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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질 수 없는 씨앗(김행숙, <<사춘기>> 분석문 )
뭉크는 자는 도중 초경을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신체의 변화를 자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에 휩싸인 사춘기 소녀를 그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눈은 등불에 비친 그림자로 형상화 된 불안과 기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녀의 육체는 어린아이를 넘어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음부를 가린 손과 움츠러든 어깨, 한쪽으로 기운 무릎으로 보 건대, 소녀의 내면은 아직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사춘기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성적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사춘기는 이를 테면 정신과 육체간의 긴밀한 협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최초의 비대칭이다. 사춘기를 기점으로 육체와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들어선다. 더 이상 그 둘은 화해할 수 없다. 벌어진 골짜기에서 혼란과 불안, 기대를 함유한 독성연기가 피어오르고, 의식의 암막커튼을 걷고 "경계의 시간"이 도래한다.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다. 흔히 사춘기는 과거의 몸살 정도로 치부되곤 한다. 근데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정신과 육체의 간극이 새살 돋듯 화해할 수 있을까. 시인 김행숙은 사춘기의 지속성에 주목한다.
우리의 안팎에서 사춘기는 새로운 모습으로 출몰한다. 사춘기는 과거와 추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지나온 사춘기와는 또 다르게 사춘기를 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춘기를 산다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움직이는 미래에 섞이는 우리들의 몸짓이며 미래에 대한 물음표이고 느낌표일 것이다.
김행숙 외 3인, <<4인 4색, 사춘기를 바라보는 저마다의
시선>>, 초암네트웍스, 2006, 64 ~65쪽
김행숙은 사춘기를 병적으로 앓은 경험이 있는 시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실기시험을 앞두고, 쓰러진 것이다. 시인은 그때의 졸도를 육체가 "공포와 수치로부터 도망"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고 고백한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아무 곳에서나 픽픽 쓰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미지에 대한 병적인 공포가 꼭 졸도로 증명되는 건 아닐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불치병처럼 사춘기를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집 << 사춘기>>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유하는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온점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삶의 지점을 짚어나가는 작업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시집 <<사춘기>>에서 대별되는 사춘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대칭적 존재를 향한 관심과 애정이 나타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상실과 죽음, 불안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사춘기는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틈의 시간", "경계의 시간"으로서 기존의 차원과 미지의 세계 사이의 틈새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사춘기는 개별적이며, 불가해적이기 때문에 누설될수 없고, 누설될 수 없기 때문에 신비함을 획득한다
그러나 사춘기가 지닌 내밀성은 감추기 위함이 아닌 밝혀지기 위한 내밀성이다. 불가해성을 밝히려는 하염없는 시도들의 실패 속에서 사춘기는 더욱 긴밀해
지고 간절해지는 것이다.
사춘기 얘기는 됐으니, 여기에서 잠깐 곁길로 나가보고자 한다. 흥미롭게도 사춘기가 가지는 이러한 특징들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표상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난 딸로 꽃밭을 거닐다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하계로 끌려갔다. 어머니 데메테르의 강력한 요구로 페르세포네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만, 하데스가 건넨 석류를 먹는 바람에 하계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일년 중 삼분의 이는 지상에 머물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하계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지내게 된다.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대지와 곡물을 상징하는 존재다. 신화학의 맥락에서 페르세포네의
납치와 지상으로의 귀환은 대지에 풍요와 척박, 성장과 소멸을 가져오는 계절의 순환의 상징으로 읽혀왔다. 지상의 죽음을 통해 토지가 비옥해지듯 생명과 죽음은 순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5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사전편찬자 헤시키우스는 에우리피데스가 쓴 시 구절에 등장하는 "말할 수 없는 소
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헤시키우스는 그녀가 페르세포네'라고 결론내렸다. 페르세포네의 별칭은 "어린
소녀ragazzing"이며 처녀 혹은 씨앗(근원)을 뜻하는
용어로서 '코레(Core 혹은 Kore)'라고도 불렸다. 아감벤은 이를 지적하며, "코레라는 신성한 소녀는 여인
과 소녀라는 여성성의 두 본질적인 상 사이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동시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비결정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조르주 아감벤, 지은현 역, <<말할 수 없는 소녀>>, 꾸리
에, 2017, 17쪽.)
코레(처녀, 씨앗(근원), 페르세포네의 별칭)가 가진 근원성, 비결정성은 지하-지상의 횡단 서사를 통해 순환의 의미를 획득함으로서 완성된다. 코레는 두 세계를 잇는 통합 언어의 대변자로서 제 역할을 수행한다. (김화영, <페미니스트 평화 : 침묵하는 자에서 코레(Kore)의 복원가로>, <<한국기독끗신학논총>>, 제 76집, 한국기독교학회, 2011, 235쪽.) 근원은 소통되지 않는 한 완료될 수 없다. 소통은 주체가 한쪽에 고정되어 있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이처럼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페르세포네다. 처녀(소년)이다. 흔들리는 주체를 가진 약하고 불안정한 존재. 사춘기의 기점에 서 있는 생명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시인이 <<사춘기>>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앞서 제시한 페르세포네 신화와 상통하는 바가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유추만 할 수 있을 따다름이다. 하여, 본고는 분석을 통해 앞서 나타낸 특징들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 검토할 계획이다. 또한, 이러한 시도가 근원적으로 닿고자 하는 지향이 어디인가 페르세포네 신화와 연계하여 부분적으로 밝힐 것이다. 이 시도는 시인이 온몸으로 표현한 선례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날 테지만,시인과 진리에의 열정으로서 엮일 수 있을 테니 실패해도 즐거운 실패로 남게 될 것이다
1. 하데스와 데메테르의 사이에서 : 귀신
페르세포네는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두 세계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녀가 이승에 임하기에
데메테르는 대지를 비옥하게 다스리고 생산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종내에는 저승으로 돌아가기에 겨울을 동반한 죽음이 잠깐 세계를 쓸고 지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계에는 만발하는 생과 차가운 종말의 시간이 양존한다. 우리의 육체는 대지에서 피어나는 생명을 섭취하며 성숙해진다. 그리고 페르세포네가 저승으로 돌아가는 시간, 죽음이 대지를 휩쓸고 종말의 예감이 처음으로 우리의 의식에 그늘을 드리울 때, 사춘기가 시작된다. 시인은 과거 이 두 차원의 불안정한 소통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동 속에서 나는 죽음의 강력한 자장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정말이지 내 뒤통수에 바싹 죽음의 손아귀가 다가와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 검은 머리카락이 이미 죽음에 물들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떼어 낼 수 없는 나의 캄캄한 머리카락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이것이 한밤중의 소란 속에서 내가 한 유일한 말, 외침이었다. 나는 얼마만큼 도망칠 수 있었을까. 한밤 중에 맨발로 골목을 내달리던 소녀는 어디서 스르르 멈추었을까
나의 뜨거운 몸을 찾았던 그 꿈들은 어째서 그토록 아름다웠을까. 어떻게 하여 나는 그 꿈들을 잃어
버리게 되었을까
김행숙, <<에로스와 아우라>>, 민음사, 2012, 25쪽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느닷없이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려진다. 시인은 "죽음의 강력한 자장"을 느끼고, 그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 하데스의 세계에 대한 최초의 개안은 불가사의한 꿈을 통해 시인에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미지로 기억한다. 아름다움은 그곳에 소멸이 잠재해야만 포착될 수 있다. 잠재된 소멸은 죽음을 엿본 자만이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의 예감이 비로소 물체에 고요히 잠겨있던 아름다움을 눈앞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봐야만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는 원리와 같다. 저승-이승으로의 횡단은 이렇듯 각성의 촉매로서 작용한다
하루에 두 번, 오장육부를 운행하는 협궤 열차가 있다고 말해준 건 상고머리의 여자 귀신이다. 귀신도 사기를 치는가? 그녀와 나는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녀가 말하길
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이야. 난 그때 네가 꼭 죽을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유감없이 탈출했는데, 같이 죽기에는 피차 지겨웠으니깐, 이해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떤 기억이 이런 식으로 복구된다니! 그녀에게 철썩, 붙어서 도망친 파도들이 막 밀려올 때, 괜찮다고 괜찮다고 나는 누구를 향해서 웅얼대는 것일까?
기차가....기차가....기차가....기차가....푸른 새벽에....
어쩌면 정말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십 년 사이에 나는 아무것이나 용서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말하길,
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인데, 거울아, 거울아, 앞만 보면 세상은 화려강산이니? 거울집은 칠흑인데, 나의 외도가 너를 살렸니? 문득, 뒤돌아 서서 뭔가 보아야 할 게 있다고
아, 길을 놓쳤다고 느낄 때, 너는 뭐 했니? 하루에
두 번, 오장육부를 통과하는 협궤 열차를 놓치고 너는 엑스레이만 찍었니? 그냥 싸르르 지나가는 복통이었니? 나는 정말 없었니?
⁃<귀신이야기1> 전문, 22 ~23쪽
귀신은 육체가 죽고, 정신만이 남은 영체이다. 하데스의 세계에 기거하면서도 지상에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사춘기를 통해 죽음을 엿보고 이승에 머무는 '나'와 정반대이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귀신은 '나'에게 "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이라고 말한다. 귀신이 거울을 볼 때, 상에 비친 나' 역시 거울을 본다. 귀신이 거울을 십년 만에 들여다봤다면, 나 역시 십년 만에 거울을 들여다봐야 하는 셈이다. 그래서 '나'의 거울을 향한 응시는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이 된다. 또한, 이는 사춘기에 "죽음의 손아귀"를 감각하는 상황과 일치한다. 귀신은 거울에 대고 묻는다. 죽음이 생략된 세계는 화려강산이냐고 어둠으로 덮인 거울집에 비친 상에서 빛나는 부분만.쫓아다녔냐고. 뭐가 그리 아름답냐고. 하루에 두 번 귀신을 태운 협궤열차는 복통으로 '나'에게 존재를 알린다. 한때의 지독한 사춘기로 남은 복통이 지나가고, 귀신은 새삼 삶의 대극점을 지난 존재가 보이지 않았냐고, 정말 그때의 복통은 복통으로 끝났냐고 묻는다.
사춘기의 지속성을 강조하던 시인은 한때의 통증이
미래에도 물음표이자, 느낌표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때의 통증은 느낌표로 남는다. 그리고 귀신의 물음은 물음표로 '나'에게 남는다. 미래는 그렇게 의문과 통증의 뒤섞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순환시키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여기서 섬뜩한 의문 하나가 남는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나'의 다음은 있을까. 순환의 고리에서 나'는 어느 지점에서 튕겨져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승과 저승을 횡단하고 온 귀신이 대답한다. 당신들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전향은 정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는 다음은 다음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은 다음처럼 조용하군요. 그렇게, 죽은 다음으로 건너가겠다고 당신은 문득 멈추었군요. 당신의 그림자가 천천히 당신을 회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보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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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인간은 시간이 많지 않아요
- <귀신이야기6> 부분, 68~69쪽
귀신은 "당신의 전향"이 육체적인 분야에 속해 있음을 경고한다. 정신적인 전향인 사춘기가 아니라는것,
육체적인 전향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물질계의 장르이다. 육체의 종말에는 다음이 없다. 고로 육체의 다음은 다음이 아니다. 사고 직전의 버스 안에서 '당신'이 회전하듯, 생성과 소멸의 순환에서 모든 생명체는 돌이킬 수 없는 회전을 반복한다. 마지막에는 개인이 육체의 종말에 다다르지만, 이 모든 순환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은 "보지 못한 것"이 많다.
시인의 작품 속에서 귀신은 순환의 바깥에서 순환을
가리키는 타자들이다. 그들의 손끝에서 순환은 자신들의 회전 속에서 당신을 튕겨낼 준비를 하고 있다. 육체의 다음은 없고, 정신의 다음도 없다. 오직 경계의 주민인 귀신만이 순환의 공포에서 자유롭다. 그렇다면 귀신은 사춘기를 영속적으로 겪고 있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이 거울로 비춰보는 상이 찰나의 악몽으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사춘기는 우리의 일생 중 일부를 저승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온 페르세포네는 데메테르를 만나 홈백 꽃향기에 취했을 것이다.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생명의 경탄 속에서 페르세포네는 아주 잠시 행복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지하로 내려간 페르세포네는 더 이상 지하로 돌아갈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화려강산"이었던 지상은 거짓된 빛깔을 드러내고, 데메테르는 행복한 미소뒤에 딸과의 이별을 아프게 떠올린다. 페르세포네는 지하의 석류를 먹은 시점에서 이전의 소녀가 아니게 되었다. 사춘기가 그렇다. 당신이 그렇게 되었다. 귀신의 손가락 끝에서, 순환 속에서
2. 소녀는 마침내 여인이 되고 : 사랑
지상과 지하를 횡단하는 건 페르세포네의 특권이자,
저주였다. 그러나 페르세포네가 유일하게 지하를 엿보고 돌아온 신인 것은 아니었다. 오르페우스는 제 발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는 독사가 앗아간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살리기 위해 리라를 켜며 구슬픈 음색으로 노래를 부른다. 간절히 사랑했으나 애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슬픔이 페르세포네를 움직였을까. 페르세포네는 눈물을 흘리며 하데스에게 이번만 지하에서의 금기를 범해달라고 간청한다. 죽은 사람을 지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사랑을 위해 순리의 역행을 결단할 줄 알았다. 혹자는 오르페우스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이 성취한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이별과 만남의 굴레를 맨몸으로 감당한 페르세포네가 아니고서야 누가 하데스에게 위반을 권할 수 있었겠는가. 페르세포네는 지상에서든 지하에서든 이별과 만남을 동시 다발적으로 겪는다. 죽음과 삶이 반복되고, 환희와 절망이 뒤섞이는 와중에 소녀는 얼마나 오래, 사랑에 시달려야만 했을까
페르세포네의 사랑은 하데스가 그녀를 지하로 납치하는 순간에 촉발된다. 죽음은 차갑고 메마른 낫으로 '나'와 타자 사이를 갈라 서로의 마지막을 불안 속에서 그리도록 만들었다. 데메테르의 대지는 딸을 만나는 날 환희로 피어오르고, 헤어짐으로써 죽음에 잠긴다.
사랑은 죽음이 담보되어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에 들어서고 나서야 누군가의 여인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지상은 사랑을 세계 위에 기거하게 만들고, 죽음은 사랑을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사춘기는 그렇게 사랑을 기능시킨다.
소년이 손을 열어 보여준 건 칼이었다. 분홍색 손바닥 위로 슬몇 피가 비쳤다. "연필이나 깎지 그러니?" 소녀는 분명히 비웃었다. 소녀는 뚫어지게 소년을 응시했다
여자애에게 위로를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여자애가 무서웠다. 소년은 소녀의 집에 놀러 가보지 못했다. 소년도 소녀를 초대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해수욕장의 모래밭에 누워 있는 소녀와
볼록한 가슴에 얹어주는 뜨거운 모래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생일 파티 같은 것은 부유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진 않겠지?" 소녀는 똑똑하다.
소년은 히, 웃으며 천천히 손을 오무렸다. 손가락과 함께 칼이 사라져갔다
- <칼 : 사춘기3> 전문 ,81쪽
소년은 소녀에게만 보이도록 손을 열어 칼을 보여준다. 그 칼로 누구를 찌르기 위함인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소년과 소녀 어느 누구도 아직 하데스처럼 타인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본 적이 없다. 소년은 맹세하듯 칼을 손에 쥐고, 피가 슬몇 비치고, 소녀는 소년에게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사랑의 맹세는 죽음을 입회자로 두어야만 설득력을 갖는다. 너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부족하게나마 칼로 피를 내어 보여줘야만 한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죽음만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만이 사랑의 빈틈을 보완한다.
빈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사랑의 빈틈은 타자성에서 온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죽음을 나눠갖지 않고서는 그 틈새를 메울 수 없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린다. 찔끔, 눈물이 난다
처음 가시를 발견하고 그는 열다섯 살 소년처럼 몸을 뚫고 나오는 털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으로 소년은 털이 집중적으로 자라는 부위를 만지곤했다. 그렇지만 그는 열다섯살 소년이 아니고
가시는 부드럽게 쓸리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찔러요, 여자가 했던 말은 감각적인 것이었다. 빼야 할 건 가시겠지만
그는 여자를 빼고 눕는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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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빠져나갔다. 여자는 그를 빼고 눕고 그는 여자
를 빼고 눕는다. 누가 날 좀 뽑아줘, 누워서 소리치
기도 하지만
그건 분명 헛소리다. 그는 다시 오늘 아침에도 가시
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린다
⁃ <가시> 부분, 86 ~ 87쪽
사랑의 빈틈은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야기한다.
상대를 죽지 않을 수준으로 아프게 하는 것. 칼은 사랑을 완성하지만, 가시는 사랑을 지속시킨다. 가시는 상대를 찌르고, 상대와 나의 타자성을 강화시킨다. 그는 여자를 위해 가시를 빼야했지만, "여자를 빼"고 누워 버린다. 이후 가시는 그 자체가 된다. 나와 너의 다름이 일부에서 본질로 들어서는 것이다.
가시와 칼 사이 어딘가에 사랑이 위태롭게 서 있다. 에우리디케는 독사에게 물리면서 오르페우스를 영원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럼 독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랑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남몰래 "가시를 부러뜨리며 눈물을 흘"리면 되는가. 시인은 가시가 밀어내며 확보한 공간(대기)에서 타인의 아우라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사랑의 작용은 타인의 아우라를 발견하고 지각하여 이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릴케가 로댕의 사물들로부터 느꼈듯이, 타인의 아우라를 발견하고 지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향하여 나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을 사랑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로스의 눈빛, 에로스의 살결 속에서 아우라는 상호적이고 접촉적인 것이 된다
김행숙, 앞의 책, 17쪽
가시에서 비롯된 사랑의 지속성은 그 자체로 사랑의
작용을 현현시키며,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그렇게 "아우라는 에로스를 부르고, 에로스는 아우라에 깃든"다. 칼끝으로 완성된 사랑은 완벽하나, 공허한 울림만을 갖는다. 반면에 가시로 지속되는 사랑은 비명과 눈물로 가득하지만, 공명의 영역을 열어놓음으로써 가려진 뒷면의 심층을 드러내보인다. 너를 완결시키지 않고 지속시키는 것, 떨리고 뒤척이고 흔들리면서 공명의 여지를 남겨두고, 당신의 여지를 탐색하는 것. 그것으로도 사랑은 깊고 넓어질 수 있다.
오늘밤에도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에도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들 소녀들 오늘밤에도 총총하다
낮에 소년과 소녀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아이스크림은 햇빛에 녹지 않고, 오늘밤은 아이스크림 같아서 달콤하다. 딸기 시럽같이 성수대교를 흘러가는 자동차들은 어디서 어디서 스르르 녹겠지.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년은 전화를 한다. 난 달리지 않을 거야.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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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몇 초에 대해 오늘밤에도 명상하는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도 쉽게 깊어진다. 우리는 어디서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 항상 오늘밤이 아주 달콤해지지. 딸기 시럽같이 성수대교를 흘러가는 자동차들은 어디서, 어디서, 스르르 녹겠지
⁃ <오늘밤에도> 부분, 78쪽
소년과 소녀는 만나지 않는다. 전화를 하는 시간 동안, 소년과 소녀는 만나지 않았지만,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느낌을 받는다. 소년은 사랑의 예감에 불길해하며 "난 달리지 않을" 것이며,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불안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달콤하다. 전화를 통해 형성된 거리감은 상대에게 신비에 싸인 아우라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우라는 에로스를 불러일으킨다. 밤은 깊어지고, 소년과 소녀는 "딸기시럽 같이",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완결되지 않은, 불안한 사랑은 이처럼 떨림과 흔들림을 가져오며 또한 감동과 황홀함을 만끽하게 한다.
페르세포네는 대지를 떠나보고서야 이 땅에 겨울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소녀는 여인이 되고, 저승에서의 금기를 위반한다. 조르주 바타유는 금기의 위반이야말로 에로티즘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이에 따른다면 눈물 젖은 눈으로 하데스를 올려다보며 금기의 위반을 종용한 페르세포네는 얼마나 매혹적인 여인이었는가. 그 눈물에 하데스는 얼마간 황홀했을 것이고, 또한 무력하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말해질 수 없는 비밀 : 코레
아감벤은 그리스어 코레가 정확한 연령을 언급하는 용어가 아니며, 생명력을 의미하는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은 동물과 식물을 자라게 하는 추동력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코레는 소녀일 수 있지만
늙은 여인이 될 수도 있으며, 근원적이라는 측면에서
자웅동체적인 특성을 지닐 수 있다. 코레는 그 자체로
말해질 수 없는 만큼 나이와 성 정체성,가족 및 사회적 외관에 따라 정의될 수 없다. 코레의 납치와 데메테르의 유랑을 다룬 엘레우시스 비의는 눈과 입을 닫아야만 참가할 수 있으며, 비의의 초입에서 전례관은 침묵을 명한다.
(엘레우시스 비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종교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세기 때의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엘레우시스 비의에 참가한 뒤, "인간은 이 의식을 통해 야만적인 존재를 벗어나 교화되고 정화되어 문명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희망을 품고 죽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정작 엘레우시스 비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의식에 대한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다.)
(..) 침묵의 요점은 비입회자들이 모르도록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입회자들 자신을 위해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알 수 없는 것', 혹은 적어도 '담론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과 느낀 것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자제하도록 권유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조르주 아감벤, 앞의 책, 28쪽
바깥으로 개방되지 않은 내밀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즐겁고 비타협적인 충만함을 선사한다. 다시 돌아가,
페르세포네의 납치와 귀환, 데메테르의 유랑을 다룬
엘레우시스 비의는 말해질 수 없음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비의의 대략적인 진행은 알려졌지만, 그 안에서 입회자들이 공유하는 충만함, 내밀함, 신성을 목도하는 경험은 철저한 비밀로서, 또한,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로서 비밀이 지켜진다. 코레는 말해질 수 없다.
그 자체로 근원이기 때문이다. 근원은 언어 이전의 세계에 존재하고, 언어는 지나간 것들 중 의식할 수 있는 것들만 추려서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비의에서 입회자들이 근원을 일부 목도하는 것과 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의 중 크뤼케를 먹었다는 정도뿐이었다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과거 중 어떤 부분은 말해질 수 없다. 우리는 코레가 지하로 납치되었다는 것, 하데스가 그녀와 데메테르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코레가 석류알을 조금 먹어 영원히 지하와 지상을 오가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코레를 모른다. 우리는 코레의 겉을 더듬을뿐이다. 지상에서의 코레는 지하의 여왕에서의 코레와 다르고
지하에서의 여왕은 대지의 딸로서 왕좌에 앉지 않는
다. 하데스도 모르고, 데메테르도 모르는 중심이 코레
안에 고요히 잠겨있다. 그게 무엇인지, 누구도 모른
다. 그것은 함부로 누설될 수 없다
어린 시절....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있는 그곳, 그 곳은 누구에게나 비밀의 구멍을 남긴다. 진정한 비밀의 면모는 (누군가 알고 있지만) 누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지 못하며, 어쩌면 알았던 것이지만 언어의 세계로는 떠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한없이 다가가지만 닿지 않는 것, 명백해지지 않는 것, 환해지지 않는 것,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의 완성은 감추기 위한 장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밝히고자 하는 하염없는 시도들의 실패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밀에의 열정은 그래서 진리에의 열정과 구조적으로 닮은꼴이다
김행숙, 앞의 책, 23쪽
시인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있는 그곳", "비밀의 구멍을 남"기는 곳이라고 묘사한다. 비밀의 구멍, 실제와 환상이 뒤섞여 있는 그곳에 닿기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언어를 닦는 일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감춰져 있는 것들을 밝히기 위해 하염없이 시를 쓴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시도는 실패가 예견되어 있으며, 비밀에의 열정은 과정 속에서나마 의미를 얻는다
고백건대, 내게서 뚝 떨어진 곳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번개에 대해
번개 양편의 구름에 대해 나는 올려다보는 자이다
이때 내가 맞은 비의 굵기에 대해
잘 말할 수 없다. 나는 편향된 자이기 때문이다. 번개에 대해
뚝 떨어진 곳에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다치지 않는다. 구름은 구름의 규칙이 있다
나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겠다
⁃ <번개에 대해> 전문, 97쪽
화자는 번개를 맞아본 적"이 없다. 때문에 화자는 번개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에 대해, 섬광에 대해 "올려다 보는 자"로서 말할 수만 있다. 번개를 품은 구름에게는 "구름의 규칙"이 있다. 화자는 그 규칙을 알 수 없다. 그러니 화자에게는 올려다보는 자로서, 자신만의 규칙을 자립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서 구현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섬광이 나를 비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영영 구름이 될 수 없다는 이격된 거리감이 화자에게 물리적, 생득적 한계를 짓는다. "잘 말할 수 없"는 건.언어가 가진 한계이면서, 시인의 한계이다. 번개는 물론이고, 번개를 품은 구름에 대해서도 시인은 누설할 수 없다. 시인은 "나는 편향된 자"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위치가 갖는 한계를 고백한다
이 한계의 포착에서 시인의 시쓰기는 일련의 틀과 무관한 저 사춘기적 '경계'에 머문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실패를 염두하고 시를 쓰는 것과, 번개를 모르고도 번개를 수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은 사춘기의 시간을 조준하여 불안정한 감정, 흔들리는 자아에 초점을 맞춘다. 사춘기에 대해서라면, 시인은 죽음과, 사랑의 열병과,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춘기 그 자체에 대해서, 근원에 대해서 발설할 수 없다.
그가 눈꺼풀을 쓸어 덮어줄 때 나는 눈꺼풀 속에 또 다른 눈꺼풀이 찰칵,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눈꺼풀 바깥에 그가 있고
눈꺼풀과 눈꺼풀 사이에 그가 있고
눈꺼풀 안에 그가 있다. 나는 동시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눈꺼풀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세수를 했다. 그는 냉정했지만 눈은 녹아 그의 얼굴에서 물이 되었다. 얼굴에 얼룩진 검은 물이 그가 더러웠음을 말해주었다
너는 정말 눈꺼풀을 닫은 여자니? 눈꺼풀 바깥에서 그가 물었다
눈꺼풀 속에 또 다른 눈꺼풀이 감길 때 눈꺼풀과 눈꺼풀 사이는 그의 독방이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그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눈꺼풀에 머리를 박았다
제발 눈을 떠. 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정말 현실은 눈동자 바깥에 있을까?
너무 깊이 들어왔구나. 여기서 언제 우리가 만난적 있니? 나는 주인같이 말했지만 그가 골 속을 유령처럼 흘러다닐 때 나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어야 했을까? 그는 너무 오래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 바깥에 내가 있고
눈꺼풀과 눈꺼풀 사이에 내가 있고
눈꺼풀 안에 내가 있다
⁃ <눈꺼풀 속에 눈꺼풀이 감길 때> 전문, 61~ 62쪽
머리와 의식을 통한 '앎'은 감각의 뒤에 온다. 우리는
감각을 감각할 수 없다. 감각을 읽을 따름이다. 가령
눈이 본 섬광은 우리가 섬광'이라고부르는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 말하자면, 감각의 눈꺼풀과 의식의
"눈꺼풀 사이의 독방"에 갇혀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정말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화자는 눈꺼풀의 독방에서 눈꺼풀에 머리를
박는다. 정말 현실은 눈동자 바깥에 있을까? 현실의
바깥에서 온 유령이 우리에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경고할 때, 감각의 눈꺼풀이 찰칵 닫히려는 찰나,
의식은 눈을 감고 있기 일쑤이다. 시인은 세계를 흔들며, 자신은 귀신이 비쳐본 거울이라고, 눈꺼풀 안에 자신이 있다고, 이 모든 것들을 말해질 수 없음을 누설한다.
그러나 기지의 '앎'을 폐기하고서라도 '감각'(이를테면 '눈')을 좇아가는 시적 모험이 있습니다. 문학적인 행위는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질문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큽니다. 현실은 언제나 현실 이상입니다. 착시 속에서, 거울들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현실이 불쑥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착시도 거울도 아닌 현실의 맨살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거대한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끝끝내 의문을 남겨 두는 것, 질문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 문학적인 대답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행숙, 같은 책, 42쪽
사춘기가 경계의 시간에 깜빡거림이고, 우리가 그 경계의 주민이라면 시인의 목적은 간단하게 말해 '개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통해 "제발 눈을 떠"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에는 실패를 염두에 두고 과정에 의의를 둔 공허한 미학적 움직임이라고 읽힐 여지가 남는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투쟁이었을 수도 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 위한, 너의 눈빛을 피하지 않기 위한" 투쟁.
코레는 지하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지상으로 올라간다. 오르페우스가 지하의 금기에 맞서 하데스와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다시금 투쟁에 발을 담근다.
하데스를 설득하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갈 기회를 준다. 이 신화 속에서 코레는 이
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눈을 부릅뜨고 투쟁하는 자들의 편에 서겠노라고. 그러니 투쟁하는 자들은 누설을 삼가하고 우리의 비밀스러운 연대를 지켜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감각의 눈꺼풀을 반쯤 닫고, 신비하고 내밀한 경계의 시간 속에서 혁명을 도모한다. 우리의 곁에 서서
4. 마치며 : 사춘기 소년들 둥글게 서자
앞서 본고는 페르세포네 신화와 연계하여 김행숙의
사춘기가 갖는 의미를 고찰했다. 그럼에도 사춘기는 다 말해지지 못했다. 이 장황한 실패에 시인과 그녀의 작품이 함께 걸어준 것 같아 외롭진 않았다. 수확이 있다면 시인에게 사춘기는 불안과 공포의 시간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는 우리를 경계로 데려가 처음으로 감각의 눈꺼풀을 열어주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의식의 독방에서 작지만 찬란한 창 하나를 내주는 것이다. 나는 시인의 길에 말해질 수 없는 여신이 비밀스럽게 동행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