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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집사 선택과 말씀운동
행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1-7 / [일곱 집사를 선택하다] 그런데 신도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불만의 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헬라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식량 배급을 받을 때 자기네 과부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과부들만큼 많이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였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신도들을 불러모아 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설교하는 데 써야 할 시간을 식량 분배하는 일에 빼앗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3)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 주위를 잘 둘러보셔서 현명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이 일을 맡기기에 모두가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 일곱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4) 그래야 우리도 기도와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온 총회는 이 제안을 타당하다고 여기고 그 누구보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안디옥 사람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가 다시 그리스도인이 된 니골라, 6) 이렇게 일곱 사람을 선출하였다. 그들이 앞으로 나오자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축복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은 점차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의 수효가 크게 늘어났다. 유대교 대제사장들도 많이 개종해 왔다.
교회 내 구제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 간의 갈등이 발생합니다. 사도들은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뽑아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합니다.
신자들의 원망(1)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도를 통해 제자가 더 많아지자 동시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교회 내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 예배에 참석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사람들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입니다. 소통의 문제도 있었고 팔레스타인에 있던 교회였기에 구제대상을 파악하는 일에 히브리파의 과부들 중심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의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과부를 돌보지 않는 것은 그 과부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커다란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의 결정(2-4) 사도들이 구제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은 결국 사도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것은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해서가 아니라, 늘어난 제자들 때문에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자신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접대를 나누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구제를 다른 일꾼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전념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나 다른 일꾼들의 구제 역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자리와 역할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 일꾼 선출(5-7) 모든 제자가 일곱 명의 일꾼을 뽑았습니다. 뽑힌 일곱 사람은 대부분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아마도 헬라파 과부둘이 구제에서 빠지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자리와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고 당면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선발된 일곱 집사들은 구제 외에 복음 전파에도 큰일을 담당했습니다. 특별히 스데반은 그의 순교를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빌립은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복음이 세계로 확장되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저마다의 맡겨진 일에 충성할 때에 교회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 살고 있는지 고민해야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가 병원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며 쓰레기를 치우고 잡무를 처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신학대학을 나온 부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제쳐놓고서 배워본 적도 없고 전문적이지도 않은 수많은 잡무에 허덕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전문가를 택하여 이 일을 맡기고, 그들은 사도들처럼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합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구역과 영혼들이 있는 한…
잡무를 배우든, 사람 살리는 방법을 배우든, 그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훈련받은 대로 사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크마 주석
=====6:1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 '제자'의 헬라어 '마데테스'(* )는 본서에서처음 언급되고 있다. 이 단어는 공관복음서에서 160회, 요한복음서에서 78회, 본서에서 28회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의 12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들이된 사람들까지 지칭한다.(14:21 ; 요 8:31). 전장에서 유다인들의 탄압에 대한 가말리엘의 변호(5:34-39)와, 채찍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증거한 사도들의 담대한전도는 제자들의 수를 급증시켰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이 때의 신자의 수는 약20,000-25,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불과 1,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정도로 증가되었다는 것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헬라파 유대인...히브리파 사람 - '히브리파 사람'이란 이스라엘땅에서 출생, 성장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헬라파 유대인'이란 각처에서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 출신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전자는 약간의 헬라어(Greek)를 알고 있으면서 셈어(Semitic language)를 주로 사용했다. 당시 거의 모든유대인들은 적어도 약간의 헬라어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헬라어는 지중해 동쪽 지방의 국제 통용어(lingua franca)였기 때문이다. 이 히브리어라기보다는 오히려아람어(Aramaic)였다고 봄이 더 정확하다. 반면 후자는 아람어를 전혀 모르거나 약간알고 있으면서 주로 헬라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상용어(常用語)인 헬라어로 예배드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습관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도지속되었다. 이들은 히브리파 사람들보다는 혼합주의적 영향력에 더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히브리파 사람들은 헬라파 사람들보다 선민적(選民的) 배타 의식이 더 강했다. 구제에 빠지므로...원망한대 - 당시 유대교내의 빈민 구제 사업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일정한 지역 내의 거주민들 중 극빈한 사람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열네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방랑하는 낯선 빈민들에게 사발에다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제 방식은 위의 두 가지와는 또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구제 대상이 공동체 내의 지역민들인 동시에구제 시기는 또 매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구제를 받은 사실은이미 유대교 사회로부터 소외당했음을 시사한다(Haenchen). 한편 헬라파 유대인들이원망하게된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식량 배급이나 생필품 지급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보다 푸대접을 받거나 더러는 누락이 되어 불만을 표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의 원성이 교회 안에서 높아감에 따라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서게 되었다(2절). 더욱이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상용어가 서로간에 달랐으므로 자연히 따로 모이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며 이런 와중에서 서로는 편견과 불평들을 토로했을 것이다.
=====6: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 당시 사도들은 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기독교 공동체를 지도하고 감독했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임으대로처리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회의를 소집(召集)하였고 그 회의에서 논의된 결과에 따라 그 문제를 처리하였다. 이 회의가 굳이 예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에 의해서 주재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 반드시 남자들로만 구성되거나 연령 제한이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회의는 사도들 독단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도들은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 예수께서 열 두 사도에게 분부한 우선적인 사명은'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것이었다(마 28:19, 20). 그런데 교회 내에 구제 사업을 비롯한 행정적 일들이 날로 늘어감에 따라 사도들은 정작 주력해야 할 복음증거 사역에 자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도들은 그들이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교회 안의 행정 처리와 말씀 전하는 일을 이원화 시킬 것을 제안한다. 공궤를 일삼는 것 - '일삼는'의 헬라어 '디아코네인'(* )은 전치사 '디아'(* )와 '먼지'를 뜻하는 '코니스'(* )의 합성어로서 '먼지가일어날 만큼 분주히 움직이다', '열심히 일하다', '봉사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식사나 기타의 일 등에서 섬기는 것'(요 12:26)을 나타낼 때와 '집사로서봉사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딤전 3:10, 13). 영어의 집사에 해당하는 단어deacon은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1절의 '구제'(* , 디아코니아)라는 말도 본 단어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되어 집사들이 교회 안에서 주로 맡은일들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6:1-7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 참조). 또 '공궤'의 헬라어 '트라페자이스'(* )는 '식탁'이나 '환전상의 탁자'를 의미하는데'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는 함께 결합하여 특별히 교회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식량과 생활용품 등을 나누어 주는 등의 구제 사업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도들이'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하였다고 해서 '공궤'가 기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보다 저급(低級)한 일이라고 단정해 버려서는 안된다. 이는 다만 열 두 사도에게있어 '공궤' 하는 일은 그들이 주께로부터 부름받은 일(마 28:19, 20)보다 우선하지 못한다.
=====6:3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 집사 일을 맡아 볼 사람들의 자격으로서제일 먼저 거론된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복음 전파와 교회 확장의 주요 동인(動因)이었기 때문이다(5:32; 8:39;10:19, 38, 44;11:12, 24;16:6). 따라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은사와 함께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바쳐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혜의 충만함'은 성령 충만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혜의 충만함은 곧 성령 충만의 증거도 되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행정 및 사무 처리에 필요한 지혜를 뜻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포괄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실천적인 지혜들까지 포함한다. 여기서 '칭찬듣는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평판이 좋은 사람', '증명된 사람'이다. 즉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을 사람은 성령 충만한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인격 또한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분은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한편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본문의 과정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서 여호수아를 택하여 세우는 과정과 평행이 된다(민 27:16-20). 입곱을 택하라 - 집사의 수효를 굳이 일곱으로 정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제시되나 다음 세 가지가 비교적 타당성을 지닌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 유대인들에게 있어 7이라는 수는 성수(聖數) 또는 완전수로 여겨졌으므로 그들이 임의로 특정한수를 택해야 할 경우에는 대개 7을 택하였다. 그래서 본문의 경우에도 그들의 생활 관례에 따라 7명의 집사를 선택했을 것이다(Lenski, Pulpit Commentary). (2) 유대의 관습상 특별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관습을 좇은 것같다(Marshall). (3) 유대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지역 책임자들이 7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유대의제도를 따른 것같다(Haenchen). 어떠한 견해를 따르든 본 구절을 해석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으며 그 문제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7명 정도면구제 사업을 담당하며 교회 내의 사무 및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사례를 본받아 어떤 교회에서는 항상 일곱 집사만을선택하여 세우려 하지만 이는 본문을 잘못 해석하여 적
=====6:4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 여기서 평신도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사역의 방향이 제시된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 안의 사무 행정 등의 문제를 담당한다면 목회자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전하는 사명을 특별히 부여하심(막 16:15)과 함께 늘 기도할것을 말씀하셨고 기도의 모형을 제시하시며 기도를 가르치셨다(마 6:9). 여기서 '기도'의 헬라어 '프로슈케'(* )는 때때로 기도라는 의미 외에 '기도회' 같은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 예배'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됐는지는 모르지만, 사도들이 기도에 열심을 다하는 모습이 성도들에게 비쳤다면 당연히 성도들도 기도에 열심을 내었을 것이고 이로인하여 기도회(祈禱會)같은 모임이 자주 형성되었을 것이다.
=====6:5
스데반...니골라 - 본 절에서 제시된 일곱 사람의 이름은 모두 헬라명이다. 이 사실만가지고 이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팔레스틴내에도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 누가가 여기서 헬라식 이름만을 기재한 사실과 이들을 뽑게 된 직접적인배경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이었다는 점 등을 본다면 이들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스데반과 빌립'이 첫번째 언급된 것은 뒤이어 이어지는이야기에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처럼 훌륭한 사역을 감당한 전도자들이다. 한편 본 구절의 '빌립'은 예수의 제자 빌립과는 다른 인물이다(8:5;21:8). 안디옥 사람 니골라 -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은 본 구절의 '니골라'가 계 2:6-15의'니골라당'을 세운 사람과 이름이 같다 하여 양자를 동일 인물로 보아 본 구절의 니골라를 배교자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일곱 사람들 중 유독 니골라에게만특별히 상세한 소개를 첨부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Gieseler, de Wette,Ewald). 그러나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나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6:6
안수하니라 - 여기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에게 안수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부여한 것은 민 27:15-23에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여호수아를 자신의후계자로서 지명한 이야기와 평행하는 것 같다 (출 29:1-37 주제강해 '안수에 대하여'참조).
=====6:7
왕성하여...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 '왕성하여'의 헬라어 '으사넨'(* )은 '자라게 하다', '증가하게 하다'는 뜻인 '아워사노'(* )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교회를 질적으로 계속 자라게 하시며 또양적으로도 믿는 자의 수를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 교회의성장의 한 예로 많은 제사장의 무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의 한 예로 많은 제사장의 무리가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 내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유대교 내에서는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예수 당시의유대인 일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모두 18,000명가량이었고 이중 8,000명 정도가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 이 제사장들 이 제의(祭儀) 기능을 수행했던 기간은 3대 명절의순례축제 기간과 연 2주간 정도였으며 나머지 연 10-11개월 동안은 고정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과대제사장들 사이의 사회적인 신분격차는 대단히 컸으며 대제사장들은 항상 제사장들의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별다른 소득이 없는 제사장들은 굶어죽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제사장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따라서 당신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생활과 또한 유대교 자체의 부패상으로 인해서 많은 회의(懷疑)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그들에게는 생명력있는 기독교 신앙이 많은 호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 설 교 >
처음 세운 일꾼들
삼상 16:6-13, 행 6:1-7, 마 25:31-46 / 인명진 목사
의사요 심리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인 스캇 팩은 그의 대표작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보다 마음의 태도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재능이나 환경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를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바른 사람은 행복을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행복한 인생=문제없는 인생이라는 공식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대표적인 오해는 행복한 교회=문제없는 교회라는 공식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만나는 믿음의 인물들 중에 문제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방주를 만들어서 새 세계를 시작했던 노아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주 비겁한 인간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요 해방의 영도자 모세는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 살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한 파렴치한입니다. 한결 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손에 들려져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결코 문제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산적한 문제 앞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와 시각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없는 문제까지 만들어서 인생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교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부르신 교회지만 문제없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처음 세워졌던 예루살렘교회도, 이방선교를 처음 시작했던 안디옥교회도, 소아시아의 선교 중심지 에베소교회도, 주님을 열렬하게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듯이 문제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입니다. 그런데 나라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울 때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다는 것이지요.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고 영적으로 해결할 줄 알았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2백여 년의 짧은 역사 가운데 크게 4차례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중에서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 대각성운동은 1850년대에 일어난 3차 대각성운동입니다. 남북전쟁으로 얼룩진 상처와 폐허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했습니다. 이 3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어난 그것도 주일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적갱신운동이었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이 디엘 무디 선생입니다. 그는 안수 받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디 선생이라 말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써 미국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가 집회를 열고 간 도시마다 YMCA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YMCA가 아니라 청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순수 선교회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이 YMCA운동에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우리나라에 목사, 의사, 간호사, 선교사로 들어와서 엄청난 헌신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 한 명이 무디 선생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무디 선생에게 다짜고짜로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그 동안 교회를 옮긴 것이 벌써 세 번째인데, 지금 교회도 문제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선생이 말합니다. “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한 군데 알고 있기는 한데 당신한테 추천해 주지는 못하겠소!”했습니다. 젊은이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해하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왜요?” 무디 선생은 답변합니다.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날부터 그 교회는 완전함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 교회의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는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더 큰 문제를 양산해 낼뿐입니다.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성장하고 문제와 함께 성숙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만나는 교회, 최초로 세워진 교회, 역사상 가장 좋았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지만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시작될 수도 없었고, 박해를 이겨낼 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넘쳐 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냥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둘로 갈라질 위기 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한 교회, 성숙한 교회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없이 자라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란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눈덩이처럼 커질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연단되어지고, 자신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도 성령을 충만히 받기만 하면 그 순간 콩나물 자라듯 믿음이 자라나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한 계층이 구제에서 소외되면서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갈등이 심각하여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때 교회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거나 확대시키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원칙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해 나가면서 문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점입니다. 어떤 성도라도 또 어떤 교회의 목회자라도 자신이 직접 몸담아 섬겨 나가고 있는 교회가 완전하기를 바라고, 문제없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는 천사도 아니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섬겨도 흠과 티가 있고,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에겐 언제든지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고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약 2년도 못되어서 벌써 교회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산 증인들이 있는 교회요,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사로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바로 그 교회요, 사도들이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교회, 교회 중에 가장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교회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모인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이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점에서 본받아야 할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에 어떤 문제점이 생겼습니까?
1. 구제문제로 서로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교하는 문제로 교회가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배하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히브리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는데, 헬라파 사람들은 늘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주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사회복지인데, 이것은 분배정의 문제입니다. 콩 한쪽을 잘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통째로 먹고, 어떤 사람은 콩가루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원망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 안에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갈라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대개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혹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칩니다.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파 사람들이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주류 히브리파와 비주류 헬라파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들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날마다 믿는 사람이 더해가는 교회였는데 분배 문제로 말미암아 교회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도 보면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돕기 위해 엄청난 구호물자를 보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를 공부할 때 보니 한국에서 필요한 물자가 10개라는 선교보고서가 올라오면 저들은 중간에 떼먹을 것까지 생각해서 12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교회에서 분배를 잘못하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50년 전의 일을 들먹이면서 6.25 구호물자를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차지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불평이 단순히 배급 문제에서 그치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 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되었고, 성도들 서로 간에 미움이 커져갔다는 점입니다. 아군이 적군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아군들끼리 전투를 벌일 지경까지 갔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것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회가 매력적인 곳도 아니요,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넘쳐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곳이 되고 만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문제점은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만 행했습니다.
구제를 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구제와 봉사를 위해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내적인 징표는 말씀과 예배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외적인 증거는 구제나 선한 증거를 통해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선교와 구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결코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봉사하게 하는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교회는 교회다운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말씀 전하는 것보다 구제가 우선되다보니 교회에 심각한 문제점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꾸만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싶고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자꾸만 받고 싶어집니다. 나중에는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점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했습니까? 사람이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꾼을 세웠습니다. 구제를 전담할 일곱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처음 세운 일꾼들입니다. 교회가 처음 세운 일꾼은 그냥 자리를 준 것 아닙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준 직분도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 하라고 세운 사람들도 아닙니다. 구제를 전담하기 위해서, 선교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선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꾼을 세우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현장을 잃어버린 직분, 섬김을 잃어버린 직분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는 처음 세운 일꾼처럼 선교의 현장에서 섬기는 사람을 찾아 세우려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웠습니까?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도대체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쉰 목소리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체험을 날마다 순간마다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영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교회 직분자들 중에 자기 고집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공간도 없고, 또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충돌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낮추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이지 않고, 자기 잘못이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은 크게 보이고, 자기 잘못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허물이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구멍이 보이면 자기 몸으로 그것을 막는 사람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지혜로운 개인을 뽑았다기보다는 교회의 선택이 지혜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일곱 집사로 뽑혀진 사람들을 보면 히브리 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일곱 명 모두 가 헬라 사람이거나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주류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주류가 자기 자리를 다 비워서 비주류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지혜가 없었다면 주류가 자리를 독식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없었다면 히브리파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로 구제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여 교회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성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회 안에 주류, 비주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인이요, 나그네를 형제 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아닙니까? 복음서 말씀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것,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주류를 선택해서 주류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고궁이나 오래된 성벽을 가보면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규격화된 벽돌이 공장에서 찍혀져 나오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돌을 깎아서 담장을 쌓거나 성벽을 수축했습니다. 그런데 성벽을 확장하거나 늘이려고 하면 새 돌만 깎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벽이 되어 있는 오랜 돌도 새 돌에 맞추어서 맞물려 깎고 자리 자리를 내어주어서 비로소 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의 돌이 되게 하기 위해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내어주었고, 거기에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집사로 뽑혀서 교회를 평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하여 말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일 묵묵히 감당하여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 기름을 부으려고 기름병을 들고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요즘처럼 아들이 한 명이나 두 명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집에는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아들 엘리압부터 시작해서 일곱 번째 아들까지 다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막내이자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처음 세운 일꾼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심지어 제사장의 무리까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문제 앞에서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처음 교회 일꾼처럼 교회의 부족함을 메우고, 목회자들의 손발이 되어서 좋은 교회를 세워서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
양인순 목사 / 행 6:1-7
어떤 사람이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왕국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그는 "여러분, 당신들은 내 건물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내 공장들을 불사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중요한 참모들만 주면 잃어버린 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나 공장이나 재산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이나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조건에 맞는 좋은 인재를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이나 꿈이 있어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나 멤버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잘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부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일군을 세우고, 은사에 맞게 배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일군을 세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성령을 받고 힘있게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번 설교를 하면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초대교회는 비록 12사도를 중심으로 120명이 모여 시작하였지만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인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대형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원망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같이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overlooked, neglected)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제자들이 더 많아졌는데 신바람이 나야지 왜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깁니까? 사람은 많아졌지만 효율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군이 부족했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구제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구제하는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지고 원망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밖에서 살던 해외파 사람들입니다. 헬라 문화권 속에서 살던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살아온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게 된 국내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굴러온 돌이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박힌 돌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의해 자기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가난한 과부들과 극빈자들이 교회 내외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파 교인들이 헬라파 교인들을 의도적으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제하는 방법을 놓고 알력이 생겼습니다. 서로간에 원망과 불평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초대 교회 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창립할 때부터 있던 교인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교인들이 늘어납니다. 새로운 교인들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창립 교인과 새로운 교인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이 발생하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신앙의 선배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과 격려로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돕고, 협력하고, 격려할 때 교회는 성장합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자 사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를 합니다. 2절을 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의 역할이 있고, 제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기다 보니 사도들이 본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구제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즉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본질적인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들의 임무는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갈등이 있습니까? 처음 은혜 받았던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왜 우리가 앞으로 달려가도 시원치 않은데 자꾸 뒷걸음질 칩니까? 첫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믿음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사도는 어디서, 무슨 이유로 첫 사랑을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하고 빨리 돌이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첫 사랑의 자리로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개입하여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본질의 회복이 바로 부흥입니다. 루터가 외쳤던 종교개혁이 바로 본질의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를 이 곳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본질의 회복이 바로 교회 부흥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성지(聖志)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聖) 뜻(志)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바로 본질의 회복, 교회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새롭게 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질 때 성지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6:3)
교회의 일군을 세우는 기준은 세상의 자격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일단 학벌이 중요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그러나 교회의 일군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재산의 유무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의 일을 힘있게 하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력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많이 했느냐가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12제자가 오늘날 면접시험을 쳤다면 한사람도 합격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학력, 경력, 재력,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시고, 세상을 뒤집는 놀라운 일군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1. 성령충만한 자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누가 성령충만한 자입니까? 예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찬은 진정한 일군의 자격미달입니다. 주일날 얼굴한번 인사하듯 비추는 예배생활은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계속하는 자입니다. 구제와 봉사를 통하여 남을 섬길 줄 아는 자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줄 아는 자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쪽지가 있어서 옮겨봅니다. 나는 성령충만한 자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나쁜 버릇이 고쳐집니다.
2. 자기를 절제할 줄 압니다.
3.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4. 문제를 해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5.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6.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7.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8. 자기의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9. 모든 면에 믿음을 근거로 한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0.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믿음의 일군 되기를 위하여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자입니다.
지식은 책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위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6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거룩과 순결을 추구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만드는 자가 됩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감싸 줍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긍휼히 여깁니다. 삶 속에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한면을 보고 판단하거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거짓이 없고, 정직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내 안에 부족하다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이 있어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면 실수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지혜있는 자는 문제를 지적하기 보다는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누가 칭찬을 받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성령충만하고, 지혜 충만하면 칭찬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신앙과 인격을 귀중히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인기있는 자가 되지 말고 칭찬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연기를 잘하면 인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은 받기 어렵습니다.
칭찬은 인격의 변화가 따라야합니다. 교회 어디에 있어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 칭찬받는 자입니다. 서양란처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윽한 향기를 발하는 동양란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자가 칭찬받는 자입니다. 우리 성지교회 안에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동양란같은 칭찬받는 많은 일군들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이 모여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일곱집사를 피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집사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르, 니가노르, 디몬, 바베나, 니골라입니다. 이들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가진 헬라인들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다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헬라파 유대인들이 집사로 선출된 것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몰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평상시에는 별 문제없이 지내다가도 선거만 하면 지연, 혈연, 학연에 매이는 것이 우리의 선거풍토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다수인 히브리파 교인들이 해외파인 소수 헬라파 교인들에게 표를 몰아주어 일곱집사를 모두 헬라인 교인들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중심이 다수파인 히브리파에서 소수파인 헬라파에게로 옮겨가는 일대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일 이후, 헬라파 유대인들의 활약은 눈부시게 빛이 납니다. 7장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신다고 굳게 믿던 유대인들에게 그가 행한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서 살던 헬라파 유대인이었기에 가능한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에게 전도한 헬라파 유대인 빌립 집사의 활약이 나옵니다. 옛날 북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 제국에 망한 뒤 혼혈정책으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섞였습니다. 그로인해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을 짐승처럼 취급했습니다.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정통 유대인들이 짐승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아가 기독교 역사상 이방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직접 베풀어 준 사람 역시 빌립입니다. 빌립이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는 헬라파 유대인의 거두인 사도바울의 회심과 활약이 시작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셨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감히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듣고 가장 먼저 땅 끝을 향해 뛰어간 자들이 바로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그리고 사도행전 13장부터는 아예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독무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사도행전의 역사가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넘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입곱집사로 모두 세워준 믿음의 용기가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룬 단초가 되었습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아집과 편협함에 빠졌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행전의 역사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완벽한 협력 속에 주님이 명하신 복음전파의 명령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편협함으로 나가면 교회는 주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는 남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귀한 일군이 될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겸허함이 있을 때 우리는 귀한 일군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희생과 협력의 결과 초대교회는 어떤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1.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제자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말씀 앞에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화답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삶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도 이런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제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숫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부흥이 임하자 교인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13년 예수생명잔치를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50일 동안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해봅시다. 우리 모두 5가지 기도의 제목을 정하고 열심히 새벽을 깨우며 기도해봅시다. 먼저 자신 안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고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흥분시키시면 수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소원은 삼삼삼의 비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백명의 헌신된 리더를 세우고, 삼백개의 건강한 소그룹을 이루어, 삼십 명의 사역자를 열방에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하면, 우리가 기대하고 전도하면 우리의 비전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줄로 믿습니다.
3. 형식적인 제사에 매달렸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말씀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배를 채웠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조직을 정비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마른 땅처럼 강퍅했던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성령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일군이 많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파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선한 믿음의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변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다른 사람도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지혜로워지면 주변의 사람도 지혜롭게 됩니다. 내가 칭찬받는 자가 되면 주변의 사람들도 칭찬받게 됩니다. 내가 바로 그 선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 2013년도 표어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는 해"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려면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처음 믿음의 자리,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르신 자를 위해서 충성합니다.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섬깁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믿음의 군사가 됩니다. 기도의 군사가 됩니다. 전도의 군사가 됩니다. 그 속에 우리 성지교회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고,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금주부터 부흥성회와 예수생명잔치를 위한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우리 오기를 품고 함께 새벽을 깨워봅시다. 우리 모두 합심해서 일만 시간을 주님 앞에 드려봅시다. 각 구역을 중심으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교구장님들이 앞장서서 구역장과 권찰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구역장님들은 구역원들을 독려하여 새벽을 깨우십시오. 성전이 머신 분들은 가까운 교회에 가셔서 새벽을 깨우십시오. 우리 한번 해봅시다. 5가지 기적을 일으킬 기도제목을 품고 기도해봅시다.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0월 둘째 주에 장로님 3분을 피택합니다. 지금부터 마음에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귀한 일군이 피택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성령충만, 지혜충만, 칭찬받는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주십시오.” 라고 응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들로 채워질 때 날마다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꿈의 현상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찬송가 320장 <나의 죄를 정케하사>를 결단의 찬양으로 올려드립니다.
나의 죄를 정케하사 주의 일꾼 삼으사 구세주의 넓은 사람 항상 찬송합니다.
내게 부어 주시려고 은혜 예비 하신 주 주의 은혜 채워주사 능력 있게 하소서
죄의 짐을 풀어주신 주의 능력 크도다 나를 피로 사신 예수 내 맘속에 오소서
주여 내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사 생명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옵소서
(후렴)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고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교회, 양면성을 지닌 신앙공동체
이수영 목사 / 행 6:1~7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곧 하나님나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세상보다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의 신앙이 다 바로 서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며 교회에 나아와 앉아있기는 하지만 생각은 세상에 가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삶은 신앙적이기를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기를 싫어하고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주님의 말씀인데도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싶어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당장 그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먹기도 힘들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더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인정은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의롭게 변화하는 것은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삶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성도로 완전히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입니다.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이중성 또는 양면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의인들의 무리임과 동시에 죄인들의 무리라는 양면성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양면성의 어느 하나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또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따라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의 무리임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며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과 악의 공격과 세상의 비방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으며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자각하는 가운데 항상 말씀 위에 바로 서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닌 양면성은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교회가 지닌 양면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행2:41, 47, 5:14). 대제사장과 그 측근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기도 하며(행5:17-18) 공회 앞에 끌어다 세우기도 하고(행5:27) 채찍질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도 했지만(행5:40)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행5:42). 그 결과 교회는 더 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더 많아진 것입니다(본문 1절). 그런데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다 보니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돌보는 데에 사도들의 눈과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크게 두 무리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헬라문명권인 지중해연안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 땅에 돌아와 살게 된 사람들인 헬라파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살며 히브리말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말하자면 본토 유대인들인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이 두 무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서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갑자기 많아진 교인들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매일의 구제”란 “주간 구제”와 함께 전통적인 유대인사회의 구제방식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주간 구제”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빈민에게 열네 끼를 먹기에 충분한 돈을 매 금요일에 지급하는 것인 반면, “매일의 구제”는 상주하지 않는 궁핍한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그가 머무는 집으로 매일 찾아가 배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 가운데 이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사도들을 도와 이 구제 일을 하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만나 교제할 기회가 없거나 적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일부 헬라파의 과부들이 구제를 받는 일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고 곧 그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본문 2-4절). 사도들의 이 말을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본문 5-6절). 이렇게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본문 7절).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구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본문 4절) 한 말에 주목합니다. 교회에 두 가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념해야 할 기도와 말씀 사역이 있는가 하면 또한 집사들이 맡아야 해야 할 구제사역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본래 구제사업 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고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그 사역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역을 소홀히 하거나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부터 문제와 분쟁이 발생하고 원망하며 시험 드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다 성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 대한 오해와 나쁜 소문과 그릇된 인식이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과 기도라는 고유하게 영적인 사역과 함께 구제와 같은 봉사 사역이라는 사역의 양면성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두 가지 사역을 다 잘 해야 성장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양면성을 지닙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의 사역의 양면성을 보여주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지니는 또 다른 사역의 양면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무리로서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힘써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방황하며 몸부림치는 세상의 형편에도 눈을 돌리고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고통을 해결해주며 근본적으로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와 질병을 치유하여 복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한 가장 근원적인 사역인 복음전도의 사역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 외에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만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만족하는 데 그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고 증언하며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가지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수직적이면서 또 수평적이어야 하는 교회의 사랑의 양면성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사랑을 다 실천할 때 교회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건, 영성은 뜨거운 이웃사랑, 성실한 사회적 책임, 건강한 정치참여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교회의 모든 봉사, 사회참여, 정치활동은 바른 신앙, 경건,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양면성 중의 어느 하나에만 치중하고 다른 한 면을 망각한다면 교회가 성숙한 신앙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과 이 세상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빌3:20)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늘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나라 백성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몰두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에는 관심 없이 그저 오늘 이 세상의 삶을 즐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교인들이 허다합니다. 또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겪는 일시적 실패와 낙심과 좌절과 분노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복된 삶의 소망과 확신으로 다스리며 극복하지 못하고 한숨짓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사를 주장하시며 일시적인 악의 창궐과 불의의 만연을 내버려두시며 세상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며 결국은 당신의 선한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의심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확실한 도래와 그 복된 완성에 대한 소망을 주고 위로와 삶의 의욕과 기쁨을 되찾게 해주는 사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한 자리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한숨짓는 이들이 찾을 수 있고 그들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함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멀리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며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롭고 복된 나라에 대한 믿음을 품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니는 사역의 또 다른 양면성입니다. 교회는 허구헌 날 모여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일들과 오늘의 이 세상 이야기만 나누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이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고 영원한 세상을 꿈꾸며 변함없는 진리를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오늘 이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궁극적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마6:33)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관점에서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나라를 앞당겨 살며 거기에서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제시해줄 책임감이라는 교회 사역의 양면성에 대한 의식이 또한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이 세상을 살며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는 백성의 무리입니다. 그런 교회가 진정으로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지닌 여러 가지 양면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 모두를 온전히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
성흥모 목사 / 행 6:1-7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부흥의 주역인 좋은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120명의 성도가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던 중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복음 전파가 활발하였고, 교회는 부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6:1에는 “그 때에 제자가 많아졌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란 예수님의 12제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 시대가 되면서 예수님의 12제자는 12사도라고 불렀고, 제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120명의 성도에서 3000명으로, 다시 남자만 5천 명으로, 그리고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왔으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돌아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복음을 전파하면 양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렌스키에 의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2만에서 2만5천명의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 같은 아람어를 사용하므로 의사소통에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헬라파 유대인이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들인데, 로마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이방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의사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민사상이 강하고 배타적인 생각이 강하였기에 헬라파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열외 시켰으며,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거나, 탄탄한 조직력이 뒷받침 되지 아니한다면 와해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어려운 극빈 교우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같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한 동리에 살면서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기에 우리 기독교회가 전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교회마저도 가난한 과부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들은 생활고를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12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외쳤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공궤하는 일, 접대하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궤를 일삼는다, 접대를 일삼는다.”는 말은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여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삼는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말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삼는다는 말이 “디아코네인”이라고 하는데 영어의 집사를 'Deacon'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디아코네인’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구제라는 말이 ‘다이코니아’라는 말인데, 그 말은 봉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도들이 하는 기도와 말씀 사역은 위대한 일이고, 교인들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일은 저급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요,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리와 소명의 사역이 있기에 그것이 우선적인 일이라는 것뿐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기독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주님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로서, 교회의 존폐를 가늠하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이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움을 입었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의 선후를 알았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을 알았고, 교회가 커져감에 따라 일을 나눠 맡아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들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주님에게 받은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하는 말씀 사역과 그를 위한 기도 사역에 힘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확고한 의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고 하였습니다. “힘쓰리라”는 말은 전무한다는 말인데, 전력 질주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지속하고 꾸준히 하고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교인들의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 원망이나 듣고 있다면 우선순위를 모르고, 그런 일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얼마든지 위임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한 주간 힘들게 살다가 상한 심령으로 교회를 찾아오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교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소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 앞에 일꾼을 택하여 세우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3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고 했습니다.
일곱 분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편의상 집사님으로 호칭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이나 성서신학자들은 이 처음 안수하여 세우는 일곱 명의 일꾼을 장로의 역할을 감당한 분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직분이기에 이들은 후에 자연스럽게 장로의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곱 집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일곱 집사라고 불러봅니다.
초대교회가 세운 일곱 집사는 몇 가지 자격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또한 지혜가 충만해야 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격을 다 갖춘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실 것이지만 세움을 입고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힘써야 하고,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이 되고,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첫째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실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력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요, 복음 전파의 권능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은 모두다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일꾼은 머리 좋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라면 됩니다.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에 교회는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반되지 아니하는 열심은 자기를 위한 열심일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가끔 대단한 열심을 가진 일꾼들을 보게 되는데, 자기의 실력과 인간적인 야망과 자기 기준으로 언제나 앞서 나가려고 하는 때문에 때로는 열심 없는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인간관계를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13:7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에게 “즐거움으로” 그 사역에 힘쓰도록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는 이가 있습니다. 주의 종들로 하여금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꾼들은, 교회로 보나, 자신에게로 보나 유익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은 당장 그만두어야 하는 소모적인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 일은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지혜도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 지혜란 인간의 지식이나 똑똑함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인하여 받은 은사로서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사리 분별에 참 빠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조언하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지혜로운 이들은 정도(正道)를 따르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순리를 따르고, 이치에 맞게 처신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은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사리판단에서 능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이 있어야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데서 나오는 결과가 칭찬 듣는 신실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사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에 있어 평판이 좋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모범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건전한 사고력을 가지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며,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아야 좋습니다.
그런데 왜 꼭 일곱을 택하라고 하셨는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수는 거룩한 수요, 완전수요, 행운의 숫자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를 자연스럽게 정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면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관습을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나라는 한 지역을 원만하게 지도하기 위하여 7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하여 어떤 일을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7명 정도의 일꾼이라면 당시의 구제 사업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7분의 집사님을 세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떤 직분이나 사역에 있어 자격을 말한다면 그런 자격에 능히 합격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2-13, 15)고 했습니다.
우리는 되고, 되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고나서, 점진적으로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하나 일단 장로가 되고, 장로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어떤 직분을 받기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힘쓰다가도 일단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 15)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제안을 들은 온 교회가 기뻐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이들에게 안수하여 일꾼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수하여 일꾼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안수하고 기도하여 세웠습니다. 교회가 누구를 안수하여 세운 것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성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을 한번 외워봅시다. “스빌브니디바니” 방언같은 소리이지만, 일곱 분의 이름의 첫 자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이상 7분입니다. 이들 중에 스데반집사님은 사도들을 제치고 첫 번째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고, 빌립은 누구보다도 전도에 열심을 내었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배교자로 간주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사도를 이어 교회를 이끌어 오신 이레니우스와 터튤리안 같은 교부들은 니골라가 요한계시록2:6-15에 나오는 이단의 무리인 니골라당을 세운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니골라 한 사람만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고, 안디옥이라는 이방에서 온 점을 설명하는 것’도 그의 배교를 뒷받침한다고 보았습니다. 12제자의 한 사람 가룟유다가 배반하였고, 집사에는 니골라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7인의 일꾼을 세운 후에 교회는 안정되었고, 사도들은 더욱 힘을 얻어 말씀을 전파하였고, 교회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왕성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왕성한다’는 말은 ‘증가한다’는 말이요,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인데, 저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들어오기에는 교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는데도, 기독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들이 돌아오는데, 허다한 제사장들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유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기독교회로 돌아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십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분의 일꾼을 세우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의사들이 필독하고 암송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을 병원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처음 부분에 있었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의사라는 직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고귀한 소명으로 알고,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직원으로 세움을 받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일과 세상의 부름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직분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명예로운 직분이 없습니다. ‘멍에직’입니다. 명예직과 멍에직은 참으로 다릅니다. 국어사전에도 멍에직이란 말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말입니다. 멍에는 아무나 메는 것이 아닙니다. 한참 일한 수 있는 젊은 소에게 코뚜레를 걸고 멍에를 메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특권 중에도 특권이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명예를 얻는 순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진정한 성공은 나의 나됨을 아는 것이요, 내가 받은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모두 다 대접할 사람들이요,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치 있는 삶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베풂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고, 지식도 나누어야 합니다.
해리트루먼 대통령이라고 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겸손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도 미국에서, 10가지 리더십의 원리를 가지고 미국 역사상에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 다섯 명을 확정한 바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이었습니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비서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출용 벨을 없애버렸습니다. 본인이 직접 문을 열고 비서실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공손히 맞이하여 들였다고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고는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위하여 환영 만찬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군인 ‘유진 리스트’ 하사가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유진 리스트가 아무나 악보를 좀 넘겨 달라고 부탁하자 트루먼이 먼저 나가서 피아노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하사의 명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은 끝까지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나중에 리스트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내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다니, 한번 상상해보시오. 우리 대통령은 그런 분이라오”라고 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절대 잊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리더는 섬기는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지혜 충만을 사모하고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칭찬 듣는 사람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크게 성장하는 교회
이수영 목사 / 행 6:1-7
오늘 본문 첫머리에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 했습니다. 또 본문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합니다. 이미 예루살렘교회는 무섭게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장의 속도와 규모가 점점 더 커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놀라운 교회성장의 요인 몇 가지를 보게 됩니다.
우선 본문이 전하는 예루살렘교회의 문제상황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다 보니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돌보는 데에 사도들의 눈과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이 전하는 상황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크게 두 무리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유대인이긴 하지만 헬라문명권인 지중해연안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땅에 돌아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며 헬라권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친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히브리파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살며 히브리말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말하자면 본토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자연히 이 두 무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서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갑자기 많아진 교인들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매일의 구제"란 "주간 구제"와 함께 전통적인 유대인사회의 구제방식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주간 구제"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빈민에게 열네 끼를 먹기에 충분한 돈을 매 금요일에 지급하는 것인 반면, "매일의 구제"는 비상주민으로서 궁핍한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그가 머무는 집으로 매일 찾아가 배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 가운데 이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사도들을 도와 이 구제 일을 하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만나 교제할 기회가 없거나 적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일부 헬라파의 과부들이 구제를 받는 일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인 일을 놓고도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고 곧 그 대책을 세웠습니다. 본문 2-4절에서 보듯이 교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둘째는 이 일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 셋째는 사도들은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사도들의 이 말을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즉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시며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 속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여기서의 안수는 책무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들이 행하는 책무는 사도들의 권위 아래서 행해지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며 그들 뒤에는 사도들의 지지와 후원이 있음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의 문제가 해결되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제사장들은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반대하는 핵심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허다한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사도들이 취한 자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원망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 일부 과부들이 구제 받는 일에서 빠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공동체 안에서 약한 소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소외와 아픔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원망이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 전체에 끼칠 폐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갈등 때문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는 것은 빨리 그리고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런 일로 인해 그들 본연의 사역인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 교회성장에 가장 치명적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인 문제상황의 인식뿐 아니라 대처방식 또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온 교인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문제해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되 교인들 전체와 책임을 나누며 그들의 의사를 존중했습니다. 본문 2-4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전체 교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일곱 사람을 지명한 것도 아닙니다. 전체 교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해결하라고 무책임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신앙적 지침을 전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스스로 일꾼을 뽑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에 보면 사도들은 교인들이 뽑아 세운 일곱 사람을 받아들여 두 말 하지 않고 기도하고 안수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교인들의 권리와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한 것입니다.
사도들뿐 아니라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보인 태도 또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구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습니다" 하자 본문 5절에 보면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 제안에 일체 반대하거나 따져 묻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 대한 신뢰와 절대적인 협력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잠시 일어났던 원망이 사라지고 기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뜻을 잘 이해하고 사도들이 요청한 그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은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했지만 교인들은 "이 말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나이순으로 일곱을 정했더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들은 다 배제하고 뽑았더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인들이 택하여 세운 일곱 사람은 모두 헬라파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실도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구제에 빠지곤 하자 그 일을 할 사람 일곱을 모두 헬라파 사람들로 택하여 세우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를 안배해야 한다거나 동수로 해야 한다거나 하는 논쟁이나 힘겨루기 없이 단번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의 성숙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다 헬라파이지만 그 중에 제일 끝에 언급된 니골라는 본래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었습니다. 즉 해외동포출신이 아니라 완전히 외국인인데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니골라처럼 아예 유대인의 혈통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가장 소수이고 가장 소홀히 여겨질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겠는가 짐작해 봅니다. 혈통과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려는 의지를 엿보게 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공동체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문 7절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루살렘교회의 성장의 역사의 한 토막인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모든 교회의 성장을 위한 몇 가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나 그로 인한 원망이 없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역자와 교인들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성장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 전하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루살렘교회에서의 문제상황은 일부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것이었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상황은 그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 본연의 사역인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교역자들이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다면 교회성장의 주된 동력이 멈추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교역자들만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교인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저런 일로 교역자들의 시간과 힘을 다 소모시키고 탈진시킨다면 교회가 성장할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비본질적인 일들로, 비신앙적인 태도로, 교역자들을 피곤하게 하고 괴롭히며 주눅 들게 만들고 사역의 의욕과 기쁨을 꺾어놓는다면 교회는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편안하고 기쁨 마음으로 교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로 교역자들을 돕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역자들의 책임은 그 무엇보다도 큽니다. 교인들 사이에 어떤 원망과 불평과 갈등이 자리 잡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권위주의에 빠져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교인들의 권리와 의사를 무시하며 제왕적 전횡을 일삼는다면 교회는 큰 시험에 들고 엄청난 진통을 겪으며 온 교인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을 기도로 위로하며 말씀으로 확신과 기쁨을 주는 교역자들이 되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역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준비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교역자이기를 포기한 것이고 교회성장을 거부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말씀은 교회의 성장과 활력의 중심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예루살렘교회가 빠르고 힘있게 성장하자 사탄 또한 가만히 있지 않고 교회성장을 해치려는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을 위협하거나 잡아가두는 등 교회가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한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교인들이 탐욕과 거짓에 빠지게 함으로써 내부로부터 병들게 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시도가 다 실패하자 교회성장에 가장 치명적인 일 즉 사도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게 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하지 못하게 하기를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온 교인들이 합력하여 이 시험을 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는" 놀라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도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역자들과 온 교우들이 새롭게 각성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안팎에서 닥쳐오고 일어나는 온갖 시험을 이기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기도와 말씀에 힘씀으로써 크게 성장하는 교회 되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의 문제해결
김경년 목사 / 행 6:1-7
한번은 어떤 청년이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 스펄젼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런 부탁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돌아다녀 보아도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 문제가 없는 교회를 소개 해 주세요.”
그때 스펄젼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가 돌아다니다가 만약에 그런 교회를 한번 찾게 되면 나에게 꼭 연락을 해주게. 그러면 나도 그 교회에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하고싶다네.”그리고 한마디 더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에 가지 말게. 왜냐하면 자네가 그 교회에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다시 문제가 생길것이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초대교회는 정말 은혜가 넘치고,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있었고, 날마다 성도의 수가 부흥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누구보다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팀을 이루어서 목회를 했던 교회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 안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을 보면 오늘 이 세상의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의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문제를 해결했던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초대교회는 민족간의 갈등이 문제였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때에 제제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흩어졌던 유대인들로, 고향을 떠나서, 헬라 문화 속에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히브리파 사람들이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며, 고향 말인 아람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이들은 같은 민족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한마디로 말하면, 토박이였던 히브리파 사람들과 타향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간의 갈등입니다.
요즘도 어떤 교회에서는 토박이 성도들과 새로 들어온 성도간의 갈등이 있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토박이 교인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개척해서 어렵게 교회를 지켰기 때문에 자기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토박이의 기득권을 뺏기 위해 서로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즉 여러분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이 덥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춥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설교가 짧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길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가족적인 분위기라서 좋다고 하고, 어떤 분은 너무 촌스럽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너무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다가 보니까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고, 서로간의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전혀 이런 문제를 이상하게 보면 안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초대교회의 문제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생겼습니다.
본문 1절 하반절입니다.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초대교회는 매일 구제하는 일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일 때문에 생깁니다. 교회가 일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없는 교회는 일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일하는 교회는 어디든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교회가 좋은 일을 하다보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싸우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다 좋은 일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좋은 일을 하다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생긴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서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즉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 사람들을 구제할 때는 많이 주면서,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실 구제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구제를 받는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요즘 교회에도 자세히 보면 받으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요즘 나이가 많다고 나이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오래 됐다고 고참이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일 했다고 칭찬 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실 더 받으려는 마음을 없애면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셋째, 초대교회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모든 문제가 사람을 통해서 생기는 것 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5절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초대교회는 이와같이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움직였던 교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헌신적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리는 성도들이 있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반대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려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지만, 교회의 문제를 더 크게 확대하고 더 복잡하게 문제화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사람에게 칭찬 듣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그의 말을 따릅니다. 그는 무슨 문제든지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본업에 충실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잘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든지 구제를 잘하고, 교육을 잘하고, 선교를 잘해도, 목회자가 말씀을 잘 전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본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렇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는 열심히 일하다보면 생깁니다.
일하지 않으면 문제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중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 분들은 시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시험에 듭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결 론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사람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교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또한 주의 종들은 오직 말씀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말씀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교회가 더욱 부흥하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교회에 꼭 필요한 일꾼
박한응목사 / 행 6:1-7
찬 양 : 320, 321, 358, 495, 511, 515.
할렐루야!!
오늘도 이 시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평강이 충만 충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 전국 교회가 [평신도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평신도란 말은 우리가 평상시에 많이 들어온 말이지만 웬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엔 교회 안에서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직분을 받지 못한 그저 교회에 갖 나온 그런 신자들을 가르쳐 평신도라고 그렇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평신도는 성직자로 세움 받은 목사, 전도사를 제외한 모든 성도들을 가르쳐 평신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에 해당하는 헬라어 “laikos(라이코스)” 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평신도 운동의 시작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48년 제1차 총회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교회 누구를 막론하고 평신도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목회자 중심으로 이끌어져 오던 교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는 평신도 중심으로 이루어 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우리가 처한 평신도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여 오순절 날 120명의 문도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교회가 탄생된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성도들은 다락방을 뛰쳐나와 스스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 3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같이 급격히 성장하여 일손이 너무 분주하고 물질 분배가 잘 되지 않아 구제 문제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간에 원망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고민하던 사도들이 모든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중대한 발표를 하게 됩니다.
본문2-4절 말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고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핍박과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든든하게 성장하던 교회가 사소한 일로 인하여 갈등과 분열의 위기에 이르자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는 평신도 사역자를 세워서 사도의 사역과 평신도의 사역을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중심 사역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이요, 평신도의 중심 사역은 공궤 하는 일로서 봉사와 구제를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처음으로 초대교회가 평신도를 조직화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관심을 가질 것은 “일을 맡기고…” 라고 한 말입니다. 사도들이 공궤 하는 일까지 전담하다 보니까 교회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신도 지도자들을 선택하여 안수하여 세워서 사도들이 하던 일의 일부분을 저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처음 집사로 임명된 일곱 명 중에 특별히 스데반이나 빌립은 봉사와 공궤 하는 일 외에 선교적 사명도 충실하게 잘 감당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급기야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고, 빌립은 유대인들 간에 금기 사항이었던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에티오피아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점점 다원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도 이에 점점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회자만으로는 복음을 전담하기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평신도를 얼마나 조직화하여 복음의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가 부흥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즉 일반 성도들을 어떻게 사도적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여 자기의 직업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의 본분과 평신도의 본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사도의 본분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2-4절 말씀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사도의 본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본이 됩니다. 사도나 목사는 무엇보다도 기도로써 영력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가 외치는 복음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되고 아무리 고매한 인격과, 훌륭한 학벌과, 탁월한 재능과,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도 기도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이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목사가 기도로써 성도들을 축복하는 것은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특권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엎드려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출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하여 쫓기곤 하였습니다. 목사가 조용히 기도실에서, 또는 제단에서 엎드려 기도할 때, 또는 가정에 심방을 가서 축복기도를 할 때, 성도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처럼 주의 종들이 기도하는 사명을 제쳐놓고 사회 참여 활동과 정치에 분주하다 보면 기본적인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소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영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끼날이 빠져버린 도끼 자루와 같이 됩니다.
(2) 사도의 본분은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나 목사의 직무는 말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가르치는 책임이 목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간직하는 보고(寶庫)라면 사도나 목사는 그 말씀을 파수하는 수문장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추호라도 훼손되지 않고 순수하게 보관이 되도록 지키는 사명이 바로 사도와 목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온갖 이단 사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간수하는 동시에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사도나 목사의 최대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30년 동안 이런 결심으로 목회하여 왔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은퇴를 하였지만 앞으로도 남은여생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신령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가 신령한 교회가 되고 또 제가 신령한 목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사도와 목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전무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아멘!>
옛말에 열두 가지 재주 있는 사람이 땟거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에 음식을 만드느라 우왕좌왕하는 마르다보다 말씀을 택한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후에도 그들은 낙심하여 고향으로 낙향을 한 사람도 있고, 디베랴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열심히 기도할 때 오순절 날 성령을 충만히 받고 전무후무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정치에 성공한 목사, 사업을 해서 성공한 목사, 사회 운동을 활발하게 하여 성공한 목사, 또는 이런 저런 감투를 많이 쓴 목사 치고 진실 된 목사가 별로 없습니다. 목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목적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오직 이 사명에 충실해야 장차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1945년 처형당한 독일의 본 헤퍼 목사나, 흑인 민권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사람들은 존경하고 또 순교자처럼 추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위대한 투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가난한 교회를 지키며 심지어는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에 걸려서 고생을 하면서도 맡은 교회를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목사보다 훌륭한 목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론 시대적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위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려면 목사라는 성직을 가지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목사라는 성직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성직을 이용하여 더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종 된 사도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시간마다 영감을 받고 그 받은 영감을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증거하고 베풀고자 밤을 지새우기도 하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할 때에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는”(행6:7)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2. 최초로 세움 받은 일곱 집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는 두 종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으로써 그들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교인들로서 자신들만이 정통적인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을 히브리파라고 부르는 교인들이 있었고, 또 한 종류는 이방 나라에서 온 유대인으로써 그들은 오순절 절기에 참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로서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살았기 때문에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 헬라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헬라파 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교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교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였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구제 사업에도 구제품을 나누는데도 차별대우를 하고 또 헬라파 교인들을 빼놓기가 일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평과 원망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헬라파 교인들은 자기들도 똑같은 유대인이요 예수를 믿는 교인이며 똑같이 핍박을 받는 형제인데도 무시와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1절 말씀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곱 집사를 선택하여 세우고 그들에게 공궤 하는 일을 맡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1) 그러면 집사를 세우게 된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성도의 수가 많아짐으로 집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교회는 날마다 믿는 자가 늘어나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3천명에서 5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핍박도 날로 심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에 대항하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②구제 사업을 평등하게 하고 은혜롭게 하며 헬라파 교인들과 히브리파 교인들과의 불평과 원망을 조정하고 유지하게 위해서 집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제 사업은 집사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가 발전을 하여 오늘의 교회 안에 임원회가 조직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원들은 사도와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모든 원망과 불평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 교회를 평화롭고 은혜롭게 만드는 임무도 임원들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의 평화롭게 은혜롭게 하지 못하고 자신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③가장 큰 이유는 사도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있는것처럼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는 저들이 교회 안의 공궤 하는 일이나 성도들 간의 원망과 불평을 사전에 잘 처리함으로 사도들이 비로소 마음 놓고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성도들은 담임목사로 하여금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집사가 될 수 있습니까?(집사의 자격)
본문 3절 말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라고 하였습니다.
①그 첫째 자격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재산이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식이 높고 덕망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명예가 높아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집사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야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 안에 집사가 되면 꼭 그런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 안에 풍파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인정에 끌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②두 번째 자격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식은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지식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식한 사람은 직분을 잘 알지 못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일군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무식하거나 상식이 없거나 자기만 아는 교만이 있거나 하면 오히려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고 교회를 욕되게 하며 교회의 전도문을 가로막게 됩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람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③세 번째 자격은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집사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고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마5:16)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칭찬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고 예수님을 욕 먹이며 교회의 전도문을 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세움 받은 집사가 해야 할 임무는 무엇입니까?
①구제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일을 사도나 목사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사도들에게는 보다 더 큰 임무가 있기 때문에 구제 사업, 선교 사업 같은 일들은 교회 안에 임원들이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구제 사업을 일곱 집사에게 맡겼습니다.
②교회 행정을 맡아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임원으로 선택된 사람은 교회를 치리 하는데 필요한 제반 행정적인 문제와 재정의 수납 지출에 대한 살림을 책임을 저야 하는 것입니다.
③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은 그 어떤 임무보다도 가장 무겁고 귀중한 것입니다. 일곱 명의 집사 중에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하였고 빌립은 사마리아까지 가서 전도를 하였으며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므로 그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집사의 임무가 이와 같이 막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합니다. 그냥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니까 집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는 직분은 어떤 직분이든 간에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사명임을 깨닫고 스데반처럼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각오와 결심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갚아 주리라” 칭찬과 면류관의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우리들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 것을 깨달아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와 같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지혜도 충만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칭찬 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교회 안에 평화와 기쁨이 충만한 교회를 만들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구제 사업뿐만 아니라 전도도 열심히 하여 스데반 집사와 같이, 빌립 집사와 같이 천추에 길이 증거가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무를 주시고 또 권리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감당한 후에 권리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으로써 집사로써 권사로써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권리만 주장하면 이것도 잘못된 신앙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얼마가 되었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할 때에 우리 주님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지 두 달란트를 남겼던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해 주시며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성도들은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받은바 사명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충성된 종이 되므로 초대교회 일곱 집사와 같이 칭송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칭찬 받는 일꾼들
행 6장 1~7절 /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은 주님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로 부흥하고 성장해서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평신도의 역할과 사명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결단하기 위한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이 땅에 세워진 처음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로운 모습으로 부흥하며 성장해 가던 때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는 사도행전 6장의 말씀을 읽고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깨닫고 결단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는 이제 6개월 후인 새 해가 되면 교회가 세워진지 5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나간 5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50년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 맞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지 이제 만 14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은퇴할 때까지의 시간이 13년의 세월이 남아서 절반의 시간이 흘러가고, 절반의 시간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흩어지고 새 가족들이 등록을 해도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목회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남은 목회를 뼈를 깎는 심정으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각오로 임할 생각을 가지고 내일부터 40일 동안 제가 가장 잘 못하고 힘들어 하는 하루 한 끼씩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목회는 그동안의 목회 스타일과는 많은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목회자를 모셨다고 생각하고 저의 달라져 가는 목회 스타일에 당황하지 마시고 기도하시면서 보조를 잘 맞춰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특별히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대했던 모습들을 최대한 없애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제가 권위적으로 바뀌어져 간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그동안 하던 일을 6월 말까지만 하고 중단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 그리고 전도하는 일과 심방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종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저를 위해서 여러분들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예를 갖춰서 대해 주시기를 바라며,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친밀함으로 대하는 것을 절제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정중히 부탁합니다. 제가 앞으로 남은 13년 동안의 목회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뜨거운 기도의 협력과 깊은 이해와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평신도 주일을 맞이한 우리에게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구조(조직)를 갖추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들 각자가 은혜로운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도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은혜로운 생각들을 함께 나누며 그 생각들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좋은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께 칭찬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사역의 내용과 범위를 지혜롭게 나누고 함께 동역해 나감으로써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나가야 함을 오늘 본문 말씀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의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말씀하셨으며,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일을 위해서 평신도 사역자들인 집사들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역은 결코 경중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맡겨진 사역이 다를 뿐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각각 맡겨진 사역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목사가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평신도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고 섬기는 일을 위해서 평생을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고 세움을 받은 전문 사역자라고 하는 점에서 평신도들과는 분명한 구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후를 살펴보면 이 당시 초대교회의 상황은 두 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 가운데 사도들의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서 놀라운 속도로 부흥하고 있어서 하루에도 삼천 명씩이나 제자의 수가 더 해지는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놀라운 교회의 부흥을 지켜보고 있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더 거세게 박해하는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부적인 도전과 시련 외에도 교회의 건강함을 해칠 수 있는 또 한 가지 시련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밖에서 다가오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생겨난 문제였고, 이 문제가 사실은 교회 밖에서 다가오는 갖가지 시련보다는 훨씬 더 위협적이고 무서운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아직 교회가 건강하고 은혜로운 모습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건강한 구조(조직)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고 하는 문제와 더불어서 매일의 구제와 관련해서 교회 안의 구성원들 간에 벌어진 갈등의 문제였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급성장하는 놀라운 부흥의 속도에 걸맞은 건강한 조직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땅에서 나고 자라고 계속해서 살았던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 지역으로 흩어져 살다가 말년을 고향에서 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헬라파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가 서로 다른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간에 생길 수 있는 인간적인 섭섭한 마음이 원망과 불평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사단의 전술에 의존해서 표출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만약에 초대교회가 부흥의 속도에 걸맞게 건강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런 인간적인 섭섭한 마음이 생겨날 수 있는 일은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아직 외피도 건강하지 못했고, 거기에다가 내피,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도 아직은 다분히 인간적인 생각에 이끌려서 가다 보니까 이런 내부적인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잘 해결함으로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성숙되어 나가는 모습과 함께 누구라도 아주 쉽게 앞으로의 교회 부흥을 미리 점쳐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의 건강함과 은혜로움을 해칠 수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지체의식, 한 몸 의식, 동역의식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생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한 가지 생각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기도 한 것인데,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제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그들에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한 거룩한 직분을 맡긴다는 뜻으로 안수하여 집사로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선적으로 사도들은 사도들이 해야 할 본연의 임무와 사역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구성원 간에 생겨났던 갈등의 원인들을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해결 해 나가며 또 다른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로 초대교회는 더욱 힘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결국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예루살렘 담장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음을 사도행전 이후의 기록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초대교회가 이렇게 평신도 사역자인 일곱 집사를 세움으로써 놀라운 부흥을 이루게 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놀라운 역사의 배후에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와 같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좋은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 안에 세워졌던 최초의 평신도 사역자들인 일곱 집사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3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필요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일꾼들이 필요한 법인데,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이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와 교회 확장의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은사와 함께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조건이 가장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았던 왕이나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사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역에 필요한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역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이룰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제시된 두 번째 조건은 ‘지혜의 충만함’인데, 이것은 성령 충만함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성령 충만함의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정 및 사무 처리에 필요한 지혜를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포괄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실천적인 지혜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보다 그 일의 처리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함으로써 관계를 부드럽고 원만하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 제시된 세 번째 조건은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앞선 두 가지 조건, 곧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의 충만함’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본래적인 뜻은 ‘평판이 좋은 사람’, ‘증명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을 사람은 성령 충만한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인격 또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서 따르고 싶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나타난 모습이 바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초대교회는 구원 받는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세워진 평신도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증명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에서 교회의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맡을 사람의 자격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자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기를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구약성경 출애굽기 18장 17~2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워진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 곧 오늘날 현대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모세에게 장인인 이드로가 지도력의 분배를 통한 공동체의 건강성 확보를 위한 제안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공동체에 필요한 일꾼들의 자격 조건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선택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권위의 근거가 하나님임을 깨닫고 교만하지 않아야 됨을 말하는 것으로 겸손히 섬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실한 자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타인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올바른 방법을 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청렴결백하여 자신의 욕심과 인간적인 생각에 이끌리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평신도 주일을 지키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시고 묵상하심으로써 초대교회 일곱 집사와 같이 하나님의 좋은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나가는 일에 충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심으로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귀한 면류관과 상급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터져 나온 갈등의 아름다운 해결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행 6장 1~7절
[들어가는 말]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비판을 받게 된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하도 잘 못한다고 심한 말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기득권층을 대변한다고 ‘기득교’라고도 하고 또 ‘개독교’라고도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은 잘 느끼지 못할 텐데,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거나 새로 나오는 분들은 교회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언어도 그렇고, 사회와 너무 동떨어진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만을 위해 돈을 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로 얼마 전 미국에서 제일 크다고 알려진 휴스턴의 레이크우드(Lakewood) 교회의 재정이 공개되면서, 굉장히 많은 헌금이 나오고 예산이 높지만, 그 중 주변 이웃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게 너무 적다는 비판 기사를 보았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쓴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정도 큰 규모라면 자기 건물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당연히 써야 하지만, 이웃을 위해서 쓰는 데는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돈 문제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교회는 너무 쓸 데 없는 일로 싸운다는 겁니다. 권력 다툼으로 직분을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이 안 좋게 비칩니다. 사실은 한국 교회가 구제를 많이 하고 있는데 뒤에서 숨어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가장 많이 구제하고, 고아원이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은 개신교가 가장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기대를 교회들이 충족시키지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교회는 구제 단체가 아니다.’라고 선포하는데,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교회는 구제 단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교회 재정을 운영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사역하는 것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본 세상은 교회에 점점 더 큰 실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구제만을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가 선교와 거의 동등하게 주력했던 일이 바로 구제,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2:9-10을 보면, 가장 먼저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 악수를 하면서 부탁한 사역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였습니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던 사역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들도 구제 문제가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1. 교회 내에서 일어난 갈등 (1~2절)
1) 문제의 발생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한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와 관련되어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있었고, 이제 6장에서는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외부에서 핍박을 하다가 그게 안 되니까 내부에서 탐심의 문제를 일으키려 하고, 그것이 진정되니까 또 핍박을 하고, 이제는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는 겁니다. 성도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나니까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1절)
여기서 “그때에”라는 단어를 보면, 5장에서 연결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 단락에서 사도들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성전에서든지 집에서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5:42),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치기와 전도하기의 결과로서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제자’, 즉 단순히 왔다 갔다 하는 사람 수가 늘었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로 구주와 주인으로 믿고 영접하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에는 두 가지 좋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제자가 많아지고, 한 편으로는 구제가 실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 밖이 아니라,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교회 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교인 숫자가 늘어나다보니까, 구제 활동을 할 때 본의 아니게 혜택에서 누락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섭섭함과 불만과 비판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두 헬라파여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빠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엄청난 대형교회였습니다. 처음에 120명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하나님의 큰일을 여러 가지 언어로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했고, 그 말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로 들어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자고 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3천 명이 넘어가고, 조금 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보고 그를 일으켰을 때, 그것을 본 사람들이 남자만 5천 명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3천 명과 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니까, 그들과 함께 한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하면 최소 만 5천 명에서 2만 명은 된 겁니다. 교회가 서서히 성장해도 힘든데 갑자기 2만 명이 되면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거기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겠습니까? 100여 명만 모여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만 명, 이만 명이 되면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그렇게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다 보니까 헬라파, 즉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것(소홀히 여김을 받는 것)을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초대 교회 내에 여러 그룹들이 있었다는 것을 봅니다. 특히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에 약간의 긴장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실권은 아무래도 주로 히브리파가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를 주로 하는 정통 유대인들, 이스라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돈도 관리하고 구제나 봉사나 기타 사역들을 다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밭이나 집을 팔았을 때 그 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는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헌금을 받아서 집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이 많아지고 2만 명이 넘어가다 보니까 사도들이 전부 다 일들을 감당하기에 한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헬라파’는 이방인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히브리파와 구분되게 헬라파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고향이 이스라엘 본토가 아니라 이방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내의 여러 군데에 퍼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방 지역에서 출생한 교포 출신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 사람들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2세, 3세 들이 Korean American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로 그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헬라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그는 자기가 헬라파가 아니라 히브리파라고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헬라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모국어가 히브리어라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히브리어를 하고 살았고, 히브리 문화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자기는 헬라 지역에서 태어났어도 히브리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굉장히 특이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그는 분명히 헬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헬라 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정통 히브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정통 유대인의 신앙 속에서 자랐으면서도 헬라 문화를 너무 잘 아는 바울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교포 출신의 유대인들은 대개 예루살렘에 연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그 후 사도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 결단하고 회개하면서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국에서 왔지만 예루살렘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그곳에 있던 히브리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에는 중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이방인들을 친구로 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합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자녀들은 당연히 미국 친구들이 많고 영어를 합니다.
하지만 본토 출신의 히브리파 사람들은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그들이 크리스천이 된 다음에도 본토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헬라파 사람들까지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교포 학생들이 방문단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6월 항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 밝고 유쾌한 성향이니까 지나가면서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갔습니다. 그때 시위를 벌이느라 앉아 있던 대학생들이 있는데, 전경에게 맞아 죽은 학생도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교포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복장부터가 다르니까, 80년대 무거운 분위기였던 한국 대학생들이 그들에게 가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알아듣지 못하기도 하니까 그냥 무시하고 가다가 뺨을 얻어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파가 헬라파를 미워했다는 게 이해가 갑니다. 문화가 다르고, 자기들 식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이방인 식으로 하려고 하니까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파의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드디어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던 매일의 구제와 돌봄을 행하는 자리에서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매일의 구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봉사활동이었습니다.
2) ‘접대’의 의미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어떤 형태의 구제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일반적인 해석은, 이 구제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일 식사 대접을 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소를 차려 놓고 식사를 제공하는 형태였다는 것입니다. soup kitchen 같은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지금까지 해석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게 된 이유는 2절에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2절)
개역한글에는 ‘공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접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공손히 음식을 대접하다’라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접대”, 공동번역에는 “식량 배급”, 새번역에는 “음식 베푸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들이 이렇게 번역하는 이유는 ‘접대를 일삼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가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diakonein trapezais)’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디아코네인’은 ‘먼지’라는 말(코니스)과 전치사(디아)가 합쳐진 말로, ‘먼지가 일어날 만큼 열심히 일하다’, ‘열심히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의 집사에 해당하는 deacon이 바로 이 ‘디아코네인’에서 나왔습니다. ‘트라페자이스’는 네 발 달린 테이블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테이블 봉사’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테이블에서 먼지가 날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며 봉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테이블 봉사는 1절에 나온 것처럼 “매일의 구제”의 형태를 띠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의미를 따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매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사역을 했다고 해석이 됩니다.
하지만 이 매일의 구제가 지금의 Homeless soup kitchen처럼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면, 그것 때문에 사도들이 진짜 해야 할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나누어줄 음식 준비를 위해 야채를 다듬고 빵을 굽고 썰고 하느라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을 묵상하지도 못했던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사실 그런 생각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사도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이미 만 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들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식사 봉사 팀은 따로 있고 열두 사도들은 식사를 위한 재정 지출만을 주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식비 지출을 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다 못하고 매달릴 만큼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비는 식사 인원이 어느 정도 고정되면 일정액을 정해서 고정적으로 지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식비를 지출하는 것 때문에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가 했던 매일의 구제가 과연 어떤 형태였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트라페자이스’(원형은 트라페자)라는 단어는 보통 ‘테이블’을 뜻하는데, 단순히 밥 먹는 테이블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돈 바꾸어주는 사람의 ’계산대’라는 뜻도 있습니다. 넓게 보면 거기에는 ‘은행’이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은행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테이블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열 므나의 비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눅 19:23)
여기 나오는 ‘은행’이라는 단어의 원어가 바로 이 사도행전 6:2에서 사용된 ‘트라페자이스’의 원형인 ‘트라페자’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누가복음을 쓴 누가입니다. 같은 누가가 같은 단어를 썼다면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성경이 해석하게 하라.’는 말도 있는데, 같은 책 안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될 때는 같은 뜻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접대’라는 말은 매일 식탁을 차려서 사람들을 대접하는 급식소 같은 형태였다기보다는, 일종의 은행과 같이 구제금을 지급하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들의 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식사 대접에서 과부들이 빠졌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식사는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되면 타 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밥을 먹겠다고 줄 선 사람을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헬라파라고 쫓아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행 4:32, 새)
이 기록만 봐도, 헬라파이든 히브리파이든 서로 도우며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한 사람씩 구제금을 전달해주는 문제는 약간 다르다는 겁니다. 초대 교회에는 성도들이 밭이나 집을 팔아서 전 재산을 헌납하고 들어오거나, 들어와서 그렇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큰 액수의 재정이 쌓여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가난한 자들에게 지급하는 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사실 ‘접대’라고 번역된 단어에 주가 달려 있는데 ‘재정 출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은행과 같이 해놓은 사무실에 출근하여 아침 회의를 하고, 직접 창구에 앉아 탁자를 마주 대하고, 일일이 찾아온 사람들을 심사하여 구제금을 지불하던 열두 사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와서 받아가는 사람이 진짜 과부인지 아닌지, 확인을 다 해봐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수천 명이 몰려오는데 누구에게 구제금을 지급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 사람들의 자격 요건을 심사해야 합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부에서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는 데 많은 자격 심사가 필요합니다. 가끔 LA에서 보면 수입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아파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파트인데도 벤츠, 렉서스, BMW 같은 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물론 명의는 자녀나 다른 사람 앞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실은 돈이 많으면서 서류상으로 속여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아닙니까?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심사를 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가 생활보호대상자들을 선정해서 일정한 금액의 구제금을 지급하는 일을 했다면, 사도들은 그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매일 바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매일 괴로움 가운데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 중 다수가 원래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그런데 매일 돈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니까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매일 구제금 지급 대상자 명단을 결정하여 지불해야 하고, 하루가 끝나면 일일이 장부를 맞추어봐야 합니다.
이렇게 매일 결산, 통계, 장부 정리, 새로운 구제대상자 심사 등 너무 많은 구제 업무 때문에, 사도들은 본래 자기들이 해야 할 말씀과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매일 돈 문제에 치여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무래도 신원이 확실하고 자기들과 언어도 잘 통하는, 또 원래부터 잘 알아서 확실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파 사람들은 잘 받았고, 헬라파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심사도 많이 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 것입니다.
3) 문제의 원인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환상적인 교회’입니까? 예를 들어, 이사를 가서 다닐 교회를 찾아야 하는데, 제일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문제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환상적인 교회, 정말 좋은 교회는, 문제가 있지만 해결할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을 알게 된 사도들은 지혜로운 판단을 가지고 개입하게 됩니다.
우선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2). 모든 믿는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정식으로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회의하며 투표할 때 출석하는 모든 사람이 다 와서 하는 게 아니라 활동교인이 된 사람들만 투표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문제 해결에 참여시킨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공동의회를 하는 식입니다. 모든 제자들을 부른 사도들은 자신들에게서 나타난 문제점에 대해 솔직히 인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그 동안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접대(구제) 사역에 몰두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원인을 정확히 이야기합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도들의 반응은 짜증을 내거나 자기를 방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확히 문제의 핵심을 보고 자기들의 문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2)입니다.
접대(봉사, 구제 사역)가 나쁜 게 아니라,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데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선순위가 바뀌면 이렇게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들이 말씀보다 음식, 구제에 더 관심을 가지니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2. 사도들의 해결책 (3~4절)
그래서 사도들이 제안을 하는데, 일꾼을 세우자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3-4절)
왜 일곱 명을 뽑았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7이 완전수라 그럴 수도 있고, 사실 12가 더 완전수인데(열두 사도처럼) 열둘로 안 하고 그냥 일곱 명으로 했다는 것은, 이 정도의 숫자이면 당시의 봉사를 감당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숫자에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두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을 뽑아서 일곱 명이 팀 사역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뛰어난 한 사람이 독불장군으로 다 맡아서 하는 게 아니라 팀으로 하게 했습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분명히 “제자”(1)가 있고 “열두 사도”(2)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요즘 식으로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고, 사도는 목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이 그 당시에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제자’는 지금의 교인, ‘사도’는 목회자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제자들, 즉 교인들을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지도자를 뽑도록 합니다. 어떻게 선출했는지 그 방식은 여기에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인들이 이 일곱 명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공천위원회가 열심히 작업하여 추천을 하지만, 활동교인들이 일꾼들을 선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자와 사도 외에, 세 번째 종류의 사람들인 일곱 명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흔히 ‘집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장로라는 말도 안 나옵니다. 그저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의 교회 장로나 집사직의 초기 형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열두 사도가 모든 것을 다 주관하며 인도했는데, 이제는 함께 사역을 나눠서 할 필요를 느끼고 일곱 명의 지도자들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세운 이유는 함께 교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더 높은지 낮은지를 따지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위에 있고, 일곱 명은 그 밑이고, 나머지 성도들은 더 밑이라고 계급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금도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아니면 아무 직분 없는 보통 교인이나, 계급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더 높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도로서 할 일이 있고, 이제는 할 일이 너무 많아져서 자기들이 원래 할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 사역만 전담할 사람들을 뽑자는 것입니다. 역할이 다른 것이지, 누가 위고 아래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뽑는 것도 똑같습니다. 장로는 집사보다 높고, 집사는 평신도보다 높은 게 아닙니다. 일꾼을 뽑는 것은 사역을 함께 할 동역자를 뽑아서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의 일을 나눠서 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선출함에 있어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아무나 그냥 뽑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1) 성령이 충만한 사람
교회의 일꾼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 학력, 경력, 재력에 따라서 뽑는 게 아니라, 영적인 성숙도를 보고 뽑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박사라고, 교수라고, 국회의원이라고, 돈 많은 부자라고 교회에서 직분자로 뽑힌다면 정말 주님이 슬퍼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뽑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까?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게 뭡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까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뜻대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무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과 전혀 관계가 없고, 피하기만 하고, 전혀 함께 봉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성령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차고 흘러 넘쳐서 이웃에게로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
어떤 사람은 성품도 좋고 영적으로도 깨어 있는 삶을 살고 기도와 말씀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성령 충만하다고 하고 열심을 가졌다고 해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 지혜도 역시 혼자 지혜를 가진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성령 충만도, 지혜 충만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분별력 있고, 상황을 잘 판단할 줄 알고,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만 주장하는 사람,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알고 부드러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언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를 많이 발견하고 탁탁 지적하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이긴 한데,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하루는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기름기가 적은 고기를 주십시오.” 하고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갖고 온 고기에 기름(지방)이 너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부탁을 받은 종업원이 가져와서 그것을 보니까 얼마나 미안합니까? 그가 당황하고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고기는 운동을 안 한 소를 쓰나 봅니다. 할 수 없지요. 제가 먹고 운동하지요.” 그리고 씩 웃으셨답니다.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게 뭐냐? 반대로 주문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기를 줄 수 있느냐? 매니저 불러와. 주인 불러와.’라고 따지며 환불을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기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 종업원의 입장을 생각해준 것입니다. 자기도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도로 음식을 들고 가면 사장에게 얼마나 혼나겠습니까? 그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준 것입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똑하기도 해야겠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그런 분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3) 칭찬 받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인정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존경을 얻기가 가장 힘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가족입니다.
그래서 올랜도 비전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아이들에게 물어본다고 합니다. 장로 후보가 된 분의 자녀를 불러서 “너의 아빠가 이번에 장로 후보가 되셨는데, 네가 보기에 네 아빠는 충분히 장로가 될 만하냐?” 그러면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다, 아니다 말한다고 합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면 진짜입니다. 함께 하며 사역할 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칭찬 받고 인정받는다면 그 사람은 진짜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있으면 일은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목장을 하는 것도, 삶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과 제자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4) 너희 가운데서
리더는 교인들 가운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병을 수입해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월드컵 축구대회가 시작됐는데, 월드컵도 그렇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을 볼 때 특히 중동 국가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귀화시켜 출전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농구에서도 미국 대학 농구나 NBA 출신 선수를 귀화시켜서 자기 나라의 선수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꾼은 용병을 수입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자라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대형 교회에서 훌륭한 일꾼으로 잘 섬기던 분이 왔다고 바로 우리 교회의 장로로 모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휴스턴이나 올랜도 등 가정교회를 잘하는 교회에서 목자를 열심히 하던 분들이 왜 우리 교회에는 오지를 않나? 와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왔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되는 것이지, 어디서 수입해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은 완벽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보기에 괜찮은 사람들을 뽑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뽑은 것도 아니라, 이미 훈련을 받고 검증된 사람, 특히 그렇게 많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고, 특히 영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잘 갖춰진 사람,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겠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섬기던 사람 중에서 선출했다는 말입니다.
3. 일꾼들의 선택과 결과 (5-7절)
제자들은 사도들이 한 제안에 대해 기뻐하면서 제시된 기준에 따라 일곱 명을 선출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5-6절)
이들을 흔히 ‘일곱 집사’라고 부르는데, 사실 원어 성경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섬기는 목적을 위해 뽑혔다고 해서 흔히 ‘집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교회 재정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열두 사도가 하던 일이 단순히 매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면 굳이 일곱 명의 지도자들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으로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 잘하고 요리 잘하고 돈 계산을 잘하는 사람으로 뽑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일은 식사를 나누어주는 봉사가 아니라, 재정을 직접 운영하는 일종의 사회 복지 금융 업무, 교회의 재정을 맡는 일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성숙하고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으며 신뢰를 얻은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뒤의 다섯 명은 잘 안 나오지만, 스데반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고, 빌립은 나중에 8장을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단순히 재정을 맡은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웁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 놀라운가? 일곱 명의 이름이 하나같이 헬라파였던 것입니다. 헬라파가 문제를 제기하면 보통 ‘그럼 4대3으로 하자. 우리가 조금 더 많으니까 히브리파 넷, 헬라파 셋!’ 이런 게 보통 교회에서 많이 하는 일 아닙니까? 꼭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원 다 헬라파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성숙한 교회였습니까? 자기 이익을 따져서 한 게 아니라, 교회에 가장 유익한 길이 뭔가, 이렇게 빠진 과부들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길이 뭔가를 생각하며, 전원 다 헬라파로 뽑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절)
초대교회가 일꾼을 바르게 세우니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해졌습니다. 이 말은 성경 교훈의 말씀이 더 많아지고 질이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재정은 일곱 명에게 맡기고 사도들이 말씀에 전념하고 기도에 전념하게 되니까 가르침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을 봅니다.
둘째,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세상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죽이려고 위협하던 자들이 제사장들인데, 그 제사장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가는 말]
이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명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졌을 때, 그래서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고 집중하며 나아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바른 일꾼들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년 공천위원회가 이맘때면 열심히 일꾼을 세우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는데, 공천위원회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성령이 충만한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 그리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이러한 분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지고, 목회자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며 나아갈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섬김의 직분
조학환목사(하강교회) / 행 6:1~6
우리 교회가 다음 주일에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과 은퇴식이 있고 또 장로, 권사 추대식이 있습니다. 임직이란 말 그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직분을 맡는 것을 말합니다. 은퇴는 교회의 택함을 받아 귀한 직분을 맡아 감당하다가 정년이 되어 그 직분의 시무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추대란 본래 교회법에는 없는 제도이지만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역할을 해 오신 분들이 여러 가지 형편으로 직분을 받지 못했을 때 당회에서 그 직분에 준하는 명예를 부여하는 예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러한 교회의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한 제도나 직분을 통하여 좀 더 소명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좀 더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교회를 섬겨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래서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조직이 있고 그 조직에서 역할을 하기 위한 어떤 직책이나 직무나 직분이 있어야 보다 책임의식과 소명감을 가질 수 있고, 또 질서있게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어떤 공동의 목적을 향하여 효과적으로 힘있게 이루어갈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고 직책과 직분을 만들어 그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음 주일에 임직식과 은퇴식과 추대식을 행하게 되는 이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예식을 앞두고 우리 모두가 그 목적과 의미를 바르게 알고 행사를 잘 준비하고 은혜 가운데 잘 치름으로 금번 행사가 교회를 더욱 아름답게 세워지고 임직과 추대를 받으시는 분들이나 은퇴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큰 은혜가 되어 더욱 큰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기쁨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임직과 추대를 받으시는 분들이나 은퇴를 하시는 분들이나 우리들 모두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이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우리들 모두가 더욱 은혜 충만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1.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 직분자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직분 자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직분은 개인의 명예나 영광이나 보상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자리요 섬기는 자리요 봉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택하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보면 교회 직분 자들의 자격과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교회 직분 자를 세우면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일꾼을 뽑으면서 그 자격요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 일꾼을 세우는 목적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을 선택하여 교회의 일을 맡기기 위하여 일꾼을 세운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일’이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즉 당시는 교회든 교회 밖이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구제가 교회에서 하는 가장 큰 일 중의 하나였는데 처음에는 이 일을 사도들이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교인 숫자가 많지 않았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교인 숫자가 많아지면서 사도들이 구제사역에 매달려 본연의 업무인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일꾼을 세워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본연의 업무인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직분 자를 세운 것은 교회의 일을 하게 위하여, 성도와 이웃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회나 교회가 어떤 직책이나 지위나 직분이나 이런 것들을 만들고 그 자리에 사람을 세우는 것은 무언가 일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민이 대통령을 세우는 것은 국가를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국가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 것은 회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물론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보수도 주어지고 명예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수행했을 때 반대급부로 주어지는 것이지 어떤 직책이나 직무나 직책을 주는 근본적인 목적은 보수나 영광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더구나 교회의 직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자신의 명예나 영광이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힘있게 효과적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20:28절을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영광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운 것도 마찬가지요, 그 교회를 섬기는 직분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부르셨고, 이 역사를 위하여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역사를 이루셨듯이 주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함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직분이기 때문에 이 일을 잘 감당했을 때에 큰 영광도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뭡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보다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엄청난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입니까? 그러니 이 귀한 일에 참여했을 어찌 영광과 명예와 복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영광과 은혜와 특권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충성했을 때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게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기를 쓰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그 귀한 마음과 충성을 보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만배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4: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물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래서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 그래서그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맡았다는 것은 이것을 바르게 알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사람들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이것이 바로 직분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임직식과 추대식과 은퇴식을 행하면서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분들은 교회의 직분은 개인의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오직 주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하여 충성하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몸된 교회를 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를 교회를 섬겨 오시다가 은퇴를 하시는 분들은 이 귀한 직분을 주셔서 지금까지 감당케 하신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되새겨 보며 지금까지 섬기게 해 주신 것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되새기며 힘닿는데 까지 몸된 교회를 기쁨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충성한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과 기쁨과 영광도 받아 누리며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아름답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은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인데 그러면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3절에 있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어떤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까?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세상의 지식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재주나 이게 자격요건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맡을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고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자격 요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따로 말씀하고 있지만 거의 같은 의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결코 세상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바르게 실행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동시에 그 뜻을 따라 시행하는 과정에서도 올바른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일을 바르게 힘 있게 할 수 있습니까? 일단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압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시행해 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여러분,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안다고 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뜻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안 그래요? 알고만 있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단과 의지와 능력과 지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결단과 의지와 능력과 지혜가 어디로부터 오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올바르게 결단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고 그러면 비로소 우리가 주님의 일을 힘 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는 일반 사회단체와 다릅니다. 일반 사회 단체는 돈이나 친교나 여가선용 등의 인간의 유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일반 단체에서는 그런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식이나 능력을 보고 사람을 뽑습니다. 물론 자기편의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학연, 지연, 혈연을 보기도 하고, 대외 관계에서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백을 보기도 하고, 인간의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외모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한 곳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생명의 역사는 세상 지식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령한 은혜와 영적인 교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최우선의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번에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은 더욱 열심히 모여서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힘씀으로 더욱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그래야 하지만 중직자들은 더더욱 힘써서 성도들의 본이 되고 모든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감사와 기쁨과 감격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섬김으로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가며 여러분 자신도 더욱 생명의 은총과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려면 일단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그 다음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에게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 속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성실하게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찌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3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여러분, 잘 보세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돈과 지식이 많아 칭찬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가 출중하고 말을 잘하고 재미있고 능력이 많아서 칭찬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오직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걸어가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깨끗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면 영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신실함으로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존중받고 인정받고 귀한 대접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성실하지 못하면 도리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고 결국 복음의 문을 막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하면 엉뚱하게 부모까지 욕을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잘못하면 본인이 욕먹는 것은 물론 주님과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너나 잘하라고 하면서 콧방귀나 뀌게 되고 그러면 결국 복음의 문을 막아버리는 심각할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특별히 금번에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은 무엇보다도 정말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며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이나 경험, 이성, 가치관대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김으로 주님의 몸되 교회를 세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귀한 직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특별히 귀한 직분을 받는 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한 직분을 맡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가정과 직장과 마을과 다른 모든 삶의 현장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은 물론 여러분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 듣고 귀히 여김을 받음으로 자신도 아름답고 명예롭고 복된 인생이 되고 주님의 교회도 더욱 아름답게 세워가며 복음의 역사도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일곱 집사
이동휘목사(평강교회) / 행 6:1-7
1.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셔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즉 사도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었던 사람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고 말씀하지 곧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찬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하게 입증되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행2:41)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더해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욱 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게다가 수많은 이적과 표적 등이 나타나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등이 깨끗이 낫자 예수님 당시 못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탈옥시켜 주시면서 “(행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연합하여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온갖 음모가 꾸며졌으나 하나님께서는 일촉즉발의 살벌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히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고 그들로 더 큰 용기와 확신 속에서 예수의 증인된 사명 수행에 진력(盡力)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맹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에는 성도의 수가 무려 20,000~25,0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불과 1,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 정도로 증가되었다는 것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는 크게 두 종류의 성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이고, 또 하나는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 성장한 유대인들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12사도 모두 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에서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로, 오순절 절기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를 사용했고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몰랐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도 어느 정도 헬라어를 구사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들의 상용어(常用語)인 헬라어로 예배드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습관은 예수 믿고 교회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파 사람들보다는 혼합주의적 영향력에 더 개방적이었고, 그러나 히브리파 사람들은 헬라파 사람들보다 선민적(選民的) 배타 의식이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 교회의 성도가 되었지만 좀처럼 쉽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터지게 된 것은 구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 회당에는 상례적인 관습이 있었습니다. 구호금 접수인이 있어서 매 금요일 아침이면 시장과 일반 가정으로 돌아다니며 일부는 돈으로, 일부는 물품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금품을 거두어 드렸습니다. 그 모아진 것은 당일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위급을 면할만큼 충분히 받고, 영구 구호가 요구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에 두 끼씩 일주일, 즉 14끼니를 지낼 수 있으리만큼 받게 됩니다. 이 구호기금을 ‘쿠파’(Kuppah) 즉 ‘광주리 기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밖에 긴급 요구호자들을 위한 매일 축호 모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탐후이’(Tamhui) 즉 ‘쟁반기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는 현명하게도 이러한 유대 관습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역사상 유대인만큼 자기보다 처지가 못한 동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민족은 없었고 현재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두 부류의 유대인 간에 분열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는 주로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온 2세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노예 출신으로 빈 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들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이들 헬라파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이 경멸은 구제금품을 나누어 주는데서 나타나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은 자기네들이 소외당한다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식량 배급이나 생필품 지급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보다 푸대접을 받거나, 더러는 누락이 되어 불만을 표했던 것입니다. 히브리파 유대 출신인 사도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 위주로 구제를 일삼았습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매일의 구제 대상에서 헬라파 출신 과부들이 집단적으로 빠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원망과 불평이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화목한 분위기를 더럽힌 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문제에 말려들어 가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원성이 교회 안에서 높아감에 따라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게 되었습니다(2절).
2. 그래서 이 문제를 바로 잡고 본래의 주어진 복음 전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일곱 집사가 선택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의 무리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택하여 공궤(供饋)의 일을 전담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상호간에 지체의식을 갖고서 제자들에게 부과된 사랑의 계명(요 13:34)을 실천함과 동시에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는 주의 지상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12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기도에 철저히 우선권을 두어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사도에게 분부한 우선적인 사명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12사도들과 더불어 새로이 세움받은 일곱 집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되어 더욱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급류가 흐르는 강가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소경이었고 또 한 사람은 절름발이였습니다. 두 사람이 한동안 강가에 앉아 있다가 절름발이가 소경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형씨는 왜 오랫동안 여기에 앉아 있는 거요?”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 어디가 깊은지 어디가 위험한지 알 수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여 이러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형씨는 왜 여기에 있는거요?” 절름발이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강을 건너야 할 사람이오. 그런데 나는 다리가 불구라 강을 건널 수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라오.”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경이 절름발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서로 힘을 합해서 이 강을 건너봅시다. 형씨는 볼 수 있은 눈을 가지고 있고 나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으니 형씨가 내 등에 엎혀 안전한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오.” 소경의 제안대로 절름발이는 소경의 등에 업혔습니다. 그리고 소경의 귀를 잡아 앝은 곳으로 물살이 완만한 곳으로 인도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강이었지만 협력하니까 거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젓가락 하나를 똑바로 세우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두 개를 묶으면 균형잡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개를 묶으면 아무렇게나 세워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협동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협동하는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는 번영합니다. 그러나 분열하는 곳에는 패망이 있을 뿐입니다.
(마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리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며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곳은 천국과도 같은 곳입니다.
(전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제자들과 성도들이 앞으로 하나되도록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1-23)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교회 성도들이 모두 하나되어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나되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렇게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 그리고 사도들이 본래 받은 사명,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선택받은 성도들은 7명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집사였습니다. 사도들이 말씀 전도와 기도에 전혀 힘쓸 수 있도록 뒷받침할 일곱 집사의 자격은 첫째가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야만 한다는 것은 복음 전도는 오직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에 있어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임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고전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증거”, 즉 복음 전파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질과 건강, 재능과 지혜, 은사와 은혜, 가정과 자녀, 기업과 생업을 주신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히 쓰임 받도록 하심으로 많은 것을 남겨 “(마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즉 복음을 전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과 여러 가지 지혜들에 해박하며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하려고만 했다면 그의 박식한 철학적 논리로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만을 있는 그대로 전파하여야 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하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는 지식의 나열이나 매끄러운 설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부패한 인간의 삶을 깨끗하고 영원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는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애에 아무런 각색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힘(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학문이 없는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때 있는 그대로의 예수의 삶을 전하는 것이 면밀하게 짜놓은 이론보다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항상 변함없는 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이성과 지성이 아닌, 마음과 영에 호소함으로 그 사람의 가슴 속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에 호소하며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인간의 수식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에서 선포되어지고 세상에 전파되어질 때 그 교회는 진정한 진리의 파수꾼 사명을 다 하게 되며,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복음의 대적들은 사도 바울을 경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10: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바울은 작은 체구에 말솜씨는 졸렬했습니다. 그는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의 대적들에 의해 흠잡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자들처럼 호언장담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에 충실한 사역자로서 두려움과 떨림을 지니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대적들이 두려워 떤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고 복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성령의 권위로써 전파했습니다. 즉,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성령이 전하는 대로 말씀을 전했고 그 진리를 나타내도록 성령의 역사에 맡겼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은 논리성이나 지식의 정도, 문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능력”임을 체험하고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체험(간증)과 철학적 지혜로 설교하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쓰라린 전도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아덴에서 오직 한 번 기독교를 철학적인 말로 바꾸어 보려고 했습니다. 아덴의 말스 언덕에서 그는 철학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말과 용어들을 사용하며 그들이 인용하는 말을 자기도 인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17: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그러나 바울의 그러한 방식의 복음 전도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철학적인 설교는 전혀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된 것이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하는 것이 가장 옳은 전도 방법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개종 체험과 전도 여행을 통해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뿐이며 성령의 지혜만이 완전하며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할 때만이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는 복음이며(6-9절), 그 지혜의 근원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10-16절)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지식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일(역사)을 거부하고 미련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증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뿐이었고 그것도 말재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파할 때 “두려움과 떨림”으로 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사도 바울이 심히 떨었었다고 고백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와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 그리고 고린도인들의 철학적 사변과 교만한 태도, 도덕적 타락 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철학적 지혜와 사변(思辨)과 구변(口辯)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자신의 부족함으로 복음의 능력이 가리워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 전도와 기도에 전혀 힘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사들도, 두렵고 떨림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으로 봉사해야, 교회가 모든 잡음이 사라지고 하나되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격은 성령이 충만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후계자가 될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지목했는데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27:16-20)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19)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다 성령이 충만하며 항상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복음 전도가 맹렬히 일어날 수 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곱 집사의 두 번째 자격은 지혜가 충만해야만 했습니다. “지혜의 충만함”은 성령 충만하면 자연히 따르게 되는 것으로 성령 충만의 증거도 됩니다. 이 지혜는 행정 및 사무 처리에 필요한 지혜를 뜻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포괄적으로는 생활에 필요한 실천적인 지혜들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여기서 지혜란 일반적 의미의 학식이나 상식보다는,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 지혜는 성령 충만이 전제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2: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선택할 때, 그는 이새의 아들 중 용모와 신장이 수려한 엘리압을 보고 왕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고, 말째 아들이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눈이 빼어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매우 영특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은 후 다윗은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습니다.
(삼상16:12-13)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러한 다윗은 왕이 되어 죽는 날까지 직분자의 자격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유지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지도자는, 하나님 보다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 뜻대로 하기 쉽기 때문에, 직분 수행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압제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때에, 그는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의 자격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구분없이 동일하게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또한 지혜도 겸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집사의 자격 중 세 번째는 “칭찬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칭찬 받는 사람”은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평판이 좋은 사람’, ‘그 인격과 성품이 증명된 사람’을 말합니다. 즉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을 사람은 성령 충만한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인격 또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인관계에서도 칭찬받을 만한 인격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디모데 전서를 통해 직분자의 자격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딤전3:1-13)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소극적인 표현으로 요약하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으며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칭찬듣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던 모세에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찾아와서 백성의 농사를 담당할 자들의 자격을 이야기해 줄 때 재덕이 겸전(兼全)하고 진실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선출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교회의 직분자가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일곱 집사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이들에게 안수하여 일곱 집사로 세우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도망자”(Fugitive)의 이야기는 현대인을 상징한 것으로 평생을 도망다녀야 할 한 운명의 사나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되어 호송되는 도중 우연한 사고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서, 도망자가 되어 수배를 받고 있는 킴볼 박사는 누명을 벗을 증거를 잡기 위하여 도망다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야곱처럼 불안에 쫓깁니다. 그는 현대인처럼 줄곧 시간에 쫓깁니다. 그는 고독에 쫓기기도 합니다. 그는 도망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먹고 살아야 하는 긴박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체면에 쫓기기도 합니다. 그는 오해를 받아 쫓기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친구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살인자로 몰리고 있는 안타까움에 그의 정신은 산산이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은 극도로 피곤해집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심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킴볼의 생활에서 강조하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킴볼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만났을 때에는 자신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고 있어도 그 일을 위하여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망자이지만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잠시도 잊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휴머니즘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사가 바로 문 밖에 도달했을 때에도 그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그 후에 다시 도망자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면서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생활, 어쩔 수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사명감을 잃지 않는 생활, 이것이 바로 우리 직분 맡은 자의 생활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직분자들이 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가운데 점점 흥왕해지며 허다한 무리들이 그 말씀에 복종하는 축복의 역사가 충만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박성환목사 / 행 6:1-7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며 공부하면서 초대 교회의 시작과 확장, 고난과 핍박,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셨던 인물들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원리)은 오늘날 현대의 모든 교회가 배우고 본받아야할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고 외치고 있고, ‘초대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초대 교회가 행한 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내의 갈등의 해결 방법과 위임(역할 분담)의 원리입니다.
먼저 교회내의 ‘갈등 해결 방안’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5장까지 말씀을 공부하면서 초대 교회가 직면하였던 내외적인 어려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고 그들은 옥에 갖히고 채찍에 맞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셔서 주의 천사들을 보내 옥문을 열고 그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기도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외부적인 핍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구원자)’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위선과 거짓의 영이 초대 교회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부부의 죽음으로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은 수년간 평온함 가운데 성장하고 있던 초대 교회내의 내부적인 이슈가 발생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당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그룹이 있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이후 자의적 타의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 살던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된 유대인들이라 짐작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지역에 거주하였고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헬라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하였고 히브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선민의식으로 가득찬 정통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평민들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히브리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두 사도 모두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그룹에 공존하고 있던 초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헬라파 유대인들 중 과부들이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음으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에 준행하기 위해 구제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마다 도움이 필요한 지역 거주민들을 위해14끼를 먹을 수 있는 돈을 지급해 주는 ‘Quppah’ 라는 주간 구제 사역과, 매일 매일 먹을 것이 부족한 비거주자와 단기 체류자들을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여 음식을 배달해 주는 ‘Tamhuy’ 라는 매일의 구제 활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크리스찬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유대인들의 구제 사역을 따라서 공동체내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힘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인것은 아니었겠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를 집행하던 사도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해 불평이 생겼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애굽 군대로 부터 구하여 내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고 마실 것이 없다고 불평하며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필요를 구하여야 했지만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반복하였고 그 댓가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원망과 불평이 싹트기 시작하였지만 사도들의 지혜로움으로 말미암아 더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먼저 열 두 사도는 모든 제자(성도들)을 모아 공개적으로, 공동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즉 공동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문제들은 소수의 리더들이 결정하기 보다 전체 회중에게 알리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참여할 때 회중은 공동체의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책임과 역할을 맡게됩니다.
2)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회중에게 제안합니다.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소홀히하고 ‘접대’(또는 ‘재정 출납’, 디아코네인 ‘시중들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너희(회중)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은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접대(구제)하는 사역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겠다’
3) 온 무리는 사도들의 제안에 기쁨으로 동의하고 지혜를 모아 7명의 섬기는 자를 택하고 사도들 앞에 세웁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7명(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은 모두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로 보아 그들 모두 헬라파 유대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위 ‘통큰 양보’를 한 것입니다. 구제 사역 전부를 소외 되었던 헬라파 유대인들 중 신실한 성도들이 감당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나 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성숙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리와 권한을 주장하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나의 주장, 나의 뜻만 관철시킬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양보하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없는 존재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야하는 자입니다. 섬기는 일이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4)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합니다.
회중이 선택한 7명의 일꾼들을 사도들 앞에 세웁니다. 초대 교회내의 영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모든 회중이 참여하여 지혜를 모아 7명의 일꾼들을 선택한 이후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영적 지도자들에게 일꾼들을 천거합니다.
영적 지도력을 부여받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온 교회에 대하여 7명의 일꾼들이 교회를 대표하여 구제 사역을 담당하도록 확증하고 선포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비한 능력이 있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동체내의 영적 질서를 존중하여 영적 지도자들이 회중 앞에서 기도하고 안수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영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안에 영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훼손되면 교회는 건강하게, 능력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크게 두 번째로 ‘역할 분담’ (위임)의 원리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2절 말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를 근거해 볼 때 문제가 발생할 즈음에 예루살렘 교회내에서 사도들이 구제 사역의 책임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Apostle)은 말 그대로 ‘보내심을 받은 자’,즉 복음 전파를 위해 주님께서 택하시고 세상 가운데 보낸 자들인데, 초대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그 대부분의 일들을 그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정적인, 관리적인 착오가 발생되기도 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누락된 것 또한 의도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행정적인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짐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 내에 발생된 문제로 인해 사도들의 직무가 보다 분명해 지게 되었고 그들은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본연의 직무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4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려야했습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했기에 기도에 헌신하여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13장에 보면 느헤미야가 유대 총독으로 두번째 예루살렘에 와서 행하였던 개혁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랫만에 돌아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하여 율법을 어겼음을 보고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분리하였습니다. 또한 십일조와 다른 예물의 저장실로 마련된 성전의 방을 차지하고 있던 대적 도비야의 세간을 다 밖으로 내어 던지고 청결케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한 일중에 하나는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여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한 것을 발견하고, ‘레위 사람들을 불러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고’ (느 13:11), 즉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끔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는 바로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헌신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제 사역과 다른 행정적인 사역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primary duty(task)는 ‘기도와 말씀 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들이 구제 사역과 같은 행정적인 일에서 자유롭게 될 때 그들은 본연의 사역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온전히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의 원리에 근거하여 배우게 되는 것은 목회자(사역자)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해야하며, 다른 행정적인 일들이 그들의 주요한 업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안에 따라서 구제 사역을 전담할 7명의 사역자들이 선택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었습니까?
3절 말씀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늘 깨어 있는 자들, 육신의 생각과 소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아 성령의 뜻에 따라 행하는 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충만한 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지혜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지혜가 있다는 의미는 믿음에 근거하여 실제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고 맡은 일들을 효과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충만한데 문제 해결 능력이 없고 자기 방식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려고 한다든지, 소위 ‘하나님의 음성’에만 의존할려고 하는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르긴해도 7명의 일꾼들은 믿음도 확실했고 구제 사역을 잘 할 수있는 기술과 재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로 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인격과 성품이 부족하여 늘 사람들과 갈등하고 싸우고 상처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성령의 열매가 삶 가운데 드러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말씀에 녹아있는 성도는 삶 가운데, 인격 가운데 너거러움과 배려와 양보, 사랑과 인내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7명의 일꾼들은 교인들로 부터, 이웃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걸맞는 착한 성품의 사람들이어야했습니다.
이러한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구제’(1절), ‘사역’ (4절) ‘접대’(2절)입니다. 1, 4절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디아코니아’ (사역, 섬김, 봉사)이며, 2절 ‘접대하다’는 단어 또한 이와 어원이 같은 ‘디아코네인’(섬기다, 시중들다)이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7명의 선출된 일꾼들을 일곱 집사라 칭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집사’라는 직분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집사’라는 직분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 1:1, 딤전 3장)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원래 의미는 ‘일꾼, 수종자, 섬기는 자, 사환’이라는 의미입니다. 어원은 ‘디아코니아’ ‘디아코네인’과 동일합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 사역을 위해 선택받은 7명의 일꾼들은 한마디로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waiter’들입니다. 고급 식당에서, 연회에서 단정히 차려입고 수건을 두르고 손님들의 테이블을 오가며 섬기는 이들을 연상하면 될것같습니다.
2절 ‘접대를 일삼는 것’ (wait on tables)이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은 성도들은 교회내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인정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자들이며, 교회의 식구들을 먼저 섬기며 돌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주의 만찬을 행하시기 전에, 스승이신 주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와 스승으로 이렇게 행하였으니 너희도 서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섬기는 자’들입니다. 7명의 일꾼들이 구제 사역을 위해서 섬기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섬기는 자’들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 시간과 물질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되면서 교회에서의 모임이 축소되고, 성도의 교제가 사라지고, 선교와 봉사의 사역이 stop 된 것 같습니다. 이럴때일수록 ‘섬기는 자’로 부름받은 우리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의료 혜택이 열약한 선교 현장에서 선교 사역이 일시 중단되어 답답함 가운데 지내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주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이나 이웃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내적인 문제 해결 방법과 역할 분담의 원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지혜롭게 원망과 불평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주도하되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칭찬받은 7명의 일꾼들을 택하였습니다. 교회내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양보와 배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본연의 업무인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게 되었고, 지혜롭고 성령충만한 일꾼들은 구제 사역에 충실히 봉사하게 됨으로 모두가 ‘제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7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지혜롭게 해결되고, 사도들과 사역자들이 본연의 사역에 집중하게 되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퍼지게 되었고, 성도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되었고, 심지어 유대 종교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제사장들 중 다수가 ‘그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웨인즈빌 침례교회도 아름다운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일꾼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은사를 따라 섬기는 자로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