도록 30대의 미사를 봉헌하도록 조치했는데, 30일 후, 다른 수사의 환시에 그의 영혼이 나타나 연옥에서의 고통을 마치고 이제 하늘나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의 수도 생활은 엄격하면서도 깊은 사랑과 애정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평소 수도자로 사는 것은 “우리 창조주만을 바라보며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수사로 생활하면서 그는 묵상과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특히 성경은 물론 라틴 교부의 문헌을 찾아 공부하며 고행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한편, 그의 세 고모 역시 모두 수녀가 되어 신앙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첫째 고모와 둘째 고모가 증조부인 ‘펠릭스 3세’ 교황의 환시를 체험한 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막내 고모는 이내 수도 생활을 접고 자기 소유지의 집사와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사건들에 대해 그는 훗날 “초대받은 이는 많으나 선택받는 이는 거의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실비아’는 훗날 성녀로 시성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서기 579년 교황 ‘펠라지오 2세’는 자신이 부제로 서품한 그레고리오를 동로마 제국에 주재하는 대사로 임명하여 586년까지 교황사절로 근무하게 하는데, 578년 교황은 롬바르드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를 포함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군대 지원을 요청한 바 있으나 로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584년에 또다시 그를 통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에게 롬바르드족 치하에서 겪고 있는 로마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황제는 군사력을 동원하는 대신 외교력을 통하여 롬바르드족의 위협에 대처하겠노라 응답하였고, 이에 그는 동로마가 로마를 돕기 위해 결코 군대를 파병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 동로마에게 동쪽의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더 크고 직접적인 위협이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습니다.
이렇듯 그의 주요 임무는 동로마 황제에게서 로마에 대한 군사 원조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지만 이미 동로마의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 방향이 명확해진 이상, 달리 손 쓸 도리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에 복직된 ‘에우티키우스’에 반대하여 이미 12년간 총대주교로 재직한 ‘요한 스콜라스티쿠스’의 정통성을 주제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여 동로마 황제의 눈 밖에 나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의 상류층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인맥을 쌓는 일에 주력한 결과 서서히 도시 상류층은 물론 귀족 여성들에게 관심을 받으며 존경과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곳의 많은 귀족에게 영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의 결과가 로마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며 에우티키우스 총대주교와 나눴던 신학 논쟁은 그에게 동방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데, 이는 그가 교황으로 즉위할 때까지 여운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 같은 총대주교와의 불화는 ‘티베리우스 2세’ 황제 앞에서 공개적으로 논쟁함으로써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는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이후에도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지닌 존재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 구절을 근거로 내세웠는데, 전승에 따르면, 치열한 논쟁 끝에 마침내 그가 승리하여 황제는 총대주교가 쓴 책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가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재할 당시 얻어낸 의미 있는 성과 중의 하나로, 논쟁 당시 그는 오직 성경 내용만을 인용하며 상대를 설득해야만 했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어에 문맹이었던 그가 평소 권위 있는 그리스어 문헌들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에우티키우스는 582년 4월 5일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며 임종 직전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585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로마로 돌아와 자신이 설립한 첼리오 수도원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590년 로마 전역에 전염병이 돌면서 ‘펠라지오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의 후임자로 의도치 않게 그가 추대되어 만장일치로 선출되었고 그해 9월에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까지 받게 됩니다. 그는 본래 로마로 돌아오면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로 작정하였지만, 본인의 뜻과 달리 교황으로 선출되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글에서 임기를 시작한 첫해에 자신에게 부과된 교황직의 막중한 부담감에 한탄하며 과거 수사로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기도 생활을 더는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기 590년, 그렇게 교황직에 오른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은 교황직에 대해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고 고백하면서 수도자들의 사색적인 삶을 칭송하는 서한을 작성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전염병으로 피해를 본 로마 시민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사흘간 참회 기도를 올렸는데, 당시 그는 기도 행렬을 이끌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옛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영묘인 ‘산탄젤로 성’까지 행진하였고, 그렇게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그는 미카엘 대천사가 손에 칼을 들고 하드리아누스의 영묘 위를 맴돌고 있는 환시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는 환시가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으며 사람들에게 이제 전염병이 끝날 것이라 선포했고, 그의 말대로 이후로는 전염병 환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영묘 위에 한 손에 칼을 든 청동 천사상을 세우도록 지시하게 되었고, 당시 서방 교회에서 약화 되었던 성좌에 대한 지도력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공식 문서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자신을 가리켜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하자, 이에 반발하여 교황권이야말로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베드로좌는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이자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으므로 교황은 신앙의 머리이다. 각 주교는 해당 지역에서 저마다 사목권을 유지하지만, 교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교황좌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주교는 없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황의 위상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섬기기 위한 것이며, 하느님 백성의 영적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렇듯, 그는 처음으로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으로 이해한 교황으로, 이후 후임 교황들 역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제국과 교회를 동일한 실체로 해석한 후,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상호 보완적인 임무를 띠고 있는 교황과 황제 중에서 교황이 세속보다 중요한 영적인 문제를 관장하기 때문에 황제도 궁극적으로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북유럽의 이교도 주민들에 대한 교회의 전교 활동을 조직화하여 이를 독려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앵글로·색슨족 이교도들의 복음화인 ‘그레고리오 선교’ 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수도원장으로 있을 당시 로마에서 우연히 잉글랜드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 597년, 그는 자기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잉글랜드에 파견하면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들에게 권위를 주시어 그들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사목지로 맡겨진 잉글랜드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여러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강복은 또한 여러분의 손을 통해 여러분이 사목할 백성들에게도 내려질 것입니다.”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료 수사 40명은 그렇게 잉글랜드 교회의 창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대교구 두 곳과 교구 열두 곳이 설정되었으며, 캔터베리 교구를 수좌 교구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의 성공적인 전교 활동에 힘입어 네덜란드와 독일에도 선교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이에 위배되는 모든 이교와 미신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으며, 이 신념은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일관되게 유지된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또한 성당에 조각상을 두는 것을 금지해 왔던 이전까지의 관례를 깨고 그림과 조각상이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책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교리나 성경 내용의 예술적 표현을 지지했는데, 이러한 결정은 이후 교회 미술이 발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촉매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많은 요소를 없애거나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등 전례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는데, 당시에 새롭게 제정된 미사 의식은 이후 16세기 ‘트리덴티노’ 미사가 출현하기 전까지 봉헌되기도 했습니다.
그에 의해 개혁된 성사 예식들은 ‘그레고리오 성사’라고도 불리는데, 이를 집대성한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 예식서는 그레고리오 1세에 의해 집필이 시작되어 11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에 의해 성사 예식들이 개혁되면서 서방 교회의 전례는 동방 교회의 전례와 뚜렷하게 구별되기 시작했는데, 변화가 거의 없는 동방 교회의 전례 양식과 달리 로마와 기타 서방 교회의 전례 양식은 축일이나 전례력의 변경이 반영되어 수많은 기도문이 만들어졌으며, 그로 인해 로마 미사 전문뿐만 아니라 본 기도와 감사송도 여러 종류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서신을 850통 이상 작성했는데, 이러한 서신을 모은 14권의 서책은 그의 재위 중에 일어난 거의 모든 일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양의 단선율 성가의 주요 양식은 9세기 말엽에 표준화되었는데, 이는 애당초 그가 주도적으로 행한 것으로,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오 성가’라는 이름이 붙어졌습니다. 그의 사후 300년이 지난 뒤 ‘요한네스 히모니데스’가 집필한 ‘그레고리오 1세의 전기’에서는 이를 그의 업적으로 돌리며 그레고리오 성가가 로마 성가와 ‘피핀’과 ‘샤를마뉴’ 등이 다스렸던 프랑스•독일 제국 치하에 있던 프랑크족 성가의 융합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한편, 그가 집필한 저술로는 ‘욥기 주해’ ‘사목 규범’ ‘대화록’ ‘에제키엘서 강론집’ ‘4대 복음 강론집’ ‘아가 강론’ 열왕기 상권 주해‘ 등과 854편의 사본의 서한들이 남아 있는데, 이 사본들은 필사가들에 의해 한 권의 책에 옮겨 기록되었으며, 이 서한집은 후에 원통형 두루마리 용기에 보관되어 대부분 10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바티칸 도서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교회 미술에서 그를 묘사할 때, 교황의 정복을 차려입은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그리곤 하는데, 실제로 그가 입었던 의복과는 매우 다르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그림은 비둘기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의 친구였던 ’베드로‘ 부제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가 에제키엘서 내용에 관해 설명하고 비서가 이를 받아 적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오랫동안 말없이 조용히 있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비서가 궁금하여 자신과 교황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살짝 젖혀 들여다보니,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앉아 부리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고, 비둘기가 부리를 거두자,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으며, 이에 비서는 얼른 그의 말을 받아 적었는데, 또다시 조용해져 비서가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똑같은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10세기 이후 교회 미술에서 복음사가들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표현법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자선사업을 많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자선사업을 한 배경은 모든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며, 교회는 단지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그에게 기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하였는데, 그럼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를 원했던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렇게 모인 구호품은 개인은 물론 집단이나 단체에도 넉넉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그들의 갱생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문 역시 빈민 구제를 위해 음식과 옷 등의 생활필수품은 물론 부동산과 예술품, 투자자산, 농토 등 다양한 종류의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면서 사무소를 설치하여 구호품 분배 업무를 맡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교황이 된 590년 당시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상태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반도를 점령하면서 비옥한 영토를 많이 차지한 데다 시도 때도 없는 그들의 약탈로 인해 이탈리아 경제는 거의 마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난민들로 넘쳐났고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은 그들은 생필품조차 부족하여 로마는 거대한 난민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제국 정부가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로마의 수호를 위해 여러 차례 사절을 보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그는 결국 교회 자원들을 빈민 구제를 위한 용도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탁월한 회계처리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이는 훗날 체계적인 회계업무의 기초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빈민들을 찾아가 그들을 돕고 구제할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는데, 시칠리아의 한 성직자에게 “나는 그대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는 누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중략) 나는 그대가 ’파텔리아‘라는 이름의 부인에게 40솔리디(화폐 단위)를 주어 자녀들에게 신발을 사주게 하고, 추가로 40부셸(용량 단위)의 식량을 주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빈민 구제에 비협조적이거나 무능력한 성직자들은 과감하게 해임하였으며, 지출을 늘리려면 그만큼 소득도 늘려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증가하는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투자자산을 자금화하였으며, 1년에 네 차례 사례금을 받고 있던 성직자들이 개인적으로 빈민 구제를 위해 희사하는 경우 그 대가로 금화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기아에 허덕이는 시민들에게 식량을 대신할 수 없었으며 이는 부유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그는 교회가 갖고 있던 ‘파트리모니아’라고 하는 넓은(전체 약 12억 평) 농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물품들을 로마로 배송하도록 하면서 할당량을 주어 생산량을 높이도록 독려했습니다. 특히 실제 노동에 참여하는 노예나 소작농들에게 생산된 곡식과 농산물 일부를 넘겨주며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곡물은 물론 와인과 치즈, 고기, 생선과 기름 같은 식품들이 대량으로 로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구호품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빈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빈민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전전하거나 식량을 받으러 갈 수 없을 만큼 건강 상태가 나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사들과 함께 아침마다 식량을 들고 그들을 찾았는데, 그러면서 빈민들이 식량을 받기 전까지는 그 역시 먼저 식사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식사할 때는 여러 빈민과 주민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나눴다고 합니다. 한편, 궁핍하지만 구호품을 받는 것에 수치심을 갖고 있던 상류층에게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보내주었다고 하며, 어쩌다 작은 골방에서 한 가난한 사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살인자라고 스스로 자책하며 수일 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훌륭한 업적과 선행은 물론 그의 고결한 인품과 언행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교황이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로 군림하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기 599년, 그는 일기에 “열한 달 만에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스러운 근심들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라고 적었으며, 600년에는 “근 2년 동안 나는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에조차 세 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 있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라고 적었습니다. 또한 601년에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라고 기록했는데, 그는 결국 604년 3월 12일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로마 전례력은 그의 축일을 3월 12일로 지정한 바 있는데, 이날은 늘 사순시기에 속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에 개정된 현행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에서는 성 대 그레고리오의 축일을 그가 서품받은 날인 9월 3일로 지정하게 되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1세가 선종한 이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 기간 매우 짙게 남아 있었는데, 잉글랜드에서는 그의 사후에도 한동안 ‘우리의 그레고리오’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칭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편, 처음으로 그레고리오 1세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써진 것은 서기 713년 잉글랜드의 휘트비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였는데, 이는 이탈리아에서 써진 9세기 ‘요한네스 히모니데스’의 전기보다 100년 이상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도 잉글랜드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복음화와 변혁을 가져온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성인은 음악가와 가수, 교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