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1번문제는 저와 오르쿠트님, 샤망트님과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토론을 한번 채팅방에서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토론을 한 적이 잇습니다. 결론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로 되었네요. 서양과 일본의 예를 보면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언어의 통일, 공통신화의 창조 등 이전에는 따로 떨어져 있던 백성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공통분모만들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성공을 하죠. 하지만 청 황제의 경우, 이런 것을 만들어 내기가 힘듭니다.
청 황제는 티베트에게는 보살, 북방민족에게는 칸, 중국민들에게는 황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민족인 청나라 황제는 대다수가 한족인 중국인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천황은 수 세기동안 신앙의 형태로 민중들에게 각인된데 반해 황제는 정치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신앙적인 형태로 묶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비록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黃帝숭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매우 미미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종교형태로 삼는 것은 어려웟죠.
그렇기 때문에 이민족 황제이 대다수 한족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 어려웠고 이를 중심으로 해서 국민국가로 되는 것은 힘들지 않았나 합니다. 2. 원래 손문이 내건 가치가 반청이고 한족의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과 티베트, 타지키스탄 등은 청의 대칸이 지배하는 곳이었지 결코 중국의 황제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족국가론을 세운 중화민국에 반대해서 몽골과 티베트는 독립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대칸에게 충성했지 한족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만주쪽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했던 러시아의 존재가 몽골의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즉, 명분과 당시 정세에 있어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티베트는 어떻게 막을 수 있었지만 몽골이나 타지키스탄은 중화민국으로서는 막기 힘들지 않았나 봅니다. 3. 당연히 군벌입니다. 최소한 원세개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직접적으로 통치가 가능은 했었지만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있는 여러 군벌들, 또 지방 자체에서 군벌들이 일어나면서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범위가 거의 없게 됩니다. 이는 장개석이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명분상 짱은 장개석이지만 실제 지방은 군벌들이 설치는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이 종식되는 것은 모택동이가 1949년 최종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장개석이 군벌을 정리하지 않다가 결국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 것이지요. 장개석의 군사력이 당연히 모택동의 군사력보다 컸지만 그 군사력을 모택동은 100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장개석은 10 정도 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지방의 군벌들이 자신의 군사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존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대장정 때도 모택동을 그냥 보고도 모른척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장개석과 다르게 모택동은 철저하게 없애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군벌에게 상당한 자치와 군사력을 허용해야 했던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지방을 장악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국민당군의 분열로 인한 군벌의 항복이라면 모르겠지만 군벌자체는 장개석 떄 이미 약화 되었고 모택동 때에는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장개석이 북벌까지 하였음에도 결국 군벌의 자치를 인정하게 된 것은 그의 기반이 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의 대다수였던 농촌까지 장악하기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청나라가 신사층을 통해서 지방을 장악한 것처럼 장개석도 군벌들을 통해서 지방을 장악하려고 하였죠. 이에 반해 모택동은 토지분배 등을 통해서 농민층의 지지를 확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굳이 군벌의 힘까지 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자하면 정권의 주요 지지기반의 차이라고 할까요?
정확히는 증국번때부터 입니다. 태평천국과 여러 농민반란의 진압 등으로 세력을 키운 증국번과 그 후계자들이 청에게 한결같은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청은 지방을 장악할 수 있었죠. 신해혁명 때도 사실 손문은 그다지 인지도가 없던 사람이었고 지방들은 청에게서 떨어져나간 일종의 신사층 연합체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손문이 당시 가장 명망있고 세력이 강한 원세개에게 국가원수의 자리를 준 것이지요.
사례를 좀 들기가 힘든게 1911년 이후로 가면 실질적으로 전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티베트 탈환에 성공한 듯하더니 영국의 간섭으로 다시 분쟁상태로 가고 외몽골 침공에 성공하더니 다시 러시아에 빼았기는 등등, 국외적으로는 2~3개가 있지만 내부적으로 이미 원세개가 꽉 잡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1913년에 원세개의 친국민당 군지도자의 해임에 반발해서 일어난 군대의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9월에 그위 부하인 장훈이 남경을 점령한 것을 보면 최소한 국내의 의거나 반란은 막을 수 있는 군사력은 확보한것 같습니다.
전근대 시대에 형성된 다민족 국가의 경우 근대화의 물결에 보수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비단 청 뿐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 이중제국 모두 민족의 형성을 구심으로 국민국가의 통일에 소극적이었고 결국은 해체의 과정을 밟습니다. '민족'이란 의식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피지배 종족들의 각성을 일으키니까요. 오스트리아는 해체되어 소국으로 남았고, 오스만 역시 투르크 민족의 형성으로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만을 모태로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중국 역시 청의 영토가 일단 해체되죠.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른 사례와 달리 다시 근대적 다민족 국가로 재형성(정복) 되었는데 이는 사회주의적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도움이 된 것이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에 의거하여 의식적으로 소수민족의 권리 보장등을 통해 외형적 평등(물론 실제적 평등이냐 하면...)을 보장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록 티벳이나 신장등의 분리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청대의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한 지금은 오히려 민족주의를 구심으로 공산당 독재와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무마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지만요
결론은 한족 황조였다면 어떻게 입헌군주 태크를 통한 근대화 루트를 밟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민족, 그것도 한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인 여진족이 지배 민족이었기에 자연히 민족의식의 형성을 통한 근대화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근대화 개혁의 비효율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일본에 비해 '위기의식'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도 있고, 지나치게 큰 규모로 인해 전국에 걸친 일괄된 변혁을 수행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크죠.
당시 정황을 보면 외몽골의 경우, 러시아는 북만주를 영향력에 두려고 했었기 때문에 외몽골을 최소한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강이나 티베트까지 중국으로부터 빼았아 영향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었죠. 게다가 신강, 티베트를 빼았아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외몽골도 위험하게 되고 일본과 중국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잇는 여지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신강이나 티베트까지 러시아가 손 댈리가 없죠.
문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떤 때가 이미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한 후라는 것입니다. 외몽골이야 러시아에게는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요충이였다고 해도 굳이 신강과 티베트까지 빼았아 중국 및 열강들의 눈총을 받을 필요가 없죠. 즉, 신강과 티베트는 빼았아보았자 외몽골과 같이 당시 러시아가 필요한 이익을 줄 수가 없고 도리어 열강과 중국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일본이 만주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에 중국과 열강을 자극하여 적을 더 만든다면 만주를 차지하는데 더 힘들어질 뿐이지요.
그 과정이 1911년 몽골독립- 1915년 카푸타 조약에 의해 중화민국 하의 자치국가가 됨-1917년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가 혼란스러워지자 중화민국 진출-1920년 백군 몽골진출, 이렇게 됩니다. 즉 독립-명목상 종속-1917년 중화민국점령-1920년 다시 독립 이렇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몽골의 독립시기는 대체적으로 1911년으로 봅니다.
신강성의 경우 혁명당 인사인 유선준이 주도를 하여 혁명정부를 세웁고 1912년에 원세개의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신강의 경우는 티베트와 외몽골과 다르게 열강의 지지가 없었죠. 티베트도 사실 1912년 6월에 중화민국군이 티베트를 장악하게 되지만 영국의 간섭으로 티베트군이 영국의 무기 를 얻기 시작하면서 계속되는 영토분쟁이 아타나게 됩니다. 이게 진정되는 것이 1949년 공산당의 티베트 점령이죠. 즉, 신강은 티베트나 외몽골과 다르게 외교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고 애초에 혁명당원이 세운 정부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복속하기가 쉬웠습니다.
첫댓글 1번문제는 저와 오르쿠트님, 샤망트님과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토론을 한번 채팅방에서 새벽 5시까지 이어지는 토론을 한 적이 잇습니다. 결론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로 되었네요. 서양과 일본의 예를 보면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언어의 통일, 공통신화의 창조 등 이전에는 따로 떨어져 있던 백성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공통분모만들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성공을 하죠. 하지만 청 황제의 경우, 이런 것을 만들어 내기가 힘듭니다.
청 황제는 티베트에게는 보살, 북방민족에게는 칸, 중국민들에게는 황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민족인 청나라 황제는 대다수가 한족인 중국인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천황은 수 세기동안 신앙의 형태로 민중들에게 각인된데 반해 황제는 정치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신앙적인 형태로 묶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비록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黃帝숭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매우 미미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종교형태로 삼는 것은 어려웟죠.
그렇기 때문에 이민족 황제이 대다수 한족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 어려웠고 이를 중심으로 해서 국민국가로 되는 것은 힘들지 않았나 합니다.
2. 원래 손문이 내건 가치가 반청이고 한족의 국가를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과 티베트, 타지키스탄 등은 청의 대칸이 지배하는 곳이었지 결코 중국의 황제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족국가론을 세운 중화민국에 반대해서 몽골과 티베트는 독립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대칸에게 충성했지 한족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당시 만주쪽으로 세력을 넓히려고 했던 러시아의 존재가 몽골의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즉, 명분과 당시 정세에 있어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티베트는 어떻게 막을 수 있었지만 몽골이나 타지키스탄은 중화민국으로서는 막기 힘들지 않았나 봅니다.
3. 당연히 군벌입니다. 최소한 원세개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직접적으로 통치가 가능은 했었지만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있는 여러 군벌들, 또 지방 자체에서 군벌들이 일어나면서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범위가 거의 없게 됩니다. 이는 장개석이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명분상 짱은 장개석이지만 실제 지방은 군벌들이 설치는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이 종식되는 것은 모택동이가 1949년 최종적으로 중국을 통일하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1.그래도 장개석이 북벌로 어느정도 군벌을 정리하지 않았나요? 장개석이 지나치게 군벌을 견제, 정리하다가 일본, 모택동에서 패배했다고 들어서요.
2. 또한 군벌들은 모택동이 통일한 후에도 지방군에 많이 잔존하지 않나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장개석이 군벌을 정리하지 않다가 결국 공산당에게 패하게 된 것이지요. 장개석의 군사력이 당연히 모택동의 군사력보다 컸지만 그 군사력을 모택동은 100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장개석은 10 정도 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지방의 군벌들이 자신의 군사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존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대장정 때도 모택동을 그냥 보고도 모른척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2차 국공내전이 되면 그런 성향은 더 많이 드러나고 게다가 장개석군과 군벌군들의 갈등조차 보이게 됩니다. 결국 군벌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장개석은 공산당에 비해 집중된 힘을 낼 수 없었고 그 결과로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장개석과 다르게 모택동은 철저하게 없애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군벌에게 상당한 자치와 군사력을 허용해야 했던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지방을 장악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국민당군의 분열로 인한 군벌의 항복이라면 모르겠지만 군벌자체는 장개석 떄 이미 약화 되었고 모택동 때에는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장개석도 군벌을 없앨려고 시도는했던거같은데 없애지못했던 이유가뭔가요?... 그리고 청말때 이미 사실상 중앙정부에서 지방통치력이 없어졌다고하든데 원세개때까지는 하나의통일된정부였다는건가요?
장개석이 북벌까지 하였음에도 결국 군벌의 자치를 인정하게 된 것은 그의 기반이 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의 대다수였던 농촌까지 장악하기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청나라가 신사층을 통해서 지방을 장악한 것처럼 장개석도 군벌들을 통해서 지방을 장악하려고 하였죠. 이에 반해 모택동은 토지분배 등을 통해서 농민층의 지지를 확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굳이 군벌의 힘까지 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자하면 정권의 주요 지지기반의 차이라고 할까요?
원세개때 일시적으로 청말의 지방 유력 토호의 난립이 잠재워졌다고 보면되겠군요...?
정확히는 증국번때부터 입니다. 태평천국과 여러 농민반란의 진압 등으로 세력을 키운 증국번과 그 후계자들이 청에게 한결같은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청은 지방을 장악할 수 있었죠. 신해혁명 때도 사실 손문은 그다지 인지도가 없던 사람이었고 지방들은 청에게서 떨어져나간 일종의 신사층 연합체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손문이 당시 가장 명망있고 세력이 강한 원세개에게 국가원수의 자리를 준 것이지요.
북양군벌이 중국을 청 조정도 힘들었던 일시적으로 통합할정도의 수준이였나보군요 ㄷㄷ;;;
유문기님 당시 북양군벌이 전중국을 묶을정도로 강했는지 궁금한데 얼마나 강했는지 알수있는 사례같은게 있으면 알수있을까요?...
사례를 좀 들기가 힘든게 1911년 이후로 가면 실질적으로 전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티베트 탈환에 성공한 듯하더니 영국의 간섭으로 다시 분쟁상태로 가고 외몽골 침공에 성공하더니 다시 러시아에 빼았기는 등등, 국외적으로는 2~3개가 있지만 내부적으로 이미 원세개가 꽉 잡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1913년에 원세개의 친국민당 군지도자의 해임에 반발해서 일어난 군대의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9월에 그위 부하인 장훈이 남경을 점령한 것을 보면 최소한 국내의 의거나 반란은 막을 수 있는 군사력은 확보한것 같습니다.
전근대 시대에 형성된 다민족 국가의 경우 근대화의 물결에 보수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비단 청 뿐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 이중제국 모두 민족의 형성을 구심으로 국민국가의 통일에 소극적이었고 결국은 해체의 과정을 밟습니다. '민족'이란 의식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피지배 종족들의 각성을 일으키니까요. 오스트리아는 해체되어 소국으로 남았고, 오스만 역시 투르크 민족의 형성으로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만을 모태로 새로운 국민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중국 역시 청의 영토가 일단 해체되죠.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른 사례와 달리 다시 근대적 다민족 국가로 재형성(정복) 되었는데 이는 사회주의적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도움이 된 것이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에 의거하여 의식적으로 소수민족의 권리 보장등을 통해 외형적 평등(물론 실제적 평등이냐 하면...)을 보장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록 티벳이나 신장등의 분리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청대의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한 지금은 오히려 민족주의를 구심으로 공산당 독재와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무마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지만요
결론은 한족 황조였다면 어떻게 입헌군주 태크를 통한 근대화 루트를 밟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민족, 그것도 한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인 여진족이 지배 민족이었기에 자연히 민족의식의 형성을 통한 근대화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근대화 개혁의 비효율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일본에 비해 '위기의식'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도 있고, 지나치게 큰 규모로 인해 전국에 걸친 일괄된 변혁을 수행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크죠.
근데 신강의 경우엔 재정복하는데 성공했는데 몽골과 같은 변경지역들은 이탈할수밖에없었던 이유가뭔지요?
Rothschild님// 그건 저어기 위에 있는 댓글을 잘 읽어보심 유문기님께서 이미 설명해주셨다는걸 알 수 있을텐데요..
Zinnaphoenix / 신강도 러시아의 영향이 미칠수있는 지역이었는데 탈환이되었다는거때문에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정황을 보면 외몽골의 경우, 러시아는 북만주를 영향력에 두려고 했었기 때문에 외몽골을 최소한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강이나 티베트까지 중국으로부터 빼았아 영향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었죠. 게다가 신강, 티베트를 빼았아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외몽골도 위험하게 되고 일본과 중국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잇는 여지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신강이나 티베트까지 러시아가 손 댈리가 없죠.
유문기 / 기본적으로 중국에게 여러땅을 뜯어서 사이가 이미많이나빠져있지않았나요?... 외몽골의 독립의 계기가 중국이 러시아의힘에 굴복한거이지않나요?
문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떤 때가 이미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한 후라는 것입니다. 외몽골이야 러시아에게는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요충이였다고 해도 굳이 신강과 티베트까지 빼았아 중국 및 열강들의 눈총을 받을 필요가 없죠. 즉, 신강과 티베트는 빼았아보았자 외몽골과 같이 당시 러시아가 필요한 이익을 줄 수가 없고 도리어 열강과 중국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일본이 만주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에 중국과 열강을 자극하여 적을 더 만든다면 만주를 차지하는데 더 힘들어질 뿐이지요.
유문기 / 그렇군요... 근데 몽골의 독립시기는 러시아 적백내전때아닌가요?...
적백내전은 1917~1918년, 몽골의 독립은 1911년입니다. 당시 제정러시아가 일본과 비밀협약을 맺으면서 꾸준히 만주쪽으로 진출하려고 하던 때이지요.
유문기 / 다시 중화민국에게 점령되었다가 백군이 들어와서 중화민국 장군을 몽골에서 축출하고 독립시킨거때문에 물어보았습니다.
그 과정이 1911년 몽골독립- 1915년 카푸타 조약에 의해 중화민국 하의 자치국가가 됨-1917년 적백내전으로 인해 러시아가 혼란스러워지자 중화민국 진출-1920년 백군 몽골진출, 이렇게 됩니다. 즉 독립-명목상 종속-1917년 중화민국점령-1920년 다시 독립 이렇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몽골의 독립시기는 대체적으로 1911년으로 봅니다.
그게 중화민국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의 신강재점령처럼 수복되었다가 쫒겨나는걸 보면 이탈은 필연적인가 싶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신강성의 경우 혁명당 인사인 유선준이 주도를 하여 혁명정부를 세웁고 1912년에 원세개의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신강의 경우는 티베트와 외몽골과 다르게 열강의 지지가 없었죠. 티베트도 사실 1912년 6월에 중화민국군이 티베트를 장악하게 되지만 영국의 간섭으로 티베트군이 영국의 무기 를 얻기 시작하면서 계속되는 영토분쟁이 아타나게 됩니다. 이게 진정되는 것이 1949년 공산당의 티베트 점령이죠. 즉, 신강은 티베트나 외몽골과 다르게 외교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고 애초에 혁명당원이 세운 정부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복속하기가 쉬웠습니다.
즉, 1911~12년 당시에는 외몽골의 독립은 열강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나 점차 시간이 가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서 외몽골의 상황도 변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적백내전이 없었다면 중국군이 외몽골까지 진출할 여지가 없엇겠지요.
티베트는 결국 영국의 간섭이 제거되고 점령된것이고 몽골은 당시 소련의 종속국이여서 그런것이라 보면되겠군요?...
예, 1948년 인도 해방 이후 1949년에 바로 티베트 점령이 일어난 것을 보면 영국과 티베트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몽골이야 1911년 이후 계속해서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니 중국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지요.
댓글을 정리해서 스크립하고 싶은데;;; 노가다 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