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밭으로 어슬렁 어슬렁 / 마경덕
봄볕이 매워지면
파밭의 눈이 붉어지고 묵은 대파들 탈피를 시작한다
명아주 방동사니 강아지풀 여뀌 망초
덩달아, 입 터진 풀씨들
지 에미 닮아 파밭이 어지럽다
곁방살이에 이골난 잡초들
바람에 와르르 흩어지며 구석구석 유언을 남기더니,
한해살이 단명할 목숨들로 밭고랑이 들썩거린다
부디 살아서 이름을 내라는 어미의 마지막 소원대로
무명無名으로 십년, 이십 년* 기다린 자식들
어쩌다 봄볕 한 줌 만나
출세出世했다
해마다
뚝새풀 질경이 쇠비름도 씨주머니 탈탈 털어 짧은 생애를 기록했으니
저 파밭 한 뙈기
받아 적은 유언만 수천만 장
노인이 사라진 묵정밭으로 어슬렁어슬렁 봄이 온다
* 보통 1㎡의 밭에 7만5천개의 풀씨가 잠자고 있는데
물과 온도가 적합해도 햇빛을 못 보면 싹을 틔우지 않고
땅속에서 10년~20년을 기다린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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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 내 쓸쓸함에 동의한다. 이유도 맥락도 없는 까닭모를
서글픔일지라도
이 모호한 감정은 대부분 어스름이 내려앉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발생한다. 나는 충실하게 감정에 몰입한다.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아픈 그런 데자뷔 같은 기억들 사이에
목을 잃고 줄지어 서 있는 해바라기와 마른 수수밭을 헤집고
지나가는 밤바람소리가 들어 있다. 저녁밥을 짓는 아궁이와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의 굴뚝, 삭정이가 타는 냄새,
한가하고 가난한 풍경은 모두 슬픔의 협력자들이다.
이 누추한 슬픔을 사랑한다. 더는 슬퍼할 것이 없다면 나는
얼마나 불행할까. 감추고 싶은 것들을 이제 들켜도 좋을 나이,
무언가 앓을 것이 더 있다면, 뼈가 저리도록 그리운 것이
있다면 한동안 행복할 것이므로.
슬픔의 주성분은 숲의 뼈가 타는 냄새, 냉갈 냄새이다.
까맣게 그을음이 앉은 부엌과 수없이 다녀간 가난한 저녁들,
갈 수 없는 곳,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일찍이 슬픔과
친해야 했다. 하여 간절함이 자랐다. 그토록 갖고 싶던
한 켤레의 살색 스타킹, 동아전과, 동아 수련장, 내게 간절함은
체념과 같은 말이었다. 체념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말임을
오랫동안 비밀로 묻어두었다. 그 결핍을 사랑한다.
그 힘으로 억울한 일을 만나도 버틸 수 있었다.
내 몫이 아니어서 슬펐지만 그 슬픔이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결핍이 가르쳐준 것은 기다림이다. 긴 기다림 끝에 만나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설령, 기쁨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다림이 있기에 또 일어설 수 있으므로. 귀뚜리울음 같은
이 서글픔에 기대어 시를 쓴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막무가내인,
내 몸을 관통하는 쓸쓸함에 동의하며.
[출처] 마경덕 시인 14|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