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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연이,서연이네 집 원문보기 글쓴이: 겨울바다
덴노 친정 체제로의 전환과 그에 따른 개혁을 말합니다.
종교 정책 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이
아시아 최초의 서구화된 국민 국가 체제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붙은 이름. 일본어로는 쿠로후네)을 이끌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게 됩니다.
됩니다.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게 됩니다.
되곤 했는데 막부가 권력이 강할 때라면 조정의 윤허를 무시하고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기는 막부의 권력이 상당히 약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이이 나오스케의 독단적인 처리는
큰 반발을 불러오게 됩니다.
근왕 사상이 은연중에 퍼져나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두가지로 인하여 그간의 존왕양이파들은 본격적으로 반막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도자 요시다 쇼인 등 100명이 넘는 사람을 처형해버렸고 이는 반막부 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존왕양이파를 중심으로 하는 도막파와 막부 간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구성되는데 이 중에 일부가 신선조의 모태가 되기도 합니다.
존왕양이파의 대표적인 번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으로 초반에는 조슈 세력이 덴노의 지지에 힘을
얻어 막부 세력과 대결을 펼쳤으나 조슈의 독주를 경계한 사쓰마가 막부 세력에 붙으면서
1864년에 금문의 변 사건이 발생하여 조슈 세력은 교토에서 축출당하게 되었고 1차 조슈
정벌로까지 이어집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동맹을 맺어 삿쵸(사쓰마-조슈)동맹이 성립되면서 상황은 역전되기에
이릅니다.
포격 사건(조슈 vs 4개국 연합함대)을 겪으면서 서양 세력의 무서움을 알게 되자 이전까지의
양이를 버리고 개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때문에 원래 그들이 앞세웠던 존왕과 양이 중에 존왕만을 앞세워 막부를 압박하게 된 것입니다.
막부의 일본 통치권을 천황에게 되돌려 준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요시노부는 신정부가 구성되더라도 자신이 그 중심에 서서 실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쓰마와 조슈가 중심이 된 도막파는 막부 세력을 아예 몰아낼 작정을 했고 조정의 근왕파와
사쓰마, 조슈가 중심이 되서 신정부가 구성된 후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 세력은 역적으로
규정되어 토벌 대상이 됩니다.
이로 인해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보신 전쟁(1868년~1869년)
이라고 하며 신무기로 무장한 메이지 신정부군에 의해 막부군은 패퇴를 거듭했고 결국 쇼군
요시노부는 에도를 넘겨주는 대신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막부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고
하며 이후 계급의 철폐, 서양식 제도의 도입 등 부국 강병책이 실현되게 됩니다.
사쓰마 번(薩摩藩)과 조슈 번(長州藩)은 에도 막부 시대의 번 중에 하나입니다.
혼슈 서쪽 끝에 위치한 조슈 번, 규슈 남쪽에 위치한 사쓰마 번, 시코쿠 남부에 위치한 도사 번
여기서 말하는 번이란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다이묘들에게 주어진 영지를 말하며 보통
1만석 이상의 다이묘가 지배하는 지역을 말하며 에도 시대 말기에는 300여개에 달하는
번이 있었습니다.
번의 주인인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계로 이루어지는 신판 다이묘, 원래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가신들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후다이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도자마 다이묘로 구성되는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도자마 다이묘에
속하는 대표적인 번이었습니다.
도자마 다이묘에 속한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은 다른 번에 비해 차별도 받았고 에도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에도 막부 말기에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이 대표적인 도막파(막부 타도파)로 자리잡게
된 이유입니다.
신센구미(신선조)는 에도 막부 말기에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낭인들을 조직해 만든
단체입니다.
초대 국장은 세리자와 카모라는 인물이었으나 당시 신센구미를 후원하고 있던 아이즈번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자주했던데다가 신센구미 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콘도 이사미 일파와도
대립하고 있었는데 결국 콘도 이사미 일파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후 콘도 이사미가 신센구미 국장이 되는데 이때부터 아이즈 번으로부터 신센구미라는 이름을
받아 사용하게 됩니다.
신센구미는겐지 원년(1864)에 이케다야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는 신센구미가 이케다야라는
곳에 모여있던 근왕파 낭사들을 습격한 사건으로 이후 교토에서는 신센구미와 근왕파 낭사들
간에 칼부림이 더욱 격화됩니다.
그러나 막부 세력이 몰락하면서 신센구미에도 위기가 닥치게 되었고 사쓰마, 조슈가 주축이 된
신정부군과 막부군 간에 전쟁(보신 전쟁)이 벌어지자 이에 막부측으로 참가했으며 결국 국장
콘도 이사미가 참수되고 주요 멤버가 탈퇴, 사망하면서 신센구미는 완전히 붕괴됩니다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막부에 적의를 품고 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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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과 막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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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깨끗이 세탁해야 한다." 막부 타도의 뜻과 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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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의 종말과 새로운 일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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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길을 연'국민적 영웅
신센구미(신선조)
신센구미(일본어: 新選組 しんせんぐみ, 신선조)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인 1863년에 조직된 무사 조직이다. 원래는 교토로 가는 쇼군의 신변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교토의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싸웠다. 이후 막부 체제가 붕괴하자 막부군의 일원으로 정부군에 저항하는 무진 전쟁에 참전하였다 . 원래 에도에서 조직될 당시에는 '浪士組'(로시구미)라고 칭하였으나 이후 신센구미로 바꾸었다. 한자로는 '新撰組'라고 표기된 자료도 있으나 국장인 곤도 이사미도 '選'과 '撰'을 모두 썼다. 엄한 규율 유지를 위해 도입한 국중법도로 숙청을 하거나, '誠' 한 글자로 만든 깃발, 소매 부분에 톱니모양의 무늬를 넣은 독특한 하오리(羽織 - 일본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복장으로 유명하다. 그들이 유명하게 된 계기로는 이케다야 사건 (池田屋事件)을 들 수 있다.
==================================================================================== 메이지유신
일본에서 19세기의 후반에 발생한 대규모의 정치적ㆍ사회적 변혁이다. 서양 국제체계의 수용, 다원적 정치체제의 일원화, 신분제의 대폭적인 간략화, 중국에서 서양으로의 문명의 전환 등을 핵심으로 한다. ‘유신’이라는 호칭은 막부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사용된 ‘일신(一新)’을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고상한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주수구방(周雖舊邦), 기명유신(其命維新)’과 갈이 원전에서의 ‘유신’은 ‘혁명’, 즉 왕조교체와 동의였지만 근대 일본에서는 고전에 의거한 의미로 사용된 예가 거의 없다. 유신의 기간의 시점(始点) 은 천보(天保) 말년의 개혁(1840년 전후)이나 페리의 내항과 개국(1850년대), 종점(終点)은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이나 서남(西南) 내란(1877), 입헌정(入憲政)의 실현(일본제국헌법의 제정과 제국(帝國)의 회의 개회, 1889ㆍ1890) 등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변혁은 근대 서양이 만들어 낸 주권국가 질서로의 강제 편입을 계기로 시작 되어 일련의 국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을 거쳐 다음 시대로 이행하였다는 견해는 공통하고 있다. 유신 초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정치 상징은 ‘양이(壤夷)’였다. 후기 수호학에서 유래하는 이 상징은 동시대의 한반도에서 실행되었던 ‘서쪽 오랑캐를 국토에서 몰아낸다’는 의미이다. 정신으로서는 ‘쇄국(鎖國)’으로의 자폐(自閉)와 반대의 극에 있으며 따라서 ‘개국’ 정책으로 쉽게 전화하여 혁명을 계속하기 위한 정한(征韓) 등이라는 변종도 발생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공의(公議)’가 널리 사용되었다. 당초 친번(親藩) 외양(外樣)의 대대명(大大名)의 막부정치 참가 구상 중에 등장하였지만, 안정(安政) 5년(1859년) 정변으로 그들이 탄압을 받아, 조정이 조약 조인에 항의하기 위해 ‘천하지공론(天下之公論)’을 청취하도록 요구하여 전제(專制)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도 획득하였다. 정권 구상은 막부말에는 천왕 하에 주요 대명(大名)이 연합정권을 만든다는 형태로 수렴하였지만 왕정복이고 쿠데타에 의한 도쿠가와(德川)의 배제를 거쳐 전국에서의 관료 등용, 관사 내부에서의 공선(公選)으로 전개하고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접합하여 의회제의 구상에 이르렀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가 ‘여론공의(輿論公議)’를 정통성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막부말에는 또한 ‘복고(復古)’라는 상징도 등장하였다. 이것은 ‘왕정복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62년에 도쿠가와(德川) 장군은 서양식의 군제개혁을 ‘관영(‘寬永) 이전’으로의 복고로서 정통화하였다. 왕정복이고 시에 내걸었던 것은 ‘신무창업(神武創業) ’이었지만 의거해야 할 제도가 없는 신화(神話)세계의 참조는 천왕의 친정(親政)이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한 서양의 제도를 임의대로 섭취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막부말 10년간 원만하였던 정치체제의 변화는 왕정복고와 무진(戊辰)내란 후에 가속화되어 폐번치현, 미유럽에 대한 대규모 사절과 유학생의 파견, 에조치(蝦夷地 : 훗카이도의 옛 이름)ㆍ류큐(琉球 :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내국화(內國化)와 근린 제국과의 조약체결 등이 잇따라 단행되었다. 그리고 통치 신분이었던 무가의 녹봉도 해소되었다. 왕족(王族)ㆍ화족(華族)이 창설되는 한편, 기타의 신분이 피차별 신분이나 맹인을 포함하여 일률 평등의 신분으로 재편성된 사실은 개혁이 막부말의 정치과정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사회의 심부까지 미쳤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변혁은 몇 개의 무사반란을 일으켰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서유럽에 대한 굴욕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침략적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하고, 1910년에는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 합병하여 식민지배한 것이다. 계속해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 미국의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1945년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 세례를 자초한 자업자득 (自業自得)의 결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