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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담에서는 염성순 작가의 털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선보인다. 이전 작업에서 보여주는 세포분열과도 같은 작업의 일련의 시리즈로써 작가는 문명사회에서 감추어진 털을 다시금 끄집어 내고 있다. 여기서 <털>은 우리의 감춰진 욕망, 가시화될 수 있는 욕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피부를 뚫고 나와서 여기저기로 번져나가는 털의 모습에서 억압 속에 감춰진 몸의 욕망과 그 생명성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염성순 작가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미술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였으며 이번 전시가 열 두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쓸쓸한 남자>, <꽃 숲>, <엉덩이>를 비롯하여 15여 점의 신작이 발표될 예정이다.
염성순의 그림은 언제나 발생하는 배아(embryogenesis)와 세포의 분화과정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풍부하다. 모체로서 암시되는 바탕 위에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조직들과 기관들이 똬리를 틀고 있곤 한다. 거기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형태와 색채의 향연이 있다. 최종 작품은 어떤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결정되지만, 여기에서 미리 확정되어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염성순에게 오직 캔버스 위에서만 성공적으로 출현하는 새로운 형질은 시간과의 고단한 싸움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전리품이라고 할만하다. 몸, 또는 작품은 단번에 확실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계열들을 따라 펼쳐지며, 그 특성을 점진적으로 구조화한다. 이러한 예술적 과정은 생명의 발생과 성장, 퇴화와 진화 등에도 존재한다. 염성순의 작품을 10년 넘게 봐왔지만, 그것은 그녀의 몸에서 꺼낸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그것은 맹목이라기보다는 피해갈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몸에 주목하는 순간 이성의 위상은 상대화된다.
현대인의 분석적, 물신적 시선은 정지 화면에 익숙해 있지만, 예술가는 전이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보다 많은 잠재적 사건들에 주목한다. ‘털(hair)’(전시부제)은 잠재성과 현실성 사이의 접면에 있는 최전선의 촉수들이다. 그 촉수들에는 활발한 생물리학적 과정이 일어난다. 그것은 오직 변화를 위한 정체성만을 가진다. 그래서 생명력이 집중된 첨단은 취약하다. 인간만이 가진 털인 머리털을 제외한 체모(hair)는 피부의 변형으로, 변화무쌍하게 이동하면서 심층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전달하는 표면적 징후이다. 그러나 털은 있어야 될 곳과 때를 곧잘 벗어남으로 인해 이물감을 준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기성의 구조를 보다 확실하게 해주듯이, 털은 개체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생겨나는 과정을 매개한다. 염성순의 작품에서 몸의 표면에 두루 분포하는 털은 특정한 해부학적 대상이기 보다는 삶과 죽음, 욕망과 상실, 공포와 희열 등을 두루 함축하는 기관이다.
털은 일종의 제유법인데,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이 방식에서 털은 얼굴, 손, 심장, 성기 등등의 기관에 비해 어떤 강력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경계 위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애매한 것이다. 앎을 통한 소유와 지배를 위해 이성은 애매한 것을 제멋대로 분류한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체모는 감추어지지만, 그것은 사라졌다기 보다는 매끈하게 다듬어져 사물로 이전되는 경향이 있다. 전자매체 시대의 사물은 유혹적인 피부를 갖춘다. 반면 인간은 보다 무감각한 대상으로 환원된다. 몸은 그 실재성을 잃고 코드로 더욱 잘게 쪼개지고 이런저런 필요에 부응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가들은 잃어버린 실재 찾기에 더욱 애쓴다. 염성순의 작품에서 털로 응축된 몸은 모든 것이 허구라고 외치는 관념론자와 몸을 도구화하는 현실주의자에 맞서,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의 구체적인 예로 호출되었다. 작가는 무감각해진 피부의 각질을 벗겨내고 표면을 갱신하려 한다. 피부(표면)의 확장으로서의 털은 가장 민감한 접경지대에 있다. 이 접경지대에서는 하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경계가 아니라, 구별되는 것(차이) 간의 관계가 중시된다.
몸은 욕망을 담고 있는 수동적인 그릇이 아니라, 뫼비우스 띠처럼 욕망과 한 면이 되어 요동친다. 털은 여기저기 분포하고 뜬금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며, 그 원천과 출구 또한 불확실한 이면적 실체(욕망)의 표면이다. 몸을 바탕으로 하지만, 명확한 해부학과 무관한 염성순의 작품에서 심층과 표면의 이원적 구별은 사라진다. 다만, 털이라는 전시부제는 표면, 정확히는 심층적 표면에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털’이라는 명시적 부제를 통해 작가는 보다 구체적인 차원으로 이동한다. 구체는 추상보다 더 고양된 상태이다. 여기에서 구체란 나뉘어진 전체의 일부를 하나씩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변화하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향해 의식적으로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 늘 전체적으로 다시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른 채 변화한다. 변화를 향한 오랜 모색 끝에 감지된, ‘이것’으로 추정되는 직관은 확실한 펼쳐짐을 향한다.
이 잠재적 에너지가 일상적 현실 속에서 소모되지 않고 고여 있을수록 더욱 강력하게, 더욱 멀리, 더욱 넓게, 더욱 치밀하게 펼쳐질 수 있다.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털]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터져 나가는 힘으로 가시화된 촉수들이 보인다. 안쪽에는 생기다 만 것들이 꼬물거린다. 안쪽에 움푹 파인 구덩이들은 빠져나간 만큼 비워진 무엇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허해 보이지만, 또 다른 것들이 흘러 들어 채워질 것이다. 개체 역시 털이 나오듯이 모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어떤 경계를 뚫고 나온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인 [털이 좋아]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개체의 몸짓이 있다. 그러나 개체는 제목처럼 털 속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밖을 두려워한다. 이미 밖으로 빠져 나온 발은 공포스러운 붉은 색으로 변해있다. 배아, 또는 모태의 실루엣을 가진 형태 안의 개체는 이미 무정형의 액체 상태를 지나와 기관들이 자기 자리를 잡고 뽀얀 털 속에 감싸여 있는 단계이지만 임박한 탄생을 두려워한다.
정상이 아닌 손과 팔, 땡깡을 부리는 듯한 표정이 그것을 나타낸다. 탄생에 대한 두려움은 아이의 얼굴을 노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체 속의 유기체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시점에 도달했지만 공간적 배치는 불연속적이다. 인간/동물, 정상/비정상 등의 범주에 혼돈이 있으며, 애늙은이의 얼굴에선 시간의 흐름마저 제각각인 듯하다. 깨어남을 두려워하는 얼굴은 무한한 잠재성이 아니라, 이미 볼 짱 다 본 것 같은 노회한 모습이다. 모태 속에서의 시간의 압축적 가속화는 이미 바깥 인생의 고통스러움을 인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개체는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되고, 남자 또는 여자가 된다. 인간이라는 말도 그렇듯이, 남자/여자라는 용어가 나오는 순간, 현실을 지탱하는 가장 효율적 질서인 이원적 대립이 선명해진다. 그러나 기성의 상징적 우주에 태어날 뿐인 인간은 우선 그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명확한 본질이나 존재가 아닌, 변형이나 생성은 가치가 있다.
그것이 기성 사회가 스스로를 갱신하기 위하여 예술에게 부과한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과학자나 정치가처럼 명확한 답을 내리는 이가 아니라, 철학자처럼 문제를 문제로서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이에 속한다. 효과적으로 제기된 문제에는 이미 답이 잠재해 있다. 특히 예술은 강도를 통해서 그러한 과제를 수행한다. 마누엘 데란다의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 의하면 강도의 가장 좋은 예는 온도, 압력, 속도, 화학적 농도들이다. 이 차이들은 결정체의 형태발생(morphogenesis)이나 동식물의 형태발생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염성순의 그림에 생멸하는 몸에도 강도적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몸은 다양한 강도가 주파되는 장이다. 쾌락 역시 강도와 관련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생물리학적 삶은 강도상의 차이들이 자극의 형태로 여기저기에 분포되어 있는 개별화의 장을 함축한다. 이러한 차이들이 해소되는 양적이고 질적인 과정이 쾌락’이라고 말한다.
작품 [몸]은 검은 피부의 건장한 신체에 피톨과 신경이 퍼져있고, 뭉쳐진 에너지를 발산하려는 덩어리가 솟아 있다. 작품 [엉덩이]에는 허리뼈와 신경계가 집중되어 있는 민감한 신체 부위를 초상화처럼 펼쳐 놓는다. 한쪽으로만 쏠린 밀도는 이완이 아닌 긴장 상태임을 알려준다. 흔히 ‘엉덩이가 들썩거린다’는 말은 이미 어떤 사건이 전개되었음을 뜻한다. 작가는 엉덩이를 인간의 진정한 뒤통수로 본다. 가면을 쓴 얼굴은 숨길 수 있지만 엉덩이는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엉덩이를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꽁꽁 숨겨놓는다. [엉덩이]에는 쏠린 중심으로부터 발산하는 선들이 있다. 연기처럼 확산하는 선들에는 꽉 조여져 있던 것이 풀려 나오는 쾌감이 있다. 연기처럼 잡히지 않고 사라진다는 점이 그 매력을 더욱 강력하게 한다. 작품 [몸]과 [엉덩이]는 남녀의 구별이 확실치 않지만, 제목이나 해부학적 기관을 통해 남/녀를 알아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프로이트로 대변되는 정신분석에서 욕망은 늘 남성의 욕망이었기에 욕망을 특화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특화는 어떤 유형의 재생산(재현)과는 거리가 멀다.
염성순은 하나의 욕망이 아니라, 작품 [숲]이나 [꽃 숲]에서 가시화하듯이 숲 속에서 피고 지는 수많은 꽃처럼 욕망을 그린다. 여성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남성의 성기는 생물학적 욕구나 사회적 욕망에 의해 한없이 부풀어 오르지만 그것은 충족보다는 공허로 귀결된다. 상대 없이 자신의 끓어 넘치는 분노와 슬픔, 고통을 분출하는 [끓는 남자], 포박된 듯한 고통스러운 자세로 절정을 맞이하는 [통증],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욕망의 날개를 가진 [우는 남자], 한껏 부풀어 오른 욕망을 부러진 다리가 상쇄시키는 [쓸쓸한 남자]는 상대편을 보다 단순화시킬 수 있는, 또는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이점을 살려 (남성적)욕망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크고 작은 캔버스들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거리낌 없이 그려진다. 한편 [숲]으로 가시화된 여성적 성은 보다 풍요롭다. 거세 또는 결여로만 간주되었던 여성적 성은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나타나며, 그 자체로 충만하다. 부족함을 그 반대로 전화시키는 전략이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그러했다.
다른 동물 보다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사회적 협동을 통해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겉으로의 강인함과 달리 유전적으로 여성(XX)에 비해 취약한 남성(XY)은 가부장제라는 상징적 질서를 통해서 지배적 권력을 유지해 왔다. 마찬가지로 소수자로서의 예술은 다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일방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은폐되어 있던 여성적 욕망은 수많은 색과 형태, 그리고 이야기로 피어난다. 털같이 그려놓은,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원초적 숲은 두려움을 주고 때로는 정복되어 착취되기도 하지만, 자연과 보다 가까운 존재로 간주되어 왔던 여성이 표현한 자연은 독특하다. 여성은 예술에 꼭 필요한 이질성과 야생성에 친숙하다. 물론 그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양/질 전화의 순간을 겪어 낸 극소수 여성 예술가들에게서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은 현실성이 된다. 염성순 작품에는 현실성과 잠재성의 역동적 관계가 있다.
이 관계의 탐색은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의 주제였다. 마누엘 데란다의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은 그 주체를 특화한 것이다. 그는 들뢰즈와 더불어 객관세계의 생기적(vital) 요소를 형성하는 실재적 잠재성(real virtuality)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실재적인 것(the real)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the actual)에 대립한다’고 말한다. 염성순의 이번 작품은 그 어느 전시보다도 구체적이고 직설적이지만, 그것은 현실주의(actualism)가 아니다. 작가는 몸이라는 실재를 중시하지만, 그것이 발현된 현실의 역사는 우발적으로 실현되는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생명이 분화하는 과정처럼,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이다. 그것은 실재의 새로운 차원으로서 잠재적인 것들을 정당하게 도입하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작업이 수행되어야할 과제들, 혹은 해결되어야할 문제들이다. 염성순에게 작업이란 ‘하나의 문제가 점진적으로 특화(specify)해 가는 방식’(마누엘 데란다)이라는 점에서, 생명 발생의 과정과 다를 바 없다.
끓는 남자 116x91cm 캔버스에 유채 2014
숲 73x53cm 캔버스에 유채 2014
염성순 Youm SungSoon 廉成順
1961년
학력
1998 프랑스 베르사이유 미술대학교 수학
개인전 (최근년도 순)
2014 털 [hair] - 심층적 표면에서 생긴 일 (갤러리 담)
2013 감옥에서 보낸 한 철 (프로젝트 B 갤러리, 대구)
2011 심연의 꿈 (아트스페이스 펄, 대구)
2010 하얀사과 파란사과 하얀불꽃 (갤러리 이레)
2008 시와 몸과 그림 (갤러리 눈)
2005 쿠마의무녀 (김재선갤러리, 부산)
2003 나의심장 나의모래 II (조선화랑)
2001 나의심장 나의모래 I (관훈갤러리)
1999 도원행 桃園行 (금호미술관)
1996 사람이 떠난다 (이공갤러리)
1994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녹색갤러리)
1994 밤-어둠, 꿈, 신화, 적요 (경인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