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와 강화군은 130년 전 신미년 강화도 광성보에서 벌어졌던
한·미소전쟁을 재연, 그 전투에서 전사한 사령관 어재연 등
350명의 넋을 진혼하는 제사를 지낸다 한다. 선전포고부터가 너무나
인간적인 광성보 전투였다. 강화유수가 보낸 선전포고 사절이 강화
앞바다에 정박 중인 미동양함대 기함에 승선했다. 불법침범에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엄중히 선전포고를 하고 말미에 「만리풍파에
시달리며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았고 시장도 할 터이니 약소하나마
거세한 황소 3마리와 닭 50수, 달걀 1만개를 보내노라」 했으니 이런
선전포고를 동서고금에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함포의 비호 아래 표고 45m의 광성보에 상륙을 시도한 푸른 옷의 미
해병대와 맞싸울 조선 병사는 압록강변에서 차출된 범사냥꾼이
주력이었다. 맨손으로 범 한 마리씩 때려잡는다는 강병들이다. 맨 먼저
포대를 넘어온 미군이 매키 중위였는데 한 용감한 조선 병사의 창에 찔려
쓰러졌다. 뒤이어 넘어온 쉴리 소령에게 달려가 창질을 했는데 소매만을
뚫었을 뿐, 그가 쓰러진 채 쏜 권총에 이 용감한 병사는 전사한다. 매키
중위는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교회 맨 상단에 위패가 놓여졌고,
쉴리 소령은 후에 제독으로 승진 미·스페인 전쟁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백의의 이 용감한 조선 병사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알버트 카스텔의 논문에 보면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는 돌과 흙을 집어던졌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100여명의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은 포대를 넘어가 흐르는
강물에 투신하고 일부는 목을 찔러 자결했다.」 부상한 병사는 미군에게
죽여달라고 시늉으로 애걸했고ㅡ. 48시간 만에 이 한·미전쟁은 끝났고
광성보에 세워진 대형 「수」자 깃발이 딜톤 대위에 의해 내려지고
성조기가 대신 올려졌다. 포대 안에 죽어있는 조선 병사 수는 243명,
미군은 3명 사망에 2명 부상이었다.
지금 아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가면 이 광성보에서 노획해 간
수자 대형기를 볼수 있다. 그리고 임전할 때 부챗살에 이름을 나란히 써
죽음을 약속한 일심선도 그곳에서 보았다. 광성보 전투 재연에 이 수자
기를 다시 나부끼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