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학자, 군왕 실정 서슴없이 꾸짖다 하서 김인후의 생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는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 음력 7월19일 오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큰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참봉이라는 말단 벼슬에 그친 아버지 영(齡)이라는 분은 행실이 옳고 글도 잘해 선비의 칭호가 높던 분이었다. 하서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헌걸차서 비범한 인물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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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의 생가는 빈터만 쓸쓸하게 남아있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만 근래에 복원되어 있다. | 사진작가 황헌만 |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냥 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태도가 일반 아이들과는 달랐다. 하루는 파(蔥)를 들고는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며 속 내부까지 파헤치는 놀이를 하자, 아버지가 그런 장난질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니까, 물건이 태어나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답해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는 기록도 있다. 5세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6세에는 저 인구에 회자하는 <영천시(口永天詩)>, 즉 하늘을 읊은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모형은 둥글고 아주 커서 너무나 현묘해(形圓至大又窮玄) 넓고 넓은데 허허롭게 땅 가를 둘렀네(浩浩空空繞地邊) 덮여 있는 사이에 온갖 만물 포용했는데(覆巾韋中間容萬物) 어쩌다 기(杞)나라 사람들 무너질까 걱정하지(杞國何爲恐顚連) 지구를 통째로 뒤덮은 하늘, 크고 넓고 현묘하기까지 하건만, 중국의 기(杞)나라 사람들은 왜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했느냐라는 5세 어린이의 지적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이런 시가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면서 김인후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무렵 전라도 관찰사로 정암 조광조의 숙부이던 조원기(趙元紀)공이 하서 소문을 듣고 전주 감영에서 장성의 하서를 찾았다. 재주를 시험해보고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솜씨에 할 말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그 무렵에 기묘명현으로 이름 높던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고향인 장성을 찾았다가 하서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붓 한 자루를 선물하면서 나라의 동량으로 크도록 격려했다는 내용도 있다. 천재로 이름이 났지만, 공부에 게으르지 않던 하서는 어린 시절부터 면앙정 송순, 신재 최산두, 모재 김안국 등 당대의 석학들을 찾아가 뵈며 학문에 온갖 정성을 바쳤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모재 김안국에게 수학하던 하서는 모재가 귀경하자 서울까지 왕래하며 글을 배웠다. 19세에 서울에 노닐면서 대제학이던 용재 이행(李荇)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자, 이에 참석한 하서는 <칠석부(七夕賦)>를 지어 장안의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이때 진사과 동방(同榜)인 퇴계 이황과 만나면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가 된다.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이후 32세에는 초급 관리로 가장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학문연찬에 정력을 바친다. 이때에도 퇴계 이황 등 당대 명사들과 동기동창이 돼 서로의 학문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32세의 하서와 9세 연상인 퇴계는 41세, 이들이 호당에서 함께 자고 먹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제대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하서나 퇴계의 학문은 그 시절에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서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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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이 하서 김인후에게 손수 그려 하사한 묵죽도(墨竹圖). |
호당의 공부를 마치자 선비라면 원하는 벼슬이 옥당, 즉 홍문관의 벼슬인데 하서에게 홍문관의 정자(正字)·저작(著作) 등의 벼슬이 내려졌고 34세에는 홍문관 박사(博士)에 시강원 설서(設書)로 세자를 가르치는 임무에 종사한다. 높은 군왕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세자, 뒷날의 인종(仁宗)과의 만남은 바로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어수지계(魚水之契)의 본보기로서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었다. 요순시대의 도래가 점쳐졌다는 당시의 이야기들에서 당시 하서의 학문과 덕망이 얼마나 높았고 세자의 호학하는 자질이 얼마나 훌륭했나를 대변해준다. 하서의 인품과 학문에 매료된 세자는 온갖 예우를 다 했고, 심지어 하서에게 손수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는 정성을 바치기도 했다. 궁중에 있던 <주자대전> 한 질을 하서에게 선물하면서 가르쳐주는 공에 보답하기도 했다. 34세의 여름에 하서는 홍문관 부수찬에 오르고 언관(言官)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했으니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을 사면해 신원시키라는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정책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의 뒷받침과 수양한 의리정신을 발휘해 본격적인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예부터 훌륭한 정치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는 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해 보필을 받고 교화하는 일을 맡깁니다.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아야 인륜이 밝혀지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묘사화 때의 억울한 신하들에게 모든 선비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 본심을 개진하지 못하고 무죄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언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결자해지의 뜻으로 기묘사화를 통해 간신배들의 농락으로 실정을 거듭한 중종이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한 내용이 바로 하서의 그 차자(箚子)였다. 너무나 옳은 하서의 주장에 은연히 마음이 동한 중종은 그때부터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게 되고, 그런 하서의 주장이 원인이 돼 끝내 그 문제는 풀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그러나 그런 요순정치를 아무나 하는 것인가. 하서의 옳고 바른 주장도 쉽게 실현될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순군민(堯舜君民), 요순 같은 임금에 그 치세에 살아가던 백성의 시대를 열자는 하서의 꿈과 희망은 참으로 위대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요순시대를 꿈꾸며 학문과 수양에 힘썼던 하서, 세상을 한 번 통째로 개혁하고 싶은 욕망이야 가득했지만, 시대는 결코 하서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던 무렵 김안로(金安老)가 쫓겨났고 김안국·이언적 등 여러 어진 신하들이 조정에 들어가며 한 번 치세가 도래하려는 희망도 있었으나 외척들인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이 알력을 일으켜 시사(時事)가 도리어 우려됐다”라는 하서 연보(年譜)의 기록처럼 화란의 징조만 높아지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기미가 높아가자 부모봉양을 앞세워 고향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해, 하서는 34세 12월에 옥과현감(玉果縣監:곡성군 소속)으로 부임한다. 그 다음해 중종대왕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해 세상이 바뀌는 듯했으나, 대소윤(大小尹)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고 병약한 인종이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붕어하면서 정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큰 꿈의 소유자 천재 학자이던 하서는 영원히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사적 평가 명종 15년, 1560년 음력 정월 16일 51세의 하서 김인후는 세상을 떠난다. 인종의 등극 이후 한 차례 서울에 온 뒤, 인종이 승하한 36세 이후, 그는 영원히 서울을 떠나 고향인 장성, 그 이웃 고을인 담양·순창 등의 자연 속에 몸을 숨기고 강학과 교육에 일생을 바치며 먼 훗날 요순시대의 도래를 위한 도학(道學)을 정립하고 도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명종실록 16년 정월 16일의 기사는 그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인품과 학문, 그의 고결한 생애를 정리해 기록하고 있다. “앞전의 홍문관 교리(校理)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 자(字)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다른 호는 담재(湛齋)였다. 장성 출신이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에 문자를 이해해 글을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커서는 시문(詩文)을 지으면 청아하고 고묘해 당대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시와 술을 아주 즐겼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는 적이 없었다. 그의 뜻한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어서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은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은가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30세 이후에 문과에 급제해 부수찬을 지내고 옥과현감이 됐으나, 오래지 않아 중종·인종의 상을 당하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해 을사년 겨울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고향집에 거처하면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해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순서대로 힘쓰며 실천했다.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상·제례(喪祭禮)에 삼간 마음으로 실천했다. 모든 제사에는 아무리 병중이라도 반드시 참례했고 세속의 금기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는 뒤에 하게 했다. 남과 대화할 때에도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지 않았으나 한 번 스스로 정립한 원칙은 매우 확고해 뽑아낼 수가 없었고 너무 높아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써서 필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조선왕조의 정사(正史)에 이만하면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명확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사상의 고향 (45) 패악한 정치에 분노, 자연에 숨은 도학자 김인후(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