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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4주째가 지나서도 우리를, 나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나는 너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올해 마지막 활동으로 삼을 작품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만 하고 몇 달간 공백 기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갑작스런 너의 사고에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어영부영 마지막 드라마 촬영을 끝냈다.
그에 비해 세임은 지극정성이었다. 사고 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를 찾아갔고,
얼마 전에 차린 카페도 제쳐둔 채 너를 간호하고 곁을 지켰다. 병실에서 쪽잠을 자기 일수였고 항상 피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준과 같이 있는 세임은 빛났다. 그런 세임이 하준의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세임을 나는 끔찍이도 믿고 있었다. 10년 지기 친구니 조금의 의심도, 오해도 없었다.
“항상 고마워.”
세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제 나도 시간 많으니까, 나한테 맡겨.”
“아냐. 난 괜찮아. 너도 모처럼의 쉬는 시간인데 푹 쉬어.”
그와 중에 내 걱정까지 해주는 착한 아이였다.
사고가 있은 후 한 달이 지나서부터 나는 너의 곁에 있어줄 수 있었다.
내가 없었던 동안 너는 꽤나 세임을 따르고 있었다. 많이 친해 진 듯 보였다. 다행이었다.
아직 말은 하지 못해도 우리에게 친근한 내색이 비쳐지고 있었다.
“하준아 배안고파? 과일이라도 줄까?”
빙긋 웃으며 묻는 세임의 말에 역시 따라 웃으며 예전에 나에게 보여주던 웃음을 지어보이는 너였다.
그 친근한 내색은, 우리가 아닌. 세임에게만 비추는 것이란 걸 나는 이제야 알았다.
하준은 내게 웃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이제 내가 하루 종일 같이 있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넌 세임을 더 찾았다.
내 이름은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신경도 쓰지 않는 다는 듯.
“하준아. 우린 친구야. 저기 앉아있는 민조도 우리 친구고.”
세임은 그렇게 설명했다. 친구라. 그래 친구였지. 하지만 나는 친구가 아니다.
세임의 설명이 잘못 됐다고 할 순 없었으나 옳다고도 할 수 없었다.
병실에서 지낸지 일주일이 흘렀다. 도통 나는 너와 가까워지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밥도 챙겨주고 옷도 챙겨주고 심심할까봐 말도 걸어주고 했지만, 너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너의 옆에서 말을 걸고 너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이렇게 너를 계속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문득, 언제쯤이면 너는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 부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차근차근 다가가려고 했는데.
자꾸만 솟구치는 지난 추억들이 가슴속을 헤집었다.
가끔씩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너였다.
기억이 나려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계속 물어봤다. 내가 누구야? 내가 너의 뭐야?
너무 앞 선 것일까. 하준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지워졌다는 느낌이 든다고 공책에 끄적였다.
물론 내가 아닌 세임에게 보여준 것이었지만.
언제 부터였을까. 세임과 너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걸 느낀 게.
괜한 불안감이라 여긴 뒤 떨쳐냈다.
*
나는 배우다. 대한민국 최고의 톱 배우라고 말할 수 는 없었다. 하지만 히트작품이 다섯 손가락정도는 되는 주연급 배우였다.
신인상은 물론이고 연기대상까지 탔으니 적어도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수 십번 오디션을 떨어졌었다. 정말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젠 기억 속에서도 희미하니까 말이다.
“스케줄잡어.”
이대로 집에서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아 일정보다 더 빠르게 복귀 작품을 골랐다.
“좀 더 쉬세요. 형 이러다가 몸이 남아나질 않는다니까요?”
“됐어. 젊었을 때 하나라도 더 벌어놔야지.”
“하 진짜.. 사장님 명령이라구요. 팬들도 윤민조 그만 좀 돌리라면서 좀 쉬게 놔두라고 성화라니까요?”
“내가 괜찮다는데 다들 뭔 상관이야?”
“상관있어요, 있어! 앞으로 두 달간 스케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
사고 후, 2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계속 병실에만 있으려니 그동안의 세임의 노고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도 항상 웃으며 하준을 대하는 세임이었다. 나는 조금 지쳐있었다.
데뷔 이후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나로서는 처음 있는 휴식 기간이었고, 그만큼 피로가 굉장히 많이 쌓여있었다.
“하준아. 미안. 하루만 집에 갔다 올게.”
집에 정리할 것도 많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와야 하고 새 세면도구 등을 챙기려 오늘 하룻밤은 집에서 자려고 했다.
“오늘밤은 좀 부탁해.”
“응, 걱정 말고 다녀와. 하준이 어머니도 집에다 모셔드리구.”
“알았어.”
어머니는 내 차에 타시지는 않고 연거푸 사양하시더니 결국 택시를 잡고 가버리셨다.
우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면서, 민폐는 끼치고 싶지 않으시다던 어머니는
하준에게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니 하며 연신 감사해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떳떳할 수 없었다. 당신의 아들인 하준은, 남자인 나와 연인사이다.
라고 밝힐 수 도, 들켜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다소 가슴 한켠이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하준의 건강과 기억이 최대한으로 빨리 회복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저거, 윤민조아냐?”
“뭐?”
기자들이 슬금슬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차에 올라타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하준은 피아니스트였다. 그것도 세계에서 천재라 칭송받는. 나 따윈 감히 손닿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하준의 사고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화제 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 앞에서 죽치고 앉아 하준의 소식이라도 하나 얻어갈 거 없을까 하는 기자들의 떼가 무리를 짓고 있었다.
거기에 나까지 걸리면, 더 복잡해진다. 괜히 메스컴에서 하준과 엮이고 싶진 않았다.
그냥 잘 아는 친구사이라고 던져놓긴 했지만, 더 이상의 노출은 원하지 않았다.
하준이 이리도 주목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준의 첫 데뷔는 7살 때.
이미 어른도 치기 힘든 고 난이도의 연주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신동을 뛰어넘어선 천재였다.
그 당시 하준은 가히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대 후로 하준은 자취를 감추었다.
‘천재가 사라졌다.’
‘천재의 행방불명, 어디로 간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기사들과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하준은 공적인 자리나 큰 상을 휩쓰는 것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피아노가 좋았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급작스럽게 자신에게 몰리는 사람들의 관심은 어린나이에 부담스럽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로도 하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사는 게 하준에겐 일상이자 행복이었다.
내가 하준을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음악실에서였다.
그때 까지 만해도 나는 하준이 그 천재였을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
‘민조야.’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너의 꿈을 꾸었다. 예전처럼 따스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눈동자의 나를 맞추고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을 뜨자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시간은 멈춰있는 나는 데려갈 생각은 않은 채 무의미하게 잘도 흘러갔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를 나왔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리모컨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연예뉴스의 재방송을 틀었다.
기자회견의 한 장면인 가운데에 너가 있었다.
정확히 사고 당일 4시간 전의 너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뭡니까?”
“그동안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으셨나요?”
“그 몇 십년간 무얼 하고 지내셨던 겁니까.”
하준이 십몇년만에 첫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기자회견장은 달아올라있었다.
텔레비전 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들과 폭포수 쏟아지듯 여기저기서 터지는 질문들이 그 이유였다.
하준은 다소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나하나 대답을 해 나가지만 빨리 끝내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천천히 질문해주세요..”
하준의 목소리였다. 무려 3개월 만에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것도 텔레비전의 사운드를 통해서.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이렇게나 기쁠수가. 눈물이 났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너의 모습을 되새길 추억들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공식성상에 나오게 된 이유는요?”
하준은 처음으로 그 질문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거든요.”
가슴이 찢어질 듯 한 아픔에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거든요.”
지이이잉-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거든요.”
지이이잉-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거든요.”
지이이잉-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이거든요.”
몇 번이고 되감고 재생을 눌렀다. 그렇게 되풀이하기를 몇 십번 째.
하준이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껍데기라도 좋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너라도, 한하준은 한하준이다.
너는 나와 약속을 자주 했었다. 내가 오디션에 계속 떨어졌을 때는 오디션에 붙으면 포옹을 하게 해준다고 했었지 아마.
그런 사소한 약속들은 우리에겐 애정표현과도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약속이 되어버린 그날의 약속은.
“민조 네가 연기대상을 타면 나도 모두가 보는데서 피아노를 칠거야. 너만을 위해 칠거야.”
첫댓글 세임이가.....다름마음을 품은걸까요 원래 하준이를 좋아했던걸까.... 민조가 정말괴롭겠어요 약속을 지키려다가 사고가났으니 ㅠㅠㅠㅠㅠㅠ
점차 얘기가 드러납니다 ㅜ.ㅜ 봐주셔서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