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위의 그림은 르동이 1914년 제작한 사이크롭스란 작품을 연상케 합니다.
사이클롭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인데 사람을 잡아먹고 양을 기르는 괴물입니다.
샤갈은 평소 그리스 신화와 성경에 대한 관심이 많아 각 분야 별로 별도의 작품들도 시리즈로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이그림에서 나오는 눈동자는 사이크롭스의 눈이라기 보다는 예지자 또는 신화적인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그림의 우측 샤갈의 사인을 확대해서 살펴보니 1944년 5월에 완성된 작품이고
벨라는 4개월 후인 9월에 바이러스성 감염으로 사망 했으니 이 작품을 작업 하던시기 벨라는 이미
병상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어두워진 샤갈의 그림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4.20~1916.7.6]
19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며 당시 유럽에 유행하였던 상징주의 운동에 동참하였다.
The Cyclops, 1914 (?),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Madonna with the Sleigh 1947
"썰매를 타고있는 성모 마리아"란 이 작품은 예수의 탄생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전히 침울하고 어두운 색조로 일관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벨라를 잃은지 3년이 지난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아직도
그 상처에 대한 흔적들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Listening to the Cock 1944
행복한 돼지의 모습을 한 샤갈과 벨라의 모습은 초현실주의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등장 합니다.
알을 품은 수닭은 강렬한 붉은 색을 바탕으로 늠름한듯 그려져 있지만 왠지 불안해 보입니다.
거꾸로 서있는 나무와 달은 시간을 행복했던 과거로 시침을 돌려주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The Wedding 1944
아폴리네르가 샤갈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초자연주의>라는 말을 했던것이 1910년대 초반 이었습니다.
달리등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나타난것이 1924년 부터 였는데 아폴리네르는 일반 철학 분야와 용어가
섞이는것을 염려하여 <초자연주의>를 <초현실주의>로 바꾸어 명명했을뿐 사실은 같은 용어라고 할수 잇습니다.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이 초현실주의의 발생 근원을 다다이즘에서 찿고 있지만 엄격히 분류해 보면
그 근원은 입체주의에서 찿아 봐야 합니다. 특히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입체주의자들의 새로운 공간성의 해석과
실험은 초현실주의 양식의 샘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샤갈은 이러한 파격적인 공간성의 형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 또는 꿈의 세계를 자유롭게 펼쳐나갔다는 점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지하는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 입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로운 예술가이자 선구자였으며 로맨티스트이자 시인이었습니다.
Cow with Parasol 1946
이미 벨라와의 행복했었던 삶은 과거가 되었지만
샤갈은 그 풍부하고 행복했었던 부인과의 삶을 자신의 예술의 마르지 않는 샘으로 승화시킨듯 보입니다,
벨라가 없는 그의 삶은 고단하고 외로웠겠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유대인 다운 지혜와 러시안 다운 낙천성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 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슬픈듯 아름답고 외로운듯 왁자 합니다.
The Falling Angel 1923-1947
아주 오랜기간을 완성하지 못한채 남겨졌던 이 그림을 1947년에 가서야 완성 합니다.
작가들은 이러한 아주 오랜 기간동안 완성하지 못한 작품을 한두점 자신의 스튜디오 구석에 놓아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난히 애착이 가던지 아니면 유난히 작품 진행이 되지 않아 머리가 아픈경우 두가지중 하나라고 할수 있는데
아주 가끔 한번씩 이젤에 올려 놓고 손을 보다가 또다시 화실 구석에 쳐박혀 한참 동안을 먼지를 뒤집어 쓰곤 하는게 일상이
되버린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도 빨리 이작품을 완성 해야겠다란 조급함도 없이 그저 친구가 되버린 작품중 하나죠.
무려 24년간이나 작업이 지속된 추락하는 천사란 이작품은 24년간 샤갈이 그림으로 그린 일기장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물론 초기의 제작 의도나 표현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며 대부분 변경되고 없어져 버렸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이후에 많은 새로운 이미지와 내용이 추가되고 또 삭제되는 과정들을 거쳤을 테지만
이 작품을 벨라 사후에 완성한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서를 훔치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과 성모와 아기예수의 모습을 병치하고 붉은 천사가 맥없이 추락하는 모습은
평소 샤갈의 종교에 대한 신실함이나 그의 다정한 위트와 순수한 감수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샤갈이 1938년에 완성한 <십자가에 못박힘>과는 사뭇 다른 강렬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이 그림은
이 그림을 완성할 당시의 샤갈의 상태를 알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일찍 자신에게서 아내를 멀어지게 한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Le Quai de Bercy 1953
1940년대까지 그의 작품에서 메인이 되는 칼라는 황토색과 붉은색 이었다고 한다면
1950년대부터 샤갈의 메인색은 블루 계통입니다.
물론 여전히 붉은색과 녹색도 사용 되지만 40년대까지 붉은계열의 메인색일때 청색이 부분적인 포인트를 살려주는 색조였다면
50년대 부터는 반대로 청색이 메인색으로 깔리고 녹색과 붉은색들이 부분적인 포인트 색으로 사용됨을 알수 잇습니다.
이전의 그림들이 다소 얇고 경쾌한 느낌으로 채색 되었다면
이때부터 물감은 두텁고 무거운 분위기로 화면에 덮여 지게 됩니다.
Bridges over the Seine 1954
세느강의 푸른 물결안에 샤갈과 벨라가 서로를 애무하며 흘러 갑니다.
어두워진 파리의 밤하늘에 마리아가 아기예수에게 젖을 먹이며 떠있군요.
이미 벨라가 샤갈의 곁을 떠난지 10년의 세월이 흘러 갔지만 샤갈은 아직도 벨라의 남자 인가 봅니다.
샤갈을 닮은 초록색 염소가 세느강의 두 연인위를 뛰어 다닙니다.
Le Champ de Mars 1955
The Concert 1957
The Players 1968
1950년부터 프랑스의 남부 지역인 방스에 정착하며 샤갈의 오랜 방랑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고향인 러시아땅에서 파리로 다시 러시아에 갔다가 베를린과 파리를 전전하던 그는 나치정권의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갔다가 2차 대전후인 1947년 파리로 되올아오지만 3년후 맑고 따뜻한 남부 프랑스에 마지막 보금자리를 마련 합니다.
러시아인이면서 유대인이었던 그역시 수많은 유럽의 천부적인 유대인 예술가들이 20세기 중반까지 겪어야 했던
방황과 탄압을 받아왔지만 어느덧 대가의 반열에 그 이름을 탄탄하게 남길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100세 가까운 건강한 삶을 영위하며 장수하여 오랜 기간 수 많은 작품을 남길수 있었던것 또한
샤갈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전세계의 미술계에게도 행복하고 다행 스러운 일이었습니다.(1887-1985)
위의 그림은 샤갈이 이미 80세가 넘었을때 제작한 작품 입니다.
그의 그림에서 아직까지는 작가의 노쇠함이나 부족함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원숙해지고 잘 짜여진 치밀한 구성이 두드러 져 보일 정도 입니다.
War 1964-1966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백색의 사용이 많아 집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수 있겠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아마 80대 노령의 시각으로 작업할때
흑백의 분명한 명도 차이가 작업에 용이해서 이기 때문이 아닐까란 막연한 추측도 해봅니다.
이전의 강렬한 빨강과 청색, 녹색등의 사용들이 줄어드는 대신
흑과 백의 대비와 검정색 테두리의 사용이 많아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The Large Circus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