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 손가락 첫마디가 잘려 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4.09.29. -
오래전 젊은 시인의 등단작을 다시 꺼내 본다. 여전히 “가난한 오늘”이다. 청년들은 전세사기로, 직장을 잃은 중년들은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으로, 노인들은 줄어든 복지 예산으로 더 차가워진 장판 바닥 위에서 하루를 연명한다. 빌라들은 깡통이 되었고, 거리마다 텅 빈 상점에는 ‘임대’ 현수막이 더 이상 뜯기지 않으려는 듯, 아직 나갈 수 없다는 듯,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다.
시인은 생의 방향을 가리키던 “검지 손가락 첫마디”가 잘려 나가도 자신의 상처에 지고 싶지 않아서, “아프진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너무 무겁고 벅차서 “허리를 펼 수 없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늘어만 가는 대출이자로 두 다리는 휘청거리고, 자꾸만 “뒷걸음치는” 그림자들. 바닥으로 길게 누운 그림자가 겨우 살아난 “꽃나무”를 집어삼킨다. 마지막 꽃이 그림자 속으로 떨어진다. 이제 열심히 꽃을 피울 꽃나무는 자신 속에서 죽어버렸다. 차가운 빛들이 시인의 방으로 모여든다. 꽃나무는 가난한 시인의 입속에서 다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