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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부활절 메시지
누가복음 7장 강해 이부-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장11-17
요절 누가복음 7장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오늘은 2020년 부활절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똑똑한 어떤 지성인이 성경을 읽는데 예수님이 매우 독선적이고 교만해 보였다고 합니다. 배우지도 않고 젊은 분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건방져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알고 나서 그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합니다. 성경이 다 이해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분은 후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해야 성경이 이해되고 우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평생 청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전에 청년은 20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UN에서는 청년을 18-65세라고 새로 청년의 나이를 정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나도 청년입니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청년은 UN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20대라도 늙은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지치고 꿈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비록 90살이라도 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는 평생을 청년같이 활기차고, 꿈 꾸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20년 부활절을 통해서 평생을 청년같이 살다가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
11-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인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나인성은 매우 아름다운 성입니다. 아마 요즘 천안처럼 아름다운 벚꽃, 목련꽃,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름다운 성으로 가시자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나인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슬픈 장례 행렬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상주가 상여 앞에 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에는 영정을 든 사람이 운구하는 사람 앞서 가지요? 어머니가 슬피 울며 나오고 뒤에는 아들의 상여가 오고 그 뒤에는 많이 성의 사람들이 그 상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참으로 슬픈 여자입니다. 과부라는 것을 볼 때 이 여자는 시집와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당시에 여자는 경제 능력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여자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요 실제적인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남편을 잃으면 과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생계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매우 합법적인 것입니다.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과부로 살았습니다. 왜 과부는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임마가 목자님 이야기르 들으면서 이 여자가 과부로 산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마가 목자님은 외아들입니다. 마가목자님은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고 평생을 과부로 사셨습니다. 시집가면 외아들인 마가 목자님이 상처받을까봐 시집가지 않고 평생 과부로 아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이 여자도 아들을 상처받지 않고 곱게 키우고자 결혼하지 않고 평생 과부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며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여자에게 아들은 아들이면서 남편이요,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 청년이 되면서 남편이 죽은 슬픔도 많이 위로 받았습니다. 남편 없이 살아온 고생도 눈 녹 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갑작스런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늙은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도 죽습니다. 나영목자 친구는 30대인데 부정맥으로 얼마 전 죽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이맘 때 젊은 고등학생들이 세월호 사건으로 죽었습니다. 코로나로 죽은 젊은이도 있습니다. 과부는 아들이 죽자 하늘이 두번째로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모든 소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과부는 장례 행렬 앞에서 간신히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의 슬픔은 과부만의 슬픔은 아닙니다. 우리 모든 인생의 슬픔입니다. 몇 주전 저의 큰형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장판을 깔아 주시고, 동아리 방에 성경책을 기증하신 분이십니다. 지난 설날에도 즐겁게 웃고 함께 이야기하던 분입니다. 처음 담도암이 걸렸다고 하였을 때 눈물이 났고, 복수가 차서 입원했을 때 눈물이 났고, 돌아가신 후 문상을 갔을 때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 집에서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계시던 분이 돌아가시자 슬펐습니다. 세기 목자님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을 때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버지를 잃으신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나도 형의 무덤 곁에 나의 비석을 미리 만들어 세워놓았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를 찾아오고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슬픈 인생을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2) 울지 말라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슬픔을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외아들입니다. 30세의 청년입니다. 예수님도 얼마 후에 청년으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때 하늘 아버지의 슬픔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12시에서 3시까지 3시간이나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이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슬픔으로 과부와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이 있는데 왜 우느냐고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우는 사람은 울게 두어야 합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슬픔이 없어집니다. 함께 울어주어야 참된 위로를 얻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내가 죽었을 때 슬피 울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도 성도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위해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울어야하지만 너무 오래 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아름답고 강한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자 스데반이 자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를 진정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슬퍼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여 영원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죽은 사람은 암도, 코로나도, 심근경색도 없는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곳은 슬픔도 고통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잠시 이별하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죽은 사람을 위해 너무 많이 울지 말고, 예수 믿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3) 청년아 일어나라
14, 15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은 과부를 위로하시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인의 관 뚜껑은 열려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어 장례 행렬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때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도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이름을 아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청년아! 부르셨습니다. 모든 청년은 누워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청년은 청년답게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청년을 청년답게 하십니다. 청년 아닌 사람들도 청년답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점에서 청년을 청년답게 하십니다.
첫째,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피곤치 않게 하십니다. 청년의 특징은 피곤치 않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청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청년이라도 피곤해합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청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달려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힘을 얻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피곤을 쉽게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큼은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이 주시는 힘이 솟아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성령님 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마음에 힘을 주십니다. 이렇게 마음에 힘이 생기면 어느정도 육체에도 힘이 생깁니다. 6개월 전에 서울 성모병원에 갔는데, 녹내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6일 이상은 매일 성불사 끝까지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주차장까지 가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연습하니 끝까지 가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마음에 힘을 얻고 육체도 계속하여 운동하여 힘을 키워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힘 있게 사는 사람이 청년입니다. 문제는 마음이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실패의식이 들 때 우리 마음이 피곤해집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깨어질 때 마음이 피곤해집니다. 이것은 마음의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교만, 불신, 탐욕이 우리를 피곤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마음에 힘이 납니다. 우리가 마음에 힘을 얻고 육체도 연습하여 죽는 그 날까지 청년처럼 힘 있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청년의 특징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어린이는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 뿐 아니라 늙은이도 꿈을 꿉니다. 늙은이도 영원한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정과 교회에 건설하는 꿈을 꿉니다. 젊은이는 미래에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실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자신의 생애에 이루게 됩니다.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10명의 이복형, 3명의 이복 엄마들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세계의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갔어도, 죄수로 감옥에 갇혔어도 그 꿈은 식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적당히 훈련해서 이집트의 총리로 쓰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이 임하였을 때 마게도냐를 통한 유럽 개척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었고 노년에는 로마 개척을 통한 세계선교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도 로마선교의 꿈에 불탔습니다. 그는 노년에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했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ubf에게도 꿈을 주셨습니다. 1960년에 하나님은 한국 대학생에게 세계선교의 꿈을 주셨고 미국, 러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유럽, 남미, 호주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천안 지방대 학생들을 유럽과 미국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저에게도 대학생 시절 꿈을 주셔서 평신도 목자로 천안을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오십대에는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5천 선교사 100개 지부 개척의 꿈을 주셨습니다. 각 캠퍼스별 제자 세우는 꿈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꿈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다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살아나자 청년을 선교사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주어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4).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16-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모든 사람이 청년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무서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큰 선지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일어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가랴가 노래한 것처럼 돋는 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이 주는 어둠이 물러갑니다. 마음 속에 있는 슬픔, 두려움, 무기력, 절망이 물러갑니다. 기쁨과 평안과 능력과 소망이 솟아 납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빛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활의 주님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마음의 피곤함과 절망을 몰아내주시고 힘과 꿈을 주어 우리를 청년답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의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한국, 천안에까지 퍼졌습니다. 천안에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5) 결론, 누가 부활하는가
우리가 평생 청년 같이 살 수 있습니다. 힘 있게 꿈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부활의 주님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꿈을 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청년같이 살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청년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을 살렸지만 분명히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누구를 살릴까요? 그 날도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청년같이 사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그날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늙은이 같이 무력하게 절망하며 사는 사람은 그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늙은이의 하나님이 아니라 청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청년같이 힘 있게 살아야합니다. 청년같이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며 도전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마지막 날 다시 오실 때 청년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한마디) 청년아, 일어나라
2020년 부활절 메시지
누가복음 7장 강해 이부-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장11-17
요절 누가복음 7장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