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고래 심줄 보다 더 질긴 구원 (롬 8:29-39)
롬 8:29-3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은 참으로 신나는 말씀으로 항해 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모든 말씀이 신나는 일이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를 흥분케 하고 희열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오늘 본문만큼 큰 위로가 되는 말씀도 흔치 않을 것이라 사료 됩니다. 물론 저의 개인 생각입니다 만,,,,
오늘 본문 36절을 보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성도의 운명이 세상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말입니다. 상한 갈대처럼 언제 꺾일지 모르는 신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을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죽는 길이란 말입니다. 미움을 받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36절에서는 도살당할 양 같다고 하시고서는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하십니다.
너희들은 절대로 안 망하니 안심하라고 합니다. 38절에서는 내가 확신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개런티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거하는 갖가지 고난이나 환란은 바울이 다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버젓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확신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이 너희도 능하게 해 주실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고백은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십니다.
야! 정낙원이! 그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너를 붙잡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저 역시 바울과 똑 같은 비중의 길은 걸어오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성격의 길은 걸어 왔습니다. 신앙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자 한 적도 있었고! 실제로 세상에 푹 빠져서 산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부르셔서 지금 이렇게 복음 전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에요. 나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끌려 왔어요. 그러므로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바탕엔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구하심과 하나님의 질기디 질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똑똑하지도 않아요.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많이 배운 것도 없습니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버젓이 하늘에 비밀인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창세전 언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는 고백이 바울의 고백만 아니고 저의 고백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또한 바울처럼 개런티 합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분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장담을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제가 왜? 큰 소리 치는 줄 아세요. 저는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믿는다기보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창세전에 완성이 된 것이란 것을 알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후천적으로 우리가 이루어 가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석(朝夕)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침에는 믿음이 좋다고 하다가도 저녁에는 믿음을 다 팔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조건이나 후천적인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복주고 복 주리라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약속이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약속은 하나님이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지켜 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너는 복에 조상이 될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복에 조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반드시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복에 조상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지켜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지난 2002년도 월드컵 경기를 아실 겁니다. 우리나라가 4강을 했습니다. 축구에 있어서 변방에 불과한 자그마한 나라가 세계 4강을 하였으니까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그래서 케이블 TV에서는 지금도 그 때의 경기들을 재 방송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신이 나요. 땅콩 까먹으면 느긋하게 봅니다. 왜? 그런가요? 다 이긴 경기를 다시 보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긴 경기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아요. 왜냐하면!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처럼 이겼다는 결과를 알고 본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이미 창세전에 완전하고 완성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이미 완료가 된 것을 역사 속에서 회수해 가시는 역(逆) 수순(手順)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창세전을 역순(逆順)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어요. 이는 마치 이미 끝난 경기를 재 방송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우리는 창세전에 완료가 된 구원을 이 세상에서 꺼꾸러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세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창세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하심”은 장차 일어날 사건입니다. 그러니 구원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들어가 있어요.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해 봅시다. 성경을 열면 첫 페이지가 창세기이고 맨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중간에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들어가 있고 신약은 교회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이해하세요. 이게 이해가 되면 엄청난 기쁨을 맛보고 든든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자 보세요. 성경의 시작이 창세기이지요. 창세기 1장 1절 이전에 뭐가 있었나요? 태초(太初)가 있었습니다.
태초(太初)란? 역사가 있기 전을 말해요.
두 태초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있고, 요한복음의 태초가 있어요. 이걸 시간적 태초와 공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태초이고!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는 시간 바깥의 세상인 태초를 말해요. 그러니까 창세기는 시간적(時間的) 태초이지만, 요한복음은 공간적(空間的) 태초를 말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역사 바깥을 묵시라고 합니다. 역사가 있기 전에 묵시가 있었어요. 역사는 시간 속에 있고, 묵시는 시간 바깥에 있어요. 그래서 묵시를 영원 또는 영생의 세계라고 합니다.
영원이나 영생의 세계란? 시간이 없는 세계를 말해요. 시간이 없다는 말은 변화가 없는 완성된 곳이란 말입니다. 이걸 완료 또는 완성, 완전이라고도 해요. 이러한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해요.
역사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영원한 나라 영생의 세계라고 해요. 영생의 나라 즉 영원한 나라를 공간적 태초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공간적 태초”를 묵시 세계라 하고, “시간적 태초”를 역사라고 해요.
그러니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라는 말씀은 공간적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간적 태초에 들어오셔서 일을 하기 시작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성경 이야기에요.
역사(歷史)란? 공간적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일을 하는 곳이에요. 그래서 역사라는 말이 하나님(예수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영어로 “히 스토리(Hi story)” 라고 하지요. 여기서 히(Hi) 는 “그”를 말해요. “그”가 누구인가 하면 역사를 만드신 주인인 예수님이에요.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서 보면 “그”가 나오지요. “그”가 만물을 창조 하였다고 하지요. 만물의 주인이 누구인가요?“그”이지요.
누구를 위해서 창조 했나요? “그”를 위해서에요.
그런데 “그”가 만물 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지요. 만물보다 먼저 계시다는 말은 역사 바깥에 계신 분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만물이 “그” 안에서 선다고 하지요. 이는 만물이 “그”를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물이 뭔가요? 역사에요. 그래서 역사를 히스토리(Hi story) 즉 “그의 이야기”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이 예수님이 바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에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은 묵시에 계세요. 묵시는 보이지 않는 나라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가 없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역사 바깥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어요.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때에는 역사에 속한 모습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시 속에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오시면서 예수라는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시 속에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太初)가 나오지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공간적 태초를 말해요. 역사 바깥 즉 시간 바깥의 세계를 말해요. 이를 하나님 나라 또는 묵시라고 했습니다.
묵시 속에서 말씀이 계셨어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럼 두 하나님이 있는 셈이지요. 말씀이신 하나님과 그냥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말씀이신 하나님을 “그” 라고 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가 누구라고 했나요? 말씀이신 하나님이에요. 그럼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은 누구신가요? 하나님이세요. 이걸 쉬운 말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은 아들이신 하나님을 말해요.
그런데 “그”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어요. 누구신가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어디에 오셨다구요? 역사에 오셨어요. 무얼 하려고 오셨나요?
“예수”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일을 하려고 오셨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 는 뜻이잖아요. 그럼 이 세상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겠지요.
맞아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역사 속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시려고 만물을 창조 했어요. 골로새서 1장에서 보았잖아요.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그러니까 역사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묵시에서는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역사 속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가 역사에요.
그러니 역사라는 말이 “그의 이야기” 즉 히스토리(history)인 겁니다. 예수님에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요.
그럼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무엇을 근거로 어떤 일을 하시는가요?
이는 공간적 태초 즉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작정하신 일들을 하세요. 공간적 태초에서 작정하신 일이 무엇인가요?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역사 속에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면 첫 마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역사)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창세기 1장 1절의 시간의 시작을 알리기 전에 세상이 있잖아요. 성경은 그 세상을 태초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 라고 해요.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다양하게 말해요.
“하늘나라” 라고도 하고! “천국”이라고도 하고! “묵시”라고도 하고! “영적 세계”라고도 해요.
다 같은 의미에요.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말이에요.
“하늘나라”의 반대는 “세상나라”이고! “천국(天國)”의 반대는 “지옥(地獄)”이고! “묵시(?示)”의 반대는 “역사(歷史)”이고! “영(靈)”에 반대는 “육(肉)”이에요.
왜? 이렇게 상대적인 나라가 있을까요? 이는 실제를 말하기 위하여 가짜를 만든 것이에요. 그림자와 실체 같다고 보면 됩니다. 가짜는 실제를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 자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 세상” 즉 역사를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 즉 묵시를 말해요.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러면 보이는 이 나라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걸 만물이 주 안에서 선다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보이는 이 나라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말해주고자 합니다.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예수를 보내서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볼 수가 있어요. 어떻게 보는가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뒤에 숨어 계세요. 예수님을 앞세워서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영접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잖아요.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보이지 않은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가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보이는 이 세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보아야 해요. 마치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듯이!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성령이 성도 안에서 그렇게 보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신성(神性)들이 들어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항상 기억 할 것은 보이는 사건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사건들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묵시적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거듭난 사람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늘나라가 있었어요. 하늘나라에 계시던 하나님이 손을 걷어 부치고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예정 하셨던 일들을 하나 둘씩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세상 역사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다스려져 가고 있어요. 그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보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 자기 백성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상대적으로 자기 백성 아닌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인 겁니다.
역사는 짝으로 되어 있어요.
낮과 밤이 짝이고! 빛과 어둠이 짝이고! 하늘과 땅이 짝이고! 남자와 여자가 짝이고! 사람과 짐승이 짝이고! 천국과 지옥이 짝이에요.
성경 속에 나오는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가인과 아벨이 짝이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짝이고! 에서와 야곱이 짝이고! 요셉과 그 형제들이 짝이고!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짝이고!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짝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걸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늘과 땅이라는 두 구조인 천지(天地) 창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이질적으로 다른 두 세계에요. 마치 영과 육처럼 달라요.
천지(天地)를 그냥 하늘과 땅으로 보지 말고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사람 이야기로 보세요. 그럼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 이야기로 보여지게 됩니다. 성경은 천국백성과 지옥백성 이야기를 중심 주제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펴면 두 사람 즉 두 민족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들이 있어요. 육으로 난 자와 약속으로 난 자가 있어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와 세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민족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 예정대로 이 세상에 보내어졌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처럼 이 둘이 한 군데 섞여 있어요. 빛과 어둠이 섞여 있어요.
섞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는 구원 이야기를 보여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뭘 만들었다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기존에 만들어진 것을 갈라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감(感)이 좀 잡히시는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던 것을 역사 속에서 일을 하는데 그 창세전 언약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쉬운 말로 각 사람은 다 자기 갈 길이 정해져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 예정대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십니다.
마치 송대관씨가 부른 “차 표한 장”이라는 노래와 같아요.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떠나야 하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
이 얼마나 복음적인 노래인가요? 이런 노래를 좀 부르세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부르지 말고!
어떤 사람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가고! 어떤 사람은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요. 각자 정해진 시간표대로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갑니다.
우리는 각 자 차표 한 장씩 받고 이 세상에 왔어요.
어떤 사람은 에서처럼 지옥으로 가는 표를 받고 나왔고! 어떤 사람은 야곱처럼 천국으로 가는 표를 받고 나왔어요. 이제 각자 정해진 시간표대로 살다가 정해진 열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가세요.
신자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고!불신자는 이것을 불합리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해요. 신자는 하나님의 창세전 결정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니까 순종의 자식으로 천국에 가고! 불신자들은 우린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 할 수가 없다고 반발을 하니 불순종의 자식으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은 흥분되고 신이 나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 자들이 있다고 하잖아요. 쉬운 말로 팔자가 정해졌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해 놓은 팔자대로 각각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으로 올 자와 예수를 부정하다가 지옥으로 갈 자로 팔자가 정해져서 역사 속으로 던져진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팔자를 안고 역사 속에 온 것입니다. 인간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예정 하셨던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비로서 창세기 1장 1절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를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이야기로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는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로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빛에 속한 자는 천국 백성을 상징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지옥 백성을 상징해요. 이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세요.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하지요. 무얼 하려고 오셨나요?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셨어요.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는 빛을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빛에 아들로서 어둠 속에 있었어요. 어둠은 죄를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불러내신 겁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찾는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기 백성 찾기에요. 그런데 이처럼 예수로부터 구원을 받을 자기 백성이 언제 정해졌다고 했습니까? 창세전이라고 했어요.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를 영화롭게 하세요.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구조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도표로 그리면 이래요.
<하나님 나라 - 역사 - 하나님 나라>
마치 샌드위치 같지요.
자 보세요. 창세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고 요한계시록 이후에 하나님 나라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간에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이 있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역사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역사는 하늘나라와 하늘나라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를 담고 있고 신약에서는 교회인 성도들의 이여기를 담고 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결국 역사는 교회 이야기인 것입니다. 교회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로부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에요.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구원이야기를 말해주고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창세전에 이미 정해졌어요. 자기 백성들이 창세전에 정해져 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고 신나는 이야기인가요. 신 나지 않으세요. 참 희한한 사람들이네! 아니! 이러한 말씀에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으면 어떤 말을 들어야 합니까?
혀 꼬부라진 말을 해야 신이 나겠는가요? 히브리 헬라 말을 할까요? 아니면 무당 푸닥거리를 해 줄까요? 제 전공이에요. 언제든지 신청 하세요. 그럼 작두 한번 타 줄게요.
정신머리를 딴 데 두지 말고 창세전 언약에 두세요. 그래야 미혹당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아요. 내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시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사세요. 나는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 아시란 말입니다. 이걸 알 때 우리의 인생이 가벼워져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된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설교 초두에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기쁨 때문이에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엄청 흥분이 된다고 하였지요. 월드컵 4강 경기를 재방송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잖아요.
왜냐하면! 이미 창세전에 끝난 이야기를 복기(復棋)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미 창세전에 반드시 구원 받기로 예정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그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실패하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니 느긋하게 월드컵 4강 경기를 재방송으로 보듯이 오징어를 먹고 땅콩을 까먹으면서 즐기면서 보란 말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믿는 것이에요. 이미 창세전에 끝난 것을 재방송 보듯이 하면서 구원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재미가 있어야지 짐스럽고 고통스러우면 안 되어요. 그건 뭔가 구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방 종교식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예수를 믿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요. 그러니 구원의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너희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안 끊어져요. 그러니 염려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지켜내시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봅시다. 요한계시록 1장입니다.
계 1:8절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은 어느 시대고 항상 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라면서 현재성을 먼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전에도 계시는 분이고! 장차 오시는 분이신데! 지금 역사 속에서 현재로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라는 말은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현재적으로 일을 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고 있어요.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흘러가요. 흘러간다는 말은 미완료란 말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완성(完成)이고 완료(完了)로 계시던 분이 흐르는 역사 속으로 오셨어요. 그 속에서 이미 창세전에 정하신 자들을 오늘날이라는 현재로 찾아내고 있어요. 예수님에게 찾김 받은 성도는 이미 창세전에 정하신 자들이에요.
이렇게 정하신 자들을 창세전에 언약하신 구원을 역사 속에서 적용시키는 일을 하시고 계세요. 미완료인 역사에서 이미 창세전에 완료된 구원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 가시는 작업을 하세요. 그래서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라는 3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정하셨다는 말은 이미 완성 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영생의 길로 인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가는 길이 영생 받는 수순(手順)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시작 속에 이미 완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을 하시고 우리를 창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작하면 끝을 내는 분이라고 시작과 끝이고 처음과 나중이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시작 하면 끝을 낸다는 말입니다. 중도에 포기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구원이 시작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니까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으니 염려 붙들어 매라고 하잖아요.
성도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된 구원인 것입니다. 다만 역사 속에서는 미완료 된 것으로 나타난 것뿐이에요. 이는 역사 자체가 미완료의 세계이므로 그래요.
그러나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구원을 완료된 것으로 여기고 살아요. 그래서 믿음을 주신 겁니다. 믿음이 오면 역사에서 묵시로 살아요.
장차 영생하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하는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백성으로 사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가 하면 오늘 본문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나요?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하지요. 너희가 어떤 모양으로 어떤 환경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 구원은 이미 완성된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잖아요. 내 꼬라지가 어떻더라도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부정적인 말들이 있지요.
“누가 정죄 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하잖아요. 이건 부정적인 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답을 주십니다.
“어느 놈이 내 백성을 정죄한단 말이냐!” “내가 의롭다고 하는데!” “무엇이 너희를 내 사랑에서 끊어! “절대로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어! 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네가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구원에서 잘려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세요.
롬 8: 34-39=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본문 말씀을 잘 음미해 보세요.
“누가 정죄 하리요” 이는 누가 정죄한다는 말이지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는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고자 한단 말이지요.
누군가가 성도의 구원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죄하는 세력이 있고! 끊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죄하는 세력이 누구인가요? 마귀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간구해 주시고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참소하는 자라고 하지요. 참소란? 검사처럼 죄인을 만들어서 감옥에 가두려고 정죄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호사가 되어서 마귀의 참소를 막아 주세요. 마귀가 성도를 정죄하는 것을 예수님이 변호해 주신단 말입니다.
마귀가 무엇을 근거로 성도를 정죄하고 구원에서 끊고자 합니까?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정죄하고! 세상의 조건으로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자기 피로 변호하고 은혜로 붙잡아 주세요.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도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마귀가 성도의 행위를 가지고 “너 그 따위로 하면 구원에서 짤린다” 고 공갈을 쳐요.
이 때 예수님이 우리가 정죄 받고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고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을 보존하여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의 구원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일을 해요.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케 한단 말입니다.
마치 욥을 시험하듯이 말이에요.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자꾸만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돈으로 힘들게 하고! 때로는 건강으로 힘들게 하고! 때로는 먹고 사는 것으로 힘들게 하고! 때로는 집안에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로 힘들게 해요. 한마디로 세상 살아가는 일로 분요하게 만들어 헛된 삶을 살게 한단 말입니다.
욥을 보세요. 엄청 시험을 받잖아요.
제물을 잃어버리는 시험을 당하고! 자식들이 죽는 시험을 당하고! 마누라가 도망가는 시험도 당하고! 급기야 자기 몸뚱이가 병들어서 고통당하는 시험도 당했어요.
친구 놈들이 와서 염장 지르는 시험도 당했어요. 이건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것을 총칭해요. 인간적으로 보면 욥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포기 할 수가 있는 환경이었어요. 그럼에도 욥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짤려 나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욥처럼 시험 당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어요. 욥이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나 동일해요. 동일하게 죄 아래 있는 세상이에요.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욥이 구원에서 짤려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짤려 나가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욥을 붙잡고 계시던 하나님이 우리도 붙잡고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욥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욥도 우리처럼 창세전에 이미 정하신바가 된 자에요. 그러니 욥의 조건과 상관없이 욥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욥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로서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떠 밀려들어가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욥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선취적으로 살았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욥처럼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구원은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창세전에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창세전에 언약을 하시고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해 나가실 몫인 것입니다. 우리하고는 상관없어요.
우린 다만 하나님이 일을 해 나가시는데 도구로 쓰이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죄 아래서 출생했어요. 그러다가 우리의 요구와 상관없이 죄에서 빼내 주셨어요. 그리곤 천국으로 데리고 가세요.
누가? 하나님이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가 되거나 짤려 나가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우리의 구원은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구원이에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이건 여러분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사탕발림의 말이 아니고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확 토해내고 싶은데도! 그래도 토해 내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의 행위와 상관없이 창세전에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을 향한 말은 곧 저에게 하는 말인 겁니다. 제가 지금 누워서 침 뱉고 있는 겁니다.
목사 입장에서 보면 여러분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그래도 참는 겁니다. 토해내고 싶어도 토해내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구원이 창세전 언약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지식을 조금 아는 것 가지고 꼴값을 떠는 것을 보면 콱~ 쥐어박고 싶어요. 거기다가 말은 얼마나 잘합니까? 청산유수에요. 말로는 예수님도 못 당할 거에요. 예수님도 아마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감당 하겠어요.
하는 꼬라지를 가지고 구원이 취소가 되면 고거 참 고소하다고 박수를 치겠지만! 구원은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꼬라지하고 상관없이 보존이 되잖아요. 그러니 에라이! 이 호랑말코 같은 인간들아! 라고 욕이라도 해야지! 마음이 좀 풀리지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열 받아서 못살아요. 욕이라도 실컷 해야지 제가 만수무강을 해요.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언중유골(言中有骨)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봅시다.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오지요. 왜? 일곱 교회인가 하면 일곱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곱 교회는 온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교회를 다 함축하고 있어요.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나요. 그러니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맨 마지막 시대의 교회 상을 담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어떤가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지요. 그래서 확 토해내고 싶다고 합니다. 이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 시대 우리들 모습이에요.
그런데 어떤가 하면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어요.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고하고 자족하고 자위하고 자랑하고 있어요. 암튼 있는 꼴값 없는 꼴값을 다 떨고 있어요. 아주 웃기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 개뿔도 없는데 스스로는 믿음이 엄청 좋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시대 우리들이 그러고 있잖아요.
지금은 말씀이 홍수 시대에요. 인터넷으로 넘쳐나요. 그래서 교인들이 들은 것은 엄청 많아요. 귀는 당나귀처럼 엄청 커져 있어요. 머리로 아는 것은 예수님보다도 더 많아서 박사들이에요.
그런데 마음들은 싸늘한 냉골들인 겁니다. 말과 행동이 영 아니올시다 에요. 신앙이 관념이고 허상이에요. 그러다 보니 신앙이 성격적 지식을 개념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하여서는 박사인데 정작 예수를 몰라요. 예수를 구경만 하였지 먹어보고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맛이 안 나는 겁니다. 예수를 먹었으면 좀 나긋나긋하고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를 구경만 하니까 땡감처럼 텁텁하고 맛 대가리가 없는 것입니다. 잘난 척 꼴값들만 떨고 말만 무성해요.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기 좋아서 한 입 깨물었는데 떫어서 확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적 수치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꼴불견이겠어요.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러세요. 오죽하면 토해 내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하나님의 책망이 들려지고 있어요. 이건 사랑입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책망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다 복이고 사랑이라고 했어요. 욕을 해도 사랑이고! 두들겨 패도 사랑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된다고 합니다. 예만 된다는 말은 죽어도 복이고 살아도 복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복이에요. 그래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흥해도 사랑이고 망해도 사랑이에요. 이사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소돔과 고모라 새끼들이라고 욕을 해 댑니다. 이는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욕이 아니라 사랑의 절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곡언법(曲言法)으로 보는 안목을 가지셔야 해요. 곡언법(曲言法)이란? 말을 구부려서 한다는 뜻입니다. 말을 구부려서 하면 욕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에라이! 이 죽일 놈아! 라고 하면 그것은 야! 이놈에 새끼야 살아야 안 되겠느냐! 라는 말이에요. 이건 우리들이 우리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잖아요.
부모가 자식에서 욕을 끌어 붓는 것은 사랑한다는 반어법(反語法)이지 죽으라는 직설화법(直說話法)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에라이! 나가서 죽으라는 말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말이지 실제로 나가서 죽으란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 부모가 나가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나가 죽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씀들이 다 그래요. 그래서 저주하고 욕을 해도 난 너희들을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두들겨 패고는 다시 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서를 보세요. 맨날 두들겨 팼다가 싸매시고 하잖아요.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꼴이에요. 확 토해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내 새끼들이니까! 그래서 책망하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책망이 간섭으로 나타나고! 간섭이 징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팔 걷어 부치고 자기 백성을 챙기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고 자꾸만 헝클어지는 삶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안 살아지면 그것은 하나님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럼 빨리 정신 차리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건이 들이 닥칠 것입니다.
그럼 입에서 단내가 나게 되어요. 하나님의 책망은 말로 그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한다고 하잖아요.
성도에겐 두 가지 환란이 있어요.
첫째는,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환란이에요.
이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환란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괜히 미움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게 되기도 해요.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단지 히브리인이라는 것 때문에 종살이 당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이 복음을 받으면 이러한 미움을 받게 되어요.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은 자기들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신앙을 고수하는데 예수님은 율법 신앙을 허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상이 이 시대에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드러나고 있어요. 새 언약을 말하면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미워해요.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이 성화를 부정하면 화를 내잖아요.. 이것은 맏 아들이 탕자를 미워하는 것과 같아요.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당하는 환란이에요.
이건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아서 당하는 징계에요. 하늘 백성이 땅 강아지처럼 땅에 코를 박고 살면 하나님께서 땅에 것을 빼앗아가는 방식으로 징계를 하세요.
우리 스스로가 땅에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회수해 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와요. 이 고통이 우리에게는 힘든 아픔입니다.
이런 환란을 야곱이 당하였어요.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육적으로 이해하였어요. 그래서 장자권을 탐낸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받으면 아버지 유업을 물려받는다고 생각 했어요. 그런데 돌아 온 것은 그 반대에요.
야곱이 만약에 장자권을 받으면 집안에서 쫓겨난다고 했으면 받지 않았을 겁니다. 야곱은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면 아버지의 유업이 넝쿨째 굴러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돌아 온 것은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그 반대에요. 그러니 야곱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야곱은 집을 쫓겨났어도 외삼촌 집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어요. 결국엔 거부가 되어서 금의환향합니다. 이제 보란듯이 처 자식과 재물을 앞세우고 귀환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을 죽이는 일을 벌리십니다.
야곱은 언약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할 자에요. 약속은 하늘에 있어요. 재물을 믿고 살 자가 아니지요. 그런데 야곱은 보이는 땅에 재물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생 고생 하면서 일구어온 재물들을 빼앗아가는 작업을 벌이신 것입니다. 재물이 약속을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잊게 하는 것을 거두어 가는 식으로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처 자식과 재물들은 다 강 건너보내 놓고 야곱 혼자만 달랑 남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곤 야곱을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으로 살 때는 눈에 보이는 재물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이스라엘이 되고서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신세가 되었어요.
이 지팡이는 곧 하나님을 상징해요. 나중에 야곱은 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요셉의 두 아들들을 축복 할 때 장자와 차자를 손을 어긋맞기고 축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은 살리는 식의 축복이에요.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은 땅에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도리어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땅에서 코를 박고 살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땅에서 빼내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겐 엄청난 아픔인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본성과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환란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환란도 우리를 예수를 못 믿게 하지 못해요. 도리어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도망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환란이나 기근이나 적신도 위험이나 칼로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얍복강에서 야곱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할지라도 우리가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주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이며 하나님 보좌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창세전 언약대로 성취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이러한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실패 할 수 없는 백성이란 말입니다. 매를 맞아도 실패하지 않고 매를 안 맞아도 실패하지 않아요.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그건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어떤 사람은 리무진 타고 스파게티 먹으면서 가고 어떤 사람은 매 맞으면서 질질 끌려서 가요. 그러니까 매를 맞으면서 천국에 가든지 아니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살면서 천국으로 가든지 알아서 하세요.
징계는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미 구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아들로 대우하시고 있다는 증거에요.
성도에게 징계가 주어진다는 것은 잘라내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함이에요. 곡식과 죽쩡이의 차이는 키 질을 하게 되면 곡식은 안으로 들어오지만 죽쩡이는 바깥으로 날아가 버려요. 키 질을 해 보면 그 놈이 곡식인지 죽쩡이인지 대번에 드러나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러셨지요. 사단이 너를 밀 까불듯이 한다고! 그러나 네가 넘어지지 않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비록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 하였지만 짤려 나기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예수님이 간구하고 계신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베드로보다 낫지 않아요. 우리가 베드로에요. 내가 살고자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유익이 충돌하면 우린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헌 신짝처럼 내 팽개쳐요. 그럼에도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되어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자기 백성 찾기이지 잘라냄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은 자기 백성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해요. 이 놈이 진짜 내 백성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에요.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 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여기서 야곱이란? 이스라엘 전체를 말합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도를 말해요. 그러니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야! 정낙원이 내 말 잘 들어라!
내가 너를 조성 하였고!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이에요.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 그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과 같은 말씀이에요.
조성하였다는 말은 미리 정하셨다는 말이고! 지명하여 불렀다는 말은 예정된 자를 부르셨다는 말이고! 구속하였다는 말은 의롭다 인 쳤다는 말이고! 내 것이란 말은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과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지명(指名)하여 부른 자들을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시고 불 가운데 통행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과 같은 것들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말입니다.
왜? 이러한 길을 걷게 하시는가요? 이는 성도는 죽음의 길을 통과하고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구약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때 어떻게 했나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했지요. 그리곤 이들을 어디로 인도 합니까?홍해 바다로 인도 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애굽에는 재앙이 내리는데 하나님께서 고센 땅은 재앙을 내리지 않았어요. 애굽에 모든 장자가 죽어질 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대신 죽어줌으로서 살아났어요. 그리고 홍해 바닷가까지 왔어요.
그런데 애굽에 군대가 뒤 좇아 옵니다. 이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비백산합니다. 급기야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애굽에 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여 죽게 하느냐고 아우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릅니다. 너희는 가만히 지켜보아라! 여호와께서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지 똑똑히 보라고 합니다. 그리곤 모세에게 명하여 홍해 바다를 가르게 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바닷물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고 바다 속에 하나의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을 건너듯이 건너갑니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애굽에 군대들이 야! 저 놈들 봐라! 그러면서 자기들도 바다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자 갑자기 물이 덮쳐와서 몰살을 하고 맙니다. 동일한 조건인데도 이스라엘은 살았고 애굽은 죽었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이를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믿음으로 건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이 이들을 건너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믿어서 건넌 것이 아니고 이들은 믿지 않았는데 믿음으로 건네 준 것이에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홍해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건넜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출애굽기에서는 안 믿었다고 하고 히브리서에서는 믿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렵다는 겁니다.
잘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믿지 않았어요. 안 믿었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건너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식을 말해요.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믿음이라는 배에다 태워서 건너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에서 믿음으로 건넜다는 것은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건너게 하였다는 말이에요.
믿음을 의역하면 예수에요. 그럼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예수 안에서 건넌 것이 되겠지요. 맞아요. 예수 안에서 건넜어요. 이걸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건넜다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믿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안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방주에 태워서 건너게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건너게 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은 안 믿었다는 것이 깔려 있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들이 불 순종을 했음에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건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안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하세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를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는 바탕에는 우리는 안 믿었는데 라는 불순종이 깔려 있고, 이런 나를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은혜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곰곰이 곱씹으면서 이해하세요. 그럼 엄청 은혜가 될 것입니다.
애굽에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놈들 눈에는 이스라엘이 그냥 건너는 것으로 보인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뛰어 든 거에요.
그런데 막상 뛰어 들고 보니 이스라엘은 믿음이라는 방주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겁니다. 애굽에 군대들은 믿음이라는 방주가 없었어요. 그러니 모두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 할게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자기백성들 발목에는 끈을 매어 두었어요. 그리곤 바다 속에 던져 놓았어요. 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애굽 사람들도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 드는 겁니다. 바다 속에 애굽인도 있고 이스라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끈을 살살 당기는 겁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만 질질 끌려서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허우적거리면서 죽어가고 있어요.
이에 애굽 사람들이 야! 무슨 이런 개 법이 다 있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야 임마! 누가 너희들 보고 바다 속에 뛰어 들라고 했냐! 거긴 왜? 뛰어 들어! 그러자 애굽 사람들이 저 놈들이 뛰어 들기에 우리도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야! 이놈들아! 이스라엘 저 놈들 발목에는 내가 노끈을 매어 놓고 뛰어 들게 한 것이야! 너희들은 끈도 매이지 않았는데 왜? 뛰어 들어! 그러니 죽지! 너희들이 잘못해서 죽는 것이니까 날 보고 뭐라고 하지마!
이해되나요. 이렇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사도바울은 홍해 바다는 건넌 것을 세례라고 했어요.
세례란? 죽음을 말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건넌 것은 죽음에 바다를 건넌 것이에요. 어떻게 죽음에 바다를 건넌 겁니까? 믿음이라는 방주를 타고 건넌 겁니다.
믿음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예수라는 방주를 타고 죽음이라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품에 안고 죽음이라는 강 속에 뛰어 들어서 자기 백성들을 안고 죽음이라는 강을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애굽에 군대들은 예수가 없었고 이스라엘에겐 예수가 있었어요. 그러니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죽음 속에 던져 놓아 보아야 합니다. 그럼 어느 놈이 언약 안에 있는 자이고 어느 놈이 언약 바깥에 있는 자인지 구별이 되어요. 죽어야 할 자와 살 자들이 갈라져요.
이사야가 그러지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구속한 자들을 물 가운데로 집어넣는다고 하지요. 물 가운데 집어넣어 보아야 저 놈이 예수 안에 있는 자인지 예수 바깥에 있는 자인지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불 가운데도 집어넣어 보아야 해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세요. 불 가운데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불에 타지 않고 살았어요. 이들을 불에 집어넣고자 한 자는 불 입구에서 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불 속에 들어간 자는 머리터럭 하나도 타지 않고 살았어요.
어째서 그런가요?불 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불 이 쪽에서 보면 불 속에 들어간 자들이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불 안 쪽에서 바깥쪽을 보면 거기가 불 구덩인 겁니다.
십자가가 그래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자들은 십자가가 죽음이고 저주인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의 영생의 세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안에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이 지옥이고 저주인 겁니다.
천국은 환란 너머에 있어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우리가 많은 환란을 겪어야 천국이 간다고! 이것은 환란 당하면 천국에 보내준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은 환란을 통과해서 간다는 말입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환란 속으로 던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는 자들이 곧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환란 속에 던져보아야 믿음이 있는 자인지 없는 자인지 구분이 되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끈에 매여 있는 자인지 스스로 예수 믿겠다고 하는 자인지 드러나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끈에 매여 있는 자들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끊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끈에 매여 있지 않는 자는 다 넘어져요.
이걸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해 주셨어요.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작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들은 좋은 밭에 떨어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길가나 가시밭이나 돌짝밭에 떨어진 씨들은 잠시 싹을 내는 것 같다가 다 말라 죽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이생의 자랑이나 일락이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이생의 자랑이나 일락이나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들은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자들은 예수를 믿는 척 하다가 어떤 문제가 닥치면 다 떠나요. 그런데 좋은 밭에 떨어진 씨들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어째서 인가요?
이는 좋고 나쁜 밭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관리하는 밭이 좋은 밭인 겁니다. 씨는 농부의 관리 하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물도 주고 잡초를 제거해 주고 비료도 주면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밭이란? 구약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말하고!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 성도들을 말해요.
이스라엘이나 애굽인이나 똑 같아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교육을 받고, 애굽에 음식을 먹고 살았어요. 애굽인이나 동일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농부 되신 하나님이 그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애굽인에겐 농부가 없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살아났고 애굽인은 죽은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잘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밧줄로 우리를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에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속에서 이겨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속에 던져 넣고 보는 겁니다. 누가 나오는가? 나오는 놈이 하나님의 사랑의 끈에 매여 있는 놈인 겁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도에겐 고난이 주어져 보아야 해요. 환란에 던져 보아야 믿음을 확인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지 아니면 스스로 예수 믿겠다고 하는 자들인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들은 다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씨뿌리는 비유에서 시험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이생의 자랑거리이고! 세상의 염려이고! 육신의 일락이고! 재리의 유혹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이러한 것으로 시험하는 겁니다. 이생의 자랑 거리란? 세상 영광에 취하여 사는 것이고! 세상의 염려는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온갖 근심 걱정을 하고 사는 것이고! 육신의 일락이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면서 방종과 방탕을 일삼는 것이고! 재리의 유혹은 예수 믿는 것을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믿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복음을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복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 지가 중요해요. 요즈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이 엄청 많아요. 복음 알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모두가 복음을 자기 육신의 일락으로 사용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스스로가 복음에 합당치 않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일어나 주어야 해요. 그래야 복음으로 사는 성도들과 차별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관리 해 주는 자인지 아니면 자기 맘대로 사는 자인지 드러나게 된단 말입니다.
성도는 자기 맘대로 살도록 되어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안에 예수님이 와 계세요,.
그러므로 그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신 성도는 자기 맘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젊었다! 늙었다! 라는 것은 성령이 오시기 전(前)과 후(後)를 말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베드로가 자기 맘대로 살았어요. 죽음이라는 위험 앞에 닥치자 예수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는 자기 맘대로 살지 못합니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예수를 증거하고 죽일 테면 죽이라고 했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가 살고자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는 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죽음에 넘기었어요.
이는 모두가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서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띠 띠고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러므로 복음 안다고 하면서 육신의 일락을 즐기고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가짜들인 것입니다.
복음이 주어지면 두 부류로 나타나요. 어떤 자들은 복음을 관념으로 알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생명으로 살고 있어요.
이건 어느 시대고 그랬어요. 초대교회 안에서도 항상 두 부류의 신앙으로 갈라졌어요. 주둥이로만 믿는 자들과 삶으로 믿는 자들로 갈라졌어요. 바울은 제 멋대로 사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어요.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복음 복음하면서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이 반드시 일어나 주어야 해요. 그래야 성경이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고 항상 믿음 없는 자들이 믿음 있는 것처럼 행사하여서 믿음 있는 자들을 핍박했어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단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으로 감격하고 율법 아래 있을 때 보다 더 감사하면서 살아요.
더 헌신하고! 더 봉사하고! 더 섬기고! 더 사랑해요.
이런 모습이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복음 속에 이러한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고 난 후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세요. 이러한 모습으로 살았잖아요.
누가 이들을 이렇게 살라고 강요 했나요?아니에요, 강요하지 않았어요. 성령으로 거듭나고 보니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했어요.
복음으로 인하여 너무 기쁘니까 너나 할 것이 없이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천국 백성들의 모습이에요. 성령이 예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그들 안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야고보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행함이 없는 자는 가짜이고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고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입으로만 주절 거려지지 삶 속에서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이에요. 생명은 가만있지를 않아요. 뭔가 꿈틀 거려요. 어떤 사건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무슨 사건인가요? 예수님의 생명에 속한 것들을 토해내게 하세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에요. 우리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창조의 일을 하세요. 땅에 것을 죽이고 하늘에 것으로 살게 한단 말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가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 속에서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께서 그 안에서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사를 한번 되돌아보세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우리의 뜻인가요! 아니면 주의 손이 이끌려 왔는가요!
여러분은 어떠실지 몰라도 저는 질질 끌려 왔어요. 그러니 지금 저는 제가 아니고 주께서 간섭당해서 온 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그냥 말이 아니고 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벅 저벅 걸어 오셔서 나를 이끄는 것으로 보여진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럽니다. 야! 정낙원이 내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앞으로도 끌고 갈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하고 어떤 모습으로 있다 하여도 반드시 너를 구원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조건으로 주어진 구원은 없어요. 그러니 누가 너 그 따위로 해서 천국에 가겠느냐고 하면! 그래! 나는 요 따위로 살아도 천국에 간다고 하세요. 그래야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구원을 가진 성도에요.
그렇지 않고 그래! 내가 이러다가 천국에 못 가! 그러면 그 사람은 진짜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행위로 구원을 가늠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언약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힘으로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또한 우리의 힘으로 지켜내는 것도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고 또한 하나님이 지켜주세요. 이걸 믿으라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이론이 아니에요. 실제에요. 구원은 실제로 누리는 누림이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에요. 누림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에요.
부디 여러분 속에서 이 누림이 일어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이 질기디 질긴 사랑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믿어져서 그 믿음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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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