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일만의 기적 포항제철은 교육이 이룬 것이다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
언뜻 쓸모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큰 구실을 함 無用之用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方爲大用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쓸모라는 것이다. 是為大用
“쓸모없어도 괜찮아. 그게 너만의 곡선이고, 無用之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존재 방식이야. 是為大用”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않았고, 儉而不陋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華而不侈온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바른생각을 하라(思)
천하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러진다(政)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부지런 하면, 잘 다스러진다(政)
생각과 부지런 함은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힌다
쓸모없음이 아니라 세상에 최초를 만드는 창조자가 되게 갈망하라
영일만의 기적 포항제철
대의(大義)를 목숨 같이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한 신뢰
청암의‘천하위공’선비정신
부정(不正)·불의(不義)·부실(不實)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다는 무용납
원칙주의
삼성 이병철과의 아름다운 인연
배우는 자세
교육을 중요성을 인식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한 신뢰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청암의‘천하위공’정신
청암은 선조들의 핏값과 후손들의 미래라는 대의(大義)를 목숨같이 지키는
도덕성과 청렴결백(淸廉潔白)은 어떠한 부실이나 부정(不正)·불의(不義)와 거래하거나
눈 감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목숨 같이 여기는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를 행동으로 실천한 선비정신이다
최고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 신뢰에 배신 하지 말자는 결의
청암은 선조들의 핏값과 후손들의 미래라는 대의(大義)였다.
그렇기에 그는 어떠한 부실이나 부정(不正)·불의(不義)와 거래하거나
눈 감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인사 청탁과 금품 주고받기가 난무하던 1956년 11월,
그는 세칭 ‘노른자위’ 자리인 국방부 인사과장이 됐다.
그러나 청암은 유혹 및 압력과 싸우다가 10여개월만에 25사단 참모장 근무를 자원해 갔다.
포항제철 사장 시절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좀 써주면 안되겠냐”고 하자,
청암은 그대로 방을 나와 회사로 돌아갔다.
박정희 주변에서 떡고물을 받아먹던 측근들에게 밉보인 덕에 중앙정보부에선
허구한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자,
박태준은 "이렇게는 못 해먹겠다"고 박정희를 찾아가서
"포항제철 건설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서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주는 걸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군사혁명때 실패를 대비하여 박태준을 명단에서 빼고
자기 가족을 돌보아 줄 사람으로 남겨 두 었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한 개헌을 시도할 당시, 이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했을 때도 "난 정치에는 개입 안해." 라고 딱 잘라 버렸는데,
보고를 들은 박정희도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 하게 냅둬." 하고 놔뒀다고. 참고로 그 서명은 중앙정보부장(Flying 돈까스 김형욱)이 진행한 일이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위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박태준을 지켜보았던 김재규는 그 뒤로 박태준을 달리 보았다고 한다.
장교 시절 당번병을 쓰지 않았던 청암은 통행금지를 지키다가 첫 아이를 잃었다.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목숨 같이 지켰다
청암의‘천하위공’정신
1970년 포항제철에 사상
처음 6000만원의 보험회사 리베이트 자금이 생겼을 때이다.
청암이 이 돈을 청와대로 들고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포항제철의 예산에서 빼낸 것이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 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건네자,
박 대통령은
“임자 마음대로 써라”며 돌려주었다.
그 돈은 제철장학회를 세웠다.
피, 땀, 눈물 흘리는 직원들이 거주할 아파트와 학교, 병원 등
직원들의 복지를 공장 착공 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
"사원 복지 잘 해서 망한 회사는 없다."
소련의 대학총장급 지식인이
"우리가 꿈꾸는 모습을 포항제철에서 실현하고 있다." 극찬
1977년에 크레인 기사가 야간근무 도중 졸음 때문에 쇳물을 잘못 부어서
제강공장의 각종 배선이 완전히 망가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박태준은 해당 기사에겐 징계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간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잠도 안자나? 야간 근무라면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수면을 취했을 텐데,
그럼에도 사고가 났다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당신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가?'라고 혼냈다고 한다.
부정(不正)·불의(不義)·부실(不實)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다는 무용납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 짓던 공장을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했다.
사실 계획안과 30cm 정도 차이였는데 대충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고.
조정래 작가의 전기에서는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모양새였고 부하직원이
"그 부분만 뜯어내고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잔소리 마라, 땜질이 대형사고를 부르는거 모르나? 당장 폭파 시켜!"라며 폭발시켰다.
포항제철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본기업 도멘(東棉)의 지점 소장인
모모세 타다시(百瀬 格)가
"폭발 충격 때문에 기초 부분이 잘못될 수도 있다"라고 항의하자,
'그 부분은 군(해병대) 공병대에게 의뢰해서 해결했으니 걱정마시오.'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70%나 진척된 공사가 죄다 폭발해 사라졌다.
또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 하얀 분필로 표시해가며
"다시 꼼꼼하게 볼트를 조이도록!"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표시된 볼트는 모두 400개였다.
또다른 일화로 아직 한창 공장을 짓는 중에 기초 공사가 잘못되어
콘크리트 반죽을 붓자 쇠 기둥이 휘어지는걸 보고 간부급을 불러
너는 나라를 말아먹는 놈이라고 질타했다.
원칙주의
비슷하게 포항공과대학교를 지을 때도 내진 설계 기준도 없을 당시
강진에도 끄떡 없는 1000년 갈 학교를 만들라고 지시하여서
원리 원칙에 충실하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2017년 포항 지진 때도 포항공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재조명되기도 했다.
포스텍은 지진 피해가 심각한 포항 북구가 아닌 남구에 위치해 있기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공사 시점이 2017년으로부터 무려 31년 전인 1986년인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 철저하게 안전 기준에 따라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어찌보면 당연한건데도 미담이 되기도 한다.
몇년 후 기본도 지키지 않아 삼풍백화점을 무너지게 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준 회장과 비교하면 더 대조적이다.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이다.
그는 1977년 8월 상당한 자금을 들여 공정률 80%에 달하던 건물의 부실(不實)을 발견하고 서슴없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조국의 백년대계가 여기서 출발한다.
이것은 폭파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폭제다”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 잠수복을 입고 비서와 함께 광양 앞바다에 입수해
직접 줄자를 들고 치수를 쟀다. 바다를 메워서 공정을 진행하는 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걸 염두에 두고 회장이 앞장섰던 것.
포항제철 창립 당시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한국은 철강 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원조를 받지 못했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 때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페가 한 말이 걸작.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
(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중국의 개방/개혁 초기인 1978년 8월, 덩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포항 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은
"공장이야 지을 수 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런 제철소는 못 짓는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덩샤오핑은 껄껄 웃었지만 내심 속이 쓰렸을 것이다.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중에 중국의 초청으로 방중한 후 포항제철 임원들에게
"광산을 최대한 확보해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경제개발 착수 전이라, 직원들이 충고를 소극적으로 이행했는데,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시아 등지의
자원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회했다는 설도 있다.
주식·퇴직금 ‘0원’...73세에 전셋살이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분의 리더십 근간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이었다”(황경로·포스코 2대 회장)는 증언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준 하사금을 합쳐
서울 북아현동에 집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8년 새 15번 전셋집을 전전했다.
성장시킨 포스코에서 25년 만에 물러날 때,
그는 한 주의 공로주(功勞株)는커녕 퇴직금 1원도 거부했다.
명예회장으로 복귀한 뒤
“노후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스톡옵션을 받으시라”
“포항제철은 선조(先祖)의 피로 세운 회사이다.
공적인 일을 할때 사욕(私慾)을 갖지 말라!”
38년간 살던 집을 2000년에 팔아 생긴 돈 14억 5000만원 중 1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 73세에 다시 전세살이를 했다.
그가 사후에 남긴 재산은 전무(全無)했고, 말년에 생활비와 병원비는 자녀
5명(4녀 1남)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삼성 이병철과의 인연
이병철 회장과 박태준 명예회장은 17년 나이 차이에도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호도 각각 호암과 청암이다.
청암은 이병철 회장이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선물한 아호다.
선배는 사업보국, 후배는 제철보국에 매진하며, 조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경제인의 길에 들어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업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깊은 교분을 나눴다.
호암은 청암에게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곤 했다.
일본 철강회사들이 '부메랑 현상'을 이유로 포스코를 견제했을 땐 호암이 방패막이 역할을 했으며 1981년 11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부메랑 현상'을 경고할 만큼 박태준은 기술 이전을 꺼리는 사이토 신일본제철 사장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때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박태준을 와세다대학 후배라면서 불러서 신일본제철 사장과의 골프 기회를 주선해 제공했다. 이병철 회장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과 만든 작품이었고 얼마 후 일본 철강업계는 광양제철소에 간접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한국 철강의 역사를 바꾼 골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삼성중공업을 박태준에게 맡기려고 까지 했었다.
배우는 자세
박태준이 일본에서 공부할때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도쿄 시내에
미군의 폭탄이 쏟아지던 날 방공호에서
“그때 방공호는 질서가 정연했다.
노인들, 특히 할머니들이 나섰다.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라. 위험한 곳은 우리가 막는다. 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느냐?
젊은이는 책을 펴고 공부해라.’
방공호 입구에 천막이 쳐지고 젊은이가 모인 제일 안쪽엔 두개의 촛불이 켜졌다.“
일본 정신을 보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오늘과 같은 기적적 성과가 이룩된 까닭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해방 후 우리나라는 돈도 없는데 묘하게도 학교가 제일 먼저 생겼어요”
“우리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 자원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적 요인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소위 이공계통의 우수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는 여건이라든지,
기계나 전기·토목·야금(冶金)을 잘 아는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여건,
이런 것이 결국 일을 성취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우리나라의 징병 제도인 개병(皆兵) 제도 자체가 오늘날 공업화를 지향하는
경제 각 분야에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당시 군대가 외국의 앞선 기술을 받아들이고
근면한 노동을 배우는 학교 역할을 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육을 중요시 하는 박태준
김호길 총장과 구자경·박태준 회장
김호길의 과학과 산업 잇는 꿈은
구자경 거쳐 박태준서 꽃피웠다
국가와 기업 하나로 싸우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포스텍엔 무은재기념관이 있다.
무은재(無垠齋)란 학문에 경계가 없다는 뜻으로,
김호길 포스텍(당시 포항공대) 초대 총장의 호다.
지난 4월 30일 여기서 김호길 30주기 행사가 열렸다.
서울대 물리학과, 영국 버밍엄대를 나와 미국 로런스 버클리 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거친 김호길은 세계적 가속기 물리학자이자 한국 과학교육의 혁신가였다.
1962년부터 1983년까지 20여 년간 해외서 최고 과학자로 활동했지만
끝내 미국 시민권을 따지 않았다.
언젠가 귀국해 한국 과학을 도약시키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재미한국과학자협회 창립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흔히 김호길은 박태준 포철 회장의 요청으로 귀국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를 먼저 알아본 이는 구자경 전 LG 명예회장이었다.
구자경은 일찍이 산학 협동을 꿈꾸며 고향인 경남 진주에 공과대학을 지으려 했다.
2년제 연암공전부터 지은 그는 1983년 김호길에게 세계적 공대로 키우자고 제안하며
초대 학장으로 모셨다. 하지만 교육부 인가가 나질 않았다.
진주엔 4년제 대학이 있다는 이유였지만 속내는
‘기업이 뭔가 큰 이윤을 노릴 것’이란 시각 때문이었다.
쿠데타로 막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김호길은 편지를 써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대한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대한사기공화국”이라고 항의했다.
그의 꿈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김호길과 구자경의 꿈이 스러져갈 무렵 박태준이 등장한다.
박태준은 1985년 5월 포철 영빈관에 김호길 연암공전 학장 부부를 삼고초려 끝에 초대해,
포항공대 첫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김호길은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내가 총장을 맡으면 포철 소속 포항공대가 아니라
포항공대 부설 포철이 될 텐데 괜찮겠느냐.”
대학 운영의 전권을 달라는 얘기였다.
박태준은 흔쾌히 승낙했고, 구자경도 기꺼이 동의했다.
“실력 있는 분을 모셔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가셔도 좋습니다.”
김호길은 곧장 미국과 유럽 22국을 돌며 과학자 450여 명을 만났다.
귀국을 주저하던 한국 과학자들에게
“포항공대에 합류하지 않으면 민족의 역적이 될 것”이라고 호통친 일화는 유명하다.
누가 한국의 동해안 바닷가 이름없는 대학에 오겠냐는 우려를 씻어내고
1987년 3월 해외 과학자 33명을 교수로 초빙해 역사적인 입학식을 갖는다.
이 포항공대는 한국 산업사에서 대표적 산학 협동의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
미국의 산학 협동은 대학이 주도했지만 한국은 초기엔 기업이 주도했다.
그것이 세계 최빈국이 단기간에 경제 강국이 된 원동력이었다.
최근 삼성중공업이 펴낸 ‘카이스트와 산학 협동 30년’ 기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K조선이 1990년대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낌없는 연구 개발 투자와 카이스트와 같은 막강한 인재풀,
그리고 그들의 열정이 빚어낸 결실이다.”
LNG선의 멤브레인형 화물창, 선박 고장 예지 진단 시스템 등 이루 셀 수 없는
성과들이 자료에는 나열돼 있다.
전 세계가 AI 혁명이란 거대한 격랑에 빠져들고 있다.
여기엔 기업과 대학의 협동만으론 명함도 못 내민다. 국가적 역량이 총결집 중이다.
그것도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일본이 앞장선다.
국가와 기업이 하나되는 이 경쟁에 한국의 미래가 달렸다.
반세기 전 ‘김호길, 구자경, 박태준’은 뒤처진 산업화를 따라잡느라 발버둥을 쳤다.
오늘 그 역사를 소환한 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반문 때문이다.
또 뒤쳐져서야 되겠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