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답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에 모두들 넋을 놓았다.
텔레비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마저도 이리 황홀한데, 직접 무대를 보면서 듣는 이들은 어떠하랴.
혼을 빼앗길 듯 한 연주에 매료된 그 순간이었다.
땅이 꺼질듯 둔탁한 잡음이 들린 건.
아름다운 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지켜보던 모두의 눈동자에 비치는,
피로 물든 무대와 일그러진 피아노――.
-1-
석 달이 지났다. 햇살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일상은 일탈 없이 돌아갔다.
-날.. 모르겠어?
-네..누구세요..
-거짓말이지..응?
머리가 지끈거렸다. 죄여오는 가슴에 갑자기 답답해졌다.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던졌다.
-거짓말이라고 해! 제발...
그래도 티비는 꺼지지 않았다.
“야! 저거 좀 꺼봐!”
파앗- 하고 브라운관이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티비에서 나오는 남녀의 말소리로 씨끄러웠던 거실이 조용해졌다.
창밖의 전깃줄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크게 들렸다.
“왜 그래요 대체?”
건전지가 분리된 채 바닥에 널부러진 리모컨을 든 윤형이 말했다. 건전지를 다시 끼워 넣은 뒤 소파 위로 던졌다.
“요새 이상한 거 알아요? 안하던 모니터를 하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쓸데없이 화내고 신경질내고 짜증내고, 형 뭔 일 있어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밖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더니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 라는 식으로 돌아가 버리는 윤형이다.
현관문 닫기는 소리와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들린 뒤 집안은 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갈 곳 잃은 아이처럼 멈춰서 있을 뿐이었다.
1205호. 병실 앞에 섰다. 이름표에는 한하준 세 글자가 적혀있다.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이내 돌리지 못하고 놓아버렸다. 들어갈 수 없는 게 아니라, 들어가기 싫은 마음에 발걸음을 돌렸다.
“..민조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가, 가지마.”
내 팔을 잡는 작은 힘을, 나는 불필요하게 세게 내쳐버렸다.
허공으로 내쳐진 손을 떨며 날 쳐다보는 세임이 보였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임이 아니라 나였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내가 더 떨고 있었다. 겁이 났으니까.
“미안..하다.”
병원을 나왔다. 세임은 더 이상 날 붙잡지 않았다.
“저 사람.. 윤민조 아니야?”
“에..? 설마..”
“맞는 거 같은데? 사인받..!”
주변의 잡음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난 차에 올라탔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다 이내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어둠의 나락에 갇혀버린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
“흑...흐어..흐으으..윽..흐아..!”
세임은 울었다. 아니, 울부짖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수술실 앞에서 내내 대성통곡을 하며 내 팔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런 세임의 어깨를 감싸며 나도 울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순간 꿈인가 했다. 분명 지금 여긴 병원이고, 수술실 앞이고,
그 수술대엔 네가 누워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있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꼭 와. 올 거지?’
생생했던 너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귓가를 울린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미소 짓던 너였는데.
세임은 몸을 가눌 수 없이 울고 있었지만, 나 또한 내 몸 가누기도 힘들었다.
세임을 챙겨주기엔 내게 안겨진 고통과 충격이 그보다 더 강해서 정말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을 죄여오는 먹먹함에 죽고 싶었다. 네가 죽게 된다면 내가 대신 죽을 수 있길 바라며 울었다.
*
눈을 뜨니 차안이었다. 차속에서 그대로 잠이 든 건지, 집에 나올 때 떠있던 해는 이미 져버렸다.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집안이 반겼다. 윤형의 기척도 없었다.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는 고프지 않았고, 물 또한 마시고 싶지 않았고,
그저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이대로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 내 존재가 사라져 이 고통까지 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은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창으로 비치는 햇살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그렇게 난 살아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 소원은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너만은 달랐다.
내 말을, 내 마음을, 나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없다. 너는 없다. 내 곁에 없다.
나의 너는 오직 내 추억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것이 날 더 괴롭게 했다.
“형..형!”
잠은 깼는데 일어나질 못했다. 초점이 흐려져 정신을 잃는가 싶었는데, 윤형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 차려! 설마 아무것도 안 먹은거 에요? 정말 죽으려고 이러나!”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거의 윤형이 끌고 가다 시피 한 거지만.
급하게 차린 밥상을 내밀며 숟가락을 손에 쥐어주는 윤형.
“저리 치워. 내가 네 애냐.”
“애만도 못하니까 그렇죠! 내가 진짜 형 엄마라도 되는 줄 알아요? 제발 나잇값 좀 해요.”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서 하는 사람이 이래요? 아아- 누가 윤민조 매니저 안하려나. 때려 치고 싶네, 정말.”
매번 말을 저렇게 하면서도 벌써 몇 년째 옆에 붙어있는 녀석이었다.
“국도 좀 먹고.”
“예예-아주머니.”
“뭐요?!”
음식물이 조금씩 들어가니 쪼그라들었던 위가 차츰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들어가질 않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하준이가 깨어났데!”
딱 한번 있었다. 신이 내 소원을 들어준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몇 시간의 긴 수술 끝에 계속 잠들어있던 네가 깨어났다. 의사는 앞으로의 인생을 장담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깨어났다. 영영 그 눈동자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영영 그 손을 못 잡을 줄 알았어.
네 머리칼과, 피부, 그 모든 걸 잃게 되는 그런 지옥에 빠져 버리는 줄 알고 얼마나,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하준아!”
세임은 또다시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울음보단 웃음이 나왔다.
그 고동색의 눈동자에 내가 담겨있는 게 기뻤다.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는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괜찮아...?”
나도 너에게 다가갔다. 날 계속 응시하는 너에게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지만 움츠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너는 나의 손을 거부했다. 그리고 세임 또한 밀쳐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날 바라보는, 날 담고 있는 그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는 다는 걸 말이다.
하준은 나와 세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열지 않았다.
*
“정말, 지금 작품 끝내고 쉬어서 망정이지. 이런 상태로 스케줄이 있다면, 아주 끔찍하다 끔찍해.”
낮부터 캔 맥주를 따먹으며 투덜거리는 윤형은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돌렸다.
“안가냐?”
“형 또 단식투쟁할까봐 옆에 붙어 있으려구요, 왜요.”
“지랄 말고 가.”
“안돼요. 형 요새 이상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아무렇지도 않기는!”
갑자기 텔레비전을 툭 끄더니, 윤형은 정색하며 말했다.
“요 근래 내내 이 상태잖아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머리 좀 식힐 겸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요?”
“더 골치 아파. 집안에 박혀 있는 게 나.”
“집안에만 있다가 우울증 생겨서 자살할까봐 그러죠!”
“뭐?!”
“아, 아니 뭐 형이 자살할거 같다는 게 아니라 요즘 배우들 우울증이..”
“진짜 콱 죽어버려서 너 등에 평생 업혀 다닌다.”
“자, 잘못 했어요 형.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좀 털어놔요. 혼자 끙끙대지 말고. 정말 음침해가지고..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 그래. 정말 아무 일도 없어. 네가 우려하는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너도 가서 쉬어.”
“예예.. 그럼 잔소리꾼 이만 물러갑니다.”
그제 서야 거머리 같던 녀석이 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어둠은 금세 밀려들었다.
이것은 나 혼자 있을 때만 노려서 나타는 건지. 나는 또다시 어둠에 갇혔다.
*
“다신.. 피아노를 칠 수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하준의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
하준의 위로 조명이 떨어졌다. 직접적이었다면 즉사했겠지만 다행히 피아노에 가깝게 떨어져서 하준은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른손은 더 이상 하준에게는 쓸모가 없어져버렸다. 부서진 피아노 아래에 오른팔이 깔렸다.
그리고 바닥에 넘어짐과 동시에 머리엔 큰 충격이 가해졌다. 그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과,
의식이 돌아온 후 증상을 보이는 함묵증. 그게 하준의 현재 모습이었다.
오직 네가 깨어나기만을 바랐던 나였기에, 이러한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만 살아달라고,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나는 다시 욕심이 생겼다.
날 기억해달라고, 나만은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다시 사랑해달라고.
하지만 두 번의 기적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미안한데.. 내일 와줄래요?”
하준이 병실에 낯선 사람이 있는 게 싫다는 듯 어머니에게 종이에 무언가를 써보였다.
어머니의 말에 세임과 나는 병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하준은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사라진 건, 우리 둘과 그리고 피아노뿐이었다.
“우릴..영영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괜찮아. 기억할 수 있을 거야. 믿어.”
“말은.. 할 수 있겠지?”
“기억이 나면 자연스레 돌아오겠지. 다 괜찮을 거야.”
걱정 마. 다 괜찮을 거야.
그때의 나의 바람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
과거와 현실이 이리저리 오갑니다.
* 요 표시의시작이 과거입니다.
우중충한 새드니 새벽감성돋게 읽어주시와요6.6
첫댓글 새드 완전좋아요 ㅜㅜ 잘앍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새드좋아해주셔서감사합니다!
오랜만에새드를읽게되네요
슬프게읽어주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