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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 中 (1)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래도 무리를 시켰나보군요”
“아니. 우리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그래”
“이야기라면…?”
푹 꺼진 정신을 가르고 목소리들이 파고들었다. 누가 떠드는 것인지 알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그중 한명이 ‘그’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다음에서야 다른 목소리가 아빠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을 날 키워주고 보살펴주신 부모님보다 먼저 알아채는 ‘그’의 존재라니. 그 벅찬 마음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 두려워지기도 했다.
“자네…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저…라면”
“네가 우리 선호를 보살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와이프가 또 생각이 난모양이야”
“……. 그렇군요”
그도 그의 사별한 부인과 나의 엄마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알아듣고는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나와 그의 아들인 원우가 몇 번 어울렸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걸까.
“미안하다. 멋대로 떠들어서”
“아닙니다. 벌써… 오래되었고, 자현씨는… 그럴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군”
엄마는 어디에 갔는지 기척도 없었고, 내 병실에서 말을 주고받는 건 그와 아빠가 유일했다. 점점 더 의식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까의 숨이 차오를 정도의 두근거림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나의 몸은 편안하기만 했다.
“아…”
“일어났니? 괜찮니? 몸은 어때”
내가 일어난 것을 알아챈 아빠가 재빨리 다가와 섰다. 그리고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뺨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흐릿한 눈앞을 여러 번 감았다 뜨면서 정리하자 곧 또렷하게 아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에 물든 아빠의 얼굴이 안쓰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
“그래. 정신이 들어?”
“응…”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때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아빠의 슬픈 얼굴은, 내가 이 병원에 가둬진 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걱정과 슬픔으로 범벅되어 나를 안쓰러워하는 아빠를 위해서 매번 웃어보였다. 나는 괜찮아.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아니…”
아빠는 내가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혹은 알고 지낸 이의 친인의 죽음에 대한 것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경솔했던 말을 사과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은, 시커멓게 더럽게 물들어가는 나를 멈추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언제나 죽음과 함께 걷고 있는 내게는 나의 죽음이든, 타인의 죽음이든 간에 죽음자체는 무겁지 않았다. 그렇게 초연해져야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었고 기약 없는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겁지 않았다 한들 죽음이란 것은 결코 가벼워 질 수 없는 일임에도, 순수하게 그 여자의 죽음을 기뻐해버린 내가 너무도 무서웠다. 당장이라도 폭소를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 넘기고 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현실에서 도망갔던 것이었다.
“괜찮…은거냐”
나를 도닥이던 아빠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자, 아빠의 옆에 서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고요했다. 방금까지 갖가지 감정으로 들어차있던 일렁이는 아빠의 눈과 마주하고 있던 나는 그 정적인 모습에 잠시 숨까지 멈춰버렸다.
“선…생님”
“그래”
“선생님…”
정말 그 여자는 죽은 건가요? 당신의 아내였던 여자가 죽은 건가요? 정말인가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목구멍너머로 삼켜버렸다.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정도로 미쳐있지는 않았다. 그를 부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그는 재촉하지도 피하지도 않은 채 그저 나를 내려다보았다.
“엄마랑 아빠, 오늘 선호랑 같이 있을까?”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던 우리사이로 아빠가 내 손을 잡아오며 물었다. 나는 억지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방금 있었던 발작에 대한 걱정으로 아빠는 희게 질려있었다.
“응?”
“엄마랑 아빠… 내일 출근해야지”
“괜찮아”
“거짓말. 내일 수업도 있는 거 알고 있어”
나의 부모님은 젊은 나이였지만 두 분 다 의과대학교수직에 있었고 덕분에 각종강의와, 병원에서의 특진으로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고 정말 바빴다.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것도 부모님들은 엄청나게 시간을 쪼개고 쪼갠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그냥… 잠깐 그런 거야. 나 요즘 많이 좋아졌어”
“선호야”
“엄마 또 어디 가서 울고 있는 거지? 나 괜찮으니까 가서 엄마 달래줘. 그리고 내일 다시와”
“……”
아빠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의 침묵 속에는 나에 대한 미안함과 대견함,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자리해있었다. 한참을 내 얼굴만 보고 있던 아빠가 내 손을 이불속에 밀어 넣고는 내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두 어 번 토닥인 뒤 슬쩍 고개를 돌려 그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원우도 기다리고 있을텐데…”
“괜찮습니다”
“그래. 부탁 한다”
그리곤 나를 보더니 다시 올 테니 그의 말을 잘 듣고 있으라고 말한 뒤 병실을 나갔다. 아빠가 나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2년 전 부터 비정기적으로 오던 발작이었지만 처음 병원에 실려 오던 날 이후 부모님눈앞에서 정신을 놓은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에게 또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아 나는 마음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내가 인형마냥 병원에 갇혀 가끔씩 죽어버릴 것처럼 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려워서, 자신들이 있는 병원이 아닌 곳에 입원시킨 부모님이었다. 같은 병원에 있는다면 일이고 수업이고 내팽개치고 내게 올 것 같다면서 입원첫날 엉엉 울던 엄마가 생각났다.
“선생님도… 가보세요”
“……”
하염없이 아빠가 나간 문을 보다가 시선을 올려 그를 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린 적이 없다는 듯 단번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에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내려가던 기분이 더이상 떨어지지 못하도록 머리끝부터 잡아 채이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늦었잖아요. 원우가 싫어할 거에요”
전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던 그의 아들 ‘원우’가 뒷사정을 조금 알게 되었다고 친근감 있게 느껴졌다. 머리 커져서는 몰라도 어렸을 때는 제법 어울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기억나지 않는 머릿속을 뒤적거리며 원우로 추정되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침대 한쪽이 기울었다. 시선을 돌리자 내 옆에 걸터앉은 그가 보였다.
“선생님…?”
그는 대답 없이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칼 끝을 만지작댔다. 아빠가 쓸어 넘겨주던 다정한 손길과도, 엄마가 쓰다듬어주던 애정 어린 손길과도 달랐다.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손끝으로만 내 머리끝을 문질렀다. 끄트머리만을 한 올 한 올 세는 것처럼 한참을 만지작대던 그의 손이 조금씩 올라왔다. 뒤통수를 전부 덮을 정도로 길어진 내 머리카락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모든 정신을 집중한 것처럼 내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가 조심스럽게 내 뺨으로 손을 옮겼다. 솜털도 닿지 않을 정도로 손끝으로 뺨 위를 배회하는 손가락에 나는 눈조차 굴리지 못하고 숨까지 죽였다. 그의 손가락이 뺨을 지나 콧대를 한번 쓸어내린 뒤 천천히 내 입술에 닿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손가락에 아랫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그대로 지나치지 않은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더듬었다. 간질거리던 심장이 순식간에 빠른 고동을 만들었다. 발끝까지도 느껴질 것 같은 커다란 두근거림에 나는 그의 닿은 손가락으로도 나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걱정됐다.
“……. 아프지 마라”
한참을 간지럽게 입술주변을 훑던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그가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일어나 자라고 말한 뒤 불을 끄고 병실을 나갔다. 난 수면등 하나만 밝혀진 방안에서 조심스럽게 입술에 손을 올렸다. 간질거렸던 느낌이 살아나면서 나는 마치 그와 입맞춤을 한 것 같은 느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 얼굴에 닿은 것은 그의 손가락이아니라 마치 입술 같았다.
* * *
“몸은 어떠니”
“괜찮아요”
“그래”
“선생님”
나는 돌아서려는 나의 담당의 김교수님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그가 차트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직… 없는 건가요?”
“……. 그래”
“저 2년이 넘었는데…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요?”
“…나도 네 부모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네”
다른 의사들과 함께 우르르 그가 나가버리고 나는 아침햇살이 들이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버렸다. 울긋불긋 화려함을 자랑하던 빛나던 가을은 지나고 낙엽으로 모두 추락하여 바닥에 흩어진 채 사람들의 발길에, 바람에 바스라져 흩어지는 것들만이 남았다. 그 모습이 이제는 뒷걸음질할 곳조차 남지 않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병원 건너에 네모진 빌딩을 보면서 빌딩 속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멍하게 앉아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냐”
갑작스레 따뜻한 것이 다가와 뺨을 훑었다. 창밖을 보던 눈을 돌리니 그가 내 앞에 서서 얼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눈에서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다시 손등으로 그것을 훔쳐냈다.
“무슨 일이 있었어”
난 어째서 이사람앞에서는 이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프기 시작한 뒤로 부모님 앞에서도 울지 않았었는데. 걱정으로 점철된 그들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슬픔을 보태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온갖 의연한척을 가장해 연기를 했다. 부모님에게도, 의사들에게도, 간호사누나들에게도. 말썽피우지 않고 성실한 환자가 되어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그들이 나를 치료하겠다고 하는 방법 그대로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 착한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대견해했다. 그리고 조금 더 불쌍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가 눈앞에 있음을 알아채놓고도 쉽사리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커다란 손으로 뺨을 감싸오는 그의 손길에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아버렸다.
“대체…”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도 말할 수 없다. 사실은 부러운 것이라고. 하늘과 강과 바람을 동경하듯이 옥상을 헤매었지만, 사실 내가 보던 것은 높고 낮은 네모진 빌딩속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의 저마다의 평범한 일상을 일분이분의 시간에 쫓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이른 아침엔 추운 옷깃을 여미면서도 걸음을 옮겨 자신을 반겨주는 친구들과 직장동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고, 해가지고 나서는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또래의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뭉쳐 길거리를 걸어가며 왁자지껄하게 웃어젖히는 것에 시선을 붙잡혀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그 비참하고 괴로운 나의 밑바닥을 그에게도 난 보여줄 수 없었다. 감은 눈앞의 그가 보기 드물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허리를 숙인 그가 바로 내 눈앞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었는지 가깝게 얼굴이 보였고 난 고민 없이 그의 목뒤로 팔을 감았다. 거리를 두고 서있던 그의 몸이 딸려오면서 내 얼굴이 그의 어깨에 묻혔다. 잠시 가만히 서있던 그가 뺨에 올려두었던 손을 떼고 자신의 목에 둘러진 내 팔을 잡았다.
“……잠시”
떼어내려는 줄 알고 버티던 나에게 양해를 구한 그가, 내 옆에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놓은 채 앉았다. 그리고 잡고 있던 팔을 다시 자신의 목에 감아주더니 내 얼굴을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는 내 등 뒤로 팔을 돌려 허리와 뒷목을 감아 안았다. 완전히 그에게 갇힌 꼴이 되었지만 나는 칭얼대듯 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도 조금 더 팔에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천천히 뒷목을 쓸어주는 그의 손길에 나는 울음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울고 있는 나의 귓가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걱정마라. 반드시… 낫게 해줄 테니까”
내가 반드시….
* * *
종합병원은 다섯 시가 지나면 고요해진다. 외래환자들이 전부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죽음의 냄새가 다시 병원을 휘감는다. 처음엔 그 우울함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고, 내게 가장 유효했던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
“네. 얼마 전에 부모님이 사다주신걸 다 읽어버려서…”
내 병실에 책이라고는 한쪽 테이블에 놓여있던 몇 권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는 의아하게 나를 보았고, 나는 여태까지 다 읽은 책은 부모님이 전부 챙겨 집에 가져다 놓았노라고 말했다.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말에 의하면 서재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할 정도로 책이 많이 쌓였다고 했다.
“흠…”
며칠 전 부모님이 가져다주신 책의 마지막장을 어제 끝내버린 탓에 오늘은 할 일이 없어 힘들었다. 내 또래 애들이라면 컴퓨터로도 하루를 모두 보낼 수 있을 테지만, 나는 게임에도 인터넷에도 큰 취미가 없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다른 일이 없는 시간 모두를 책에 할애했었고 그에게도 몇 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나는 책을 모두 읽었다는 핑계 삼아 그에게 책을 사 달라 조르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부탁한다면 단번에 알았다 하실 테지만 나는 왠지 그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보고 싶은 건 제가 적어서 드릴게요. 안 되나요…?”
“……”
“어려우시면… 그냥 부모님께 부탁드릴게요”
그의 침묵이 거절의 의미라고 생각한 나는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를 하기위해 단축키를 누르려는데 그가 손에 있던 핸드폰을 쓱 빼갔다.
“선생님?”
“핸드폰이 있었군”
“아… 네. 부모님이 가끔 전화 하세요”
그는 내게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듯이 손에 든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빠른 손길로 화면을 눌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가운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진동이 울리고 있는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양쪽 핸드폰을 몇 번 조작하더니 그는 다시 나의 것을 내손에 넘겼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려받은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다급하게 들어간 전화부 목록에는 ‘최기문’이라는 새로운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놀라움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자신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도록 하지. 이제 아침저녁으로는 많이 추우니까”
“……네?”
“점심시간에 맞춰 가면 괜찮을 거다. 그렇게 알고 있어”
“……무슨”
“서점에 같이 가자는 얘기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기쁨인지 놀람인지 입도 닫지 못하고 굳어진 내게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내 길어진 머리칼을 쓰다듬고 슬쩍 귓가를 만지고 떨어졌다.
“나간 김에 점심을 밖에서 먹고 와도 좋겠지. 시간이 길지 않으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라”
“네…네!”
“내일 오전 진료 끝나고 오지”
나는 아직도 헤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그를 보냈고 한참을 허공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입이 양쪽으로 씩 끌어올려지면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
부모님들도 단 한 번도 내게 서점을 가자고 하신 적이 없었다. 내가 책에 푹 빠져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내가 목록을 이야기하면 찾아올 때마다 한 아름씩 사서 들고 오곤 했었다. 그것에 나는 불만이 없었고, 잊지 않고 이렇게 챙겨주는 그들이 고맙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사소하게, 부모님이 아닌 그에게 부탁이란 것을 해서 선물을 받아보고 싶다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욕심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는 나에게 도리어 더 큰 기쁨을 주었다. 함께 서점을 가자라니…. 새 책으로 가득한 종이와 잉크냄새가 자욱할 그곳에 갈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나는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화면에는 전화부에 저장된 ‘최기문’이라는 이름이 떠있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눌렀다. 그리고 단축번호를 다시 저장하고는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이제 액정화면에는 ‘최기문선생님♡’이란 이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오전회진이 끝나자마자 나는 옷장을 뒤적였다. 지난번 커다란 니트로 잘못된 코디를 했던 기억이 선연했기 때문에 오늘은 실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춥게 입었다며 그가 옷을 전부 다시 입게 할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예쁘고 따뜻하게 입어야 했다. 병원에서 있는 시간이 길고 외출이 잦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진 옷은 많지 않았다. 집에야 옷이 꽤 있었지만 가져다둔 옷은 그것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옷장 문을 열고 고심하며 옷들을 노려보던 나는 적당한 옷들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딩을 꺼내 놓고 문을 닫았다. 냄새를 맡아보니 이번엔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지난번에 오래된 옷 냄새를 맡은 이후로 부모님에게 부탁해 전부 세탁을 했기 때문이다. 병원 복을 빠르게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셔츠를 걸치고 패딩을 팔에 끼우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네”
나머지 한쪽 팔을 마저 끼우는 새에 상대가 방에 들어왔다. 들어온 그는 가운은 미리 벗어두었는지 말끔한 정장에 한 팔에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 준비했어요!”
침대에 던져둔 목도리를 둘둘 휘감으면서 냉큼 말하자 그가 등 뒤로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코트를 내려놓더니 내게 다가와 섰다. 그리곤 거울도 보지 않아 어색하게 둘러진 목도리를 풀어내더니 패딩 지퍼를 잠근 뒤 목까지 올려주었다. 패딩 모자를 뒤집어씌운 그는 그 위에 목도리를 솜씨 좋게 둘러 묶어주었고 그것은 입 근처까지 바람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장갑은?”
“여기요”
냉큼 장갑을 꺼내들자 그가 그것도 하나씩 내손에 직접 끼워 주었다. 슬쩍슬쩍 스치는 그의 손길에 나는 목도리 뒤에서 몰래 웃었다. 내가 완전히 준비한 듯하자 그가 내려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걸 본 나는 눈을 빛내며 그에게서 코트를 뺏어들었다. 그러자 그가 뭐냐는 듯 돌아본다.
“제가, 제가 입혀드릴게요”
코트를 펴들고 그의 등 뒤에 가져다대자 그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내가 가져다 댄 대로 팔을 끼워 넣었다. 양팔을 넣고 뒤에서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자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곤 가자-며 내 머리를 한번 쓱 쓰다듬고 병실 문을 열었다. 나는 잠깐 굳어있던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밖으로 향했다. 그의 옆을 걸어 병원을 나서면서도 나는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옆에 걷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코트를 입고 돌아선 그는 웃고 있었다.
* * *
근처의 서점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는 아니었는지 차까지 끌고나왔다. 그리곤 시내 한복판에 커다란 서점으로 나를 안내했다. 건물지하전체가 서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규모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오니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책, 책, 책뿐이었다. 높지 않은 책장사이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큰 길목에는 베스트셀러 등등의 진열대들이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천정에는 책의 분류가 쓰여진 팻말들이 걸려있었고 계산대 앞은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서 있었다.
“와…”
내가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만 두리번거리자 그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커다란 상자들이 쌓인 수레가 지나갔다. 그것을 보고 나를 잡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한 번 더 나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조심해. 다치게 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다”
난 그의 손길을 따라 길목에서 벗어나 책이 진열된 곳으로 갔다.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로 이책 저 책 눈으로만 훑고 있는 사이 그는 내 뒤에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듯해서 나는 정신없이 책을 보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 빨리 들어가야 하죠?”
“……. 천천히 봐도 돼”
“그치만”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그의 일은 자신이 모두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그 배려가 고맙고도 조금은 속상했다. 내가 좀 더 나이가 많았다면, 내가 좀 더 건강했다면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를 잡아끌었다.
“현대문학이 어디일까요?”
“흠…”
머릿속에 사려고 했던 책들의 리스트를 꼽아보며 말하자 그가 잠시 둘러보더니 움직였다. 나는 그의 규칙적으로 앞뒤로 흔들리는 손을 탐욕스럽게 노려보았다. 내 보폭에 맞추어 걸어가던 그를 따라가면서도 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던 나는 그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추는 바람에 그의 팔에 이마를 부딪혔다.
“앗”
“괜찮아?”
그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한번 내 이마를 문지른 뒤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현대문학이라는 커다란 팻말이 달린 곳이 보였다. 그 앞에 놓인 선반에 ‘신간’이라고 또 다른 팻말이 꽂혀있는 곳에서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 나를 그는 천천히 뒤따랐다.
“앗!”
드디어 찾아낸 책을 집어 들며 나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도 마주 미소 지었다. 아,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그 미소를 내게 지어주었다.
* * *
정신없이 서점을 종행무진하며 책을 고르고, 그 외에도 서점을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그를 보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책을 계산했다. 그리고 책을 받아들려는 나를 무시하고 자신이 책 꾸러미를 들었다.
“주세요…”
“무거워”
“그치만”
듣지 않겠다는 듯 앞서 걷는 그를 쫓았다. 서점을 막 벗어나는데 나는 그제서야 허기지는 배를 느끼면서 깜짝 놀랐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자 이미 시간은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있었다.
“선생님, 병원에…”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네?”
“먹고 싶은 것. 점심 먹어야지”
멍청하게 되묻자 그가 다시 한 번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서있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밥 먹고 들어갈 거다.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
그가 내 걱정을 눈치 챘는지 책을 들지 않은 손으로 슬쩍 내게 꿀밤을 먹였다. 그것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지만 나는 엄청나게 놀라버렸다. 그가, 내게 꿀밤이라니. 그는 나를 때려놓고 신경 쓰였는지 꿀밤 때린 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손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그 손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잡아챘다. 아까부터 날 유혹했던 손이다.
“나, 나, 피자 먹고 싶어요!”
나는 그가 손에 대해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그는 내입에서 나온 의외의 메뉴에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의료적 지식’과 나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고심하는 듯 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긴장어린 얼굴로 보고 있던 나는, 오히려 먼저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몸을 돌려 걸어가는 바람에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조금은 울컥해버렸다. 그의 커다랗지만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엉켰다.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정말로 좋았다.
* * *
그와 함께 간곳은 서점근처의 피자집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것이라 메뉴를 고르는데 헤매고 있자 그가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덕분에 피자한판과 음료, 샐러드에 스파게티까지 주문 할 수 있었고 종업원이 가져다준 샐러드접시를 들고 샐러드 바를 오갔다.
“자주 드시나 봐요. 피자”
자연스럽고 자세했던 그의 설명에 내가 젤리하나를 입에 넣으며 묻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원우가 좋아하니까”
순간적으로 오물거리던 입이 멈췄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젤리를 씹었다. 이렇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잊곤 한다. 그가 나만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아들처럼 나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파고들어온다. 순식간에 달콤하게 입을 적시던 젤리가 까끌까끌하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어릴 때… 원우랑 만난 적이 있대요. 기억은 안 나지만”
“가끔 왔었다고 하더군”
“……? 저를 본적이 없으세요?”
“선배님과 자현씨가 온건 내가 집을 비울 때였으니까. 아내가 원우를 홀로 보기 힘들 때 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거였다”
“아…”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면 가끔 원우가 널 찾았었지. 형 어디 갔냐면서”
나는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원우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는 이야기에 조금 생경했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원우라고 생각되는 아이는 없는데.
“원우… 만나보고 싶나?”
눈을 굴리는 내가 원우를 기억해내려 한다는 걸 알았는지 그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 말에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녀석은 아주 어릴 때였는데도 널 기억하고 있더군”
“원우가요?”
“그래. 어쩌다 네 이야기가 나왔는데 단번에 ‘선호 형’이라고 하면서 반가워했지”
나는 원우의 기억력에 정말 놀라워하면서도 조금은 감동받았다.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상대는 나를 아주 어렸을 적임에도 기억해주고 있다니.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원우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그런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생님?”
“……. 나만 모르다니 조금은 억울하군”
“네?”
“아니다”
뭔가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인가 고민할 때 주문한 메뉴가 테이블위에 차려졌다. 오랜만에 맡는 피자냄새에 나는 기분 좋게 웃었고, 그가 피자조각을 내 접시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한 뒤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피자를 자르려고 하는데 갓 구워져 나온 피자는 좀처럼 잘리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의 앞에서 교양 있게 먹으려던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냉큼 손으로 집어 들었다. 피자모서리를 입에 넣고 당기니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늘어졌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쫀득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어요!”
“그래. 많이 먹어라”
바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 나와 달리 그는 스파게티를 먹기 좋게 뒤적거리고 샐러드 바에서 피자와 곁들일 피클을 조금 더 퍼오고, 조금 남은 음료수를 리필 하는 등 자잘한 것들을 세심하게 챙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피자조각을 잘라 먹었다. 한 조각을 벌써 해치우고 손가락을 쪽쪽 빨던 나는, 그의 우아한 모습에 새삼 내 손과 포크를 번갈아 보았고 갑자기 목이 타는 것같아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는데 나를 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 놀란 듯 했고 난 그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조금 일으켜 내손에서 휴지를 가져가 대신 입가를 닦아주었다.
“탄산음료는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탈난다. 천천히 먹어도 돼. 조금 늦어도 괜찮아”
내가 빨리 먹는 것이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자상하게 말했다. 톡톡 문질러오던 그의 손길이 떨어지고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새로 접시에 가져다놓은 조각을 이번에는 꼭 포크와 나이프로 먹겠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나이프를 놀렸다.
“큭”
토핑과 도우가 서로 떨어지고 자잘한 야채들이 접시에 전쟁터마냥 어지럽게 흩어질 무렵 고개 숙인 나의 머리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움찔 굳었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리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보였다. 웃음을 참는 듯 살짝 흔들리던 그가 슬쩍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곤 나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의 처음 보는 소리 내는 웃음과, 어색해하는 표정에 내가 난장을 쳐놓은 상황도 잊어버리고 멍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이내 원래대로 표정을 되돌리며 말했다.
“들고 먹어도 괜찮아”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내 접시를 보았고 초토화된 피자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가 직원을 불러 접시하나를 주문했고 곧 가져다준 새 접시에 새 피자를 올려 내 앞에 내려놓았다. 처참한 최후를 맞은 피자는 한쪽구석에 놓였다. 난 조심스럽게 피자를 들어 올리며 그를 흘낏 쳐다보았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셨다. 이런 상황에서도 맛있는 피자를 베어 물면서 나는 그가 먹기 좋게 해둔 스파게티에 포크를 갖다 대었다. 빙글빙글 돌려 돌돌 말아 입에 쏙 넣자 제법 맛이 있었다.
일련의 해프닝들을 뒤로하고 식사를 한창 하는데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울리다 우리테이블 옆에서 멈춰 섰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웬 여자 두 명이 서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무슨 용건이냐는 얼굴로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
“저기,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날씬한 몸매에 제법 예쁜 얼굴. 화장은 조금 짙었지만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높은 굽의 힐을 신고 무릎 위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그녀는 대학생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고, 그렇다고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당돌하게 그에게 번호를 요구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들고 있던 피자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기름이 손바닥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반대편의 그를 보았다. 그 순간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고, 언제 마주쳤냐는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동생분이 참 귀여워요. 함께 식사하러 오신건가요?”
그가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 그녀가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그 말은 내 뒤통수를 친 것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동생…이라고?
“안녕. 몇 살이야?”
굳어져있는 나를 향해 그녀가 예쁜 웃음을 지으면서 물어왔다. 호감형이었고 참으로 예쁜 얼굴이지만 나는 무서운 것을 보는 것처럼 몸을 뒤로 빼며 물러섰다. 그러자 내 반응에 마음이 상했는지 조금 얼굴을 찡그렸으나 곧 웃음 짓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 일련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나 봐요. 저, 여기…”
그녀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나는 그 핸드폰과 그 핸드폰을 들고 있는 그녀의 가늘고 예쁜 손가락을 노려보고 있었다. 싫다. 싫다. 정말. 그녀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부러뜨리고 싶다. 내 앞에서, 내 앞에서 그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그녀가 너무도 미웠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이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발갛게 질려있을게 자명했지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내 입술에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무섭게 그녀의 손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리자 슬쩍 상체를 들어 올려 손을 뻗은 그가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입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누가 그렇게 물고 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 내 입에 넣었던 손가락을 한번 입술을 쓸어내며 떨어진 그가 말했다.
“깨물지 마”
그는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고 완전히 일어섰다. 장신의 그가 서자 높은 구두까지 신은 그녀들이 작아보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녀들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동생 아닙니다”
당황한 여자가 나와 그를 번갈아 보더니 한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굳어 있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져있었다. 그녀들의 구두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는 멍하니 식어버린 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 옆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쯧… 피가 났군”
그의 목소리에 옆을 보자 그가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미간을 찌푸리고 내 아랫입술을 슬며시 건드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물을 적셔 내 입술에 갖다 대었다. 한참을 조심스럽게 누르면서 닦아내던 그가 갑자기 손수건을 구겨 쥐더니 일어섰다.
“더 먹을건가”
난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목을 잡고 일으켰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거친 손길에 내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자 그의 서늘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놓지 않은 채로 계산을 하고 매장을 빠져나와 걸었다. 밥을 먹느라 벗은 모자와 목도리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평소에는 내 보폭을 맞춰주었을 그답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뒤를 뛰듯이 따라갔다. 그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던지듯이 넣었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나는 살짝 가빠진 숨을 간신히 내쉬면서 조수석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앉은 그를 슬쩍 돌아보자 그는 시동을 걸어 히터를 강하게 튼 뒤 한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올렸다. 처음 보는 감정에 휩쓸린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제야 내 숨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몸까지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는 나를 보던 그가 팔을 뻗어 내 턱을 쥐었다. 살짝 당기자 입이 벌어지며 공기가 폐로 침입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잦아드는 내 숨을 지켜보던 그가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선생님…”
한 팔로 핸들을 쥔 채로 앞만 보고 있는 그를 지켜보다가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나는 깜짝 놀라버렸다. 언제나 고요함과 정적이 내려앉아있던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 정도로 감정이 움직이는 것은 부모님의 것밖에 본적이 없었고, 그것은 언제나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슬픔 같은 것은 존재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뜨거움에 시선만으로 데일 것 같은 무서운 불꽃이었다. 그의 눈에 놀라 굳은 내게 그가 핸들에 놓여있던 손을 들어 내 볼을 감싸 쥐었다. 뛰느라 얼어있던 뺨이 그의 손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난 가라앉지 않는 불꽃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무엇일까. 저것이.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저 뜨거움은 뭘까.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다가온 그의 불꽃이 그의 눈이 감기면서 사라짐과 동시에 입술에 닿아온 온기를 알아챘다. 상처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화끈거릴 정도로 열이 나는 입술을 느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눈에 타오르던 불은 바로 정염(情炎)이었다.
* * *
나는 일주일을 앓았다. 감기도, 그 외에 내가 가진 병으로 인한 것이 아닌 신열이었다. 일주일동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부모님이 매일같이 오갔고, 김교수님도 회진시간 이외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간호사 누나들도 여러 번 열을 재면서 챙겨주기 위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환상을 보았다. 그가 평소에는 온기를 전해주던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와 볼을 감싸 쥐며 식은땀을 닦아내주고, 나의 열에 뜨끈하게 익어버린 수건을 찬물에 시원하게 빨아 나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수건으로 나의 목과 앙상한 팔, 그리고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열에 정신이 없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나에게 그는 그의 멋진 목소리로 대꾸해주고, 웃었다. 그런 행복한 꿈을 꾸고 깨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 병실을 보고 슬퍼했다.
아직도 내게 닿아왔던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잊혀지지 않고 있는데 나의 감각은 그의 향기를 잊으려 하고 있었다. 고열은 내 머릿속에서 그의 얼굴마저 앗아갈 것처럼 나를 혹독하게 괴롭혀왔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흐릿한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시야만큼 부옇게 흐려지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눈 꼬리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귓가까지 흘러내려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걷는 것조차 힘이 들어서 외출도 자제하던 내가, 그의 걸음을 따라 뛰었음에도 멀쩡했던 심장이- 그를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불규칙하게 뛰었다. 성치 못한 심장이 덜컥덜컥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심장의 불안한 펌프질에 몸을 휘도는 피들이 제대로 온기를 전해주지 못하고 손끝과 발끝이 차갑게 식었다. 몸과 머리는 뜨겁게 녹아내릴듯한데 손은 내 것이 아닌 듯 감각을 잃어갔다.
난 떠올렸다. 옥상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팔을 벌리고 서있었던 나를 떠올렸다. 지쳐버린 내가 나의 바닥이 보이는 용기를 쥐어 짜내어 선택했던, 자살을 행하려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첫날은 바람 때문에, 두 번째는 강 때문에, 세 번째는 바람 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포기했던 순간들. 바닥을 싹싹 긁어모았던 용기로도 부족했던 나의 의지. 하지만 그 부질없는 ‘시도’만은 포기 할 수 없었던 얄팍한 용기 때문에 하루하루 그 자리에 올라섰던 나의 어리석음. 그리고 그의 강인한 손안에서 시작했던 새로운 삶. 아니, 새로 시작했다 생각했던 인생.
하지만 그것은 나의 꿈이었다. 나의 바램이었다. 그가 추락할 뻔한 나를 살려냈다 한들 나의 심장은 이미 고장나있었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으며 진정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심장뿐이었다. 인간이 살아있음의 증거가 되는 이 맥박을 나는 타인에게서 빼앗아 오기위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남의 것을 가져오기 전에 삐걱거리는 심장을 견디게 하기위해서 약물과 오기로 버텨왔다. 그런 내게 진정한 행운은 오지 않았고 나의 심장을 대신할 것은 단 한 번도 내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죽음을 앞둔 이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했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마지막 심지를 태우듯 화려하게 빛난다 했었다. 나는 내 죽음을 예감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화려하게 태워버릴 최후의 심지조차 남지 않았으리라. 혼미해지는 정신에서 심장을 때리는 엄청난 격통을 느끼면서 나는 그를 떠올렸다. 나를 달래던 그의 품과, 내 손을 얽어매던 그의 커다란 손과, 그를 스스로의 죄 아닌 죄악에 번민하고 괴롭게 만들었을 뜨거운 입맞춤을.
*중편을 들고 돌아온 율입니다. 아아, 여러분 정말 다시만나 반가워요ㅠㅠ
제 이름을 보고 읽어주신다는 댓글을보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맛에 소설쓰는구나 했습니다!
*소설을 쓰다보니 생각보다 길어진덕에 중편은 1,2편 두편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총 4편이 되겠네요.
나쁘지 않죠? 게다가 한편당 분량 완전 착하지않습니까 칭찬해주세요!!
*중편2는 주말에 올릴예정입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있군요. 다음편도 기다려주세요!
댓글달아주시고 추천해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저에게 댓글과 추천은 큰 힘이 됩니다^^
첫댓글 처음으로 읽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제가 선호랑 많이 동일시가 되는군요.
그러고 보니 '동일시'도 일종의 방어기제라던데ㅋㅋ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연리지님. 선호랑 동일시라.... 어떤점에서 그런걸까요? 벼랑끝에 몰린 선호의 속마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율님은 시작하면 빨리빨리 진행해 주시니 너무 좋아요.
이번편도 너무너무 슬퍼요...눈가에 눈물 매달고 읽었어요.
선호의 병이 나아서 행복했으면 좋겠네요...이거 결말을 제 입맛대로 종용하는걸까요 ㅎㅎㅎ
주말에는 손님도 오고 콘서트도 가고 바쁜데 심장병때문에 꼭 들어와야 겠네요.
주말에 추워진다는데 건강 조심하시고...주말에 뵐게요.
-안녕하세요 하와이갑부님. 아마 단편이라서 속도감이 더 있을거에요. 장편은.... 좀 끌어줘야 제맛이죠 ㅋㅋ
선호가 하루하루 괴로워하고있습니다.... 몸이 나을수있을지 어떨지 지켜봐주세요.
역시 크리스마스연휴라서 바쁘시군요! 저도 외출을 계획하고있답니다. 사람들한테 치일생각에 벌써 걱정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젬있게 보고가요...
-안녕하세요 소희맘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편도 재밌게봐주세요~
재미있어요~ 역시나 글솜씨에 감동받고 재미에 감동받고 갑니다. ㅎㅎㅎ 담편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안녕하세요 달달콩콩님. 와우 최고의 칭찬을 받은것 같아요! 비루한 문장력이 칭찬을 받다니 ㅜㅜ
달달콩콩님의 격려덕에 더 즐겁게 쓸수있을거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슬프네요...ㅠㅠ
-안녕하세요 하녀기님. 선호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편도 꼭 봐주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2.12 1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