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꿈꾸는 얼굴로 (외 1편)
이근일
나비를 따라 길을 나서자 아픈 마음이 조금 환해집니다 꽃 속에서 마주한 신음하는 낙타의 얼굴 잠시 꿀 빨던 나비가 날아오르고 그 나비의 길을 따라 낙타가 꽃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모래바람 속 낙타 혹처럼 불룩한 여자가 터벅터벅 지나가고 여기저기 고통을 잉태한 꽃들이 짙은 향기 내뱉으며 피어납니다 아찔해 그만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하늘 아득히 솟구치는 나비 그래도 낙타는 보이지 않는 그 어지러운 나비의 길을 갑니다 막막함이 긴 꽃술로 찌르는 동안에도 오직 나비를 꿈꾸는 얼굴로
숨바꼭질
난청 앓는 저이의 표정은 드라이플라워를 닮았다는 생각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 끝에 낱말 하나가 흘러들었다 환한 오해의 불씨 하나가
어릴 때 동생과 숨바꼭질하다가 장롱 안에 숨어들었던 기억 그때 어둠 속 옷가지들 틈에서 두려웠던 건 나였는데 정작 울음을 터뜨린 건 날 찾던 동생이었지
둘이 있어도 혼자라 느낄 때 당신은 더욱 혼자에 빠져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쇠잔한 빛 한 줄기라도 가슴에 끌어당기는 사람인가
분리수거장엔 낡은 장롱이 버려져 있다 옛날이 이다지 눈에 선한데 바로 얼마 전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건 왜일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어떤 말은 말들의 이면에 고여 있는 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곳에 고인 채 숨죽인 것들 다시 불리기를 스미기를 꿈꾸는 것들
꾹 다문 입술이 떨리듯 흐느끼는 소리가 안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한낮의 술래가 된 심정으로 장롱 문을 열자마자 해묵은 어둠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시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2023. 4 ---------------------- 이근일 / 1979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아무의 그늘』『침잠하는 사람』『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