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오사화 - 조의제문
3조선 중기에 약 50년 동안 4번의 사화가 일어나 수백 명의 사림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4대 사화 중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조에,
기묘사화(1519)는 중종조에, 을사사화(1545) 는 명종조에 일어났다.
그중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세조를 폭군으로 비유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 등의 훈구세력의 발고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조의제문'이란 '의제를 애도하는 글'이란 의미로 김종직이 생전에 꾼 꿈에 대해 쓴 글이었다
꿈에 신인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 꿈을 꾼 후 김종직은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했으며, 그 글이 《조의제문》이다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함양 군수 시절 함양군의 한 정자에 걸려있던 현판을 간신이 쓴 현판이라 하여 떼어내어 불 사른적이 있었는데 이 현판의 주인이 바로 유자광이다. 평소 서자라 하여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김종직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던 유자광은 이글에서 의제는 단종을, 서초 패왕은 세조를 은유한 것으로 악의적인 해석을 했다.
유자광의 발고로 왕은 사초를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훈구대신들은 연산군의 요청에 의해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를 발췌하여 연산군에게 바쳤다.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조의제문을 검토하던 연산군은 뚜껑이 확 열렸다.
세조가 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 귀인 권씨를 범하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기록되어 있었고 단종의 시신을 '산 속에 넣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아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받은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 국문을 시작했고, 거듭되는 고문에
칡넝쿨 얽히듯 연루자가 불어 났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관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능지 처사에 삼족이 처형을 당했다.
그 외에도 25명의 신진세력들이 참형을 당하고 유배에 처해져서 무오사화의 총 피화자는 44명에
이른다.
이로써 성종 때 부상했던 사림은 씨가 말라버렸고, 귀찮고 말 많던 사림들을 싹쓸이하고 나서 연산군은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자로 부상했다
♡갑자사화 - 폐비 윤씨 ♡
갑자사화(1504)는 무오사화보다 기간이 길었고 피화자의 범위가 훨씬 넓었다. 갑자사화의 주 원인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 폐비 문제였으나, 내면으로는 왕권을 능멸하는 신권에 대한 연산군의 징벌의 성격이 짙었다.
연산군이 모친 윤씨가 폐비 되었음을 안 것은 재위 3개월만이다. 재위 1년이 넘었을 때는 윤씨의
기일도 알게 되었다. 재위 10년이 된 어느날, 연산군은 임승재의 집에서 임사홍으로 부터
" 성종의 후궁이었던 엄숙의와 정소용이 모후를 참소하여 폐비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참을 울던 임금은 궁으로 들어와서 엄, 정 두 후궁을 손수 죽였으며 그녀의 자식들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장검을 들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리다가 돌아왔으며, 죽인 엄숙의와 정소용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근 후 산과 들에 뿌리도록했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는 와중인 연산군 10년 4월에 세상을 떴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병석에 누운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들이받았고, 인수대비는 이 충격으로 죽었다고 전한다
갑자사화 때 등장한 형벌이 '쇄골표풍'이다. 시체의 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형벌을 말한다.
조상숭배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던 당시에 쇄골표풍은 제사를 지낼 근거마저 없애버리는 극악한 형벌이었다.
♡ 연산군과 장녹수 ♡
갑자사화가 수그러들자 연산군은 전국에 운평을 두었다. 기생의 이름을 운평이라고 바꾸어 부른 것인데, 대궐로 뽑혀 올라온 운평을 흥청이라 했다.
운평은 처음에는 300명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1300명이나 되었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부인도 가리지 않고 간통했다고 한다. 궁궐에서 잔치를 베풀어 신하들 부부를 함께 초대한 후 마음에 드는 여인은 나인을 시켜 화장이나 옷차림이 잘못 되었다 하고 내실로 불러들여 강간을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총애했던 후궁 중 유명한 여인이 바로 장녹수이다. 장녹수는 원래 제안대군 집안의 여종이었다.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제안대군 집안의 노비의 아내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은 후 창기가 되었다.
장녹수는 원래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았고, 나이는 30세였으나 얼굴은 16세 아이와 같았다 한다.
왕이 장녹수의 노래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궁궐로 맞아 들이니 왕의 총애가 날로 융성해 숙원으로 봉해졌다. 장녹수의 미모는 중간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남 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이 견줄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연산군이 얼마나 장녹수에게 빠졌는지
《연산군 일기》에 장녹수가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그녀는 연산군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에 질투를 내지 않고, 오히려 종친이나 사대부 부인들을 강간하는 것을 즐겨 도와 주었다 한다
연산군의 몸과 마음을 떡 주무르듯이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한 몫을 한 장녹수는 연산군이 폐위되자 마자 민중들 에게 돌로 맞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