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거들을 입었어 / 마경덕
외로울 때면 거들을 입었어. 낯선 그 사내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웠어. 허술한 아랫배를 꽉 조이고 그 남자를
만나러 나갔지. 여의도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준,
그 변태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내 다리가 예쁘다고 말했어.
팔랑거리는 치마 속, 거들은 나의 힘, 거들이 없는 데이트는
정말 끔찍해. 맛있는 돈가스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디제이의 목소리도 시들해지고,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러나 나에겐 거들이 있지. 자취방 거울 앞에서 간신히
추켜올린 짱짱한 거들, 힙을 받치고 흘러내리는 불안을
받쳐주는 거들. 굵은 팔뚝보다 여관 앞을 서성이는
사내보다 힘이 센,
거들만 믿었어. 거들을 벗으면 나는 무방비 상태였어.
속이 더부룩해도 허벅지와 아랫배에 솔기자국이 선명해도
난 거들을 벗을 수 없었어. 언젠가 나무 그늘에 나를 밀치던
그 변태를 거들은 기어이 뿌리쳤지. 정조대처럼, 단단한
그 거들을 감히 어쩌겠어. 나는 그 보호대를 껴입고
아빠도 오빠도 없는 객지에서 스무 살을 무사히 넘겼지.
딸 셋을 키우는 우리 집 빨랫줄엔 힘센 갑옷이 세 개나
널려있지.
- 마경덕 시집 <사물의 입> 2016
[출처] 마경덕 시인 14|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