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그 차는 거기 서 있었다. 우리가 언덕 정상에 도착할 때 이미 그 차는 언덕 한쪽 그늘진 곳에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동은 꺼져 있었으며 운전석과 내부 사이에는 차단 장치가 되어 있어서 안쪽을 살펴 볼 수도 없었다. 당신 같으면 궁금하지 않겠는가?
여기는 섬이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를 연결하는 세계에서 3번째 긴 13.5km의 다리가 놓여져 있지만, 이곳은 섬인 것이다.(현대건설에서 만든 그 다리는, 페낭 섬이 싱가포르처럼 말레이 연합에서 탈퇴해서 독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섬을 말레이 반도와 연결시키기 위해 당시 수상의 특별지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캠핑카 한 대가, 이 나라 번호판도 아닌 이상한 번호판을 달고 산꼭대기에 멈춰 서 있다면,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여름 휴가차 페낭에 오게 된 것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곳에 오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매일 30분씩 진행하는 생방송이 문제였다. 담당 피디에게 부탁해서 결국 나에게 주어진 휴가기간은 주말끼고 모두 5일. 미주나 유럽 혹은 남미나 호주를 가기에는 부족한 기간이다. 동남아시아 웬만한 나라는 여러 번 가보았다. 가고 싶은 곳은 인도양에 있는 섬 몰디브였지만 클럽 매드 담당자는 [풀]이라고 소리쳤다. 예약을 너무 늦게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깃발 좆아다니는 단체관광은 질색이었으므로 대한항공 에어텔을 찾아보기로 했다. 비행기 좌석과 호텔을 패키지로 연결하는 상품인 에어텔은 비용도 괜찮고 무엇보다 독립적으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
대한항공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인터넷으로 페낭을 신청했더니 다음 날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가보지 않은 자카르타와 쿠알라룸프르 두 곳을 예약해 놓았다. 여름 휴가로 이런 도시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혹시 페낭 예약자 중에서 캔슬한 사람이 있거든 연락을 달라고 했는데, 담당자는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이미 예약금이 모두 입금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두 도시 중에서 자카르타로 마음을 굳히고 인터넷 검색으로 관광 정보를 찾아보고 있는 데 일주일 뒤 에어텔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다. 페낭에 자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자카르타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페낭 힐에 서 있는 것이다.
캠핑카 뒤쪽 문이 열리고 먼저 뛰어 나온 것은 골든 레트리버였다. 황금색 털이 아주 탐스럽게 달려 있는 그 개는 주인보다 먼저 밖으로 뛰쳐나와 그러나 멀리 가지는 않고 산 아래쪽 경치를 훑어보았다. 캠핑카의 주인은 담배를 물고 그 뒤에 서서히 걸어나왔다. 잠에서 이제 막 깬 듯 한쪽 눈을 부비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이]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인사를 했지만, 그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은 마하티르였다. 마하티르는 아주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다. 말레이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 똑같이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필리핀 쪽보다 발음도 훨씬 좋다. 페낭 힐에 도착하기 전까지 [상그리라 골든 샌즈 리조트] 투어 담당 운전기사인 마하티르와 나는 차 안에서 김정일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계속 질문을 했다. 몇 년 전 북한에서 식량문제로 많은 어린아이들을 비롯해서 주민들이 죽어간 것을 아느냐, 왜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에게 대항하지 않는가? 김정일은 왜 핵을 개발하는가? 내 생각에는 한국이 북한에게 지원한 식량으로 김정일은 북한 군대를 먹이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외국인 중에서 한국 시사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이 신문 기자라든가 아니면 외교관 혹은 국제 정세에 민감한 외국환 업무 관계자라면 그래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태국 관광청의 고급 직원인 내 친구 사두디는 한류 매니아여서 비와 권상우를 좋아하고 한국 신인 그룹들을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정치 얘기를 한 기억은 없다. 그녀가 아마도 한국 정세에 대해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만 마하티르처럼 상세히 알 것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하티르는 웬만한 한국인 보다도 더 남북한 정세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
어제 밤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호텔 프론트에 페낭 섬 일주 관광을 신청했다. 호텔에 비치된 투어 목록에는 나비농장이나 열대과일농장 투어도 있고, 섬의 모스크를 순례하는 투어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전날 페낭 섬의 중심 도시이며 말레이에서는 쿠알라룸프르 다음으로 큰 조지타운에 가 보았었기 때문에 이 섬에 특별히 관광할 자원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섬 일주 투어면 충분할 것 같았고 가보고 싶었던 바틱 공장이나 다이아몬드 공장도 코스에 들어 있었다. 출발시간은 아침 10시였다. 그런데 아침에 로비에 내려와서 차를 기다리는데 소형 승용차가 한 대 다가오는 것이었다. 다른 신청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하티르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말레이와 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살던 그의 할아버지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페낭 섬으로 이주했고 그는 페낭에서 태어났다. 말레이 사람들의 주식은 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쌀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것이 우리 대화의 시작이었다. 호텔 조식 뷔페에는 특별한 말레이 요리가 없었다. 대개 어느 나라 호텔이든지 특급 호텔의 뷔페는 비슷하지만 그래도 그 나라 특산물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별 다섯 개의 [상그리라 골든 샌즈 리도트] 조식 뷔페에는 인도 음식이나 일본 모밀 심지어 김치까지 준비되어 있었지만 말레이만의 특별한 음식은 찾아볼 수가 없어서 나는 그런 질문을 했다.
그러나 페낭 섬에서 논을 본 기억은 없다. 그러자 마하티르는 페낭에는 논이 거의 없지만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은 논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서울에서 왔다는 것을 알자 한국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휴가지에서 투어를 신청했는데 운전기사가 북한 김정일의 과격함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핵 정책, 6자 회담에 대해서 계속 질문한다면 당신은 머리가 아프지 않겠는가? 그것도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물건 값을 깍아달라거나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관광 영어가 아니라 일상 시사 상식에 대해 영어로 능숙하게 대답하는 것은 너무나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차가 바틱 공장을 들려서 다음 코스인 페낭 힐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빨리 밖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그 차가 서 있는 것이다.
*벨기에 국경을 넘어 말레이까지 달려온 1979년산 포드 캠핑카
[1979년산이래요]
마하티르가 나에게 다가와 처음 한 말이다. 그는 아쿠 로우히메스 감독의 핀란드 영화 [레스트리스]의 주인공 미코 노우샤이넨을 닮은 그 외국인과 10여분 넘게 얘기를 계속했었다. 나는 그 동안 페낭 힐 밑으로 펼쳐진 페낭 섬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실내도 아니었고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그들 옆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한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다. 햇볕은 강렬했고 대부분이 산악 지대인 페낭 섬은 푸른 숲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가끔 붉은 지붕을 한 건물들이 보였다.
마하티르는 캠핑카를 가리켰다. 포드였다. 작은 바퀴는 얼마나 낡았는지 힐에는 검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모습의 캠핑카였다. 12인승 봉고 차 크기의 프레임에 운전석 위에는 지붕이 얹혀져 있고 그 속에는 침실이 있다. 운전석 뒤로는 원룸처럼 되어 있어서 주방과 테이블이 있다. 캠핑카를 볼 때마다 차의 크기에 비해 바퀴는 너무 작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안쓰러울 정도였으니까.
캠핑카에서 생활하는 꿈을 잠깐 가져본 적도 있다. 집을 구입하지 않고 2억원 정도의 캠핑카를 사서 밤이 되면 교외의 한적한 곳이나 한강 고수부지에 세워 놓고 잠을 잔다. 낮에는 캠핑카를 몰고 일하는 곳에 가고 주말에는 캠핑카를 몰고 강릉이나 속초의 바닷가 혹은 안면도나 문경새재의 조령관문 혹은 구례 하동의 지리산에 간다. 그래서 캠핑카 전시를 할 때 깊은 관심을 갖고 방문한 적이 있다. 캠핑카마다 비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내부 구조는 비슷했다. 봉고나 타이탄 트럭을 개조한 8천만원에서 1억 2천만원 대의 캠핑카도 있고, 처음 제조해서 출시될 때부터 캠핑카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훨씬 시설이 좋다. 대부분 침실은 운전석 위에 만들어진 좁은 공간에 마련되어 있다. 운전석 내부 뒷편에 침실로 올라가는 작은 사다리가 있고 잠을 자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올라가 몸을 눕혀야 한다. 앉으면 머리가 천정에 닿는 좁은 공간이다.
[저 차를 타고 벨기에에서 왔다는군요]
나는 벨기에 국경을 넘어 유럽대륙을 지나 이란과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말레이 반도, 그리고 현대건설에서 만든 13.5km의 다리를 지나 이곳 페낭 섬 언덕에 다다른 캠핑카를 바라보았다. 그 흰 색 차는 아직도 헐떡헐떡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라면, 히히히힝, 콧김을 팍팍 내뿜으며 힘든 여행을 마친 뒤 크게 울기라도 할 텐데 이 쇠붙이 차는 가만히 서 있었다. 더구나 아직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니다.
26년. 차의 수명으로는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다. 나는 하얀 수염의 포드 캠핑카를 다시 바라보았다. 무릎 꿇고 엎드려서 큰 절 한 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연세에 벨기에에서 여기까지 여행을 하시다니, 너무 힘든 여행이었을 것이다. 어디 관절이라도 상한 곳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아파트 뒤편 산 중턱에 주민들이 만든 배드민턴 코트에서, 아침 운동 삼아 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치시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친 어머님 생각이 났다. 어머님께 드리려고 꽃사슴 연두에게서 구입한 대웅제약 글루코사민 건골 두 박스를 이 할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어졌다.
[아니야, 괜찮아. 난 여행을 좋아하거든. 젊었을 때는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
할아버지 캠핑카는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건골 두 박스는 오히려 내가 먹어야 될 것 같은 기운 있는 목소리였다.
[흐으으흥흥. 히히힛, 푸우 힝]
그는 페낭 힐 아래를 내려다보며 크게 기침을 한 번 한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괜찮아. 무엇보다 공기가 신선하잖아? 유럽은 말이야, 이렇게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가 없어. 그래서 나도 이번 여행에 무척 기대를 많이 걸고 있다고]
내가 차를 가장 오래 탄 것은 불과 5년이었다. 대부분 3년 주기로 팔아치우고 새 차를 샀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탄 미쓰비시 이클립스가 가장 오래 탄 차였는데 그것도 처음 산 가격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낮게 쳐주는 중고차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래 탄 것이었다. 차라리 그 값에 차를 파는 것보다는 그냥 타고 다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간 속도감이 뛰어나서 나는 그 차를 사랑했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7.8초. 보통 10초 이내 들어야 스포츠카라고 부른다. 국내 최초의 스포츠카인 현대 티뷰론이 9.8초였다. 이 차이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주 커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멀어져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속도를 내며 달릴수록 이클립스는 지상에 착 달라붙어 땅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준다. 브레이크의 기능이 뛰어나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도 속도탐지 카메라를 발견하고 브레이크에 발을 얹으면 속도계는 금방 100으로 줄어든다.
이상하게 스포츠카는 중고차 값이 너무 싸다. 차를 빨리 몰았을 것이고 따라서 사고가 많이 났었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20년 무사고 운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일 중 하나가 운전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30분의 기록도 이클립스와 함께 세운 것이다. 심야 고속도로를 운전하는데 가장 힘든 장애물인 트럭들 사이를 헤치며 나는 새벽 2시에 부산을 출발해서 4시 30분에 서울에 도착했다. 부산항에서 하역한 짐들을 싣고 트럭들은 밤새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아침에 주인에게 인도한다. 트럭들은 느리게 움직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도로 보수공사 기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더라면 내 기록은 적어도 30분 정도는 단축되었을 것이다. 이클립스는 평균 시속 230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가끔 속도 탐지기 카메라가 번쩍 빛을 쏘기도 했지만 이클립스를 몰 때는, 그 정도 범칙금은 속도에 대한 경배금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지불했었다.
그러나 잔고장 하나 없던 그 이클립스도 5년이 지나자 거품을 물었다. 청계 고가를 달리다가 차가 서 버린 것이다. 국내 AS 센타가 없는 수입차는 이럴 때 정말 난감하다. 수입차를 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레커차를 불러 공장에 차를 보내고 우선 시내에서 급한 일을 본 뒤 공장에 갔더니 내 사랑하는 이클립스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간이나 쓸개 부위가 이상한가 봐요. 교체를 해야 한다는데요]
그것을 교체하는 비용은 소형 국산 차 하나를 사는 비용보다 적지 않았다. 부품을 교체하고 바퀴와 내부 청소까지 깨끗하게 한 뒤 나는 정이 들었던 이클립스였지만 헐값을 받고 팔아버렸다. 그리고 BMW Z3 3.0을 구입했다. 차의 지붕이 열리는 2인승 카브리올레인 이 차가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 타면서 유명해진 뒤 처음 국내 소개되었을 때, [자동차 생활]이라는 잡지에서 시승을 권유해서 타 본 적이 있다. 자유로를 달려 한적한 빈 터에서 사진을 찍고 시승을 했었는데 도로 시설만 포장되어 있던 그 구역은 지금은 헤이리 마을이 되었다. 예술인촌 헤이리 마을 입주를 권유 받고 직접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유로를 달려 도로표지판을 보고 찾아갔었는데 오래 전, BMW Z3 시승식을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소개된 Z3는 1.8과 2.0이었다. 스포츠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속도도 이클립스와 비교할 정도가 못되었다. 하지만 이클립스를 교체할 무렵 출시된 3.0은 이클립스와 재원이 거의 비슷했다. 수입차지만 BMW는 AS가 가장 잘되고 있다는 점도 수입차를 타지 않겠다는 마음을 바꾸게 했다.
그런데 고장 없는 튼튼한 차라는 미쓰비시의 5년된 이클립스가 그 모양이었는데 26년이나 온갖 풍상을 겪으며 나이를 드신 이 할아버지 캠핑카를 보면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캠핑카의 주인은 직접 바퀴를 갈아 끼우고 부품 수리를 할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이런 장거리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미코(나는 그 캠핑카의 주인에게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내 마음대로 [레스트리스]의 주인공 이름을 갖다붙였다)는 1미터 90 정도의 큰 키였다. 키에 비해서는 약간 마른 몸이었지만 하얀 피부가 검게 그을려서 아주 탄탄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그 사이, 캠핑 카 운전석과 내부를 가리고 있던 차단막이 걷혀 졌다. 그 안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일로나와 한나. 일로나는 16살이고 한나는 38살이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들도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특히 일로나는 20대 초반으로 보일만큼 성숙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나이가 궁금했지만 처음부터 그것도 숙녀의 나이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들의 나이는 그들이 출발한 뒤 마하티르가 가르쳐 준 것이다. 마하티르는 처음 본 사람이라도 경계심을 풀고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의 친근감이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내가 미코에게 여행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캠핑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한나는 175 정도의 키였고 일로나는 그보다 2-3센티미터 작아 보였다.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던 황금색 골든 리트리버는 그들 주위로 달려가 두 발로 딛고 서서 꼬리를 흔들며 안기고 있었다. 그들도 방금 잠에서 깬듯 눈을 부비며 황금색 태양을 바라보았다.
[벨기에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렸지?]
미코는 오른 손을 들어 보이더니 그 중에서 세 개를 폈다.
[3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3달?]
[아니, 3주]
아아, 3주만에 벨기에의 브륏셀을 출발한 1979년산 포드 이 할아버지 캠핑카가 이곳 말레이시아 페낭 섬까지 도착한 것이다. 나는 진짜로 할아버지 캠핑카를 존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건데?]
[태국과 베트남을 거쳐 중국에서 러시아로 가려고 해]
[그럼 어떻게 집에 돌아가려고?]
내 말을 듣고 미코는 웃었다.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후,하고 품더니, 그는 오히려 나에게 질문했다.
[왜? 왜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거지? 우리는 지금 [어라운드 월드]를 하고 있다고]
그렇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집이다. 아무 데나 캠핑카를 세우면 그곳이 집이다. 어쩌면 그들은 살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직장을 그만 두고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1979년산 포드 캠핑카에 맡기고 브륏셀 떠났는지도 모른다. 3년, 5년이 걸릴 수도 있고 영원히 고향 벨기에 브륏셀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무릎 꿇고, 그들의 인생을 싣고 여기까지 온 1979년산 포드 할아버지 캠핑카에게 절을 했다. 마음속으로.
*페낭 힐에서 브륏셀의 탱고 오나다와 탱고를 추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레트로닉스 음악이었다. 그런데 낯익은 음악이었다. 나는 두 귀를 당나귀처럼 활짝 열었다. 바호폰도의 데꼴라쥬. 아아, 탱고였다. 나는 얼어붙었다. 8월 한낮 12시, 태양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불화살을 내리쏘는 섭씨 30도의 페낭 힐에서, 나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미코와 한나가 탱고를 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춤은 부드럽지만 강렬했고 단순했지만 화려했다. 그들이 춤을 추는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하얀 구름이 내려왔다. 그들은 구름 위에서 춤을 췄다. 지상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지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나는 혼자 있는 일로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일로나의 손은 말랑말랑했다. 키는 나보다 조금 컸다. 어깨끈이 달린 탱크 탑만 입고 있어서 검게 그을린 어깨가 드러나 보였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고 눈을 지그시 감은 뒤 바호폰도를 들었다. 그 강렬한 비트의 탱고, 고탄 프로젝트의 [산타마리아] 같은 곡보다 훨씬 더 영혼의 깊은 곳을 자극하는 음악을 들으며 내 온 몸의 세포를 활짝 열고 그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내 몸 안의 붉은 피들은 모세혈관 끝까지 마구 소리치며 말 달리기 시작했고 우르르 꽝꽝 천둥이 울렸으며 심장이 북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일로나의 어깨 위, 그녀의 오른쪽 귓바퀴 옆으로 페낭 힐 아래 펼쳐진 섬의 푸른 나무들과 그 너머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아득한 곳에 위치해 있을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둣가가 보이는 듯도 했다. 나는 천천히 스텝을 딛기 시작했다.
그들은 브륏셀의 탱고 오나다였다. 탱고 아니라면 아무것도. 미코와 한나, 그리고 그들의 딸인 일로나. 이 세 사람은 지금 아르헨티나까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알래스카와 맞닿는 지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알라스카로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을 거쳐 멕시코와 중남미로 내려가 그들의 꿈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1979년산 포드 캠핑카 늙은 할아버지를. 그는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관절염같은 것은 나에게 전혀 문제도 안된다는 듯이 탱고를 출지도 모른다. 힘 있게 땅게라를 리드하며 화려한 누에보 동작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혹시 몇 년 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세 가족과 함께 하얀 백발의 할아버지 캠핑카가 나타나서 탱고를 추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내가 페낭 힐에서 만난 그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미코와 한나, 일로나 그리고 1979년산 포드 할아버지 캠핑 카의 등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첫댓글 귀한 땅게로스와 조우하셨군요
모든 길은 탱고 오나다로 통한다.^^ 말이 필요없는 탱고 오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