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꽤 도발적으로 보이는데
<일본의 제국 대학을 졸업한 식민지 조선의 유학생들은 어떻게 대한민국의 엘리트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추적한 책입니다.
저자인 정종현 교수는 동아시아 문화사 전문가로서 교토 대학에서 연수하던 무렵부터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왠지 이런 내용이면 좌빨? 책 같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의외로 담백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한 게 느껴집니다.
2019년에 출판한 책 답게 문체가 그리 어렵지 않아 술술 읽히는 것도 좋고요.
책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제국 대학은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 대학의 국가 주의에 강한 인상을 받아 창설한 일제의 국립 대학교들을 일컫습니다.
처음에는 도쿄 제국대학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수가 늘어(교토, 규슈, 도호쿠 등)
나중에는 식민지인 조선에도 경성 제국 대학(서울대의 전신)이 생기게 되죠.
그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다양한 이유와 경로로 일본 본토의 제국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완용 자작새끼 같은 순혈 매국노의 자녀나
고등 교육에 관심도 많고 돈도 많은 지주의 자녀들,
그외 배움에 갈망이 있는 지식인들(조선엔 대학교랄 게 없으니까),
그리고 독립 운동 경력으로 인해 조선에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청년들까지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다고 해요.
(의외로 일본 본토의 대학들은 식민지와 다르게 요시찰 인물들을 특별히 거르지 않았답니다)
물론 대부분의 초기 제국대학 입학생들은 지식을 쌓아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현해탄을 건넜을 거에요.
하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 멀어진 조국의 독립과 그와 비교되는 일제의 발전상,
심지어 모태 식민지둥이 신입생까지 등장하면서 제국대학의 조선 유학생들은 점점 '모던 보이'가 되어갔겠죠.
어떻게든 일본인 비스무리하게 꾸며 출세하거나 차별에 좌절하며 개탄하는 식민지 지식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저자는 이런 유학생들의 졸업 후 행적을
학교에 남아있는 각종 명부와 동창회 자료, 실존 인물 인터뷰, 현대사 이력 등을 통해 밀도있게 그려내는데요.
그 과정을 통해 이들을 대략적으로 분류해 보니
1. 일본 고등문관시험(요즘 시대의 3대고시)를 통과하여 조선 총독부(혹은 만주국)의 관료가 된다던가
2. 이공계열(의학부, 과학부, 농학부)이나 문학부 등에서 개인적인, 혹은 민족을 위한 성취를 위해 활동한다던가(우장춘 등)
3. 독립 운동가나 공산주의자가 되어 일제에 저항하는 인사(극소수)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네요.
(윤동주의 친구 송몽규처럼 제국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모두 진성 친일파는 아니라능...)
여기서 눈 여겨 뵬 게 있는데요.
군부 체제로 가기 전 일본 제국의 시스템(조선 총독부 포함)이 놀랍도록 현 윤석열 정부와 흡사하다는 겁니다.
일단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한 도쿄 제국대학 사법부 출신만을 중용하고요.
고위 관리직에는 이념적으로 불순한 자(AKA 불온한 조선인)는 절대 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해요.
특히 총독부의 사법 관료 자리는 정말 찐 친일파(내사람)가 아니면 채용하지 않았는데
법관시보 탈락자의 회고에 따르면 면접 때
"천황에 대한 충성심만 바로 박혀 있으면 법률을 알고 모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할 정도였다죠.
그렇다보니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 연구소도
판검사 이력이 있는 친일파 인물에 대해서 만큼은 별달리 이견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만큼 총독부 압제 하에서 활동한 사법 관료는 확실한 매국 증명서? 가 되었거든요.
재미있는 점?은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중도 쪽에서도 크게 흠을 잡지 않는 대법관 출신 이회창 씨의 집안 이야기인데,
그 분의 친가, 외가, 처가 모두 이 <제국대학-고등문관시험-식민지 관료>로 이어지는
일제의 사회적 자본 트로이카를 구현해냈다는 것입니다.
이회창의 삼촌 이태규는 무려 강점기 시절 교토제국대학의 교수였고
아버지 이홍규는 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처 해방 이후 검사까지 지낸 인물이며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를 거쳐 일본 군수성 관료를 역임,
해방 이후 국회의원까지 갔었죠. 참고로 김성용 말고도 외삼촌들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더라고요.
이모인 김삼순은 후카이도 제국대학을 나온 농학박사랍니다.
또 이회창의 장인은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의 대법관까지 지낸 한성수죠.
처남이 되는 한대현도 헌법 재판관을 지냈고요.
이회창에 대한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우리 사회의 사법 엘리트들이
어떤 기반을 가지고 현 시대까지 융성했는지를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네요.
그 외에도 우리나라 헌법이 왜 총독부 사법 관료 출신들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서울대의 특권의식이 어디서 부터 시작됐는지
어떻게 일본 교육 시스템의 추종자들이 미국 교육의 추종자로 바뀌었는지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어요.
특히 김일성대학을 위시한 북한의 고등 교육 시스템에도 제국 대학 출신들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할 수가 있었네요.
여기까지가 독후감인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30프로는 그렇게 단단하다죠?
일본 제국이 36년간 정성들여 박아놓은 거대한 말뚝들을 어찌 한번에 뽑아낼 수 있겠어요.
인내심을 갖고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진짜 보수를 만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나라 걱정 하시는 분 많은데 다들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신친일파가 아니라 그동안 그냥 이웃에 살고 있었군요.. 상상 이상으로 많이 정재계에 많이 뿌리내렸을 거 같네요
네 책 뒷면에 졸업생들의 발자취가 연표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마어마해요
감사합니다. 일독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참 글을 잘 쓰셔요. 심정적으로는 그 때 왜 친일파를 도륙내지 못했나 싶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씀을 읽고 나니 어떤 방향으로도 어려운 거였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아쉽습니다.
복잡하죠. 처음부터 매국한 사람은 역사에 남았지만 왔다갔다 한 사람, 본인의 자아실현이 제국의 힘이 된 사람 등이 월등히 많아 확실히 프랑스나 동남아시아 국가처럼 식민지 시절이 짧은 나라들과는 청산문제가 달랐어요
추상적으로 결과론적으로만 알고 있는것들이 싸이코가넷님 덕분에 조금 더 디테일을 알게 되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흥미로은 책이네요. 회사 도서관에 신청해야지~~
현 시점에 읽으면 블록버스터급 감흥을 느낄 수 있겠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