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난 17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행사장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인사말 도중 김경율 비대위원을 마포을이 지역구인 정청래 (더불어민주당)의 맞상대로 소개하면서다. 한 위원장은 “김 위원은 진영과 무관하게 공정과 정의를 위해 평생 싸웠다”며 그를 추켜세웠다.
무대에 오른 김 위원은 “어젯밤 (한 위원장과)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고 했고, 한 위원장도 “어제 제 부탁을 김 위원이 수락하자마자 말씀드린다. 그의 마음이 변할까봐서다”라고 말했다.
비대위원장이 지도부라 할 수 있는 비대위원의 출마지를 당사자와 늦은 밤 전화로 논의한 뒤, 그 바로 다음 날 발표한 것이다. 전날(16일) 밤 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시스템 공천’을 표방하며 경선룰을 확정·발표한 지 18시간만의 일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17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 행사장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경율 비대위원과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비슷한 상황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에서도 벌어졌다. 지난 16일 인천시당 행사에서 한 위원장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무대 위로 불러 “이재명이 출마하는 지역이라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고 싶어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계양을 출마를 공식화한 것인데, 당사자인 원 전 장관은 행사 후 기자들과 만나 “어제(15일) 한 위원장에게 전화로 제 뜻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두 지역은 각각 김성동(마포을)·윤형선(계양을) 당협위원장이 출마를 준비해온 곳이다. 한 중진 의원은 “출마를 준비해온 사람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후보를 발표하는 것은 정치적 도의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공정을 말하고는 불공정을 행한다”(김성동), “‘낙하산 공천’에 주민 반감이 커지고 있다”(윤형선)는 두 사람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다. 두 사람 모두 경선에 나서면 파열음이 커질 거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 16일 인천 계양구 카리스 호텔에서 열린 인천시당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총선 승리를 다짐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건 ‘사천(私薦)’ 논란이 불붙고 있다는 점이다.『조국흑서』저자인 김경율 위원은 2022년 5월 한 위원장의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 여당 측 증인으로 출석해 민주당 의원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팔짱을 낀 채 발언해 박광온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마포을에 공천될 기류에 야당은 “한동훈표 시스템 공천 도입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한 위원장 입으로 시스템을 다운시킨 것”(권칠승)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국민의힘에선 최근 불공정 경선을 우려한 예비출마자가 탈당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 2일 경기 수원에서 열린 경기도당 신년인사회에서 수원병에 출마예정이던 방문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단상 앞에서 자신을 소개한 뒤 한 위원장과 격하게 악수했다.
8일 국회에서 열린 입당식 때 방 전 장관은 한 위원장이 입혀주는 빨간색(국민의힘 상징색) 점퍼를 입었다.
김용남 전 국민의힘 의원이 1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탈당 및 개혁신당 합류를 선언하고 눈물을 닦으며 나서고 있다. 오른쪽부터 개혁신당 이기인·허은아 공동창당위원장, 김 전 의원, 천하람 공동 창당준비위원장.
이런 소식을 접한 김용남 전 의원(전 수원병 당협위원장)은 12일 국민의힘을 탈당하고 개혁신당에 합류했다. 그는 언론사에 “공정한 경선은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당협위원장은 “불공정 경선 논란이 생기고, 불복한 분들이 무소속 출마하거나 개혁신당에 합류하면 우리 당 후보 당선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도 한 위원장은 18일 비대위 비공개회의에서 “시스템 공천은 우리 당에서 해보지 않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익명을 원한 중진 의원은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공천을 ‘잘했다’는 듯이 자평하는 건 난센스”라며 “공천은 종합예술인 만큼 이기는 후보를 내는 것도, 매끄럽게 과정을 일궈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