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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의 말로 사도들이 풀리다
행 5:33-42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 5:33-42 / 이 말을 들은 의회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사도들을 죽이기로 하였다. 34) 그때 바리새파에 속해 있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율법교사로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발언하는 동안 사도들을 의사당 밖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35) 이윽고 그가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계획은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6) 얼마전 드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선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지요.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37) 그 후 호구 조사를 하던 해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라는 자가 나타나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자기 제자로 만들었지만 그가 죽어 버리자 그를 따르던 자들도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8) 그러므로 나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을 제안합니다. 만일 그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그들 마음대로 꾸며낸 것이라면 곧 뒤집혀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어떻게 여러분이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는 오히려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셈이 됩니다.' 40) 의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을 한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특권을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를 나왔다. 42) 그리고 성전이나 가정 모임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결의하지만 가말리엘의 조언으로 사도들이 풀려납니다.
공회의 반응(33)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자 공회원들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크게 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프리오’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을) 톱으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분명히 공회원들의 마음을 마치 톱으로 자르듯 조각내었습니다. 이쯤 되면 회개할 듯도 하지만 공회원들은 “감히 우리 앞에서 회개를 운운하다니, 우리가 누구인데”라고 하며 자존심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사도들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가말리엘의 조언(34-39) 결론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도들은 풀려납니다. 이렇게 된 데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존심 강한 공회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가말리엘은 율법학파의 창시자인 힐렐의 손자이자 후계자로서 랍비보다 더 높은 ‘라반’(우리 선생님)이란 명성을 얻고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원들에게 근래에 있었던 역사적인 두 사건을 예로 들면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드다라는 인물이 반란을 주도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 둘째는 갈릴리의 유다라는 인물이 백성을 잠시 미혹하다가 모두 흩어져버린 사건입니다. 가말리엘의 조언은 이렇습니다. 만일 어떠한 사상이나 운동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저절로 소멸할 것이며,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작금의 예수 운동에 대해서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회는 가말리엘의 조언대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풀어줍니다. 가말리엘의 조언은 일리가 있지만 크게 부족한 점이 보입니다. 예수 복음운동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기쁨의 사역(40-42) 당시의 채찍질은 살점을 떼어낼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일찍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의 채찍질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능욕 받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뻐합니다. 이러한 기쁨에 사도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어디서든 어느 때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기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예수 이름을 위해 수치나 고난을 받은 경우를 기억해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이었는지요?
인간이 가진 권세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그것을 인간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권세 맡은 자들은 그 권세에 따라 말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권세에 따라 결정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권세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세워 두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신 권세에 맞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 순간의 위협에 압도당해 사람들의 뜻을 들어줍니다. 그 순간 그에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못합니다. 우린 가말리엘을 묵상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5: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 제사장들은 비록 철판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해도 깊이 감동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이론을 전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데는 조그마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외적인 가르침은 귀를 때리는 일일 뿐 다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적들을 꺾어서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거친 성품이 굴복되거나 교정되기는커녕 그들은 더욱 더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 말씀의 효과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나아지도록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양심을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자로 인하여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사실에서 그들의 분노가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복음의 전부를 기꺼이 비웃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솔한 행동을 맹렬하게 쓸어버리는 어떠한 숨은 존엄이 복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오도록 나팔소리가 그들을 소환할 때에 그들의 광기(狂氣)가 분명해 질 것은 사실이다.
======5:34
이제 누가는 주께서 어떻게 그 악한 자들의 광기를 씻어버리셨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가말리엘이 양자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 무모한 의논을 저지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어떻게 단 한 사람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한 바리새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파는 우리가아는 대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었던 파였다. 그는 국민 전체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누가는 전해준다. 그러나 또한 당국자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고도 전해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들 앞에 돌발적인, 또 예기하지 않은 공포의 원인을 성정함으로써 원수들의 폭행을 저지하시는 일 등을 행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가말리엘은 자기 말이 사도들을 한층 더 대담하게 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들을 밖에 나가 있도록 명령한다. 왜냐하면 가말리엘은 자기가 복음의 가르침을 시인했거나 혹은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변호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격분에 불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점잖고 온건한 인품을 지닌 그는 그들의 지나침을 온건한 말로써 누구러뜨리는 것이다. 어쨌든 만일 아무라도 그 모든일을 적절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의 견해는 우리가 신중성있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상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충분히 밝혀진다. 즉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은 아무도 형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범죄는 처벌되지 말도록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생명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이 우리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모든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가말리엘이 말한 두 가지가 다 분명히 옳다. 즉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깨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나 한편 '사람에게서 나온'것은 무엇이든지 언제까지나 존속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 이 둘은 다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 끌어 낸 결론으로서 대체로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태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
권고는 그와 같은 것이다. 가말리엘은 율법학자들이나 장로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일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로써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그는 그 사건의 진가에 관해서 이미 근본적으로 불확실하여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감히 그의 마음을 확정짓지 못하고 그 상황이 자연히 좀더 잘 밝혀지기까지 얼마동안 시간이 연기되어야 한다는 저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요약한다면 가말리엘은 올바른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에만 적용해야 할 것을 외적 행사나 행동방식에 잘못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을 우리의 논리가 되게 하도록 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것은 비록 전 세계가 그를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써 확증되고 있는 신앙은 사단이나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존속될 수밖에 없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창조자요 수호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어떠한 세력도 그것을 전복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 그 기초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를 대항하여 싸우며 흔들지라도 여전히 안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더구나 악한 자들이 아무리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여 제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도발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승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도를 타격주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무모함에 형벌을 가하시기 때문이다. 그 두 선언이 다 신앙에 잘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덜 열심이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자기들의 게으름 때문에 교회를 파멸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다는 이유도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악행을 못본 체하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다.
======5:36
드다가 일어나 -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신빙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가말리엘은 여기서 역사의 참된 진로를 거꾸로 만든것이 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즉 가말라(Gamala) 성에서 태어난 유다 가울라니테스(Judas Gaulanites)는 퀴리니우스(Quirinius) 혹은 싸이레니우스(Cyrenius)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인구 조사의 실시를 막기 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드다(Theudas)는 쿠스피우스 파더스(Cuspius Fadus)가 총독이었을 때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더스는 글라우디우스 가이사(Claudius Caesar)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전자의 이야기는 고대사 18권에 수록되어 있고 후자는 20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가 "그 후...유다가 일어나"라고 말할 때에 유다가 나중에 나온 사람인 듯이 연대적인 순서를 지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유사한 두 실예를 내세웠기 때문에 그는 시기를 생각하지 않고 그는 이 쪽을 저쪽 과 바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post)라는 말은 '그 위에'(above) 혹은 '한편'(besides)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더구나 가말리엘이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는 그 실예들까지도 현재의 주제에 적절하게 해당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에 대해서 즉각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선동했던 폭동은 많은 재난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군대의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드다는 쿠스피우스 파더스의 분투로써 재빨리 타도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해를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단지 사람들이 결과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을 추진 할 때 모든 일이 좋지 못하게 뒤집힌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형벌에 의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신아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충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당황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갈팡질팡함으로써 무가치한 이론과 함께 자기들의 이지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것 사도들이 매를 맞은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적어도 12년은 경과한 때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시간을 계산해 봄으로써 추론하게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Tiberius) 치세의 남은 5년에 칼리굴라(Caligula)가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요단강을 마르게 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통과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가말리엘이 얼마나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나중에 자기의 말을 누그러뜨리고 또 좀더 호의적인 견해로 기울어지면서 이 사건이 하나님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단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짓지 못한 채 나겨두기는 하였지가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직자들을 협잡군들과 약탈자들과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좀더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은 그가 악한 자들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무모함에서 기가 꺾어지게 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보다 더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 가말리엘의 충고가 받아들여졌다고 누가는 말한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또 가르치는 일을 금지당했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의 적이 얼마나 크게 격분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이제는 가라앉혀졌거나 혹은 적어도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처럼 과격한 방법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진리는 무시되고 인간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던 그러한 불명확한 권고가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는가가 분명하다. 가말리엘은 확실히 사도들의 생명을 아끼는 일을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사람들의 수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수치를 당한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그들의 원수들에 관한 한 영원한 침묵 속에 매장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처럼 그의 말씀을 기적 적으로 선포하시는데 그러나 그 복음이 끊임없이 의곡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이 일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 때문에 위험 속에 빠진 사람들의 생명을 아껴주기만 한다면, 혹은 그렇지 않으면 피를 흘릴 수 있는 형편에서 약간 부드러운 방식으로 돌아선 적이 된다면 자기들이 적지않게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불명예스럽게도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을 두려움없이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귀한 일이다. 그러나 참된 신아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선행의 의무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 속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5:41
사도들은...기뻐하면서 - 사도들은 자기들이 부당하게 다루어졌을 때에 그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고통조차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무감각하였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성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원인을 생각했을 때에 기쁨이 우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될 때마다 언제나 두가지 방면으로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확실히 형벌의 아픔으로 인하여 시달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영적 기쁨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에서 생겨나는 열정이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성급한 후회를 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에 있어서 죽음이 쓴 것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선언하셨지만 역시 죽음이 왔을 때에 그가 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등에 십자가가 지워질 때에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서(ad obeundam crucem) 계속 지고 가도록 고난과 불안과 더불어 싸워야만 할 것을 배워야 한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이라는 말은 누가가 불명예스러웠던 것을 영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얼른 보아서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의 상이성(相異成)으로 인하여 인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치욕으로 생각되는 사항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는 큰 존엄과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견뎌 내신 그런 종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고상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순응하게 될 때에(참고; 빌3:10, 롬8:29)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치욕의 대상이 된다 해도 실상은 우리가 뛰어남의 표시가 되고 있음을 훌륭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공공연하게 그 그리스도의 흔적을 이야기하였다(갈6:17)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는 일의 근거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치욕을 자기의 영광으로 흡수할 뿐 아니요, 모욕과 불명예와 조소를 최고의 영예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다. 이리하여 비록 십자가를 지는 일에 용감하고 민첩한 사람이 그처럼 소수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거의 모두 육체의 감
=====5:42
저희가 날마다...쉬지 아니하니라 - 그들의 기쁨과 함께 또한 번함없는 견지성(堅持成)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제 승리의 결과를 앞질러 자기 마음에 가지려고 또 지구력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러 올리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켜 주는 박해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기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에 스스로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괴로운 싸움을 싸워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탈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죽음을 향해 용감히 진군하기 위하여 채찍맞는 일로 무장을 한 것이다. 정말 우리의 길이란 미묘한 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사소한 박해를 통과해 욍으면서 우리는 마치 이미 퇴역군인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즉시 그 횃불을 넘겨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 설 교 >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면
양인순목사(성지교회) / 행 5:33-42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존경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중에도 존경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사 중에도 존경받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똑같은 목사인데도 존경받는 목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목사도 있습니다. 성도 가운데도 존경받는 신앙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존경받고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기왕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라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자식으로부터 존경받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존경받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존경받는 목회자, 중직, 제직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존경 받는 신앙인과 존경받지 못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먼저 존경받지 못하는 신앙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두 번째로 사도들을 불법 구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옥문을 여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도들은 도망치지 않고, 주의 명령대로 성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황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다시 긴급 체포조를 결성하여 사도들을 잡아옵니다. 그리고 왜 예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불법을 행하고 있느냐고 심문합니다.
이에 사도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속히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성령님도 동일하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식하다고 여겼던 사도들 앞에서 두 번씩이나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바로 오늘 본문 33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행5:33)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크게 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도들을 죽여서 없애버리려고 했을까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그들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도들을 죽일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 멤버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입니다. 그 중에 다수파는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얼마든지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왜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집중해서 전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관할권자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두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을 예수를 죽인 당사자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죄없으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전파했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일차로 공회 명령으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전히 예수를 전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교리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주변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항상 옛날 이야기나 하면서 발목을 잡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자기 이기심에 노예로 사는 사람은 어디가나 눈총을 받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에 해당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절제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은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분노로 표출합니다. 지나가다가 자기를 쳐다봤다고 칼로 찌릅니다. 길을 가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다고 그 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입니다. 바로 본능적인 감정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사회병리적인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심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
마음의 분노가 구체적인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쌓아두면 언젠가는 분노로 표출됩니다. 그것은 결국 마귀가 틈을 타는 통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누군가에 대해서 미움의 감정이 있습니까?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그 곳에 마귀가 틈을 타면 분노의 감정이 커집니다. 어느 순간에 마귀가 스위치를 누르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는 마귀가 틈타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마귀의 올무에 빠집니다.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깨집니다.
육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살면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삶을 망치지 말라고 경고해주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15년 동안 목회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에 목사님과 뜻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교인들이 비난을 하고, 나쁜 루머를 퍼뜨려도 꾹 참았습니다. 속이 상해도 기도로 인내하면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제직회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공개적으로 목사님을 다시 비난을 합니다. 여기서도 참으셔야 하는데 목사님이 그만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대학시절 유도 2단이었습니다. 양복 윗옷을 벗어던지고 집사님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업어치기로 내던졌습니다. 순식간에 제직회장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15년 동안 잘 참았는데 한번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항상 후회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상사나 동료에게 꾸중 들었다고 사표 던지면 더 큰 일이 닥칩니다. 바로 실직자가 되고, 앞길이 답답해집니다.
감정을 따라 충동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면 존경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분노함으로 마귀의 밥이 됩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 가운데 존경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다같이 34절 말씀을 읽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행5:34)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법과대학 교수입니다. 그는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랑스럽게 자신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임을 고백합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편에 섭니다. 사도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합니다. 평상시에 사람들로부터 말과 행실에 문제가 있던 자가 그랬다면 벌써 면직되거나 감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백성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당시 온건파였던 힐렐의 후예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랍비로 불려지는 ‘라반’의 칭호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라반 가말리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대한 존경도, 순수성과 금욕도 가버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말리엘은 동료들로부터 모든 백성들로부터 율법의 백미로 불려질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자입니다.
합리적 사고란 종합적, 논리적,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주관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주관이 있기에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입장을 강조하면 복잡해집니다.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말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면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주장과 고집을 부립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면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문제 자체에 매이지 말고, 더 큰 틀에서 접근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동료들이 사도들이 잘못했다고 여기는 가운데 반대 의견을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고집이 되면 안됩니다. 종합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한 결과여야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의 결과여야 합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어 냅니다. 무조건 Yes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로는 창조적인 No!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더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No!를 할 때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바로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No!하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구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항상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하거나 감정에 이끌리면 공동체에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창조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위기를 뚫고 나가는 힘을 부여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둘째로, 매사에 조심성이 있는 자입니다.
35절에 보면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조심하라”는 것은 원문성경이나 영어성경에 보면 두 가지를 조심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consider carefully what you intend to do to these me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너 자신을 조심하라”입니다. 성경에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바울도 “너 자신을 삼가라(Beware of yourself).” 말합니다. 가말리엘도 “너 자신부터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ves).” 합니다. 사람은 남의 티를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나도 그럴 수 있지’ 인정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오히려 더 많은 잘못을 하면서도 남의 작은 실수와 허물을 지적합니다. 손을 들어 검지가 ‘너 잘못 했어’라고 가리키면 엄지가 바로 자신을 가리키며 ‘너는 더 잘못 했어’라고 충고합니다.
설교를 듣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듣고 난 후에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제 남편이 들어야 되는데 오지 않았어요. 오늘 설교는 수다쟁이 김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 아닙니다. 설교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남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이면 ‘나는 더 큰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을 통해 나를 보게 하는구나.’ 깨닫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네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쁜 동기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습니다. 동기는 마음속에 있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의 동기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동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말하면 반드시 상처를 줍니다. 나쁜 생각과 동기로 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우리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선한 동기로,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의 결과가 선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가말리엘은 자신에 대해서 조심하는 자입니다. 항상 악한 무리 속에서도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데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설명을 합니다. 36절에 드다 라는 사람이 일어나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해서 400명이 따랐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드다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요단강 가에 불러 놓고 강이 갈라지게 하고 무리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결국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가 보낸 기마병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갈릴리 유다 역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주후 6년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시리아 지역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와서 과세를 하기 위해 호적 등록을 시켰습니다. 이 때에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재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 통치자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다는 곧 처형되었습니다.
두 인물을 통해서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는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망한다’입니다.
결국 가말리엘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같이 38-39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5:38-39)
사도들이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온 소행이라면 무너질 것이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면 자신들의 소행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임으로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높여주십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자는 결코 존경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겸손한 자는 존경을 받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비록 채찍을 맞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히려 믿기 어려운 태도를 보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들은 매를 맞았는데도 좋아합니다. 오히려 나같은 부족한 자가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은 당시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안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모습은 없는지요? 드다와 유다처럼 스스로 교만하여 넘어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율법교사 가말리엘처럼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며 자신을 잘 살피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진리를 따르고 있는지요? 주님은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고 존경받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 516장>
♫ 1.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길
2. 주예수 따르라 승리의주 세계 만민이 나아갈
길과 진리요 참 생명 네 창검을 부수고 다 따르라 화평 왕
3. 놀라운 이 소식 알리어라 세계 만민을 구하려
내주 예수를 보내신 참 사랑의 하나님 만 백성이 따를 길
4.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으면 온 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후렴) 어둔 밤 지나고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
전도자로 변화되자!
행 5장 33~42절 / 박신진목사
오늘은 변화주일이다. 무슨 변화일까? 산상변모사건을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그냥 훌륭한 인간에 머무르는 분이 아니라 신적 본성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준 사건이다. 즉 내적 변화, 본질이 바뀌니까, 외적변화, 용모의 변화가 있었다고 성서는 증언한다. 마태 17장 2절에 보면,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하였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한다. 일반적인 빛이나 흰색이 아니라, 초월적인 빛과 흰색이라는 것이다. 보통 이 부분은 ‘예수님의 신성 현현’으로 인정되는 구절이다. 귀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제자 셋이 이 장면에 참여하고 경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제자공동체인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신성을 바라보고 그 신성에 참여하는 믿음공동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후예, 오늘의 성도들인 우리는 어떻게 변화할까? 내적 변화가 용모의 변화로까지 나타나기를 기도하자! 다 예뻐지고 고상해지고 품위있어지기를!! 예수님이 하늘의 신성을 가지신 빛나는 분으로 나타나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되찾아서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다른 변화를 요구한다. 예수 증인 되는 변화이다. 그냥 예수를 아는 데에서 더 나아가 예수를 전하는 데로 변화되어야 한다. 오늘 성경이 알고 보면 그 말씀이고,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능력있게, 강하게 만든 비결이 나온다. 그렇다! 예수 믿어 구원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는가? 이제 교인이 되었으니 실제 예수 따르는 자로, 제자로 성숙하기를 축복한다. 제자는 어떻게 변화할까, 증인이 되어야 한다,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신자로! 신자가 제자로! 제자가 전도자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변화의 방향이다.
오래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의 제자들이 전도하다가 붙잡혀갔다. 잡아간 관원들이 제자들과 얘기를 해보니 큰 죄도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제자들을 없애고 싶어 했다. 그때 존경받는 지도자였던 율법학자 가말리엘이 그들을 죽이거나 핍박하면 오히려 세력이 커질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충고한다. 유대인들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제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런데도 그냥 보내지 않고 채찍질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주었다(40절). 풀어주기로 했으면, 무고히 붙잡아서 죄인 취급을 했으니 미안하다 사과하고 보상해서 보내야지, 어떻게 매를 때리고 내보는가?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제자들이 오히려 예수 이름 때문에 창피 당하는 일을 기뻐하였다(41절)! 게다가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42절). 전도하다 붙잡혀가서 매를 맞았는데 오히려 기뻐하고, 놓인 후에는 더 열심히 전도했다니!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다. 부활하신 예수가 구주요,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였다. 그때 교회는 부흥하며, 내적으로 생명 있는 교회가 되었고, 제자들과 성도들은 점점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 변화산에서 얼굴이 빛나고 옷이 희어지면 무얼 하겠는가? 멋있어지면 뭐하나? 예뻐지면 뭐하나? 물론 그것도 직접적이고 보기에 좋게 하니까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하지만 잠깐 기분 좋아질 뿐이다. 그러나 전도하면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 교회는 전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고,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그 일을 잘하여 온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뿌리내리게 했다. 우리도 이 일에 부름받았다. 전도하자!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오자! 복음을 우리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일이 일어나게 하자! 그것이 우리가 잘 되는 길이다!
교회가 생긴 이래 교회는 사회와 불신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왔다. 예수님 자신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으셨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는 군중의 폭언과 빌라도의 사형 집행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에 교회가 사회에 많은 기여도 하였고 신앙인들의 삶이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한때 기독교가 거의 공인 종교가 되다시피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다가 근래 20여년 동안 기독교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제 물러서서 조용히 있어야 하나? 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더 나아가 계속 사회에 복음을 전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려, 범사에 근신하여 전도자의 자세를 지켜야 한다. 먼저 우리 믿음의 고백을 분명히 하라.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점검하라!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경건생활에 힘쓰며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예수를 증거하고 나타내며 사회에서 교회를 수호하기에 더욱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닌 진리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며 이 시대에 꿈과 희망을 주는 생명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소리를 하고, 그 말이 이치에 제법 맞는 것 같더라도 흔들리지 말라! 지혜로우면서도 용기 있게 진실한 사랑으로 전도하라!!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8, 20-21)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목적이다. 따라서 열심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전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앙인은 전도해야 한다. 듣기 싫어하더라고 복음으로 권면하라! 초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고,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전도하기를 쉬지 않을 때 진정한 변화와 능력이 교회 안에 임했다.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죽기를 무릅쓰고 전도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 전도할 수 있을까? 오늘 설교시간에 짧은 전도 강습을 하니, 어디다 메모해 두시고 실천하라! 전도를 위해 다섯 가지를 하라!
1) 전도하려면, 예수를 자랑해야 한다.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예수를 자랑하자! 예수님의 교회를 자랑하고 예수님의 사람들을 자랑하고 예수의 일을 자랑하자! 교회도 완전하지 않고, 믿는 사람이라고 다 훌륭하지 않다. 부족한 점도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빛은 감추기가 어렵다. 우리 안에 빛나는 등불이신 예수를 자랑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전도이다.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면 자꾸 불이 잦아들어 결국 꺼지고 말지만, 등경 위에 두면 멀리까지 비춘다.
오늘날 소위 교양 있는 성도들이 전도하지 말라고 하면서 복음의 은혜와 감격을 가슴 속에만 감추어 둔다. 각자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고, 신앙은 양심의 문제니까 강요할 수 없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말 아래 감추어두면 어떻게 되는가? 점점 은혜를 잃어버리고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잘 모르고 부족하지만, 말씀대로 받은 은혜를 전하고 구원받은 기쁨을 증거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복을 내려 주신다. 예수를 자랑하라, 받은 은혜를 자랑하라, 베푸신 축복을 시인하고 더욱 드러내기에 힘쓰라.
2) 전도하려면, 세상 죄를 마음 아파해야 한다. 세상에 죄가 가득 찬 것은 우리가 전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이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은 전도로 나타나야 한다. 세례 요한도 죄를 책망했고, 요나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의 회개를 전했으며, 많은 선지자들이 세상 죄를 아파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세상에 죄가 넘치는 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것을 마음 아파하며 내 책임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소망이 있다.
한번은 어떤 권사님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상상할 수 없는 거친 말들이 터져 나왔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예수는 무슨 얼어 죽을 예수냐, 일 마치고 나서 소주 한잔 먹으면 거기가 천국이다 하는 핀잔이었다. 이 권사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먹고 사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병들어 눕게 되면 거기서도 소주 천국을 운운할 수 있느냐’ 하면서 책망을 했다. 정말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죄 없이 사는 거요, 인간답게 사는 것인데, 그러려면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살아야 한다, 교회로 나오라. 그러자 이 기사가 생각해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복음을 바로 전하면, 처음에는 생각만 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교회에 나오게 된다!
3) 전도하려면, 영혼을 사랑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신앙인은 밤낮으로 기도하지만 특별히 전도 나갈 때는 철저한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이 필요한 영혼, 주님을 향해 나오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죄악의 세력 앞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많은 기도 중에서도 전도하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신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며 놀라운 평안과 축복을 받는다. 여러분! 새해 들어서 전도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누구를 전도하겠는가? 그냥 살다보면 부딪치는 사람에게 전도할 수도 있지만, 계획을 가지고 그 영혼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다보면 전도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럴 때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게 된다.
어떤 분이 전도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도를 나가는데 교회 옆으로 이사온 지 여러 달 되는 사람에게 전도하러 갔다. 그랬더니 그 집 주인이 자기 성경책을 꺼내 보여주면서 교회 옆으로 이사오던 그 주일부터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주일마다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대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고 하였다. 어떤 집사님은 자기 동네 슈퍼 아줌마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그 아줌마가 워낙 거칠고 싸움도 잘하는 사람이라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 아줌마가 너무나 열심히 듣는 나머지 손님이 와도 장사를 할 생각도 아니 하고 복음을 듣는 게 아닌가! 결국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에 예비된 영혼을 만나게 해주시고,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신다!
4) 전도하려면, 끈질기게 실천해야 한다.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는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녔다(눅15:4). 영혼을 찾는 일에는 인내와 분발이 필요하다. 찾을 때까지 노력하겠다는 끈질김이 있을 때 영혼을 구하게 된다. 어떤 집에 ‘발바리’라는 별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쏘다니기를 좋아해서 걸핏하면 잃어버렸다. 한번은 설날에 온 친척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온 식구가 음식 만들던 것을 중단하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날이 저물도록 헤매다가 밤에야 파출소에서 찾아오게 되었다. 자식을 찾으니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애 엄마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을 이상하게 마음이 툭 떨어지면서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시각도 지체할 수 없었단다. 자식은 찾을 때까지 찾는다. 자식 잃어버리면 밥도 안 먹고 찾는다. 아는 사람 집이라면 빠짐없이 다 전화하고 연락해본다. 우리도 전도하려면 영혼을 사랑하는 끈질긴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어머니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5) 전도하려면,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참으로 복음을 필요로 하면서도 일시적으로 복음을 배척한다. 우리는 복음을 배척하는 겉모습을 보지 말고 복음이 필요한 영혼의 요구를 보아야 한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광신자라, 무례하다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영혼 구원의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도 외롭고 죄에 매여 고통을 당하는 불쌍한 영혼이다. 물론 우리는 전도할 때 무례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우리는 예의 바르게, 경우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예의를 지킨다고 아예 복음 전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서울 봉천동 어느 교회의 사모님은 평생 처음 전도나갔다가 문전 박대에 형용할 수 없는 더러운 욕을 먹고는 돌아와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교회 안에서 사모님 사모님 하고 대접만 받다가 밖에서 복음을 전하며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니 이제야 내가 주님의 편이라는 실감이 납니다.” 인천의 어떤 여자 집사님은 전도대에 끼여 춘천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웬 남자에게 뺨을 두 차례나 맞고도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니’ 라는 생각이 들어 제자들처럼 기뻐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왕보다 더 영광스럽게 왕비보다 더 고상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영혼을 위하여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더라도 복음을 전하며 ‘주를 위해 망가지기’를 기뻐하는 성도가 되자.
많은 교회가 외적인 부흥, 성장에만 관심을 두고 내적 변화, 태도의 달라짐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이 변화주일에 이뤄야 할 중요한 변화는 복음을 아는 데에서 전하는 데에로 나가는 변화이다. 전도자 되는 일, 증인 되는 일이다. 증인은 순교자와 어원이 같다. 전도자 되려면, 증인 되려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 희생은 목숨을 바치는 큰 헌신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릴 때, 기회를 보아 그분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고 소개해 주라. 안 하다 처음 하려면 정말 ‘쪽팔린다!’ 복음을 위해 쪽팔림을 감내하라!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길이다. 내가 전도자가 되는 게 정말 중요한 변화이다! 전도하려고 하면 마치 보험을 들게 하거나 물건을 팔 때처럼 망설이게 되는데,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아는 복음을 그냥 진실하게 전해주고 그 영혼을 사랑하면 된다. 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거나 억지로 교회에 끌어오려고 애쓸 필요 없다. 복음을 아는 대로 느낀 대로 기회를 보아 전하면 된다. 한편, 복음 증거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니, 전도의 말과 함께 생활의 덕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지난주에는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었었고, 이제 봄을 기다리는 주현절 마지막, 변화주일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새봄이 다가온다. 이번 봄, 코로나 극복을 계기로 전도할 계획을 세우고 일 년 동안 열심히 전도하는 삼척제일 교인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내가 교인에서 전도자로 변화되자!” *
능욕을 기뻐하던 사람들
행 5장 33~42절 / 우선동목사
1.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
30-31절에서 사도들이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였다고 전하는 것을 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33절에서 크게 분노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권세를 이용하여 아예 사도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34-35절입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유대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최고의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 유명한 사도바울이 유대교에 속해 있던 시절 그의 율법 스승이 바로 가말리엘이었기 때문입니다. 행22:3에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고 소개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가말리엘이 소란스러운 논쟁이 벌어지는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뒤 사도들 처리에 신중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36-3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예전에 스스로 정치적 구세주임을 자처하며 무장봉기를 꾀했던 드다의 무리와 유다의 무리가 모두 한 순간에 스스로 소멸되어 버렸음을 예로 들면서 사도들을 죽이려 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상과 소행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드다나 유다처럼 얼마 가지 않아 반드시 스스로 망할 것이지만,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인간이 무너뜨릴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경우에 사도들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사도들이 잠시 밖에 나가고 없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했던 사람은 오직 가말리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밥 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세와 명예를 얻고 누리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죽이려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나 하나님의 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도들에 대한 질투와 시기 그리고 사도들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진리를 짓밟고 대적하는 삶을 거리낌 없이 반복해 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말리엘은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하나님을 향해 방향이 바뀌어 지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제안을 한 것의 배경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가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 의장까지 역임했고 말년에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처럼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울이 그의 제자였기에 늘 가말리엘의 제자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바울이 그에게 진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수 있고 가말리엘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말리엘의 경고에 대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을 40절이 기록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사도들의 사상과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정중히 사과하고 예의를 갖추어 석방시켜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채찍질을 하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 것을 협박한 뒤에 마지못해 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순간적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항상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모든 신앙 훈련은 바로 이것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이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었습니다. 반면에 죄 없이 채찍질을 당한 사도들의 반응은 41-42절이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왜 이유 없이 채찍질하느냐고 대들거나 어디 두고 보자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어둠의 세상에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능욕을 감수해야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그 일에 선택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나아가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서든 성전에서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진정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매일 진리를 반복하는 삶을 기꺼이 살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 시간에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평소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고후4:8-10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고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거나, 답답한 일을 당하거나, 마침내 거꾸러지고 만다면 자기 삶의 길을 바꾸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욱여쌈을 당하는 상황을 맞아도 자신은 결코 그 상황에 싸이지 아니하며,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아무리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아예 거꾸러진다고 해도 망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더더욱 예수 생명의 증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반복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진리를 위한 반복만이 참된 삶이요, 진리를 위해 죽는 것은 영원히 사는 길임을 그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순간에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경우에,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는 그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복음을 전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해 제자들은 수치와 모욕, 즉 능욕을 당했고, 사도들은 그 능욕 당함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런 사도들에 대한 본문의 마지막 기록이 42절입니다. 당시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지닌 유대교 지도자들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입밖에도 내지 말 것을 엄히 명하고 매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든 거침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옮긴 것으로 ‘구원자’란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사도들은 ‘예수는 그 그리스도’라고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리스도,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기다리던 그리스도, 바로 그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 즉 너희가 못 박아 죽였던 예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담대하게 전하는 사도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처음에는 그들 역시 자신들만 생각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모셨으면서도 마지막 순간,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크고 높은지를 놓고 다투던 한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한 목숨 살기위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주님께서 체포당하셔서 대제사장의 뜰 안에서 심문 받으실 때, 주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던 한심한 배신자였습니다. 그때의 사도들이라면 그들은 지금 상황에서는 입을 닫고 조용히 있어야 마땅합니다. 신체적 위협이 직접적으로 가해지지 않을 때에도 지레 겁을 먹고 주님을 배신할 정도였다면, 투옥과 채찍질에 협박까지 당한 지금은 예수의 ‘예’자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공공연하게 전하고 다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배신했던 그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목숨을 걸고 증언하고 있는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들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뀐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사도들에게 예수님이란 존재는 그분의 능력을 빌려 각자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이용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주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현장에서의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이상 스승도 아니고 추종할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마음속으로부터 버렸던 그 예수님께서 죽음을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이 그동안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그리스도셨습니다.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 자신들의 생명과 삶, 자신들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해주시는 ‘그 그리스도’를 그들이 직접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금할 수 없는 그들의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충만한 자신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나,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모여들었을 때에나, 그로 인해 투옥되고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본문 속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고 소환되었을 때에도, 그들의 진술은 항상 같았습니다. 언제나 같은 진술을 반복했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그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가 그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데 그들의 일생을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이 돌려받은 것은 세상의 권세나 명예나 부귀가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핍박과 박해를 거쳐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거나, 참수형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외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생명과 삶, 그들의 전 존재가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프랑스어권에서 천주교의 평신도가 가끔 신부가 없는 상황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할 때 드리는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고 합니다. ‘오, 주님! 이 죽은 사람이 개처럼 장사되지 않게 해주소서!’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몇 년 전에 옥상에서 기르다가 죽은 진돗개 한 마리를 묻은 적이 있습니다. 다리 밑 습기 많은 땅을 파고 간단히 묻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의 코에서 호흡이 멎는다면, 과연 우리의 죽음은 개의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의 죽음이 개의 죽음보다 나을 것이 있겠습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개는 주인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합니다. 주인을 사랑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만약 개가 자기 주인에게 대들거나 배신한다면 그것은 오직 한 경우, 즉 미쳤을 때뿐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미치지도 않았습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배신하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개보다 못할 뿐 나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 또한 개의 죽음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낫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개보다 못한 삶을 산 인간이 주님을 향해 개처럼 장사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 없는 의인을 위함이 아니라, 개보다 못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개보다못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개보다 못하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개보다 나은 사람으로 회복되고 또 개보다 나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과 주님의 사도들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야말로 주인에게 절대 충성하는 개보다 더 못한 인간들입니다. 사도들 역시 비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외면하고 배신한 사도들 또한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개보다 못한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뚜렷하게 구분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그 그리스도’임을 끝까지 부정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무리 높은 권세를 부려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었고, 결국 그들은 개보다 못한 인간으로 그들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하찮은 잡종개보다 더 못해 보이던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가 그 그리스도임을 삶의 체험을 통해 믿음으로 인해 개보다 못한 인간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의 사람, 의인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요, 개보다 나은가 개보다 못한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들의 이 놀라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를 도전받습니다. 하나는 나는 과연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인가? 또 하나는 나는 정말로 ‘예수는 그 그리스도’시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선택의 순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언제나 예수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나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예수가 그리스도시라고 전하고 가르치고 소개하기를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박지은 목사 / 행 5장 33~42절
지난 주일에는 뭐 성탄절하고 이렇게 있어서 몇 번 메시지가 나갔습니다 만은 주일 메시지에 제가 중점적으로 생명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우리 하나님과 나 사이는 무슨 관계라 그랬습니까? 생명관계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의심이 없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별로 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확실히 믿습니다. 누리는 만큼, 이것을 믿는 만큼 실제적인 힘과 능력이 증거 되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는 것 다른 종교와 달리 구별하기 위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생명의 종교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계시의 종교라! 그렇게 말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의 종교라 그렇게 강조하고 싶고요.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 생활은 믿기 쉽다! 어렵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기 쉽다 어렵다 이것을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면 그대로 우리는 믿는다! 안 믿는다! 상관없어요. 너무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기 위해서 억지로 애쓰고 노력한다면 종교에 빠지고 그것은 안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날에 우리 생명에 문제라는 것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한번 짚어봤고 그 생명이 내게 이루어지는 역사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된다. 이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하나님께서 다 주었어요. 이름으로 그 이름으로만 아니고 그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로 믿도록 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뭡니까?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인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전체에 기록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 복음서에는 특별히 소개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 대해서 깊이 생명과 연결해서 설명한 것이 주로 요한복음 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첫 장부터 생명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에는 깊은 그 어떤 진리를 소개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요한 복음서에 보면 상당히 여러 가지 재미있는 토론들도 많이 나옵니다. 토론들이 주로 뭐냐 하면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생명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이시다! 이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안 믿으려 그러고 이걸 믿는 이것을 증거 하는 사람들을 죽이려 그러는 겁니다. 그게 이제 뭔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그런 말씀이죠. 그래서 그런 것에 그런 어떤 사건들이 급하게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요. 구체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와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보고 사람이 아니냐!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기도 하고 귀신들린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무 중요한 말씀을 많이 해 놓았어요.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진리가 누가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런 내용들로 쭉 나와있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많은 말씀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은 8장 4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47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그랬습니다. "(요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이 예수를 향해서 사람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들린 사람이다 사람이라고 그런 어떤 나쁜 평가를 하죠. 그때에 49절 말씀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그랬습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죠.
그 다음에 이럴 때에 유대인들이 또 52절에 보면 "(요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냐하면 예수를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왔지만 누구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설명할 때에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지난주에도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한번 보십시다. 요한복음 기록을 맺으면서 그 목적을 분명히 말씀했죠. 20장 31절에 뭐라고 말씀을 했느냐? 다같이 시작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그래서 예수께서 이 사실들을 쭉 열거를 하면서 기록한 요한이 뭐라 그랬냐하면요.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되는 목적과 이유가 뭐냐? 왜 워낙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 믿으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안 믿으니까! 여기서 목적을 그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누구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러면서 그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중요한 요한복음서에 핵심입니다. 그러면 쉽게 봅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습니다. 믿는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많은 경우 여러분 확실하게 분석을 해 보면요. 그리스도를 잘 안 믿어요. 잘 안 믿습니다. 예수를 믿어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믿고 하나님을 잘 믿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많은 경우 사회복음이라던가 이런 어떤 것을 예수님을 하나의 이간 모형으로 해 가지고 본 받자! 이렇게 해 가지고 뭐 예수님처럼 열심히 뭔가 헌신하고 착한 일 하고 그 다음에 가난한자 찾고 뭐 이런 사람들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 배경 속에는 여러분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그 사람들 배경 속에는 뭐냐하면 예수님을 인간 모델로 본다는 사실을 알아야됩니다. 인간 모델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간 모델로 보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자! 그래서 여러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살자! 그러면 그 말 자체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수가 없는데... 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저의 구원주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흉내도 못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살자! 그런 배경에는 자신도 모르게 뭐냐하면, 예수를 인간 모델로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그 경향이 그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967년도 우리 신앙 문제 때문에 NA 하고 KAL하고 나누어지고 그때 뭐 싸움하고 뭐 제가 알기로는 어느 교회에서는 똥바가지 들고 똥을 퍼붓고 이랬어요 막!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 싸움에 대해서 나쁘다! 좋다!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싸움의 배경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 만들려는 그런 운동이 미국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이것을 한국에다가 적용시키려 하가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때 중요한 내용이 뭐냐하면, 동정녀라는 말을 없애자 그랬습니다. 동정녀! 예수도 하나의 인간이다! 말하자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짙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을 부인하고 그래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믿으니까 그런 것들을 부인하고 그래서 동정녀라는 말을 빼자. 그러면서...
원래 원문에는 젊은 여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맞습니다. 원래 원문에는 그것이 젊은 그대로, 원문 그대로는 젊은 여자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정녀라고 그랬던 것은 그때의 통념상 이 단어가 처녀에게 해당했던 단어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원문 자체로 봐서는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뭐냐하면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자! 그게 그때에 일어났던 하나의 운동입니다. 그래가지고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 그런 어떤 운동들이 여러분과 제가 속해있는 교단 때문에 온 싸움이요. 또 이것은 전에 우리교단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지켜야 된다는 정도가 아니고 믿어야 될 문제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예요.
그래서 그냥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것을 믿는 것까지도 또 좋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못 믿었을 때에 여러분이 창세기 3장에 전부다 걸려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게 지금 문제예요. 창세기 3장의 문제를 누가 합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을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수님,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인간 예수 참 위대한 일 했다! 큰일했다. 그것은 세상이 다 압니다. 여러분! 여러분 그 증거로 올해가 몇 년도입니까? 2000년도 바로 오늘 마지막 끝이죠. 2000년도라는 기준이 누구입니까? 예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신 불신간에 예수 인정 다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그래서 좋을 일 했다. 그리고 어떤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줬다. 제일 큰 영향을 줬다. 그게 프랑스에서 그때 과학자들과 여러 분야에서 모인 100여명이 선출해낸 인물이 예수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들도 믿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불신자들이 그 예수를 무엇으로 안 믿습니까? 그리스도로 안 믿습니다. 그리스도로!
그런데 여러분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깊이 따지고 보면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까지는 그 분을 그리스도로 못 믿고 있습니다. 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실이 거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흐르는 갈등 내지는 이 현장들이기 때문에 성경전체는 이 설명을 주로 다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이 사실을 주로 말하면서 오늘 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바로 전도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가르치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도, 말해주는 것 그래서 이것을 말씀운동이다! 그러고 이걸 가지고 우리는 전도라 그럽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천당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라야 천당 갑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 바로 이해가 안 되니까 종교로 빠지고 신비주의로 빠지고 그렇게 돼요. 다시 말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믿음이 뿌리를 안 내린 상태에서 기도 많이 하면 신비주의로 빠집니다. 신비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 뿌리가 안 내리고 성경에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을 열심히 알고 그 다음에 열심히 교회 와서 봉사하면 어디로 빠집니까? 종교로 빠지게 되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다 있거든요.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 믿어요. 그래서 보통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 안 합니까! 분명히 구별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 많다니 까요! 개개인이 정말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여기에 모든 답이 나온다 그랬습니다. 창세기 3장이 바로 여기에 답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조금 이렇게 보면요. 요한1서 2장 22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 그래도 전부 거짓말쟁이예요. 교회 나와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메시아이시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시고 여러분 왕으로 사단의 왕국을 꺾으시고 제사장으로 오셔서 모든 죄와 허물을 해결하시고 저주에서부터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 떠나서 인간 세상에 빠졌던 우리를 하나님 만나게 만드셨다. 이 직분을 바로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이것을 믿느냐? 믿을 때에 뭐가 옵니까? 창세기 3장 15절이 성취가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교회 열 번 다니고 백 번 다녀도 어디에 빠집니까? 종교에 빠지고 사단의 통로가 돼요. 그러니까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리더라 구요.
오늘 여러분 가슴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우리 교회 다니면서 거짓말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이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이것도 그리스도 되심을 안 믿는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 그랬습니다. 이 전부 종교에 빠지고 이게 이상한데 빠지는 겁니다. 요한 일서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하나님께로서 났다 그랬습니다. 나았다. 지난주에 제가 이 말씀을 상세히 드렸죠. 나았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5장 42절도 이 사실을 강조했거든요. 사도행전 18장 5절도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그랬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것을 못하도록 죽이고 심지어는 이 공문까지 가지고 와서 감옥에 가두고 안 그랬습니까! 그래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해답을 주고 난 후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어요. 예수는 알아요. 그런데 인간 예수로 그리스도를 안 믿으니까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해 주었다 그랬습니다. 이게 성경 전체의 내용이에요. 그 다음에 사도행전 18장 28절에도 뭐라 그랬냐 하면요.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그랬습니다. 쭉 내용이 전체 다가 이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가 뭐냐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많은 장들을 할애했더라 구요.
그래서 이것을 다는 말씀을 못 하지만 제가 몇 군데 몇 구절 찾아보면요. 마태복음 1장 16절에도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그러니까 예수는 이름인데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를 낳으니라" 그렇게 첫 번부터 기록을 하죠.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왜? 못 깨닫는 자들에게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되는 일은 어떤 자격을 가져야! 어떤 자격을 가지고 거쳐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왜? 직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잠깐 이 말을 다시 말씀하면 내가 집에서는 그리고 일반인으로서는 박지 온입니다. 집에서는 나를 목사님 그러고 안 그래요. '아빠!' 그리고 그렇죠. 그리고 우리 집사람 나한테 뭐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를 때는 목사님 이렇게 부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부를 때는 '여보!' 그러고 고함을 지릅니다. 나는 느닷없이 '여보!' 그래도 '예!' 그리고 내려갑니다. 왜 개인적으로는 박 지 온입니다. 그런데 이 강단에 설 때는,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는 뭐라고 부릅니까! 목사라 부릅니다. 그러니 이 강단에 서기까지는 반드시 소정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시험도 쳐야됩니다. 아들은 시험 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직분을 맡길 때는 시험을 칩니다. 아버지의 회사에 있지만 그 아들을 어떤 직분을 맡기고 어떤 직책을 맡길 때는 소정의 과정을, 자격이 주어져야 맡깁니다. 바로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지만 그 예수님을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한 직분인 메시아 직분을 주시기 위해서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야 돼요. 그 소정의 과정이 뭡니까? 십자가라 그랬습니다. 십자가! 그래서 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문제였고 그리고 마지막 그 십자가를 지실 때에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엘리 엘리 나마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참한 그런 어떤 그 고백이 안 나옵니까! 그러면서 마지막에 운명하기 직전에 뭐라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직책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신 그분이 그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뭐가 됩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이루었다 그럴 때에 삼 직을 가지고 삼 직을 완성하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왕으로 사단의 왕! 특별히 사단의 왕! 그럴 때에 사단은 흑암의 왕이요. 저주의 왕이요. 죽음의 왕입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라 그랬습니다. 사단은 주로...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현재 어디에 주로 떠느냐? 히브리서에 말씀한 것처럼 죽음 앞에서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흑암 권세예요. 사단 권세예요. 그러니까 사단의 왕국 죽음의 왕! 바로 사단을 완전히 깨어 버렸습니다.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로 통해서 죄와 저주가 왔습니다. 그래서 저주와 죄를 통해서 여러분과 여러분 후손들이 엄청난 운명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 빠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 빠져 있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부터 구원받고 거기서부터 건져질 수 있는 길이 누구입니까? 바로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그 죄에서부터 저주에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세상에 빠져서 세상 좋아하고 세상 욕심에 빠져서 사단 왕국에 속해서 세상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던 그런 저희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게 되는 순간 이때에 바로 선지자의 직책입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 선지자의 직책을 한 몸에 가지시고 이것을 최후로 하나님 앞에 이것을 인정받는 그리스도로 그 직책을 인정받는 순간이 언제냐? 최후로 그리스도 되시는 순간이 언제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 시간입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지고 이 사실이 내가 믿어져야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디에? 내 안에 들어옵니다. 이때에 나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뭐가 됩니까?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부터 당장 말씀이 결론부터 말 안 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뭘 주었습니까?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권세를 거기에 부여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못하게 하고 이 일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못 믿게 하고 예수가 그리스도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요. 그것이 쭉 유대인들에게 나오는 배경들입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배경이에요. 만약에 예수가 그리스도 되신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라도 그것은 뭡니까? 사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7절 말씀 보면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에 너무 좋아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러면서 칭찬했죠. 그러면서 세 가지 축복을 했죠. "이것을 알게 한 것은 네 자신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그러면서 반석에 있고 그 다음에 기도응답 주시고 전부다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예수께서 뭐냐? 그리스도 되시는 마지막 단계를 마지막 수준을 이제 그 일을 치러야 되는데 그 일이 뭐냐 하면요. 십자가 지시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메시아 되시는 일에 가장 중요한 메시아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 중요한 일을 해야됩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것을 설명할 때에 여러분 성경에 보면요. 그것을 설명하기 전까지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것을 설명하기 전입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16장 21절부터 "이 때로부터" 그랬습니다. "이 때로부터" 이제 저들이 알았으니까! 설명을 해 줍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그러는 것은 오래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가르쳐주고 싶었지만은 아직은 때가 안 되니까 비로소 설명하게 됩니다.
여러분 알아듣는 것이 아무 때나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알아들어요. 아마 여기 오신 분들도 처음 예수 믿자마자 알아듣고 메시아 알아듣고 그게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알아듣습니다. 받아합시다. "때가 되어야 알아듣는다." 긍정하십시오. 혹시 아직까지 잘 못 알아듣거든 낙심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알아듣습니다.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런데 금방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을 해 놓고 베드로가 어떤 짓을 하느냐? 이것은 짓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되는 가장 중요한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통과해야 될 그런 과정을 베드로가 뭐냐? 막았습니다. 예수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가만히 가로되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쳐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이 주께 해당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당장 그 자리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 이전에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방해되는 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못 믿게 하는 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왜 이것을 믿어버리면 사단이 깨지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보루가 예수도 믿고 하나님의 아들도 믿고 있지만 뭘 못 믿게 하느냐? 그리스도 되심을 못 믿게 해요. 그리스도 되심을... 여기에 우리도 모르게 속고 있더라 구요. 많은 경우... 여러분 개개인이 이 문제가 해결되면요. 자연적으로 창세기 3장 15절 문제 해결됩니다. 창세기 3장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뭘 상하게 해요?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다음 뱀의 후손은 여자의 뭘 상하게 해요? 발꿈치를 상한다! 그건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대강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라는 별명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이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태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지난주에 말씀했죠.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를 낳게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누구에게?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하시고 성경이 뭐라 그랬냐하면요. 받아합시다. "마리아에게서" 누가 났어요? 예수가 났다! 그랬습니다. 이래서 별칭 여자의 후손이라! 별명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여자의 후손을 다른 게 아닙니다. 왜? 여자가 유대의 관념에서 절대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생명은 누구로부터? 남자로부터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없어요.
그래서 족보를 기록할 때에 마태복음서에 여자들에 대해서는 안 나와요. 아예! 전부 그냥, 남자 이름만 누가 낳았다. 누가 낳았다. 전부 남자 이름이 있지 여자는 안 나왔어요.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가 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 되니까! 그것이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낳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우리가 지금 여자의 후손이다! 그렇게 별명을 붙였습니다. 성령으로 바로 이것을 하나님 앞에... 그런데 예수가 낳는데 예수가 낳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삼 직을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뭐가 되어야 돼요. 그리스도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게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5절에도 보면 이런 문제로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그랬고 이 설명을... 왜 모르니까! 그 다음에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에 현상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세에 현상에는 잘못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 그리스도가 분명히 뭔가 말세에 약속은 했는데 잘못 아는 것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뭐냐? "말세에 미혹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들이 24장 5절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시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여러분과 제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되는데 이 그리스도가 되는 사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전부 사단의 역사거든요. 이것을 지금 바로 이해를 하셔야되죠.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7절에 똑 마찬가지로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복음 9장 22절에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이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거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는 사람은 무조건 출교하기로... 출교라는 것은 옛날에 출교 그러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에 보장을 못 받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쨌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출교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예요.
그 다음에 요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그 다음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 사도행전 2장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뭐가 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 그랬는데 예수가 그리스도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럴 때 참 거부감이 나오더라 구요. 어떻게 예수님이 날 때부터 그리스도신데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성경에 깊이 들어가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구요. 예수는 날 때부터 예수이지만 그리스도 되시는 것은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어디에서?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은 쉬워요. 믿는 것은 쉬운데 뭐냐? 그에게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신은 시간이 필요하더라 구요. 금방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를 보내시면서 여기 분명히 말씀한 것이거든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행 2:36)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주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어디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리스도 되는 일에 완성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아야되죠. 사도행전 3장 20절에 보면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누구로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했죠.
그 다음에 오늘 사도행전 9장 22절에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무슨 말이냐 하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누가 임했습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실을 말할 때는 뭐냐? 고넬료의 가정에서 행했던 베드로의 전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했더니만 그 그리스도를 깨닫고 아는 순간에 누가 임해버렸습니까? 성령이 임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하리요." '하나님이 하시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임함도 제가 지난주에 우리 그 크리스마스 때 설명을 했습니다만 예수를 정확하게 정말 그리스도로 내가 영접하는 순간에 따라서 뭐가 임합니까? 성령이 그 자리에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죠. 이 사실이 바로 중요한 사실이죠.
그 다음에 사도행전 26장 23절도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곧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고난 받아야 이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제가 많은 성경 구절을 말씀드린 것은 이것을 조금만 유의하시면서 성경 읽어보면요, 제가 다 빼먹어 버렸어요.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딱 알기 쉽게 몇 구절만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찾아보니까요. 신약에는 쫙 나오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너무 많아요. 다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너무 안 믿고 살았다 이겁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왜 안 믿었느냐? 안 믿게 된 배경이 사단의 배경들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이 그리스도 되신 것을 믿는 순간에 누가? 창세기 3장에 사단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단의 문제가 오늘날 해결된 옛날에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해결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찾아봅시다. 이건 우리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싶어요. 요한계시록 12장 9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아멘. 여기에 옛 뱀, 용이라 그러는데 용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사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뱀도 역시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록에 사단을 용으로 표현을 하는데 그 용이 어떤 존재냐? 옛 뱀! 옛날에 뱀으로 뱀을 통해서 들어왔던 사단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옛 뱀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 누구 꼬시던 뱀입니까? 아담 하와를 꼬시던 옛 뱀입니다. 바로 그게 뭡니까? 바로 그 옛 뱀이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몰라가지고 뱀을 사단인줄 알고 뱀을 마귀로 알고 옛날에 어릴 때도 우리가 얼마나 '저 마귀 잡아라!' 그러고 그래가지고 뱀을 잡고 그랬습니다. 저도 뱀 잘 잡아요. 뱀은 대가리 찍어 버리면 죽습니다. 그래가지고 옛날 시골에는 물뱀, 도랑에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가지고 당장 잡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껍질 벗겨 가지고 구워 먹어버리고... 그런데 그 여러분 뱀 고기가 그렇게 맛이 있더라 구요. 아주 고소한 것이 맛이 있어요. 보통 여러분 웃지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그 군인들 특수 훈련받을 때는 뱀 잡아먹는 것도 훈련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요. 그 뱀을 사단이라 생각을 하거든요. 뱀을 통해서 상징입니다. 통해서 누가 들어왔습니까? 뱀을 통해서 사단이 역사 한 것이죠. 여러분들이 지금 이 통로를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옛 뱀에 걸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잘못하면 왜? 그리스도 부정하게 되면 옛 뱀! 사단에 걸리게 됩니다. 일단 이리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예수를 그리스도의 생명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확인되는 만큼 창세기 3장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해결된다. 우리가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모든 기도의 문제들이 응답되는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여자의 후손으로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완전히 사단의 머리가 박살나 버립니다. 완전히 깨버립니다. 그러니 죽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 저는 그 그렇게도 볼 수 있어요. 뒤꿈치를 상한다! 그럴 때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을 꺾을 때에 어떤 면에서 이것을 발악을 하면서 우리에게 작은 손해는 끼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겁낼 것 없어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 과거를 이렇게 돌이켜 보면요.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 그런 이상들이 있어요. 그 인상들이 뭐냐하면,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좀 어려웠습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면요. 사단이 그 발악을 하니까 좀 어려웠죠.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그리스도를 확인하는 만큼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형통하게 되어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었을 때에 잘 되는 것 같으나 한꺼번에 허망해 지더라 구요. 한꺼번에 망하게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내게 그리스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다 믿는 것은 어려움이 없어요. 믿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삶이 좀 어렵다 그것은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발악하는 것도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확인되는 만큼 뭡니까? 구체적으로 승리하는 역사가 나옵니다. 왜?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모든 원수의 능력을" 뭐할? "제어할 권세를 주셨나니 결단코 너희를 해할 자가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자꾸 손해를 보게 되고 자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저녁에 조금 말씀을 하겠습니다 만은 오늘 저녁에 조금 제가 이 구체적으로 언약을 잡게되는 그때부터 답이 다 있더라 구요. 성경에 보니까! 그때부터 전부 다 풀려요. 육체적인 문제 물질문제 다 풀리더라 구요. 이게 안 되는 만큼 어려워 져요. 성경 전체에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전부 사단의 역사 속에 나도 모르게 우리 자신들이 사단의 통로가 돼요. 옛 뱀이 되어 있더라 구요. 옛 뱀이! 옛 뱀이 그러니까 흉직스럽잖아요. 옆에 사람 뱀으로 생각해 보세요. 같이 앉아 있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모르니까! 다 당하는 겁니다. 오늘 정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 모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사단의 유혹 때문에 불 신앙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이 자꾸 부정이 되고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이게 불신입니다. 여기서 모든 통로가 열리고 그것이 바로 옛 뱀이 되는 사단의 통로가 되는 엄청난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이것을 확인하고 믿는 만큼 2001년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큰 축복과 역사가 계속해서 승리로 역사 될 것을 확실히 믿고 이 일에 여러분과 제가 함께 섰음을 감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 축복이 계속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쉬지말고 복음을 전하자
김 조 목사 / 행 5장 33~42절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사상적, 종교적인 투쟁사요 가난, 질병, 환경과 싸우며 살고 더욱이 사탄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성도의 삶에 언제나 승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초대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이루며 사도들이 능력있게 복음을 증거함에 많은 환란도 핍박도 받게 됩니다. 감옥에도 갖히고 매도 맞고 재란을 받으면서도 그런것에 굴하지 아니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하셨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승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러한 승리가 있기 원하며 “쉬지 말고 복음을 전하자”라고 제목하고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비결 즉 승리의 비결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저 합니다.
1. 확신 갖고 자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33-39절)
국가 최고 기관인 공회에서 판정한 것도 무시하고 예수 부활의 증인임을 전하게 되니 산헤드린 공회에 크게 두 파가 있는데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들이 크게 분노하여 없이 하고자 흥분하고 있을 때에 부활을 믿는 바리세파의 공회원 중 가말리엘 교법사가 말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법사요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유전을 체계화한 힐렐의 손자이며 율법학자로써 율법의 고문으로 한때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으로 일했고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인 미쉬나(Mishnah)에도 그의 글이 많이 실려 있으며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22:3) 이러한 인물이 사도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사도들이 일에 너무 흥분하지 말라 최근에 정치반역을 꾀하였던 드다, 유다도 일어났다가 다 망하고 흩어져 버렸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된 아무리도 사람에게 난 사상이나 행실이면 얼마 안가서 망해버릴 것이요 만약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니 그냥 버려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옳게 여겨 채찍질하고 석방했던 것이다. 가말리엘의 변론이 매우 합리적이다. 사두개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게 되었으니 칭찬 받을만했지만 내용면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분명한 것 없이 중용적 태도로 우유부단했습니다. 교법사이기에 새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해야 하는데 드다 , 유다 같이 정치적 선동을 일삼던 자와 같이 비유하여 소란한 백성을 조용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것과 당시 지배자인 로마의 허락 받아 집회를 하는데 종교문제도 시끄럽게 되면 유대교인들이 자기가 손해를 볼 것 같으니 사두개인도 잠재우고 자기(유대교)도 보존하려 했으니 분명한 교리가 아니라 기득권 보호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결과적으로 복음을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확신 갖고 자신 있게 권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 아니요 하나님께로 났으니 구원은 오직 예수입니다.(요14:6, 행4:12) 현실과 타협이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를 예수 외에는 구원 있다고 하다가 신학교 교수 면직 파면되었고 성당에 부처상이 있었다니 인간적인 착상으로 종교 갈등해소 하려는 것은 좋게 보이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요 구원은 오직 예수라 그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 당해 주신 분(사53:4)이요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확신 갖고 자신 있게 전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고난 당해도 기쁨으로 전해야 합니다. (40-41절)
가말리엘 말을 합당하게 여기고 사십에 감한 채찍질을 하고 석방시켰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명예로 알고 기쁘게 했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는 용서하지 아니하는 무서운 채찍입니다.(신25:3) 그런데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의 매질은 장차 받을 영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받는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롬8:18) 성도들이여 하나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주실터이니 이를 생각하면 사도들처럼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기쁨으로 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 때문”(벧전1:7) 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아니합니다. 많은 수모와 멸시 천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축하 받을 일임을 알고 기쁘게 전도합시다. 1930년대에 “예수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님은 매를 맞을수록 하늘에 상 받음을 알고 매 맞을 때마다 감사했으니 석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고난당해도 상급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전도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언제나 어디서라도 전해야 합니다. (42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는 매일 또는 하루 종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딤후4:2) 하셨습니다. 또한 “성전에 있든지”라고 하신 것 보면 성전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라 전하기도 좋지만 반대자에게 다시 체포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요 “집에 있든지” 라는 말은 생활의 터전이 집이기에 사람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식구들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전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으니 십자가는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만큼 하고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요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복음전하는 것이 성도가 꼭해야 할 사명일찐데 쉬지말고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가말리엘 교법사처럼 현실적 문제 해결 위해 확신 없이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타협인 태도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되며 오직 예수임을 분명히 확신 있게 증거해야 하며 고난과 환란을 당해도 하늘나라 상받을 것 기억하고 언제나 감사하며 기쁨으로 전해야 할 것이요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전도했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로 나의 삶의 전체가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있기를 원하며 이렇게 쉬지 않고 전함으로 큰 복을 받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교법사 가말리엘
손상률 목사 / 행 5:33∼42
사람에게 있는 자질 가운데 나면서부터 간직하게 되는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후천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전자는 부모나 조상을 잘 만나서 얻게 되는 경우이지만 후자는 좋은 선생님이나 좋은 선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장 모범된 선생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 보면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는 유대인의 스승이요 교법사인 가말리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명망높은 선생으로서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해 성경이 말하는 교사들 가운데 가말리엘의 행적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존경받는 선생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은 남을 가르칠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며 도덕성이나 품행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 교법사(敎法師)의 신분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중 율법에 정통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율법사라고 하며(마23:35), 또는 서기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전자는 율법을 잘 알고 이를 해석하는 자이며 후자는 그 중에도 문서를 관장하고 가르치는 학자를 뜻합니다(마2:4). 교법사라는 말은 누가복음 5:17에도 나오는데 이 역시 율법의 선생을 의미합니다. 본문말씀 34절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신약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랍비들 중에서도 선택된 7인의 "라반"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라반인 힐렐(Hillel)이 그의 조부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건한 율법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역시 학자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2) 경륜이 높은 선생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불이 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자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이 일었습니다.
매우 당황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일을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21에 보면 "…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서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제사장과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권위있는 인물들을 망라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 사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궁리하였습니다.
33절에는 "저희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가말리엘이 나서서 회중을 장악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지난날에 있었던 드다의 사건과 갈릴리 유다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그 두가지 사례는 모두 백성을 선동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으나 그 동기도 불순했고 결과도 좋지 않았습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곧 사그라들고 만다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3) 이치에 맞는 가르침
사도들의 처리를 놓고 공론에 붙인 산헤드린 회의는 크게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도행전 4:16-17에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하자"고 결의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하며(행4:19-20) 더욱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잡아 매를 때리며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행5:4-41).
이와같은 사람들을 폭력으로 제압하려하고 무자비하게 죽여버리자고 할 때 가말리엘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 시켰습니다.
진정한 선생은 어떤 경우에도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치지 않고 또한 대중의 인기를 몰아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도리를 일러주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5:11-12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신앙있는 선생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신앙과 지식, 또는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갈등을 빚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바벨론 나라에서 방백을 지낸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은 거친 이교의 문화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난을 겪었습니다(단1:8).
예수님 당시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공회의 의원으로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집단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는 주님을 사모하였고(요3:2) 가장 요긴한 순간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였습니다(요20:39).
가말리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하고 사도들을 박해하며 죽이게 한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주님을 위하여 요긴하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본문 38-39절에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대 사회를 장악하였습니다(요9:22). 그러나 같은 공회 의원이면서도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자기 목적을 이루겠다고 날뛰는 경우 "가시채로 뒷박질하는 고생"이라고 하였습니다(행26:14).
(2)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였습니다.
36-37절에 가말리엘이 예를 든 두가지 사건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의 경영으로서 모두다 무의미하게 끝난 사건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의 글에 의하면 드다가 일어나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자기가 명령만하면 요단강도 갈라진다고 선동하였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 중에 드다를 제2 여호수아로 알고 수백명씩 따라 다녔으나 로마 총독 파두스(Fadus)가 보낸 기마병에 의해서 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다도 백성을 선동하며 로마에 납세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은 사례를 가지고 설명하는 가말리엘은 결국 인간의 무능을 지적하는 것이며 산헤드린 공회가 저희들의 단합된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5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본문 38-39에서 가말리엘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옛날 신앙가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두고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고 하였습니다(삼하16:10).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롬11:33-36).
Ⅲ. 하나님 나라에 이바지한 선생입니다.
선생된 자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5:19).
(1) 주의 종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정신적으로 그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의 주장을 펴면서 사도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도들의 목숨을 구해 내면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지혜나 재물이나 권세나 무엇이든지 그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나를 생존케 하신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면서 헌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에4:14, 수14:10).
(2)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덕망있는 랍비로서 많은 후학들을 키우며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신약역사에 불후의 인물인 사도 바울같은 사람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 보면 바울이 천부장 루시아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해22:3).
구약시대 엘리야는 곳곳에 선지학교를 세우고 엘리사와 같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왕하2:1-11). 예수님께서도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지상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였습니다(마10:2-4). 바울의 업적 중에는 전도를 하여 교회를 세운 일과 성경을 기록한 일이며, 그 중에도 디모데, 누가, 디도, 빌레몬과 같이 기라성같은 재목들을 배출해 낸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주일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서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꾸준히 키워냅니다.
다니엘 12:3에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존경받는 사람
김상복 목사 / 행 5장 33~42절
사람들 중에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 중에도 부모의 존경을 받는 아이와 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부모와 그렇지 못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예수 믿게 해주셨으니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이웃들 간에 꼭 존경받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왜 존경을 받지 못합니까? 육을 따라 본능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5:33). 여기서 유대지도자들은 본능과 습관과 감정대로 살았으므로 적절하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육을 따라서, 느끼는 대로, 1차적 분노에 의해 행동하였습니다. 분노는 인간의 기본적 감정이라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자연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분노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화내거나, 폭언하거나, 구타하거나, 비방하거나, 복수하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사람을 죽일 수 있기에,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십니다. 분노는 또한 사람의 명예를 짓밟고 관계를 깨뜨리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에, 예수님은 분노를 조심하고 감정에 따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15년 동안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인간사회기 때문에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인들이 한두 명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동안 속상한 일도 잘 참아오셨는데, 어느 토요일에 열린 제직회에서, 항상 그랬던 사람이 또 공개적으로 목사님을 공격해 왔습니다. 여러분, 정 못 참겠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아야 합니다! 그 때 못 참으면 큰일 납니다. 그분은 그날만은 참지 못하고 왈칵하는 감정에 따라 행동해버렸습니다. 대학시절 유도 2단이었던 그분이 벌떡 일어나 웃통을 확 벗어던지더니 그 집사님의 멱살을 잡은 것입니다. 제직회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분의 15년 목회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제직들이 다 보는 가운데 그 난리를 폈으니 어떻게 그 다음 날 예배를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교회의 지도자 다섯 명이 한 밤중에 저를 찾아와 주일예배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러분, 1차적 분노와 감정과 육을 따라 행동하면 존경을 잃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사임하고 택시기사가 되었다가 후에 슈퍼마켓 직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의 말에 기분 나쁘다고 사표 던지고 나오면 그 때부터 실직자가 되는 거예요. 감정적이고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살면 존경받지 못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1차적 반응이 아니라 2차적 반응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육을 따라 행동했지만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을 따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매우 안타깝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19-23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생각하니 고통이 너무 커 낙심을 했습니다. 1차적, 육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마음 깊이 묵상해보니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여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2차적, 영적 반응입니다. 육적 반응으로 낙심하여 끝나지 않고, 영적 반응으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니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1차적 반응에서 2차적 반응으로, 육적 반응에서 영적 반응으로 돌아설 때 이와 같은 위대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1차적, 육적, 감정적, 습관적 반응에서 해방받기를 바랍니다. 분노대로 그냥 움직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요. 살인한 사람은 다 후회합니다. 최근에 제가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한 젊은이가 자기 부모를 죽였다가 감옥에 가서 후회하고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삶을 망치지 말라고 경고해주십니다.
유대의 지도자들 중에는 존경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교법사 가말리엘인데 사도바울의 스승이었습니다(34절). 교법사는 지금의 법과대학 교수인데,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로 유명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요? 가말리엘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합리적 사고란 종합적, 논리적,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조심하지 않으면 주관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누군가 무엇을 보고 저에게 얘기를 해줄 때가 있는데, 자세히 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은 그 시간에만 본 것인데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때는 “제가 보니까...,” “제 생각에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라고 주관적임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전부고 진실이다” 하지 말고 내가 본 대로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것이요, 객관적이라는 것은 모든 형편을 다 알아보고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다각도로 확인하고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존경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가말리엘은 공과 사를 구별했습니다.
그는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5:34). 자기들끼리 의논할 일이 있다며 사도들을 나가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 5명 정도가 교회에 다니고 2-3명이 다니지 않을 때, 교인들이 다수이므로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목사님이나 교회의 흉을 보게 되기 쉽습니다. 성도들끼리 모였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마치 집안 식구들이 집안 얘기를 하는 것처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 집사에 대해서 흉보면, “나도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는 분별력 없는 그런 일을 평생 보았는데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있는데 가족끼리 서로 흉보는 이야기를 하면 누워서 침을 뱉는 격입니다. 손님이 보면 대번 “콩가루 집안이구나!” 할 것입니다. 공과 사를 구별해야지요.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가말리엘은 매사에 조심성이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이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5절). 여기에서 “조심하라”는 것은 원문성경이나 영어성경에 보면 두 가지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너 자신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바울도 “너 자신을 삼가라(Beware of yourself)” 했고, 가말리엘도 “너 자신부터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ves)” 합니다. 인생은 자기 자신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실수가 보이더라도, 좋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그를 공격할 게 아니라 “아, 나도 저런 짓을 한 적이 있는데, 내게도 저런 경향이 있는데...” 하며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예배를 마치고 나가 인사하는데, 어떤 부인이 남편과 함께 오시더니 “오늘 설교는 제 남편이 들어야 되는, 제 남편에게 딱 맞는 내용인데 마침 제 남편이 처음 나왔어요” 합니다. 여러분, 설교는 남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입니다. 그 남편에게 참 미안하고 무안했어요. 지금 그 분이 여기 앉아계시다면 “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생각하시겠죠? 정 말해주려면 다음 주일날 나에게 살짝 와서 얘기해주면 되는데, 남편 앞에서 그러면 되나요? 공과 사를 구분해 줘야죠. “먼저 너부터 조심하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네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동기로 말하거나 결정하거나 행동하거나 일할 수 있습니다. 동기는 마음속에 있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 동기를 아십니다. 그 정도는 돼야 하나님이지, 여러분의 속마음도 모르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동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자기 자신과 동기를 조심할 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가말리엘은 역사에서 영적인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는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400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다... 그 후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다”(36-37절). 여러분, 칭찬은 남이 해줘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면 사람들이 꼴사나워서 못 봐요. 말은 안 해도 속으론 고개를 흔들지요. 여러분, 칭찬은 남들이 하게 하십시오. 칭찬해주면 고맙다고 하세요. 다른 사람이 칭찬해야지 스스로 자랑하며 “내가 잘났다. 내가 유대의 지도자다. 날 따르라” 하면 됩니까? 귀가 얇은 사람들 수백 명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죽으니까 기껏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다 망했죠.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도 똑같았어요. 혼자 날뛰어서 사람들이 잠시 따르기는 했지만 그 사람도 죽으니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렸어요. 가말리엘은 이런 역사에서 교만한 자는 망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섭리를 살폈습니다.
여러분,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삶 위에 크신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안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찾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절). ‘이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보복이나 처벌하지 말고 그냥 둬라.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리도 그저 주관적으로 감정적으로 분노해서 섭섭해서 외로워서 속상해서 일차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모든 어려운 일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크신 손길을 보는 눈과 지혜와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어떤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쓸데없이 날뛰다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너무 빨리 육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봐가면서 살아간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가말리엘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은 억지나 강제로 일하거나 시키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섭리적이며, 논리정연하고 냉철하여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며 말하니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0절). ‘옳게 여기다’는 것은 가말리엘에게 설득되었다는 말입니다. 일차적인 감정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조심하면서 인생에서 계속 배운 지혜를 활용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살피며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아멘이에요!” 이렇게 살면 존경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핍박을 받아도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사도들은 매를 맞았는데도 좋아했습니다. 매 맞고도 좋아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 아닌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본능적, 육적, 일차적으로 살지 않고, 이차적, 영적으로 사니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와 도움을 받고 살면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일을 발견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나가서 더 열심히,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도대회를 열고, 전도대상자 명단을 두고 기도하며 노방전도도 합니다. 그 가운데 설령 핍박을 받아도 주님을 위한 핍박에는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통을 받는다 해도 진리를 따라 꾸준히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우리가 다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해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인간적인 일차적 반응으로 살지 않고 성령에 의해 지혜롭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가정과 교회에서, 이웃과 직장과 사회에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받고 살 때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랍비 가말리엘
김영규 목사 / 행 5장 33~42절
적대자들의 분노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하던 중에 사두개인들이 가장 분개했습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3) 얼마나 분노했는지 사도들을 다 죽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였는데 그 제자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공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수파에 속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죽일 결심을 했다면 얼마든지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분개한 것은 특히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중점적으로 전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관할권자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무시하고 성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집회를 하고. 병자들을 고쳐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두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을 예수를 죽인 당사자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무죄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전파했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일차로 공회 명령으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전히 예수를 전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튼지 사두개인들의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 뻔했습니다. “없이 하자”는 말은 “ajnairevw”(아나이레오)인데, 제거하다, 혹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인다면 추종자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최초, 최대의 위기 상황입니다.
랍비 가말리엘의 제안
바로 이럴 때에 공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놓은 사람이 랍비 가말리엘입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일군을 돕는 사람을 준비해 두십니다. 비록 그가 바리새인이고, 율법주의자이지만 사도들에게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왜 사도들에게 호의적인 발언을 했는지? 그의 출신, 그의 사상을 통해서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랍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칭호를 보면 “율법 교사”입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34) 율법교사라는 말은 “nomodidavskalo"”(노모디다스칼로스)입니다. 노모스란 말은 율법이란 뜻이고 디다스칼로스란 말은 선생이란 뜻입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율법교사입니다. 유대 역사에서 보면 가말리엘은 힐렐 파의 7인의 라반 중에 한 명입니다. 보통 “랍비”라는 말은 “나의 선생”(my teacher)이란 뜻입니다. “라반”이란 말은 “우리의 선생”(our teacher)입니다. 라반이란 칭호는 랍비 중에서도 크게 존경받는 인물에게 붙여지는 칭호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랍오니여”라는 말을 했습니다.(요20:16) 이 말이 바로 라반입니다. 가말리엘의 부친은 라반 시므온이고, 조부는 라반 힐렐입니다. 힐렐은 샴마이와 함께 바리새파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인물입니다. 샴마이는 보다 엄격한 보수파였고, 힐렐은 온건파에 속합니다. 가말리엘은 바울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본문에 보면 가말리엘은 백성에게 존경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율법의 영광도 떠났다고 슬퍼했을 정도입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 공회의 의장은 사두개파인 대제사장이었지만 가말리엘의 발언에 모두 수긍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의 판결도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공회의 다수파입니다. 그들의 결의로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반대하는 결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바리새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공회가 가말리엘의 발언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 이유입니다.
본문은 가말리엘이 바리새인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34) “바리새”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쉼”, 아람어 “페리솨야”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분리된 자”(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의식법에 소홀한 속된 사람들과 구별 짓는다는 뜻으로 이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하스모니안과 구별된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스모니안은 시리아의 안디오쿠스 4세(175-163BC)에 대항하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제사장족들을 가리킵니다. 한 때 바리새인들은 하스모니안들에게 협력했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 시기(76-67BC)에, 바리새인들에게 상당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잠깐 하스모니안과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결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스모니안들이 정치 세력화 하고 세속적인 지배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주후 1세기 경, 바리새파는 형제애로 뭉쳐진 5-6천 명의 강력한 조직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공식적인 해석자였던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헤롯 통치 후반기, 특히 주후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 유대 사회에서 유일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고, 특히 힐렐파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습니다. 힐렐은 바로 가말리엘의 조부입니다.
그러면 왜 가말리엘이 바리새파라는 점을 밝히고 있을까요? 바리새파가 사도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리새인은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형식주의에 매인 자들, 외식주의자들,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 예수님께 욕을 먹은 사람들, 뭐 이런 식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바리새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그들이 행하는 경건의 노력, 혹은 그들의 율법적인 가르침 자체는 매우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편견은 바리새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 적대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시대에 보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보다는 교회에게 훨씬 호의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개종했던 공회원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공회 앞에서 나는 부활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 바리새파는 수긍했고 사두개파는 적개심을 표시했습니다. 최초의 교인들 가운데 상당 수는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교리적으로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 바래새파가 사두개파보다 사도들에게 덜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말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살기등등한 공회의 분위기를 일순간 바꿔 놓았습니다. 심문 받던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판결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5) “조심하라!”(prosevcw), 주의하라,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행동을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이전의 두 가지 사례들을 참작하라고 합니다.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사건입니다. 드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요단강 가에 불러 놓고 강이 갈라지게 하고 무리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떨다가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가 보낸 기마병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이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갈릴리 유다 역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유다는 가말라 유다라고도 하고, 갈릴리 유다라고도 했습니다. 가말라는 골란 지역의 한 지명입니다. 주후 6년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시리아 지역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와서 과세를 하기 위해 호적 등록을 시켰습니다. 이 때에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재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 통치자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다는 곧 처형되었지만, 그를 이어 열심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미미했습니다.
가말리엘의 결론을 보세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8-39)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설 것이고,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지리라! 이것은 힐렐파에 속한 바리새인들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의 의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늘의 이름으로 모인 무리마다 결국은 세워질 것이고, 하늘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모인 무리마다 결국은 무너질 것이다.”(2세기 랍비 요한의 말) 가말리엘은 바리새파 사상에 충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 하늘이 냈으면 흥할 것이고, 인간이 냈으면 망할 것이다! “And so in the present case, I say to you, stay away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plan or action should be of men, it will be overthrown;”(NASB)
가말리엘의 온건주의
바리새파 중에는 샴마이파가 있고 힐렐 파가 있었습니다. 대중들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샴마이파가 아니고 힐렐 파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극단적인 것은 해롭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7:16-18)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은 의롭게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 의인이라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니 무엇에든지 극단적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보면 극단주의가 자주 등장하고, 지지를 받는 듯이 보입니다. 정치적인 극단주의를 보세요. 공산주의자들은 반세기 동안 지구상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수 천 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스탈린의 학살, 폴포트의 학살, 김일성의 학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수법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상과 이념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중합니까?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 결국 지상낙원이 되었습니까? 지상 낙원은커녕 지상 최대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을 보세요. 자유가 없는 지옥이요, 먹을 것 없어 굶주리는 지옥입니다. 그래도 김정일이 좋다는 사람들이 남한 땅에 수두룩하니 한심한 일입니다.
종교적 극단주의도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은 합력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이 죽일 일입니까? 미국의 인민사원 사건, 한국의 오대양 사건, 시한부 종말론 파들을 보세요.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고 자기들도 망했습니다.
극단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어떤 생각도 전적으로 옳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당시에는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만, 결코 최선은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사상이 나오겠지요. 둘째로, 극단주의는 상대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거리에서 시위하는 주동자들을 보세요. 그들의 요구는 대통령이 그만두라는 겁니다. 헌법에 보장된 임기 5년의 대통령을 그만두라고 하면 그들은 법 위에 있습니까?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 뭡니까? 쇠 파이프, 죽창, 돌, 새총, 화염병, 경찰 버스 뒤집기, 이것이 민주 사회에서 할 일입니까? 지금 혁명하자는 겁니까?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상대를 없어지라고 합니다. 우리만 살면 된다. 너희는 사라져 주면 좋겠다! 셋째로, 극단주의가 지속된 예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추종자들을 죽음으로 내몰던 사이비 교주들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매사에 온건주의자가 되세요. 인간 사회에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장 옳다는 생각,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퇴장시키려는 행동, 이런 과격한 행동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과격파는 항상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듭니다. 정치적 과격파, 종교적 과격파, 과격파가 되지 마시고 온건파가 되세요.
기독교가 진리라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가말리엘은 아주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하나님이 내신 진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제아무리 막는다 해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진리는 결코 억압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사도들은 석방되었지만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채찍은 가죽 끈으로 만든 것으로, 끝에는 쇠붙이가 달려 있어서 한 번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나갑니다. 그런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때로는 태장을 맞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40 대에 한 대 감하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완전히 짐승 취급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 나왔다.”(공동번역)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의회에서 나왔다.”(현대인의성경) 아무나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 당할 자격이 있는 자가 박해를 당합니다. 사도직은 박해를 당하는 특권을 받은 직책입니다. 내가 감히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특권을 받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자랑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박해는 아무나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만이 당합니다. 오늘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하셨습니까? 특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집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석방되었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전파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한 우리는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복음을 전파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리는 가만 놔둬도 점점 흥합니다. 비진리는 흥하려고 애를 써도 망합니다. 역사를 보세요. 과거 기독교 2000 년 역사가 어떠했는지? 유대인들의 박해, 로마 황제들의 박해, 공산당의 박해 속에서 교회는 견디어 왔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박해 중에 부흥했습니다. 박해를 이기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세요! 박해자가 있으면 옹호자도 있습니다! 복음은 승리합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생명의 말씀
최승윤 목사 / 행 5:34~42절
오늘 설교제목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5:20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가 생명이란 뜻도 되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란 뜻도 됩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생명의 말씀이 주는 생명은 우리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명은 아닙니다. 그 생명과는 다른 생명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그 기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떡도 먹고, 고기도 먹고, 물도 주시고, 포도주도 주시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니 말입니다. 농사 지을 필요도 없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잠 못 자면서 고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경험했던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의 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일종의 징계요 심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다면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고 하면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습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광야 생활이지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늘 함께 하셨고, 보호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 생활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셨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영원토록 산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제 1세대는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굶주린 욕망을 채워주는 대신 심령의 굶주림과 갈증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인 예수님 자신을 그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하늘에 온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빵과 떡으로 사람들의 근본적인 영혼의 굶주림,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지고 상한 영혼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깨진 항아리에는 물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제 얼굴 모습에 신경이 쓰입니다. 잘 생겼냐? 못 생겼냐? 의 문제가 아니라 내 얼굴을 통해서 보여지는 제 자신의 내면세계, 영혼의 상태입니다. 내면의 모습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나타난 모습은 참으로 춥고, 짓눌려 있고, 영혼의 기쁨과 평안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얼굴을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얼굴을 잘 생기고 예쁘게 생겼는데 그 얼굴 표정에서 거만함과 고집과 욕심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오랜 만에 만나보면 얼굴 모습이 많이 변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하신지요? 아무리 치장하고 위장을 한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우리의 속 사람이 모두 드러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어서 남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을 감출 수 있다고 하여도 본인 스스로는 만족이 없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힘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채우려고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아우성치는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면 온 몸에 힘이 쫙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조언도, 좋은 이야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간이 길어져서 이제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냥 체념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활기를 주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 초두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이요, 어두움 가운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참 생명이요, 참 빛이신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인생도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가 멸망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방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굶주림과 갈증은 밥을 먹으면 되고, 물을 마시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떡과 물로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어느 정도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단지 영원토록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만족과 풍성함과 생명력을 느끼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요, 그 생명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주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삶 자체가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 우리 속 사람이 힘을 얻는 길,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오직 생명의 말씀이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열매와 증거가 우리 안에 나타나고 있는지요? 생명의 양식, 생명의 말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영혼에 배부름이 있습니다. 만족함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건강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고, 힘이 있고, 성장과 성숙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나 혼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처럼 생명 있는 자처럼 살도록 도와주는 일에 힘을 냅니다. 속 사람이 건강한 사람, 생명력 있는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볼 수 있는 열매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41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제자들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능욕과 멸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도들이 그런 자신들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능욕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기쁜 일입니까?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평안하게, 기쁘게, 고생하지 않고, 즐길 것을 즐기면서 예수를 믿고 싶어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예수를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는 싶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사는 동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뻐한 것은 고난과 능욕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뻐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과 멸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자신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 그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고 멸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택하여 세우셨다,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런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도 받고, 능욕도 받고, 멸시도 받게 해서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얻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게 하셨다. 그 사실을 사도들이 알았기에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4:9절-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처럼 만드신 사실을 억울해 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비방을 당한 것을 억울해 했을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모데 후서 1:11절-12절을 읽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과 마음 고생한 것을 결단코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을 것임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었던 아픔을 경험하고 많이 하고 삽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음 고생하고, 자존심 상하고,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없는데,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교회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로 마음 아프고, 고생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편하게 예수 믿고 싶고, 예수를 믿어도 마음 고생하지 않고 즐겁고 기쁘게 예수 믿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일을 조금만 하려고 해도 금방 이런 저런 일로 마음 고생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세우시고, 깨닫게 하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셨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에 기뻐하십시오. 베드로가 한 번 설교 했을 때 삼 천 명이 회개한 적도 있었지만 잡혀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채찍에 맞기도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하는 모든 수고와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이런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확장되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 얻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 위에 편만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이 땅에 살면서 겪는 모든 수고와 고생과 당하는 모든 어려움들을 주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수고와 노력이 결단코 헛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여러분들이기에 그런 어렵고 힘든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땅에 것, 일시적인 것, 잠시 잠깐 이면 없어질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 놀라운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56:8절).
시편 90편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 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과 수고와 고생은 결단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이 땅에서, 또는 저 세상에서 반드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품고 생명의 말씀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도합시다
행 5장 38~42절 / 고흥식목사
케네디 가문이 젊고 촉망받을 때, 40대에 암살당했다고 1998년 뉴스윅크지는 케네디 가문에 대해서 기사를 썼습니다. 케네디는 40세에 죽고, 마이클은 39살 때 심장마비로 죽고, 아버지 로버트는 대선 후보전에서 42세에 암살당했고, 태어난 지 3일밖에 안된 아들도 죽었습니다. 삼촌은 46살에 암살당했고, 맏형과 여동생도 다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1997년 7월16일 케네디 가문의 마지막 2세는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다 사망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그 가문은 흑암의 줄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축복의 가문은 어떤 가문입니까? 대통령이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의 가문이 아닙니다. 영적줄기에서 흑암의 세력을 잘라야 합니다. 발동 꺼진 배가 침몰되는 배를 구조할 수 없듯, 능력 없는 세상의 힘은 인간의 참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참 능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왜 우리가 전도해야 합니까? 전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케도냐로, 빌립은 에디오피아로, 도마는 인도로, 안드레는 스코틀랜드로, 카비드는 중국으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이기종 목사는 제주도로 그리고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복음 전파자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전도, 선교에 열심인 미국은 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나 영국은 활기가 없습니다.(사52:7)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하고, 박해할 때 바리새인 가말리엘 교법사가 지혜로운 권면으로 사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자제시키고, 사도들은 채찍질하고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풀려났습니다.(고후11:24) 그러나 저들은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며 기뻐하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29절)
저들의 복음전파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처세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예수 그리스도가 주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고전1:23)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복음의 사명 때문입니다.
복음의 사명 정신은 어디서 나올까요? 복음의 빚진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롬1:14)
빚의 종류는 물질의 빚, 마음의 빚, 그리고 영적인 빚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빚지고 빚을 못 갚으면 종으로 팔리거나, 자식을 종으로 내줘야 했습니다.(롬13:8) 멸망 받아 마땅한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구원받아야 됩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 바울은 일평생 자신을 바쳤습니다.(고전9:16)
구 소련인 러시아(Russia)는 이미 9C경에 복음을 받은 나라였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중에서 Russian Orthodox Church는 신도 수 5000만 명으로 추정하는 큰 교회로 존속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몽고족이 침입했을 때는 복음을 위해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고, 도처에 대교회가 많이 세워졌습니다. 19C초 알렉산드로의 푸슈킨, 고골리의 외투,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작품들은 그 당시 기독교 문화가 활발할 때 쓰여진 작품입니다. 러시아 성가(Russian chant)는 11-13C악보(비잔틴 성가)가 슬라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 1917년 11월에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종교 활동과 교회를 폐지했습니다. 러시아의 찬란한 문명의 꽃은 다 지고 말았습니다. 경제는 몰락하고, 정치는 후퇴하고, 후진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승리하고, 일본 도쿄에 입성했을 때 맥아더 장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 세계의 당면문제는 경제문제이지만 이것은 군대문제입니다. 군대는 정치문제요, 정치는 양심의 문제요, 양심은 도덕문제요, 도덕은 종교문제입니다. 종교문제는 신학의 문제인데 미일전쟁은 하나님과 일본신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세계 최종적인 싸움은 신의 싸움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축복을 받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친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2.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41절)
예수 이름으로 욕 받아도 기뻐할 수 있는 힘은 무엇 때문일까요?(롬1:16)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병원, 의술, 고도의 약학이 발달해있으나 병원마다 초만원입니다. 최고의 의학이 발달된 시대이지만 못 고치는 병이 더 많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영혼을 고치거나 살리는 일은 과학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해답은 예수뿐입니다. 예수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고, 가정을 구원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리면, 그 능력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고후5:14)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나의 조건과는 무관합니다. 명문 가문이라서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해서도 아니고, 잘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참깨를 깨끗하게 하려면 체에 걸러야 합니다. 참깨를 채에 넣고 물을 계속 부으면 깨는 깨끗해지고 물은 다 빠져 나갑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찬송하고 예배를 드릴 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맑아집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맑아집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콩나물을 기를 때 물을 계속 주면 물은 다 빠져나가지만 콩나물은 쑥쑥 자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라는 것입니다.
3.전도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공산당 치하에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회교권, 불교권, 힌두교권에서 전도하는 것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 시대, 역사의 종말은 점점 더 가까이 임박해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 타락, 양심미비, 사회부패, 가정혼란, 무질서, 자연계 현상, 예측 못할 천재지변, 등 성경의 말씀대로 임하는 징조들을 볼 때 사람들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전도해야 합니다.(고후6:2, 2:12) 지금 세계도처에 전도의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선 예수를 믿으면 공직자가 되지 못하고, 사업도, 직장도 가질 수 없습니다. 지금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문이 닫힐지 모릅니다. 영혼을 위해 전도합시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세요. 두려워 말고 최선을 다해 전도하고 그를 교회로 인도합시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절)
Day after day they teaching and proclaiming the good news that Jesus is the christ
성경대로 초대교회처럼 쉬지 말고 끈기 있게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나가서 합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행 5장 40~42절 / 오정호목사
우리와 신학노선이 다르기는 하지만 당대에 걸출했던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 독일의 칼 바르트라는 분이 있습니니다. 석학들이 모여 세미나를 하는 중에 거기 모였던 동료들이 질문하기를 '바르트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동안 성경을 연구해 오셨는데 이것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성경의 내용을 표현하면 어떤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실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이 주어진다면 어떤 대답을 할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받은 바르트 교수는 미소를 띠면서 '예수님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좌중에 있던 석학들이 웃었습니다. 당시에도 주일학교에서 많이 불려지던 찬송가의 한 소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찬송가 411장입니다.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단순하지만 신학적인 그리고 성경에 있는 모든 메시지를 압축한 내용의 가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볼 때 '복음'을 만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날 위해 해주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전부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최고 최대의 선물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3:20에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수 있는 선물가운데 최대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2:22에는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자가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도행전2:23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3:14,15에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고 하십니다. 우리 선조들이 영적인 무지함과 교만함 때문에 생명의 구주로 오신 주님을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십니다<사도행전1: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3:13>. 또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2:4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마음을 다하여 믿음으로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사도행전2:21>. 이것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믿을만 합니다. 내 인생 전체를 걸어도 결코 손해보지 않는 이름입니다. 오늘 세례받는 분들과 우리가 이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사도행전2:38절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의 외적 표지인 물세례를 받습니다.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새로남교회 세례교인 명부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책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 이름을 가치있는 이름, 천국에서 발견될수 있는 이름이 되게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 한 일이 있습니다.
1.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41절>.
41절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특권을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 앞을 나왔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고난 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반쪽 복음만을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해놓으신 모든일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동참하는 것은 인생의 특권중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 때문에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누릴수 있는 또 다른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힘있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예수 이름 때문에 받은 그 은혜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내가 복받고 평안한 것에서 멈추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고난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주님이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와 수준이 달랐습니다. 동일한 예수님을 경험하고 동일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삶과는 뭔가 다릅니다. 어떤 정신의학자가 '이 시대는 정신 분열의 시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사 랑 분열증의 시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을 어디에다 누구를 위해 쏟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쏟아낼 사랑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 사랑을 주를 위해서 순전하고 깨끗하게 바치고자 결단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의 마지막 관문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이것이 주님의 관심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면 '비록 연약하고 실패해서 주님의 이름에 욕돌릴때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42절>.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벙어리 신자는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등장하면 항상 '권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권능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따라나오는 단어가 '증인'입니다. 초대굣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을 구했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믿음의 가족들도 벙어리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 처럼 입술을 열어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에 힘쓰십시오. 우리 인생사명 가운데 이루어야할 사명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학식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살았느냐?'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 새로남교회가 주의 이름의 증인을 많이 양성하고 훈련하고 진리로 무장시키는 아름다운 증인이 많은 복된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상대방의 지위나 그에대한 선입견 때문에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어린아이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누구에게도 전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복음 그 자체를 가지고 이웃, 친지, 친구에게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주의 능력으로 복음을 체험하고 이제는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전도할 때 내 자신에게도 신앙의 확신과 큰 영적인 유익들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높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혀 높이지 않는 것이다'고 이해할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을 주신대로 만일 사도들이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복음의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입을 닫고 있을 때 복음을 들어야할자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입을 열 때 또다른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우리 가운데 복음으로 재 탄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남은 생애에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예수 이름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기뻐하고, 예수 이름을 담대하게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주님께서 힘있게 세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쉴 수 없는 복음전도
행 5장 40~42절 / 김남준목사
들어가는 말
성령강림 사건이 사도행전 2장에서 주어진 다음에 계속 복음이 열심히 전파되다가 교회에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떼어먹으면 이런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부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에는 이처럼 심판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성령이 인정해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곳에 그 성령이 동일하게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사도들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다루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나니까, 교회가 다시 거룩함과 순결을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게 오늘 본문의 맥락입니다. 결국 복음전파라고 하는 것도 교회의 영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순결하고, 그 교회가 거룩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할 때 그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니까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그 옥에다가 가뒀습니다.
복음전파와 성령
복음전파의 역사는 항상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성령주심은 성경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지마는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하나님이 내게 느껴지고 관계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앙의 놀라운 감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누리며 사는 것에 놀라운 신앙의 행복을 느끼게 되니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이런 행복 안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는 그런 열망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설교를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간증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고래고래 길거리에서 소리를 치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방법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말로 하든지 글로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찌하든지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야 되겠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한 나라의 복음의 문을 열고 복음의 불을 붙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정된 목표
이 사도들이 오늘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채찍질해서 놓아주었더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매 맞고, 욕을 먹고, 능욕을 당하게끔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듣게끔 말하는 것이 자기가 평탄한 가운데, 능욕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도 틀렸습니다. 성격도 틀렸습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도 같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사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한 면을 체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체험이 어떠했든지 교회에서의 위치가 어떠했든지 또 어떠한 교훈을 들으면서 이제껏 살아왔든지, 그들은 인생 자체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말하는 일에 매었습니다. 붙잡혔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시던 똑같이 연속적으로 이 사도들을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두려워 할 정도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 가지에 그들의 모든 삶의 목표가 꽂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그 모든 것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로 세우셔서 설교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다니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학교를 다니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신 것은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든지 궁극적으로 그 살아가는 방법을 통해서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알리셔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의 증인이라
사도행전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사람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 사람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 아래 서 보지도 못한 그 십자가의 증인들이 되게 만들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까?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은 철저하게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에게 매이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천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실 때 피상적으로 알던 신앙이 확실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알았던 신앙이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형체가 불분명하던 신앙이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되는 거지요. 이런 모든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 전도할 수는 있어도 그러나 전도에 있어서 성과는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엄청나게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든 못 받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복음 전도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상황에서 전도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족이 로마라고 하는 한 울타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방의 민족들이 종교가 없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그 당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라고 하는 이 말도 되지 않은 미개한 이야기를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겠습니까? 자신을 거의 불가능한 일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이세상 사람들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미련한 일 하나에 인생을 걸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에다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 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지어다" 거기서 '너희'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어요?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불모의 지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살아가는 자, 오늘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월급 받고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신앙에 불타고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며, 모험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간증할 만한 것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고 자기 개인의 유익을 포기하며 오직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놀라운 체험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옥문을 흔들고 싶으시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 투옥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그 일 하나에 생명을 건 사람들을 찾기 힘드니까 하나님의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어서 성경은 말합니다.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 그 중심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지상 생애에서의 이름이라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기다려온 그 전 인류를 구속의 소망이신 그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망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어요. 그들은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그 때의 시대에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언제나 사람들이 나뉘어 집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것이죠.
이들이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이 교회 한가운데 있었고 거기에는 필요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구약의 약속 그리고 못 박혀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다시 오실 것, 심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얘기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들을 얘기하면 신구약 성경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전하던 바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복음의 도에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좋을 때나, 혹은 전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든지,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 허황된 교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은 전해도 소용없을 때 내일 다시 전하고 오늘 가르쳐도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다음날 다시 가르치고 금주에 이해되지 않고 ,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도해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가고 쉴 새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쳤습니다.
쉬지 않는 교회
교회가 쉬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유사이래 없는 위대한 성령의 능력의 부음을 받았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부여잡고 도저히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에 예수의 복음을 실어 나르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들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태만하고 헤이하게 느껴집니까? 그 때는 영적 전쟁의 현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지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영적인 전쟁에 자신을 드려야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을 섬기고 진정 당신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예수 믿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천당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우리를 쓰시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들고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지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요.'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약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자신을 드려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절박한 영적인 싸움의 전쟁터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쓰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하기를 그칠 때, 그 교회는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주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어두움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구원의 길을 보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쉬지말아야 할 일
행 5장 40~42절 / 김광일목사
옛날 소돔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이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이 망하는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한 노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그 노인에게 찾아가서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영감님,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데, 왜 쓸데없이 날마다 외치고 계신가요?" 그 말을 들은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자기가 가만히 있다가는 소돔 사람들처럼 금새 변질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소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상, 세상 사람들은 변화를 받지 않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닮지는 않을 것이다."
본문 42절 말씀에 보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 공부하며,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특히 전도하지 않으면서 교회 드나드는 사람들을 더욱 겁내지 않습니다. 전도는 영혼의 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안 하니까 온몸이 병들어 결국은 전신 마비 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 안 하면 마비 증상이 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중단하지 않고 전도했습니다. 모두가(everyone), 날마다(everyday), 그리고 어디서든지(everywhere)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교회는 가르치기와 전도하는 것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쉬면 교회와 우리 자신은 무능력해지고 쇠퇴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할 이유는,
첫째로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전도자 무디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당신은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무슨 상관이 있소"하고 버럭 화를 냈지만 무디는 웃으며 "당신이 화내는 것은 좋은데 예수는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가 "당신은 왜 자꾸 나를 괴롭힙니까?"라고 묻자 "이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아 ! 당신이 바로 무디 선생님이군요"라고 알아볼 만큼 전도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도 빚을 지면 채무국이 되어 국제통화조정기구인 IMF의 내정간섭을 받습니다. 개인도 빚이 많고 갚을 능력이 없으면 신용등급이 떨어져 은행 대부도 받을 수 없고 신용카드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속에는 복음의 빚진 자라는 복음적 사명의식이 투철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교회 출석 자체로만 만족하려는 종교생활로 나아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광신자나 어떤 특별한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점차 교회는 쇠퇴해가고 여호와 증인이나 몰몬교와 같은 이단자들이 더욱 전파에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87세 되던 해 알렉산더 메더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가 아니고는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람, 하나님이 아니고는 전혀 원하는 것이 없는 전도자 100명만 저에게 보내 주십시오. 그들이 성직자이건 평신도이건 상관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야 지옥문을 부술 수 있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전도자 100명만 있으면 영적 전쟁에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전도하는 일에 생명을 내걸고 나서야 합니다. 빚진 자가 한가하게 노닐 여가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타인에게도 이 구원의 복음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복음의 빚을 갚는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닥터 하리 아이온스타인이라는 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방 전도를 하였습니다. 한참 열심히 전도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아주 날카롭고 거만하게 생긴 사람이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예수 믿을 사람은 결신 카드에 적어 내면 나중에 책을 보내 주겠다고 하며 결신 카드를 주었는데 이 사람도 적어 냈습니다. 그런데 그 카드는 예수를 믿겠다는 카드가 아니라 공개 토론하자는 도전장이었습니다. '크리스천과 회의주의자가 공개 토론을 하자. 이것은 도전장이다. '라고 해놓고 자기는 회의주의자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기는가를 해보자는 말입니다.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과학 회관이고 시간은 다음 주 오후 4시이고 비용은 자기가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누가 챔피언이 되는지 해보자는 것입니다. 아이온스타인은 회피해 버릴까하고 생각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회의주의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내가 다음 주 오후에는 선약이 있지만 너무 뜻깊은 도전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꼭 해야 되겠는데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당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인을 두 사람 데리고 오십시오. 물론 나도 증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기독교에, 생명의 진리에 대해서 도전을 할 만큼 위대한 교리를 발견했다면 그 중인은 당신의 감화를 받아 풍성한 생활을 하고 이 이론이라면 언제든지 생명을 바칠 만한 제자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남자 하나 여자 하나를 세워야 합니다. 남자에게는 극적인 사건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형수였다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다든지, 이혼했다든지, 남을 속여먹었다든지, 강도짓을 했다든지 하는 죄 많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의 설교를 듣는 동안에 너무 감동을 받아 저것이 진리이다. 저것이 생명이다 하고 180도로 회개하고 돌아와 당신의 제자가 되고 그것을 선전하는 훌륭한 증인 한 사람과 여자는 아이를 죽였다든지,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든지, 알코올 중독자라든지, 아편 중독자라든지 하는 굉장히 나쁜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어디를 지나가다가 당신이 기독교를 비판하고, 냉소하고, 공격하고, 성경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는 사기꾼이다 하는 설교를 감동적으로 듣고 영감이 와서 저것이 나의 생명이다. 저것을 따라야 하겠다. 저것 속에서 생명을 받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당신을 따라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전도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대신 나는 수가 많겠지만 100명을 데려오겠습니다. 그 증인들을 데려다 놓고 이야기를 합시다. 당신하고 나하고 이야기를 해봤자 그것은 한 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력 대결을 해봅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할 말이 없어져서 "잘 해보시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 안에 영혼 구원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쉬지 않고 전해야만 합니다.
청송 보호 감호소에서 교도관으로 오랫동안 일한 박효진 장로는 "하나님이 못 고칠 사람은 없다"라는 간증집을 통해 개과천선이 불가능한 수많은 무기수와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를 받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기도하면서 혹은 찬송 부르면서 형장으로 끌려갔다고 전합니다. 17명이나 닥치는 대로 죽였던 김대두, 일가족 여섯 명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도 예수를 믿고 갔으며 막가파 지존파도 사형집행 전에 안구를 기증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은 나와 여러분들을 구원했고 우리들의 가정을 구원했고 더 나아가서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줄 믿습니다. 이런 구원의 능력인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은 우리는 쉬지 않고 가르치기와 전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국은 지구촌에서 유일한 신비로운 기독교 국가입니다. 복음이 안 열려있는 곳이 없습니다. 군대에도 복음이 열려 있고 관공서도 복음이 열려 있습니다. 광화문의 종교교회에서는 목요일 정오 때 청와대, 정부청사 등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핵심 관공서의 직원들이 모여 목요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또 기업체나 상가, 골프장, 백화점마다 신우회가 있고 복음이 안 들어 간 곳이 없습니다. 국회의사당 안에 예배실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예배실 입구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드린 기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복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강화도에 가보면 마을 곳곳마다 예배당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동네의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은 예배당입니다. 마을 마을마다 초라한 예배당들을 헐고 거의 새로 지은 데다가 예배당들이 아주 멋지게 세워져 있습니다. 사실 복음이 강화도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핍박당하고 선교사들이 흘린 피의 역사가 있는 아픔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강화도에 복음의 문을 여시고 역사를 일으켜 놓았습니다. 반면 북한은 복음의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숨은 성도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북한은 전도의 문을 닫아놓고 있습니다. 회교국가들도 전도의 문을 닫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가르치기와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쉴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쉬고 있다면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 봉사가 하기 힘들어지고 괴로워진다면 그것 또한 신앙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쉬지 말고 끈기 있게 전도합시다. 따라해 봅시다. "전도! 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지금! 합시다. " 오늘 전도 서약한 영혼들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열매가 맺혀질 줄 믿고 전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행 5장 42절 / 윤삼중목사(대구신창교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꼭 기독교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기독교인들은 말하는 것일까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나요? 아무 종교라도 잘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는가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제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깨닫고 영생을 얻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선행만으로는 진리와 영생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력구원(自力救援)은 불가능합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도움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는 타력구원(他力救援)입니다.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귀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참된 신, 즉 살아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즉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으므로 사망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 마귀가 주관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은 위인들과 많은 종교가 있는데 왜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 이름외는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사람도 구원주가 될 수 없으며, 예수님을 구원주로 영접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주가 될 수 있을까요? 이 분이 바로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시다는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제자들이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후에 나사렛 예수님을 100% 구원주로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생을 맞쳤습니다. 석가모니와 공자와 마호메트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이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도 죽었고 마호메트도 죽었고 한 시대를 호령했던 유명인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이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요, 우리가 전한 것이 헛것이요,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살아온 모든 것이 헛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짓말 하는 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오늘날 교회를 탄생시켰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이 나사렛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놀라운 부흥의 원리가 살아 있고, 부흥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져 있고, 살아서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대에 부흥의 현장을 경험하려고 하면 믿음으로 사도행전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사도행전 1장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2장의 체험을 누리고, 3장에서 온갖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복음으로 승리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의 생명력 있는 영적 부흥의 현장에 들어가면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우리의 주인이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들은 성전에서, 집에서 수없이 반복하고 집중하고 가르치고 전파하였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다고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복음을 어떻게 전수하며, 가르쳤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전파할 때에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그리고 초대교회는 환란과 핍박중에서도 어떻게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까? 그 사실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요, 교육의 핵심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1.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을 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누가 나사렛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를 삼게 하셨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살아계시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직접 살리심으로 만방에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선포는 천지를 진동하는 사건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거짓 선지자요, 신성모독죄, 성전 훼방죄로 낙인찍어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가운데에서 살리시고, 그를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며, 구원주가 되게 하신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모든 만물보다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는 다윗의 고백(시110:1)을 인용해 증거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친히 살리시고,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 당시에는 “주”라는 칭호는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주라는 칭호는 로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며,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가 주시다”라고 부르다가 걸리면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는 사도들과 무리들은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에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원의 주로서 종말에 나타날 구세주요 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고 온 피조세계를 구속할 구세주요 왕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세주요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증언하고 후세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히 살피고, 연구하여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후에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객꽌적인 논리와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핍박과 환란속에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세우기 위하여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4복음와 모든 서신서들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긔 시대와 상황에 맞게 기록하여 보낸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셨습니까? 영어로 말하면 구세주는 Savior 이고 주님은 Lord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원자로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님으로 모셔 들인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고백되어져야 할 고백 중에 고백은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시고 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내 인생에 주인이시다. 예수는 손님이 아니고 주인이시다. 예수는 내 인생에 개체가 아니고 주체이시다 라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의 주와 나의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한 후에 어떻게 고백합니까? 신앙의 큰 갈등과 고민을 하던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격하고 직접 체험한 후에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7-28) 행9장에서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후에 그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구원주이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은 그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전파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성령님께서 오시고 내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할 진짜 기독교 교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지식이나 철학,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한 후에 구원주가 되시며,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즉 역사의 현장속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롬1:4절에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당시에 전통적인 신앙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명령하셨습니다(행1:4-5)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그래서 제자들을 포함한 120명의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기도한 지 열흘 만인 오순절날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과 함께 놀라운 능력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제자들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현장으로 나가서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자 3천명, 5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니며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가정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정교회가 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교회가 생겨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자 그들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오순절 이전의 사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욕심에 붙잡혀 천박하게 생활했습니다. 이기심, 명예,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 붙잡힌 바 되었을 때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예루살렘이 복음으로 발칵 뒤집어져 어리둥절하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차에 걸친 투옥과 박해 가운데서도 교회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온 시민까지도 합세하게 되었습니다.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더 깊이 사회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드디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까지 복음에 굴복하게 만들었습니다.(행7:6)
성령의 권능이 언제 임하게 됩니까? 제자들이 환란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선포할 때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롬15:19절을 보면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영혼구원의 열정을 가질 때 성령의 충만하게 하실 것이고,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전에서, 집에서 반복하고 집중하여 가르치고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42절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초대교회의 교육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그 시대와 상황에 맞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두번 교육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집중하여 양육하였습니다. 어떤 교육의 목표에 도달하려면, 훈련의 효과를 거두려면 반복, 집중, 시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교육하였고, “그치지 아니하니라”는 것은 집중하여 교육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이나 가정교회에서 시연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은 확실하게 믿었고, 그들을 목숨을 걸고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최대교회는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맛보았고, 제자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들까지 이 복음에 복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초대교회는 환란과 핍박의 상황속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가정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가정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수많은 가정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행2:46절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들이 어디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까? 우리는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을 함께 먹었다” 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말은 애찬과 성찬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성찬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찬식을 규칙적으로 자주자주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고 예수님과 신자들 그리고 신자들끼리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집이라는 말은 단순한 하우스가 아니라 가정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 환란과 핍박의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소그룹으로 모일 수 있는 가정교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때에는 일반적으로 집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행5:42절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초대교회는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가르치기와 전도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정교회에서 날마다 모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더욱 굳게 믿게 하기 위하여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전파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3000명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이 이미 가정교회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시다고 배운 말씀을 베드로가 다시한번 설교할 때에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이 모든 사실을 믿게 함을 얻는 자들입니다. 즉 지금까지 가정교회에서 배운 말씀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예수가 나의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41절에 보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서 숫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지 않고 “세례를 받은 자”의 숫자입니다. 즉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에 핍박과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전의 개역성경을 보면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고 번역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문에 보면 “프쉬카이”라는 단어인데 처음 믿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행6:1절에도 보면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런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복음을 더욱 확실하게 가르치고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합니까? 집에서나 교회서나 직장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예수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속에서 담대히 3분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믿고 전파하기 시작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며,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가슴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 행하게 합시다
행 5장 42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행 5: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였던 에텔 워터스(Ethel Waters, 1896~1977)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내가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로서 인기절정에 달하였을 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명예도 인기도 돈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받는 사랑은 내 마음 속 깊게 도사린 고독을 풀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시절의 나의 마음은 언제나 겨울이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남들이 부러워하였던 것들 중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은 생기가 차고 넘칩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드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나이 40이 지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께 내 전부를 내어 맡기자 그분은 나를 부수어 다시 빚으셨습니다. 그 후로 나는 고독이라는 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웃습니다. 지금 내 마음은 푸른 젊음 그 자체입니다.”라고 고백 하였다 합니다.
에텔 워터스에게 새로운 삶에의 기쁨을 주시고 웃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들 가까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마음 문을 지금 두드리고 계십니다(계3:20).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면 에텔 워터스를 변화시키신 예수께서 우리들을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초대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외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박해를 하게 됩니다. 사도들을 붙잡아 다가 감옥에 가두었으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주자 성전 맡은 자들이 다시 잡아 공회 앞에 세우니다. 대제사장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라고 변론합니다. 그러자 저들이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합니다. 그때 새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 주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심을 기뻐하면서 어디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며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41절)이란 말씀은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한 자세와 각오를 나타내는 내용으로 '그 이름을 위하여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능욕 받는 일'은 공회에서 채찍질 당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채찍질은 원래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이 매는 40대가 넘지 않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고후 11:24)라고 합니다.
공회에서 채찍을 맞은 사도들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확신과 권능에 충만하여 오히려 이러한 일을 기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고난을 받고서도 오히려 기뻐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당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고백한 바울과 똑 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며('맥가비' McGarvey) 나아가 회당에서 채찍질 당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10: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비록 자신이 잘못을 범했더라도 그 잘못을 직접 지적당하고 책망을 받으면 감정이 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아무런 잘못을 행치 않으셨는데도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벧전 2:23)
그리고 직접 제자들에게 이러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제자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입니다(약 5:17).
모세 같은 경우를 보면 민족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 애굽 사람을 살해했으며(출 2:12),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인을 보고서 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할 것을 간청하였습니다(눅
그런데 나중의 모세를 보면, 그리고 제자들을 보면 그 이전과는 달리 너무도 온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말씀 하시기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하셨을까요? 그러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같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변화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표현하기를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을 보도록 해야 하고 손과 발을 통해 나타나는 일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고통스럽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온유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현실의 고통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고통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지자적인 혜안을 가지고 살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고통이 일찍이 예수께서 예언하신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 10:17)는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고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곧 자신들도 내세에 복 받을 선지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깨닫고 기뻐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앙인은 환난이 닥쳐올 때 상황을 변화시킴으로 고통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신앙인은 환난의 내면적 가치를 깨달아서 고통을 이겨내고 나아가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사명 감당 할 때 선을 이루는 역사가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세계적인 땅콩 생산지인 미국의 아라바마 주의 엔터프라이즈라는 도시의 동네 재판소 앞에는 이러한 기념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목화를 갉아 먹던 벌레에게 감사한다. 이 벌레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가 되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 주었다. 목화벌레들이여! 다시 한 번 그대들에게 감사한다’ 알라바마 주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원래 목화생산이 주된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95년 난데없이 목화벌레 떼가 나타나서 목화를 갉아먹기 시작했다합니다. 이 벌레로 인하여 그 해 농사는 완전히 망쳐 버리고 말았다합니다. 목화 재배 때가 되면 많은 일꾼들이 모여들었었는데 그 일꾼들조차 어디론가 다 뿔뿔히 흩어져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그 힘겨운 한 해를 보냈는데 그 다음해에도 목화벌레가 극성을 부려 많은 농장들이 파산위기에 처하게 되었다합니다.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점점 더 생겨나자 그 알라바마 주의 목사와 성도들이 모여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바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로마서8장 28절이었다합니다. 농민들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그들에게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합니다. 목화 농사만 하면 벌레가 오니 땅콩을 심기로 한 것이었다 합니다. 땅콩을 심으니 비옥한 땅에 풍년이 들었고, 그리고 그것은 더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 후 산업 발달로 값싸고 질긴 나일론실을 공장에서 생산하게 되자 목화가 필요 없게 되었다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포기하거나 한탄하지 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좋은, 우수한)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세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회에서 풀려난 이후의 사도들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표현이 매우 강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닥쳐온 환난에 감정적인 반응을 삼가했을 뿐 아니라 사명에 대해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 예레미야를 보면 그는 일생에 걸쳐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전혀'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폭행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결실도 없는 일을 일생에 걸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음 전파 사역도 고난이 닥쳐온다고, 혹은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스럽고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라면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된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금세기 초 온 세계에 영향을 미친 웨일즈 부흥 운동은 웨일즈의 한 작은 마을에서 발단되었다합니다. 연합 집회에 참석한 어떤 소녀가 그 모임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벌떡 일어났다합니다. 평소 그녀는 말이 없고 소심하며 민감한 성격을 지닌 소녀였다 합니다. 따라서 그녀는 일어나긴 일어났지만 '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짧게 한 마디 하더니 곧 제자리에 앉고 말았다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고백을 통해 주님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로 삼으셨다합니다. 그녀의 짧은 고백이 흡사 오순절의 역사처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영적인 부흥의 불꽃을 일으켰고, 온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전한 케리그마의 내용과 방법입니다.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파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도한 내용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으니 예수는 그리스도라 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 그리스도는 예수라고’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에서 온 말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구약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이들은 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장차 오실 완전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는 신분과 인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직분과 신성을 예표하는 이름입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고 합니다.
즉 유대인들이 아직도 대망하고 있는 메시야,즉 그리스도는 이미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나사렛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더 이상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지 말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죽였으나 부활 승천하여 구주가 되신 그 예수를 메시야,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는 촉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들고 나가 전했던 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는 전도는 오늘 날에도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죽음에서 건지는 진정한 전도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나사롓 예수라는 것을 명확히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내용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전파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어떻게 메시야가 되셨는가 하는 사실을 가르치고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한 전문의가 병원으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았다합니다. 내출혈로 위급한 소년이 실려 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자동차를 몰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합니다. 자동차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노란 모자에 검정 점퍼를 입은 괴한이 나타났다합니다. 강도는 권총을 들이대며 자동차를 강탈해갔다합니다. 전문의는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예상했던 것보다 1시간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합니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5분전에 숨을 거둔 후였다합니다. “강도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년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그런데 중년의 아버지는 소년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데 노란 모자, 검정 점퍼…. 소년의 아버지는 몇 시간 전 의사의 자동차를 강탈해간 노상강도였다고 합니다. 내출혈로 죽어가는 소년에게 아버지도 필요했지만 진정 필요한 사람은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신앙, 아내의 신앙, 자녀의 신앙은 내 영혼 구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내 영혼을 치료할 의사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을 치료할 의사, 그분의 이름은 바로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회에 사로잡혀 매를 맞고 위협 당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난 후에도 그들의 메시지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전하는 복음은 조금도 추가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미미한 듯 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곧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은연중에 자기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와 영광을 말하면서 은근히 자기의 탁월함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죄의 유혹을 이겨낸 것입니다.
정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증거자라면 우리 역시도 한 터럭이라도 예수님보다 자신을 드러내 예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산당원은 얼어 죽을 각오,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 66권 말씀을 근거로 한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순교자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으며 돌과 톱과 칼로 고문과 죽임을 당해도”(히 11:37∼38) 그 지조를 지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 따라 살다가 보니 저들도 “세상을 이기는 자”(요일 5:5)가 됐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1-42)라고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되 말씀의 가르침을 끝까지 지켜 행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쳐 행하게 하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5장 42절 / 김원효목사
제가 신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이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입니다. 거기에 오신 분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중한 병이 들어서 하나님의 치료를 기대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해지는 목사님들의 설교도 대부분 치료에 관한 메시지가 많았습니다.
저 또한 그곳에서 치료에 관한 메시지를 주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기도원에서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여러 번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렇게 병든 분들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고침을 받았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그들도 다시 병들어 죽지를 않는가? 그리고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도 살려주었는데 그렇게 고침을 받는 사람들도 결국은 얼마 후 모두 죽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나도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의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나 또한 언젠가는 병들어 죽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죽기 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는 바로 ‘전도다.’라는 명확한 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 오신 분들에게 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런 권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치료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 기도원에서도 전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여기서는 다 믿는 사람들이니까 따로 전도할 대상이 없지만 전화로는 여러분들 지인에게 전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야- 나 지금 중한 병이 들어 기도원에 와 있는데 네가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예수님 믿자. 그리고 반드시 천국에서 만나자.“
저의 이 말처럼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에도, 죽음의 순간에도, 세상의 종말이 내일 다가와도 마지막까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내가 아직 살았다는 것은 전도를 받을 사명이 있거나, 전도를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캐나다에 오기 전 우리는 한국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저의 경우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서울 강서구 목동 4거리에 있는 ‘대흥교회’라는 장로교회에서부터였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어머니를 따라 간신히 주일예배만 드리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한 후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부흥회 및 각종 특별 집회에도 참석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누구보다 열심을 냈고, 그 열매도 많이 맺었습니다. 당시 장로교회 대흥교회 청년회에서 제가 전도를 해서 청년들을 많이 모으니까 저에게 전도부장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당시 20년 정도 된 교회였었는데 교회가 생긴 이래로 청년회가 가장 많이 부흥이 되었다고 교회 원로 분들이 칭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중등부 교사도 맡겼는데 제가 맡고 있는 반 아이들도 제가 전도를 강조니까 저를 따라서 얼마나 전도를 잘 하든지 부흥이 되어 6개월이면 또 다른 반을 떼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해서 순복음 교회 청년회에 들어갔는데 아- 거기는 내가 다니던 장로교 청년회 하고는 일단 규모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애들 기도하는 것을 보니 대부분 성령을 받아서 아주 큰 소리로 방언까지 하면서 무섭게 기도를 하는 겁니다. 아- 이건 뭐, 능력 있는 여자 전도사님이나 목사님 같더라고요.
그 분위기에 처음에는 좀 주눅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청년회 전도실에 들어가니까 그룹을 지어서 병원전도, 유치장 전도, 전철 전도, 노방 전도를 하고, 아주 전도에 미친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아- 나는 나만 전도에 미친 줄 알았는데 여기는 나보다 더한 녀석들이 있는 겁니다.
거기서 저도 몇 년간 열심히 같이 전도를 하다 보니 결국 교구 전도부장, 교구 전도실장, 청년회 연합 전도 실장을 맡아서 전도 팀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사는 동네가 강서구 염창동이었는데 거기에 보니까 공장들이 제법 많이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셔서 상당히 많은 청년들을 전도했습니다. 저 혼자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매주일 조 식구들이 팀워크를 이루며 같이 전도에 미치다보니 일 년에 백 명 이상이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청년회 전도상을 저를 비롯해 저의 조 식구들이 매년 타곤 했습니다.
아마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청년회가 생긴 이래로 우리가 가장 많이 전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저는 새신자 청년들이 하도 많아서 때로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애들아- 이리로 와라. 여기다 여기.” 하고 안내하면서 교회 내부를 이동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예배가 막 끝나게 되면 성도님들이 갑자기 몰려서 새신자들이 길을 잃고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마치면 교구 사무실에 들려 담당 교구장님에게 인사도 하고 기도도 받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도한 식구들이 너무 많아서 교구 사무실에 다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조에서 자체 총동원 부흥의 날을 정해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기도원 성령 대망회에 청년들을 모두 데리고 가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청년회에서 주일 예배 후 기도원에 갈 때 교구 당 보통 버스 2대가 갔고, 몇 개의 큰 교구는 3대, 작은 교구는 1대가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평상시에 저의 조에서만 보통 1대가 갔고, 그 날 총동원 할 때는 버스 4대가 갔습니다. 그 많은 인원을 위해 점심 도시락, 저녁 도시락도 준비하고,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 당시 쓴 돈도 35년 전 화폐로 100만 원 이상이 들었습니다. 아마 기도원에 한 조가 버스 4대가 간 이 기록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청년회에 전무후무한 기록일 겁니다. 그런 제가 순복음 영산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성인 교구를 맡았습니다. 도봉구 미아 교구, 서대문구 홍제 교구, 영등포구 문래 교구, 구로구 개봉 교구장을 맡으면서 뭐- 제가 하던 게 늘 전도니까 역시 교구가 꽤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파송이 되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척 3년 만에 자체 성전을 구입하고 주일 출석 인원이 80명 정도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전도한 것에 비하면 저로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외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여기는 영혼이 참 귀한 동네구나!”
그리고 제 스스로 이렇게 탄식하며 말합니다. “아- 천하에 김원효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 와서 고전하는구나!” 그리고 어떤 때는 자존심이 몹시 상하기도 하고, 제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나기도 해서 가끔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그리고 그 후 교회가 지금까지 오면서 가장 많이 부흥이 되었을 때는 주일 출석 인원이 180명가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COVID-19 바로 직전에는 주일 출석 인원이 120-130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COVID-19 2년을 겪게 되면서 예상대로 떨어진 성도님들이 꽤 생겼습니다. 그리고 저도 2년이란 나이를 더 먹어 어느덧 62세가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목회자로서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후퇴할 시간이 없고, 이대로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워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제 설교 제목인 ‘주여,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처럼 삼손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힘을 받아 블레셋 사람 3000명을 물리친 것처럼 저에게도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혼 구원, 전도는 혼자만 미치는 것보다 단체로 미쳐야 시너지 효과가 커집니다.
하나님이 저를 비롯해 부교역자 및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영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전도에 아예 미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다가 깨어나면 ‘전도’를 외치고, 꿈속에서도 전도를 외치고, 늘 생각하는 것이 “오늘은 누구를 전도하고, 이번 주에는 누구를 데리고 교회에 갈꼬?”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는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 여러분, 우리는 한국에서 늘 전도를 했는데 그만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전도를 쉬었습니다. 더구나 COVID-19으로 인해 2년간 강제로 전도를 완전히 쉬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시 전도의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벌써 시작이 되었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이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겠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죽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교회를 부흥시키십시다. 그러지 않으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여러분, 초대 교회 성도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핍박을 각오하고, 각종 불이익과 수치를 각오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저희가... 날마다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오늘 우리는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조용히 한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하나님, 저도 이 말씀처럼 날마다 전도를 생각하며 전도에 힘쓰기를 원합니다. 내 스스로는 전도에 자신이 없지만, 주님이 힘을 주시면 저도 전도의 사람이 될 줄을 믿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전도의 힘을 주시옵소서. 저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손을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더 많은 사람이 손을 들기를 원하십니다. 자- 이제 손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눈을 뜨십시오. 여러분,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결단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전도할 마음도 전혀 없고, 의지도 없는 사람에게 전도의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실 전도는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는 전도하는 사람을 제일 미워합니다. 전도를 못하도록 극렬히 저항하고 방해합니다. 고로 전도하는 사람은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마귀를 이기신 예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더 많은 사람이 전도에 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저와 더불어 전도를 위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한번 용기 있게 일어나 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때에는 용기를 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혹시 용기가 없으신 분은 눈치를 보고, 분위기 파악하고 일어나면 교회 생활이 무척 수월합니다.
그러나 혹시 최근 다리가 몹시 아파서 일어나기 매우 힘드신 분은 앉으셔도 됩니다. 자- 찬양팀 나오시고요. 우리 같이 찬송 한번 부르고 다 같이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주여, 나도 전도를 위해 교회 부흥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성령 충만을 주시옵소서. 주여 삼창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