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잠화 앞에서
한여름에 피는 화초로 비녀를 닮은 옥잠화가 있다. “여름날 뙤약볕에 주름진 넓은 잎맥 / 꽃대는 웬일인지 옆으로 뻗더니만 / 길쭉한 망울이 나와 꽃이 될까 싶더라 // 세모시 홑적삼에 거울 앞 앉으셔서 / 참빗을 쓰다듬던 할머니 쪽진 머리 / 옥비녀 그 모습이라 옥잠화로 불린다” 어제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뜰에 꽃을 가꾸는 친구 꽃밭에서 본 옥잠화를 소재로 남긴 자작 시조다.
앞 시조에서도 그렸듯이 옥잠화는 꽃이 피기 전 꽃망울이 옥비녀를 닮았다. 수년 전 창원수목원에서 이제 막 피려는 옥잠화 꽃봉오리를 보고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꽃의 이름과 꽃의 모양이 절묘하게 일치할 수 있음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꽃으로 피기 이전 꽃봉오리는 세워지지도 않아 옛적 부녀자가 쪽을 묶은 머리에 옆으로 찌른 백옥과 같은 비녀를 보는 듯해서다.
나는 지난달 장마 기간에 창원수목원의 옥잠화가 궁금해 비가 그친 틈새 현장을 찾아가 봤다. 당국에서는 옥잠화가 자라던 주변을 음지식물원으로 확대해 다른 화초와 같이 가꾸었다. 내가 보려는 옥잠화는 아직 때가 일러 꽃을 피우지 않아 꽃망울을 맺으려고 준비하는 즈음이었다. 대신 그 곁에는 비비추가 엷은 보라색 꽃을 피워 반겨주었다. 비비추는 야생화로 산에서도 흔하게 봤다.
옥잠화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우리나라 산야에서 절로 자라는 야생화는 아니다. 비비추는 도심 공원이나 주택 정원에서 옥잠화처럼 더러 가꾸어지기도 하나 본디 산림에서 자라던 야생화였다. 내가 봄날 근교 산자락에서 뜯어오는 산나물에도 비비추가 있다. 그늘진 숲 바닥에 군락을 이루고 자라 마음만 먹으면 많은 양을 채집해 올 수 있으니 희소성 있는 산나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뜰에는 꽃을 가꾸는 이가 세 사람이다. 그 가운에 초등학교 친구 꽃대감 꽃밭의 꽃이 아주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 곁에는 팔순의 안 씨 할머니도 꽃과 더불어 살고 통장을 맡은 한 아주머니도 넓은 구역에 꽃을 가꾸고 있다. 꽃대감 친구는 자신이 가꾸는 꽃을 영상에 담아 유튜브로 소개해 시청자들의 호응이 좋아 모종과 꽃씨 분양 신청이 쇄도한다고 했다.
우리 아파트단지 뜰에는 옥잠화와 같은 계열인 백합과의 다수 꽃이 있었다. 잎줄기가 높이 자란 참나리는 개화가 시작되어 꽃대감이 영상으로 제작해 시청자에게 선을 보였다. 그 이전 밀양댁 안 씨 할머니는 꽃집에서 모종을 사서 심어 가꾼 다양한 색상 백합도 꽃을 피워 저물어 간다. 거기다 꽃대감이 화분에 가꾼 무늬 비비추도 꽃대를 여러 개 밀어 올려 엷은 보라색 꽃을 피웠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여가에 취미 삼아 꽃을 가꾸는 봉사와 헌신이다. 가꾸는 꽃밭은 아파트단지 뜰에 나란히 펼쳐져 있는데 개성과 취향에 따라 나름의 차별화는 있다. 이분들이 꽃을 가꾸는 정성과 열정으로 입주민들은 집으로 드나드는 길목에서 철 따라 저절로 꽃을 완상하는 눈 호강을 한다. 세 사람 수고 덕에 주민들은 아파트 생활에서도 이웃 간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산다.
어제 내가 본 옥잠화는 아파트 이웃 동 통장 아주머니가 가꾼 꽃밭에서 피운 꽃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 꽃을 보지 않았다면 언제 틈을 내서 창원대로 삼동 교차로 근처 창원수목원으로 나가려고 했다. 지난번 장맛비 틈새 피지 않았던 옥잠화 개화 상황이 궁금해 두 발로 찾아가 확인해 볼 참이었다. 창원수목원 음지식물원에 심겨 자라던 옥잠화는 지금쯤 하얀 꽃을 피워 있지 싶다.
요즘은 일상에서 부녀자들이 쪽을 묶어 비녀를 꽂은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남자로 치면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사람을 보는 만큼이나 귀한 쪽진 비녀 차림이지 싶다. 그러니 비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실물을 아는 이들도 많지 않을 테다. 여든두 살 생애를 살다 가신 어머님은 평생 쪽을 묶고 비녀를 꽂으셨다. 옥잠화 앞에 서니 옥비녀 금비녀도 아닌 당신의 은비녀가 새삼 그립다. 23.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