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삼존불이 있는 곳의 망월사
꽃이 활짝 피어난 봄날인데도 하늘은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중국에서 황사가 떼지어 몰려온다는 날씨 예보였다.
경주로 가는 버스의 차창 밖은 가까운 단석산도 옅은 안개에 파묻혀서 모습이 흐릿하다. 봄날치고는 매우 좋지 않다. 때때로나마 햇빛이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비는 오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산을 오르지 않고, 찾아가기 쉬운 산자락의 절을 선택했다.
배리 삼존불이 계시는 곳에 삼불사와 망월사가 있다. 예전에 삼존불 답사를 다닐 때도 그 절이 있었지만, 삼존불의 명성에 가리어져 있었다. 우리는 신라 문화 답사를 다니는데, 현대인들이 지은 절이라 생각되어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그 절을 찾기로 했다. 절은 문화 유산과는 무관한 종교 성지가 아닌가. 오래 된 절이면 어떠하고, 역사가 일천한 절이면 어떠하랴. 나의 108사 답사에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달지 않기로 하지 않았는가. 더더군다나 나는 불자도 아니잖은가.
배리 삼존불은 답사로 열 번도 더 찾아간 곳이다. 우리나라에 몇 분 밖에 없는 삼국시대의 석조 부처님이어서 이다. 둥글 넓적한 얼굴은 한국사람 얼굴이고, 미소띈 온화한 얼굴은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협시보살까지 거느리고 계시어서 삼존불이라고 한다. 그때는 삼국시대의 부처님을 뵈옵는 것이 목적이어서, 절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도 물이 흐르는 개울 너머에 절집의 기와담장이 내 눈을 끌었다. 망월사이다. 흘깃 바라만 보았지 들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몇 걸음만 걸으면 삼존불이 나온다.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는 삼불사와 망월사의 안내판이 서 있다. 삼불사는 주차장에서 계단으로 바로 오를 수 있어서 삼불사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계단으로 몇 걸음만 오르니 절 마당이고, 대웅전이다. 절 마당의 끝에는 삼존불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런데, 절이 너무 초라하다. 대웅전의 문도 닫혀 있고, 요사체도 보이지 않는다. 절 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대웅전에 들릴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삼존불을 뵈러 갔다.
예전에 답사를 다닐 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한산하다. 썩 좋은 날씨는 아니더라도 꽃이 만개하는 사월이고, 답사철로는 대목이나 다름없는 일요일이지 않는가. 삼존불상 앞에는 우리 부부와 모자로 보이는 두 분 뿐이다. 삼존불 앞의 길에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많이 지나갔다.
잎이 무성한나무들이 둘러싸여 있고, 풀이 파릇한 땅 위에 그대로 서 계시니 더 자연스럽고 보기가 좋았다. 그후에 집을 지어 집안에 모시고 나니, 오히려 답답해 보였다. 지금도 답답해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은 절집을 찾으려는 것이 목적이니 개울 너머의 망월사에 들리자, 아내도 좋다고 했다. 절 마당도 너르고, 대웅전도 번듯하고, 요사체며, 종무소도 있다. 그런데도 왜 이리 황량하게 느껴질까. 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산골 절의 적막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초파일에 달 연등을 준비하는지 마당에 널려있는 플라스틱 기둥과, 노동복으로 돌아다니는 일꾼의 모습이 절집과는 어울리지 않아 눈에 거슬린다.
집사람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려 법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절문 밖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준비해간 빵을 뜯어 먹었다.
다음 정류소가 포석정이다. 걷기로 했다. 시내버스 정류소이지만 시내와는 거리가 다르다. 꽤 멀다. 시골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서 사니 정류소를 가까이 둘 필요가 없으리라. 포석정은 입장료를 챙기므로 들리지 않고 지나친 일이 많다. 이제는 입장료를 낼 나이를 지났으니,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하루의 운동량을 채우려면 걸음 수를 채워야 한다.
포석정 정류장에는 승룡차가 꽤 많다. 관광버스도 보인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들도 보인다. 매표소에서는 표를 팔지도 않고, 표를 확인하는 사람도 없다. 입장금을 아예 없애버렸나 보다. 하기야 경주에 오면 들려야 할 곳이 많고, 그때마다 입장료를 내면 지출 금액도 상당히 많아진다. 입장료를 없앤 일은 잘한 일이다.
포석정은 왕과 귀족들이 술이나 마시면서 유흥을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견훤이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궁궐(반월성)을 덮쳤는데 경애왕이 이곳에서 한가하게 술자리를 벌리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 이런 사실을 역사라고 가르쳤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경애왕과 신라 귀족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역사라면서 옛날의 우리 지도자는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가르친 사람이 누구일까.
헌강왕 때의 고사에 의하면 이곳은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다. 나라의 존망에 처하자 경애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산신에게 빌고 또 빌지 않았을까. 결국은 산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견훤의 칼날에 목슴을 잃었지만. 내 생각이다. 나는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굳게 믿는다.
관광 온 분에게 부탁하여 우리는 부부 사진을 찍었다. 산골 절집을 찾아 다니다 보면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우리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은 드물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냈다. 너희 부부도 사이좋게 지내라는, 은근히 보내는 암시이기도 하다.
다음 버스 정류소는 나정으로 가는 길의 입구이다. 또 걸었다. 이 길도 시골의 정류소라서 여전히 멀다.
나정은 절집이 아니다. 그런데도 들리기로 한 것은 예전 답사 때의 기억 때문이다. 나정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다. 이웃한 육촌부(양산제)는 육부촌장이 회의를 하였다는 곳으로, 지금은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화백제도의 본거지이다. 굳이 따진다면 절보다는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과 가까운 곳이다.
옛 기억은 언제나 흐릿하지만, 지난날의 답사 때 안쪽의 마을로 들어가서 신라 탑을 만났다. 그곳이 천룡사지라고 하였다. 우리 부부는 절의 터도 많이 찾아 다녔으므로 천룡사 터까지 다녀오자고 했다. 나정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 보니 저쪽 맞은 편의 남산 자락에 탑이 보인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다른 곳에서는 탑이 보이지 않는다.
“저기인가?”
“그런 것 같네.”
아내의 대답이다. 그곳까지는 너무 멀어서 걸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벌써 몇 년 전인가, 오래 전부터 나정은 재발굴을 한다면서 공사 중이었는데, 오늘도 일군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건너편 산자락의 탑이 있는 곳만큼 멀지 않는 마을 안에 절터가 있다고 우겼다. 마을까지만 가 보자면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마을 사람을 만나서 탑과 절터를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저 안은 그냥 마을인데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 온다. 바로 옆에 정자가 있어서 다리도 쉴 겸 올랐다. 준비해간 빵과 커피로 점심을 때웠다. 우리가 정말 점심을 사 먹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해서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면, 그럴 때도 기분이 지금과 같을까. 하늘이 어두워지면 콰당당하는 소리와 번개가 번쩍한다. 소나기라도 쏟아질 기세이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번개는 저 먼 산의 뒤쪽으로 비를 몰고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조금 있으니 하늘이 다시 밝아온다. 간간이 한 두 방울씩 빗방울도 떨어졌지만, 이건 비가 아니다. 집사람과 나는 시내 버스 정류소로 가서 대구로 돌아오기로 했다. 바람이 제법 세찼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 두 방울씩 바람에 날린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뛰다시피 하였다. 지난번에 용장사 터를 찾았다가 비를 만나 혼이 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절집 찾기 보다는 유적지 답사 여행을 한 기분이다. 아무려면 어째, 우리 부부는 어차피 운동삼아 다닌다고 말하지 않는가.
2023.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