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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국사(我誤國事)
내가 나라 일을 그르친다
我 : 나 아(戈/3)
誤 : 그르칠 오(言/7)
國 : 나라 국(囗/8)
事 : 일 사(亅/7)
조선 중기의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함양(咸陽) 출신의 인물이다. 문장에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했다. 예법과 유교 경전에 정통하여 당시 이름난 선비들이 의심나거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그에게 물었다.
문과에 급제해서 조정에 나가서는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는 우뚝한 절벽 같은 기상이 있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장관급에 올랐으면서도 생활은 검소하여 가난한 선비 같았다. 나중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나라의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을 때는 공정한 논의를 펼치려고 노력했고 절대 청탁을 받지 않았다. 그의 행정 업적은 뛰어났다.
언젠가 자기 친척이 찾아가 이야기하다가 벼슬을 구하려는 뜻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자 이후백은 정색을 하며 조그만 책자를 보여주었다.
그 책 속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과 재주와 행실이 적혀 있었다. 그 책은 이후백이 괜찮다고 생각하여 장차 발탁하려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모은 것이었다. 그 친척의 이름도 이미 그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다 보여주고 나서 이후백이 말했다. "내가 자네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해서 장차 어떤 자리에 발탁하려고 했던 것이네. 그런데 지금 자네가 벼슬 구하는 이야기를 했네. 벼슬 청탁하는 사람이 벼슬자리를 얻는다면 공정한 도리가 아니지. 아깝도다! 만약 말하지 않았더라면 벼슬을 얻었을 걸세." 그 친척은 크게 부끄러워 하며 물러났다.
이후백은 어떤 사람을 벼슬에 임명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것이 옳을지의 여부를 부하 관료나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물어서 합의가 된 뒤에 임명했다. 혹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임명했으면 밤새도록 잠 못 이루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닌가(我誤國事)?" 라고 고민했다.
지금 국가의 인사권을 쥔 사람들이 이후백처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람을 이 자리에 임명했을 때 국가 민족에게 도움이 될 것이냐? 손해가 될 것이냐?"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들이나 인사권을 쥔 장관들이 대개는 자기 당파 사람,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 자기가 빚진 사람, 누구의 소개나 청탁을 받은 사람들을 그들의 능력이나 전문성을 묻지 않고 마구 임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예만 들면, 주중한국대사 임명이다. 역대 중국대사 13명 가운데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단 1명, 전문 외교관은 단지 3명, 나머지는 전부 대통령 비서 출신, 선거에 떨어진 자기 정당 사람 등을 임명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우리나라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중국대사는 아주 중요한 자리다. 이런 자리에 전문성 없는 인사를 임명하면 정말 나라 일을 크게 그르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역대 대통령들은 아무 고민 없이 이런 식으로 중국대사 인사를 하였다. 다른 분야도 다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패한 권력을 중심으로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라는 국기문란 사태로 혼란스럽다.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자신의 부나 영욕을 성취하기 위한 행태에 온갖 허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리의 증거가 드러나도 수치심이나 죄의식도 없다. 단지 부정축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어두운 과정의 모든 면을 변호인을 통해 미화시키고 있다. 공직자로서 선비정신은 실종 된지 오래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 아오국사(我誤國事)
공직자의 윤리를 선비정신에서 찾다
율곡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경연일기(經筵日記)에 공직자로서 표본이 되는 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후백(李後白)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으니 정사가 볼 만하였다.
後白爲銓長, 務崇公論, 不受請託, 政事可觀.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雖親舊, 若頻往候之, 則深以爲不韙.
하루는 일가 사람이 찾아왔는데, 말을 나누던 차에 관직을 구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一日, 有族人往見, 語次示求官之意.
이후백이 안색을 바꾸고 사람들의 성명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 주었는데,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이었으며 일가 사람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後白變色, 示以一小冊子, 多記人姓名, 將以除官者也; 其族人姓名, 亦在錄中.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 이름을 기록하여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했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가 관직을 구한다는 말을 하니, 만약 구한 자가 얻게 된다면 그것은 공정한 도리가 아닐세. 참으로 애석하네만,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네." 하니, 그 사람이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後白曰: 吾錄子名, 將以擬望. 今子有求官之語, 若求者得之, 則非公道也. 惜乎! 子若不言, 可以得官矣. 其人大慙而退.
이후백은 관직 하나를 제수할 때면 매번 벼슬할만한 적임자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폭넓게 물었으며,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제수했을 경우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구나"라고 하였다.
後白每除一官, 必遍問其人可仕與否, 若誤除不合之人, 則輒終夜不眠曰: 我誤國事.
따라서 당시의 여론이 이후백의 공정한 마음은 근세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時論以後白之公心, 近世無比.
위의 일화는 명종과 선조 연간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인 이후백(李後白)이 이조 판서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전조(銓曹)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일컫는 말인데,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한 곳인 만큼 사적인 청탁이 없을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 어디보다도 공평무사한 덕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평무사함이란 사사로운 이익에 이끌려서는 안 되니, 몸에 밴 공손함과 검소한 성품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후백이 이조 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서 이처럼 사심을 배제하고 공정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부귀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철저히 선비정신을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공직을 맡아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렀어도 빈한하고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아 손님이 와도 밥상이 초라하였다고 하니, 청백리로 선정된 이유를 알 만하다.
한번은 명종에게 "검소하면 씀씀이가 자연 번다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한 번 부국(富國)에 뜻을 두면 세금을 거두는 신하가 으레 먼저 자신의 사욕을 채울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부국에 성심을 다할 자가 또한 몇이나 되겠습니까?"고 아뢰어 임금이 솔선하여 검소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선비정신은 의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혼자 있는 곳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과 검소함이 있다고 보겠다. 이 두 가지가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모습에서 이후백과 같은 청렴함과 공평무사함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이나 부를 이루기 위해 온갖 허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허언임이 밝혀지고 비리가 드러나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실수였다', '잘 몰랐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경제 발전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할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성과 지상주의로 치닫다보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정의 모든 어두운 면이 미화되고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집단도 생겨날 정도로 우리 주변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성과만을 중요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유명한 희곡의 제목이 어쩌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유가(儒家)의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 매우 탄탄하고 유례없는 긴 역사를 이룩한 국가였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구한말을 거쳐 국권을 상실하는 아픈 시기를 겪었고, 해방 후 미 군정 시대와 전쟁, 그리고 잘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을 지내왔다.
그동안 우리는 쇠퇴의 원인을 유가의 선비정신에 떠넘겨 낡고 고루한 것으로 평가절하 하는 동시에 그 역사까지도 외면해 버렸다. 이는 우리가 유가의 선비정신을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겉으로 표출되었던 일부 부정적인 외형만을 가지고 그것이 선비정신의 모든 것인 양 평가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유가의 선비정신은 의(義)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함과 검소함이 있다. 공손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고 하였으며, 또한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탈취하지 않는다(恭者不侮人, 儉者不奪人)"고 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후백이 지켰던 선비정신의 일면을 통해 과연 어떤 가치를 추구해 나갈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선비정신의 바탕에 깔린 공손함과 검소함을 중요 덕목으로 삼아 자기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 종계변무 시정한 청백리 '이후백'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은 조선 전기 전라도 영암 출신 문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5세에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와 학문을 배웠다. 2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35세에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정7품 승정원 주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38세에 정7품 승문원 박사로 재직하던 중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호당은 세종이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던 제도이다. 이후백을 비롯해 신숙주, 김안국, 이이 등이 사가독서를 한 대표적인 문신이다. 호당 출신만 대제학에 임명됐다.
이후백은 사가독서를 끝내고 호남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파견됐다.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암행어사가 파견됐다는 소문만 듣고 스스로 사직한 탐관오리들이 있었다고 한다. 암행어사는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을 암행하면서 감찰하는 임시 관직이다. 다시 정6품 병조좌랑, 정5품 이조정랑, 정4품 사인, 정3품 홍문관 전한 등을 역임했다.
○ 잘못 기록된 '이성계 혈통' 바로잡아
이후백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동부승지, 대사간, 병조참의, 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1571년 정3품 당상관 이하의 문신을 대상으로 실시된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을 하였다. 1573년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를 방문하여 '명태조실록'과 '대명회전'의 개정을 주장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종가의 혈통을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다.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친원파인 이인임의 아들이다'고 200년 동안 잘못 기록됐다. 대제학 황정욱이 1584년 종계변무를 최종 달성했다.
이후백은 종2품 평안도관찰사와 대사헌에 이어 종2품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관제학에 임명됐다. 정2품 이조판서에 이어 호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조판서 시절 친척이 찾아와서 관직을 청탁하자 작은 책 한 권을 꺼내어 ‘자네를 추천하려고 명부에 올려 놓았더니 지금 보니 안되겠네’라며 추천자 명단에서 지워버렸다고 한다.
이후백은 예조판서를 역임했던 노진이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휴가를 내고 함양까지 찾아가 슬퍼하며 하룻밤을 앓다가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노진은 "오면 가려 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퍼하노라."는 시로 유명한 문신이다. 이후백은 사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연양군(延陽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인사 청탁 거절한 청백리
'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기개가 있었다. 그가 비록 문한(文翰)에 종사하였지만 몸단속을 엄숙하게 하였고 말할 때나 조용히 있을 때에도 절도가 있었으며 기쁜 표정과 언짢은 표정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자제들이나 아랫 사람들이 감히 시사의 득실에 대하여 묻지를 못했다'고 선조수정실록 12권에 이후백의 졸기가 기록됐다.
이후백은 사후에 광국공신(光國功臣)으로 책봉됐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됐다. 광국공신은 종계변무에 공을 세운 1등 황정욱, 2등 이후백, 3등 기대승 등 19명에게 내린 칭호이다. 청백리는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표창제도이며 청백리에 녹선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1590년 전라도 강진에 후학들이 이후백을 제향하기 위해 서봉서원(瑞峰書院)을 창건했다. 백광훈(白光勳)과 최경창(崔慶昌)을 추배됐고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됐다. 1924년 호남 유림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박산서원(博山書院)으로 개칭했다.
○ 우음(偶吟) / 이후백(李後白)
細雨迷歸路(세우미귀로)
騎驢十里風(기려십리풍)
野梅隨處發(야매수처발)
魂斷暗香中(혼단암향중)
보슬비 내리고 물안개 자욱해 길을 잃고 헤매느라,
지친 나귀, 십 리 바람 속을 절뚝거리며 걸어가네.
온 들녘 여기저기 매화꽃이 안개 속에서 드러나매,
그윽하고 또 그윽한 그 향기에 그만 넋을 잃었네.
나귀를 타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람결을 타고 흩날리는, 넋을 잃을 정도로 짙은 향내가 진동하기에 사방을 둘러보니 보슬비 내리고 안개 자욱한 들녘 여기저기에서 고결한 자태의 연분홍빛 매화꽃이 모습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조선 중기, 중종 조의 유학자 이후백(李後白)은 눈앞에 펼쳐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과 후각을 자극하는 짙은 매화 향기에 이내 넋을 잃었고 할 말을 잊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때 그곳의 광경을 시로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평생 한 번이라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이러한 광경을 그냥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법인지라 이후백은 나귀 등에서 눈앞의 광경을 정리하여 '우음(偶吟)'이라는 제목의 시로 완성하였다. 이 시는 안개 속에서 드러나 보이는 아름다운 매화꽃뿐만 아니라 매화 특유의 향내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보슬비 내리는 데다 안개가 온 세상을 휘감는 바람에 길을 잃고 헤매느라 사람도 지치고 나귀도 절뚝거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문득 바람결에 실려 오는 짙은 매화 향기에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안개 속에 드러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더욱더 놀라 감탄하면서 시를 읊는 지은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문장의 풍모가 당나라 때의 이태백 시풍을 닮은 것으로 보여서인지 '후대에 등장한 이태백(李太白)'이라는 뜻으로 '후백(後白)'이라 이름 지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것이 자의(自意)에 의한 것이든, 타의(他意)에 의해 붙여진 것이든 간에….
들매화에 흠뻑 취한 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처럼 이후백은 매화를 노래했다. 혼탁한 정치권을 바라보며 매화처럼 향기를 팔지 않은 청백리 이후백이 그립기만 하다.
■ 청백리(淸白吏)
●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黃喜)
방촌 황희는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평생을 관리로 지내며 원칙과 소신, 관용과 배려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는 탁월한 조정능력을 발휘한 '행정의 달인'이었다.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반영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조정하고, 논쟁을 조율해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는 청빈한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로 꼽히지만,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뇌물 등에 관련한 기록 때문에 시비거리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이지만 작은 기와집 바닥에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살 만큼 청렴했기에 '황희 정승'이란 애칭으로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다.
○ 황희 정승의 말대로 하라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말·조선 초기 명재상이며, 청백리의 표상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태조~세종 때까지 56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영의정 등 주요 요직을 엮임했다. 66세에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이 "이 말이 만일 누설된다면, 내가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만큼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다. 세종 때에는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해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 왕을 보필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고,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세자(양녕대군) 폐출 불가를 주장하는 등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대신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신분을 초월해 인(仁)을 실천하고 인권을 존중했다. 또 신뢰할 수 있는 법치주의에 근거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며 <경제속육전>을 편찬하고, 오늘날 소방서 같은 '금화도감'과 파출소 같은 '경수소'를 설치해 화재와 방범에 대비했다.
그는 회의에서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거나 그 말이 옳다고 아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두루 듣고, 마지막에 종합해 의견을 개진했다. 그래서 태종이나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의 말대로 하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은 "청백리란 '봉급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않고, 먹고 남은 것은 집에 가지고 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자'를 말하는데, 조선 조를 통틀어 이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청백리는 황희 정승이다"고 했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은 "젊을 때는 대간과 승지로서 바른 말을 하다가 서너 번이나 면직, 좌천되고, 두 번 감사(강원도, 평안도)로 나갔을 때는 관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은 그리워했다"며 "오랜 경륜과 신중한 태도로 4군 6진의 개척과 대마도 정벌을 실제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다"고 말했다.
그는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 반구정에서 유유자적 인생을 관조하며 풍류를 즐겼다. 90세까지 장수하다 파주 탄현 금승리에 안장됐다.
○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세종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낡은 옷과 다 닳아빠진 멍석을 보고는 "그 멍석은 너무 낡아 등 긁개로 쓰면 딱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 일화는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데 지금까지도 적용되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되는 이유다.
어느 날 퇴궐해서 단벌 옷을 빨았는데, 입궐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그는 갈아 입을 관복이 없어 바지와 저고리 솜을 실로 얼기설기 잇고 그 위에 관복을 덧입고 서둘러 입궐했다. 그런데 세종은 그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을 얼핏 보고는 말했다. "과인이 듣기로 경은 청렴결백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 옷을 입었소?"
이에 그는 "이것은 양털이 아니라 솜입니다"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종이 비단 열 필을 내렸으나, 그는 "백성은 흉년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은데 솜옷 한 벌도 과분하다"며 거절했다.
어느 날 집안의 여종들이 싸움을 하다가 그에게 일러바쳤다. "대감마님, 손님이 먼 길을 오시느라 시장하니 음식부터 장만하는 게 옳지요?" "오 그렇지.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집안부터 청소하는 것이 우선 아닙니까?"라고 하자, "허허허, 네 말도 맞구나!"했다. 이를 듣고 있던 아내가 "대감, 무슨 일이든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그른 법 아닙니까?"라고 하자, "허허, 부인 말도 옳소!"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여종은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고 다툼을 멈췄다.
들판에서 농부가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두 마리의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둘 다 일을 아주 잘 한답니다." 잠시 후 농부가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실은 누렁소가 검정소보다 일을 휠씬 잘 합니다." "아니 그런데 왜 귓속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누가 자기를 욕하고 흉보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남보다는 못할지라도 열심히 일한 소의 입장에서는 마음 상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는 이 일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줏대도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여봐라! 김종서 대감이 앉아 계시는 의자 다리가 짧은 모양이다. 누가 나가서 나무토막을 가져오너라!" 당대 최고 명장 김종서가 거만한 자세로 탁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그의 질책을 듣고 얼른 자세를 고쳐 앉고 잘못을 사과했다고 한다.
그는 관리나 가족들에게는 엄격하지만 노비와 아이들에게는 관대한 휴머니스트였다.
● 청백리 재상 오리 이원익
'오리 정승' 이원익은 조선 중기 난세의 재상이다. 그는 '성품이 충량(忠亮)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하는 것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주목사 시절에 뽕나무 심기를 권장해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는 등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그가 도입한 대동법은 조선후기 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수십 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검소하고 소탈한 삶으로 백성의 칭송을 받아 청백리로 선정됐다. 그는 황희, 허목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힌다. 그가 만년에 여생을 보낸 광명시 소화동에 관감당과 종택, 영정, 묘소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포용의 리더십으로 정국 혼란 극복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시대 대표 청백리이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그는 '나라를 튼튼히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백성을 편안하고 잘 살게 해야 한다'는 '안민(安民)' 우선의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현장행정을 펼쳤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의 4세 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1569년(선조 2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65년 동안 관직생활 중 44년을 재상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을 여섯 번,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 직책인 도체찰사를 네 번이나 지냈지만, 재산이라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뿐이었다. 그가 해낸 일에 걸맞은 부귀, 권력, 명성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조선 중기 사회는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광해조의 정치적 질곡,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이 일어난 혼란기였다. 내부에서는 동서로 갈라져 치열한 붕당정치를 전개하고, 밖으로는 외적이 침입했다. 왕권이 무너지고 관료는 부패하고, 백성은 피폐했다.
나라가 위태롭던 격동기일 때, 그는 국정의 중심에서 '물리침'보다는 '감싸안음'의 리더십을 발휘해 정국을 합리적으로 수습했다. 그는 이이와 유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덕형, 곽재우 등 쟁쟁한 당대 인사들과 교류하며 난세를 헤쳐 나갔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중앙정치의 중심 인물이기 보다는 지방행정의 달인이었다. 질정관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 황해 도사와 안주 목사, 평양 감사를 지냈다. 그는 중앙에 든든한 배경도 없었고, 로비는 물론 이벤트도 할줄 몰랐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하던가.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임진왜란 중에 우의정으로 조정에 들어간 이후 재상의 반열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 율곡, 오리를 알아보다
"이원익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참으로 쓸만한 사람입니다." 율곡 이이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닌 이유가 있다.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에 부임했는데, 이이가 그곳 감사를 지냈다. 율곡이 도지사이고, 오리가 부지사인 셈이다. 율곡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모든 정무를 맡길만큼 신임을 얻고 훌륭한 치적도 쌓았다. 특히 그는 무질서한 군적(軍籍)을 바로 잡았는데,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할 정도였다.
그는 율곡의 추천으로 고급관료 인재풀, '홍문록'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 청요직인 사관원 정언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그러나 승정원 탄핵사건으로 파면돼 야인 생활 끝에 1587년 안주목사로 다시 등용됐다. 그는 임명을 받자마자, 거창한 부임행차를 거부하고 홀홀 단신 부임지로 떠났다.
굶어죽은 사람이 절반일 만큼 참혹한 안주백성을 위해 곡식 1만석을 긴급 방출해서 기근을 해결했다. 또 1년 중 3개월이던 복무연한을 2개월로 줄여서 군역의 부담을 덜어줘 백성들은 농사에 힘쓸 수 있도록 했다. 백성들이 '토질이 맞지 않다'며 심기를 꺼려하는 뽕나무를 심어 양잠업을 성공시켜 의식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그 때 심은 뽕나무 숲을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불렀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백성을 남겨두고 한양을 떠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갔다. 조선은 무력했다. 국토는 순식간에 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병농일치제와 진관체제의 방위체계는 허술했다. 양반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군포로 병역의무를 대신하는 방군수포제는 '유령군인'을 양산하는 등 국방력은 부실하기 그지 없었다. 병력 충원과 운영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왜군은 단숨에 평양을 함락시켰다. 도순찰사였던 이원익은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평안도를 보존함으로써 조선의 명맥을 지켜냈다. 그가 안민(安民)행정을 펼치다가 떠나자 평양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공덕을 기렸다.
그는 철저한 현장행정을 펼쳤다. 솔선수범해서 발로 뛰고, 현지 사정을 헤아리고, 문제점을 해결했다.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린 안주백성들이 마음으로 키작은 '꼬마' 사또에게 승복했다.
○ 백성이 근본이고 나머지는 군더더기
그는 '안민=국방'이라고 생각으로 국난 극복에 기여하고, 조선 최대의 납세 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의 세금부담을 완화시켰다. 임진왜란이 휩쓸고 간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는 피폐했고, 바닷가 마을은 유령마을로 변했다. 백성들은 짊어진 세부담이 크다보니, 왜적이 물러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슬퍼하고, 왜적이 머무른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뻐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한다. 그 밖의 일들은 전부 군더더기일 뿐"이라고 선조에게 비장한 마음을 담아 보고했다.
특히 그는 옥에 갇힌 이순신을 구해내고, 한산도까지 내려가서 군사를 지원했다. 이순신은 "장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음을 돌보지 않고 적진 깊숙히 쳐들어가서 큰 공을 세우게 한 것도 실은 이상국의 덕"이라고 탄복했다. 이순신이 실제 바다에서 나라를 구했다면, 이원익은 민심의 바다를 장악해 조선을 구해낸 것이다.
그는 선조의 유언 덕분에 광해군 초대 영의정에 올라 임진왜란 이후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로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69세에 귀양을 갔다. 이어 인조반정 공신들의 추대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선정을 베풀었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성절사로 중국을 다녀왔을 때 귀국 행장의 간소함은 그가 지청(至淸)한 관료로 인식되는 계기였고, 도체찰사 수행시에는 맑고 투명한 공무 처리로 청렴한 양신의 모범을 보였다"면서 "호성공신에 녹훈됐지만 끝내 사패지를 사양해 삼척동자도 그의 청렴함에 탄복할 따름이었다"고 했다.
● 대 이은 청백리, 이제신, 이명준 부자
청강 이제신과 잠와 이명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자 청백리이다. 양평군의 전의 이씨 청강공파유적지 묘역에 잠들어 있다. 항상 자식들에게 '재물을 썩은 흙처럼 보라'고 가르친 이제신은 녹봉을 받으면 모두 가난한 친족에게 나눠 줬다고 한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는 유능한 관리였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벼슬살이가 순탄하지 못했다. 진주목사 시절에 지방 권세가들의 모함으로 병부(兵符; 병력동원을 할 수 있는 표적)를 분실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제신의 넷째 아들 이명준 또한 부친을 닮아 강직하기로 유명했는데,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일화가 등장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인물이었다.
○ 큰 틀을 중시한 양평의 청백리 이제신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은 중종에서 선조 무렵의 강직하기로 이름난 문신이자 청백리이며,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문성(文誠)이다. 그는 청강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질구레한 것보다는 큰 틀을 중시했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불과 일곱 살의 나이로 당대에 학식과 문장으로 유명했던 성세창(成世昌) 앞에서 "새가 날아 저 푸른 하늘로 떠오르니, 푸른 하늘의 높이를 알겠고나(鳥飛靑天浮 靑天高下知)" 라는 시를 짓는 영특함이 있었다. 대학자인 남명 조식이 어린 그의 영특함을 보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해 좌우에 차고 있던 패를 끌러줬다고 전한다.
17세 때 조욱(趙昱, 1498~1557)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스승인 조욱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일찍이 기묘사화에 연좌됐으나 화를 면한 뒤 양근(지금의 양평)에 있는 용문산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조욱은 평소 제자인 청강을 가리켜 "천리마의 뛰어남을 어찌 왕량의 채찍질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며 칭찬하곤 했다.
25세에는 남명 조식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닦았으며, 29세인 1564년(명종 19) 문과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과 춘추관의 사관 및 삼조의 정랑을 거쳐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사관(史官) 시절에 숨김없이 직필하고 공평무사한 태도를 일관해 주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는 이후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장애에 직면하게 된 원인이었다.
청강은 일생 병부(兵符)와 두 번의 깊은 악연이 있었다. 당시 조정은 진주의 토착세력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선조를 비롯한 조정 관료들은 불의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청강을 이들 토호 세력을 해결할 적임자로 지목했다.
진주목사에 부임한 청강이 지역 세력가들을 족치자 궁지에 몰린 토호들은 아전과 더불어 몰래 병부를 훔쳐내어 진주목사 자리에서 면직되기를 바랬다. 이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만, 청강은 선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중 이듬해 여진족이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됐다. 이후 경원부를 다시 회복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소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오만하게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병부를 3일 동안 묵혀두고는 즉시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죄를 씌워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청강의 재능과 전공이 큰 것을 잘 아는 선조는 형을 감면해 의주 남쪽에 있는 인산으로 귀양을 보냈지만, 48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1584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 정약용이 인정한 청백리 '이명준'
자식들에게 '재물을 썩은 흙처럼 보라'고 가르친 청백리 이제신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울에서 태어나 양평에 거주한 넷째 아들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은 아들 중에서도 부친의 강직한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었다.
잠와는 1603년(선조 36)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가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다. 서원현감으로 있을 때 물새들이 성안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명령을 내려 허술한 제방을 수리했는데 바로 뒤 큰 장마가 졌지만 피해가 없었고 평양서윤으로 있으면서 기와를 싸게 공급하도록 해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꿔 화재 예방에 힘썼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서제(庶弟)가 옥사에 연루돼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후 장령으로 임명됐는데 홀로 우뚝 서서 바른 말을 하자 조정이 이로 인해 엄숙해졌다고 한다. 영남지방에 암행어사로 가서 활동하고 있다가 이후 충청도관찰사와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난갔으며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해 가난한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부담을 덜어줬다.
잠와는 인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해 관직을 역임할 때마다 청백하기로 이름이 났으며 허술한 집에 살면서 늘 양식 걱정을 했다. 이정암, 이항복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저서로는 '잠와유고' 4권이 있다.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고, 신도비는 청음(淸陰) 김상헌이 지었고 묘표음기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지었다.
다산 정약용은 청백리로 이름 높은 이명준의 일화를 '목민심서'에 두 번이나 소개해 수령들의 귀감이 되게 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은 인정이 많은 나라인데 인정은 곧 '뇌물'을 뜻한다고 했고, 다산 정약용은 수많은 관리를 배출한 조선에서 청백리가 드문 것은 사대부의 수치라고 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의 세상이 아닌, 이제신·이명준 부자와 같은 청백리의 세상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다.
● 조선 최초의 청백리 천곡 '안성
천곡 안성(安省)은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다. 고려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해 보문각(寶文閣) 진학사(直學士)와 상주 판관 등을 거쳐 1414년 태종 14년 강원도 도관찰사로 부임해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터전을 마련한 광주시 중대동 텃골(덕곡)마을은 광주 안씨 집안의 600년 세거지다.
광주 안씨는 안성과 함께 안팽명, 안후열, 안구, 안처선 등 5명의 청백리를 배출한 명문가문이다. 후손이 실학자 순암 안정복이다. 대대로 벼슬을 했던 집안이지만 당색이 남인이기에 순암의 아버지 이후 벼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선영이 있는 광주 덕곡마을에 정착했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호는 설천(雪泉), 천곡(泉谷),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천곡(泉谷) 안성(安省, 1351∼1421)은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그는 태조 1393년에 조선시대 최초의 청백리로 녹선됐다. 태조, 정종, 태종 등을 섬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는 어릴 때 한쪽 눈이 작아서 '소목(少目)'이라 불렸다. 고려 우왕 초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우왕이 이름을 소(少)와 목(目)을 합친 '성(省)'으로 고쳐 주었다고 한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든가,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고향 함안으로 낙향했다. 그런데 태조가 혁명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할 만한 신하를 찾던 중 고향에 내려간 안성을 불러들여 개성 유후(留後)라는 직책을 임명했다.
이에 안성이 "조상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이고, 나 또한 고려의 신하인데, 어찌 조선의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인가"며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통곡했다. 주변의 공신과 대신들이 그를 죽이려고 들자 임금이 급히 말리며 "나에게는 역신이나 고려에는 충신이다.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 선비들 중 누가 군주에 충성하겠느냐"고 말렸다.
부득이 벼슬에 나간 이후 그는 선정과 덕치를 이루고 청렴을 생활화 했다. 이에 태조 때 조선왕조 처음으로 청백리 제1호로 녹선됐다. 특히 동문수학한 태종이 그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했는데, 대간들이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기피했다.
신하의 반대에 화가 난 태종은 서명제도 자체를 없애고 직접 친필 왕지와 교지를 내려서 그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했다. '짐이 조정을 다스리고 경이 지방을 다스려 준다면, 이로 하여금 만백성이 평안함을 얻으리라'라고 썼다. 이 어필은 현재 전북 장수군 어필각에 문화재로 보존돼 있다.
그는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기면서, 본인에게는 청렴, 국가에는 충의, 백성에게는 선정과 덕치를 신조로 삼았다. 명망가에서 태어나 학덕과 절의를 겸비한 위대한 학자요 정치가며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빙벽저절(氷檗著節)의 삶이었다.
특히 상주 판관 재직 중 선정을 베풀고 성을 개축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니 백성들이 믿고 따랐으며, 독곡 성석린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오직 안씨가 으뜸'이라고 했다.
그는 고려와 조선에서 40년 동안 6개 지역에서 감사를 지냈다. 그가 벼슬길에 오를 때 가져간 것은 오직 책과 이불을 담은 농(籠; 대그릇) 하나 뿐이었다. 벼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올 때에는 대그릇이 낡아서 물건을 담을 수가 없었다. 부인 송씨가 말하기를 "대그릇이 찢어졌는데 왜 다시 바르지 않소"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헌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바른단 말이요"라고 했다.
그는 녹봉으로 빈민을 구휼하고 집에는 한 섬 곡식이 없어도 그러니하고 꿋꿋이 절개를 지키며 가는 곳마다 교화를 이룬 청백리였다.
방촌 황희가 안성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몸소 가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을 고하며 '치자(治者)의 도(道)'를 묻자, 안성이 "우리가 죽은 뒷일은 다만 청렴 '렴(廉)'자 한 자 만을 지킬 뿐"이라고 했다. 이어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보답해야 할 것인데'라고 했다. 여기서 그의 청렴함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광주 안씨의 청백리 안구(1458~1522)는 청도군수를, 안처선(安處善)은 진주목사와 경상관찰사를 역임했으며, 안팽명(安彭命)은 대사간으로 명성을 날렸다. 또 안후열(安後說, 1632~1664)은 사간원 등 삼사에서 봉직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만 전념하는 영광을 누렸으며, 선조수정실록 편찬에도 힘썼다.
● 양만리(楊萬里) 집안의 청백
중국 남송(南宋)의 양만리라는 관리는 학문이 높은 학자이자 뛰어난 청백리로서 역사에 길이 이름을 전하는 분입니다. '목민심서'에서도 여러 차례 거명되고 있습니다. 양만리는 호가 성재(誠齋)로 '성재집'이라는 높은 수준의 문집을 전하고 있으며, 보문각대제라는 높고 귀한 벼슬로 치사(致仕)하여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양장유(楊長孺)도 아버지에 버금가는 청백리로 역사에 이름을 전하고 있어 아름다운 가문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양장유의 호는 동산(東山), 복건안무사를 역임하고 시호가 문혜(文惠)였는데 목민관 시절에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목민심서' 귀장(歸裝)조목에 나오는 그들의 청백한 공직 생활은 이렇습니다. "양성재가 강동지방의 조운(漕運)을 맡고 있을 때 봉급으로 받은 돈이 1만 민(緡)이었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오면서 관고에 그대로 두고 왔다. 그의 아들 동산(東山)도 오양성을 다스릴 때에 봉급 7천 민을 하호(下戶)에 대하여 조세로 내어주었다. 그의 집은 짧은 서까래에 흙으로 섬을 만들어 농부의 집같이 짓고 살면서 삼대(三代)에 걸쳐 증축하거나 장식하는 일이 없었다. 사미충(史彌忠; 자는 양숙)이라는 여릉 태수가 임기를 마칠 무렵 양씨의 집을 방문하니 문에 들어서나 마루에 올라서나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쟁이에게 명하여 그의 집을 그려가지고 갔다."
높은 벼슬아치로, 대단한 세력을 지닌 사람들이 허름하고 낡은 집에 살면서 3대에 걸쳐 증축이나 보수도 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니, 그림으로만 그려서 남길 일인가요. 청백은 그래서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전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양성재와 양동산의 청백한 공직생활도 아름답지만, 사미충의 청백리를 부러워하는 심정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초가 3간의 허름한 고관대작네 집의 그림이 어딘가에 전해지고 있을까요. 우리네의 고관대작들도 그런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맑아질까요.
● 명(明)나라 정선(鄭瑄)의 청백리 정신
공직자들의 청백리 교과서인 '목민심서'를 읽다보면 특별히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명나라의 관인(官人)이자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정선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가 목민관이 꼭 읽어야 할 지침서로 지은 '작비암일찬(昨非庵日簒)'이라는 책의 환택편(宦澤篇)은 바로 청백리정신을 가장 올바르게 기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다산은 '목민심서'의 중심적인 논리가 공직자들이 청백리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이곳저곳에서 정선의 목민관 정신을 자주 인용하였다.
청백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나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우선 마음가짐부터 일반 사람과는 다른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탐심(貪心), 즉 '무엇을 탐내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무엇을 가지고 싶고 얻고 싶으며 지니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청백한 사람은 될 수가 없다고 했다.
목민심서 청심조목에 나오는 말이다. "탐내서 얻고 싶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얻어도 싫어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온통 사치를 좋아하는 하나의 마음 때문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염담(恬淡)하여 부족함을 모른다면 세상의 재화나 이익을 어디에 쓸 것인가. 맑은 바람에 밝은 달이야 무슨 돈이 필요하고, 대울타리 띠 집에 무슨 비용이 들어가며, 책을 읽고 도(道)를 논하는데 돈이 왜 필요한가. 제 몸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며, 남을 건져주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데 남은 돈이 있겠는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성찰하면 세상 맛에서 초연히 벗어나는데 탐욕스러운 마음이 어떻게 저절로 생겨나겠는가."
맑은 마음(淸心)을 지녀야 청렴한 공직자가 된다는 다산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어서 다산은 바로 그 부분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다.
더 절실한 정선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요즘 사대부(士大夫)들이 밖으로는 공명(功名)을 낚고 안으로는 돈벌이를 경영하여 넓은 고대광실 1천 간(間)에 기름진 전답 일만 경(頃)에 종들이 개미 떼처럼 많고 여종이나 첩들이 구름처럼 많으면서도, 입만 열면 성리학의 고담준론을 펴고, 스스로 청허(淸虛)하다고 자부하지만, 입에서 아무리 부처님의 입에서 나오던 오색연꽃을 토해 낸다 해도 나는 믿지 않겠노라"고 했다면서 고위공직자들이 입으로는 청렴한 주장을 펴지만 실제론 집안은 부호여서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라는 것으로, 그런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면서,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잘못된 공직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청렴한 공직자라면 겉과 속이 투명한, 언행이 일치하는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정선은 주장하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라 어떤 비방이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만이 청렴한 공직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벼슬하는 고귀한 신분의 공직자가 한번 벼슬에 올라 잠깐 사이에 큰 부자가 되고 큰 이익을 얻으며 벼슬까지 높아지면 능력 있다고 칭찬받고, 가난하고 검소하게 벼슬이라도 유지하면 겨우 비난이야 면하지만, 공정하고 청렴하며 꿋꿋하여 벼슬도 잃고 이익도 얻지 못하면 크게 졸렬한 사람이라고 칭하게 되어, 아내나 아들들조차 허물하고 친구들이 비웃으니 자기 고을에서도 의탁할 길이 없다. 하늘이 낳아준 고결한 인품이 아니고서야 바람 부는 데로 쏠리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 무능한 공직자와 유능한 공직자가 이런 방법에 의하여 구별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바로 능력 있는 공무원이란 남보다 먼저 승진하고 남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우고, 남보다 더 큰 소리치고 남보다 더 수완을 부릴 줄 알아야만 모두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 세상이 계속되는데 어떻게 청렴한 공직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수백 년 전의 명나라에서도 그러한 세상이었고, 200년 전의 다산이 살던 세상도 마찬가지였는데, 오늘이라고 또 다른 세상이 되겠는가.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사는 사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사는 공직자, 겉으로 능력 있다는 평가에 현혹당하지 않고 마음의 흔들림에 중심을 잡고 마음에 부끄럼 없는 공직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청렴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정선의 주장과 다산의 마음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 또는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의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아심여칭(我心如秤), 자기네 편의 무위가 드날림을 이르는 말을 아무유양(我武維揚),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일컫는 말을 물아일체(物我一體),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망아지경(忘我之境),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자기가 어떤 것에 끌려 취하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자아도취(自我陶醉), 잘못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곡재아의(曲在我矣),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어떤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를 잊고 다른 사물을 돌아보지 않거나 한 가지에 열중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림을 일컫는 말을 무아몽중(無我夢中), 자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게 됨을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유아지탄(由我之歎), 인신人身에는 항상 정하여져 있는 주제자 즉 아我가 없다는 말을 인아무상(人我無想),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이르는 말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일컫는 말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일컫는 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誤(그르칠 오)는 ❶형성문자로 误(오)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吳(오)로 이루어졌다. 吳(오)에서 口(구)를 뺀 자인 夨(녈)은 머리를 기울인 사람의 모양으로, 바르지 못함을, 口(구)는 입, 말을, 음(音)을 나타내는 吳(오)는 나라 이름, 또 娛(오) 따위 다른 글자의 부분(部分)으로도 쓰기 때문에 잘못이란 뜻인 때는 言(언)을 다시 더하여 誤(오)라 쓴다. ❷회의문자로 誤자는 '그르치다'나 '잘못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誤자는 言(말씀 언)자와 吳(나라이름 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吳자는 머리가 기울어진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머리가 기울어진 모습을 그린 吳자에 言자가 결합한 誤자는 '말이 기울다' 즉, '말이 잘못됐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지금의 誤자는 말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태도가 잘못됐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誤(오)는 ①그르치다 ②잘못하다 ③의혹하다(의심하여 수상히 여기다) ④의혹(疑惑)하게 하다 ⑤잘못 ⑥그릇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날 과(過), 그릇될 와(訛), 그르칠 류(謬), 어긋날 착(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정(正)이다. 용례로는 그릇되어 이치에 어긋남을 오류(誤謬), 뜻을 잘못 이해함을 오해(誤解), 잘못하여 다른 것으로 인정함을 오인(誤認), 그릇된 심판 또는 그릇 심판함을 오심(誤審), 어떤 대상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을 오도(誤導), 잘못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을 오기(誤記), 잘못 사용함을 오용(誤用), 그릇된 계산 또는 그릇 계산함을 오산(誤算), 관측하거나 셈한 수와 그 정확한 수와의 차이를 오차(誤差), 그릇된 대답을 오답(誤答), 잘못 쓴 글자를 오자(誤字), 그릇된 보도 또는 그릇 보도함을 오보(誤報), 잘못 판단함 또는 그 판단을 오판(誤判), 그릇된 번역 또는 그르게 번역함을 오역(誤譯), 틀리게 읽음을 오독(誤讀), 착각으로 말미암아 잘못함 또는 그러한 잘못을 오착(誤錯), 인식과 대상 또는 생각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일을 착오(錯誤), 잘못이나 그릇된 짓을 과오(過誤), 잘못을 바로잡음을 정오(正誤), 그릇됨을 논함을 논오(論誤), 문자의 잘못을 바로잡음을 감오(勘誤), 일을 잘못하여 그릇됨을 분오(僨誤), 잘못하지 않음 또는 그르치지 아니함을 불오(不誤), 틀린 글자 따위를 깎아 내어 바로잡음을 간오(刊誤), 시간을 더디게 끌어서 일을 그르침을 지오(遲誤), 과거의 잘못이나 오래 된 허물을 구오(舊誤), 글씨를 쓰다가 그릇 쓰거나 글자를 빠뜨리고 씀 또는 그러한 글자를 일컫는 말을 오서낙자(誤書落字) 또는 오자낙서(誤字落書), 홍교에게 잘못 부탁하다는 뜻으로 편지가 유실된 것을 비유하는 말을 오부홍교(誤付洪喬), 홍교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편지가 유실된 것을 비유하는 말을 홍교지오(洪喬之誤), 학습 양식의 한 가지로 실패를 거듭하여 적용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행착오(試行錯誤), 글자를 잘못 쓰기 쉬움을 가리키는 말을 노어지오(魯魚之誤),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잡음을 일컫는 말을 양민오착(良民誤捉), 총명하기 때문에 스스로 일생을 그르침을 총명자오(聰明自誤) 등에 쓰인다.
▶️ 國(나라 국)은 ❶회의문자로 国(국)은 간자(簡字), 囗(국), 囶(국), 圀(국)은 고자(古字), 囲(국), 围(국)은 동자(同字)이다. 國(국)은 백성들(口)과 땅(一)을 지키기 위해 국경(口)을 에워싸고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는 데서 나라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國자는 '나라'나 '국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國자는 囗(에운담 위)자와 或(혹 혹)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或자는 창을 들고 성벽을 경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或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누가 쳐들어올까 걱정한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 '혹시'나 '만일'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囗자를 더한 國자가 '나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國자는 성벽이 두 개나 그려진 형태가 되었다. 참고로 國자는 약자로는 国(나라 국)자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國(국)은 (1)어떤 명사(名詞) 다음에 쓰이어 국가(國家), 나라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나라, 국가(國家) ②서울, 도읍(都邑) ③고향(故鄕) ④고장, 지방(地方) ⑤세상(世上), 세계(世界) ⑥나라를 세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 백성을 국민(國民), 나라의 법적인 호칭을 국가(國家), 나라의 정사를 국정(國政), 나라의 안을 국내(國內), 나라의 군대를 국군(國軍), 나라의 이익을 국익(國益), 나라에서 나라의 보배로 지정한 물체를 국보(國寶), 국민 전체가 쓰는 그 나라의 고유한 말을 국어(國語), 한 나라의 전체를 전국(全國), 자기 나라 밖의 딴 나라를 외국(外國), 양쪽의 두 나라를 양국(兩國),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국가의 수를 세는 단위를 개국(個國), 조상 적부터 살던 나라를 조국(祖國), 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국(殉國),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을 이르는 말을 국치민욕(國恥民辱), 나라의 급료를 받는 신하를 국록지신(國祿之臣),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고 온화하게 힘을 이르는 말을 국풍순화(國風醇化),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흩어졌으나 오직 산과 강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을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이란 뜻으로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이나 인물을 이르는 말을 구국간성(救國干城),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으로 저속하고 난잡한 음악을 일컫는 말을 망국지음(亡國之音), 국권피탈을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을 경술국치(庚戌國恥),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이해 관계가 밀접한 나라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순치지국(脣齒之國),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노자가 그린 이상 사회, 이상 국가를 이르는 말을 소국과민(小國寡民), 한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운다는 뜻으로 뛰어난 미인을 이르는 말을 일고경국(一顧傾國), 사이가 썩 친밀하여 가깝게 지내는 나라 또는 서로 혼인 관계를 맺은 나라를 이르는 말을 형제지국(兄弟之國) 등에 쓰인다.
▶️ 事(일 사)는 ❶상형문자로 亊(사), 叓(사)는 고자(古字)이다. 事(사)는 깃발을 단 깃대를 손으로 세우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역사의 기록을 일삼아 간다는 데서 일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事자는 '일'이나 '직업', '사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이 등장했던 시기 使(부릴 사)자와 史(역사 사)자, 事(일 사)자, 吏(관리 리)자는 모두 같은 글자였다. 事자는 그중에서도 정부 관료인 '사관'을 뜻했다. 사관은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事자는 제를 지내고 점을 치는 주술 도구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후에 글자가 분화되면서 事자는 '일'이나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정의하기로는 史자는 '일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吏자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事자는 '직책'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事(사)는 일이나 볼일 따위를 이르는 말(~를, ~을 다음에 쓰이어)이나 또는 일의 뜻을 나타냄의 뜻으로 ①일 ②직업(職業) ③재능(才能) ④공업(工業), 사업(事業) ⑤관직(官職), 벼슬 ⑥국가(國家) 대사(大事) ⑦경치(景致), 흥치(興致) ⑧변고(變故), 사고(事故) ⑨벌(옷을 세는 단위) ⑩섬기다 ⑪부리다, 일을 시키다 ⑫일삼다, 종사하다 ⑬글을 배우다 ⑭힘쓰다, 노력하다 ⑮다스리다 ⑯시집가다, 출가하다 ⑰꽂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事實), 뜻밖에 일어난 사고를 사건(事件),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사태(事態)평시에 있지 아니하는 뜻밖의 사건을 사고(事故),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사정(事情), 모든 일과 물건의 총칭을 사물(事物), 일의 전례나 일의 실례를 사례(事例), 일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운영되는 지속적인 활동이나 일을 사업(事業), 일의 항목 또는 사물을 나눈 조항을 사항(事項),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일의 안건을 사안(事案),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 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친이효(事親以孝),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군이충(事君以忠),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일컫는 말을 사사건건(事事件件), 사실에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근거가 없거나 사실과 전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사실무근(事實無根), 사태가 급하면 좋은 계책이 생김을 일컫는 말을 사급계생(事急計生), 일정한 주견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 사람을 붙좇아 섬기면서 의지하려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사대사상(事大思想), 자주성이 없어 세력이 강대한 자에게 붙어서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을 사대주의(事大主義), 옛 사람의 교훈을 본받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사불사고(事不事古),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하거나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함을 일컫는 말을 사사무성(事事無成), 일의 되어 가는 형세가 본래 그러함을 일컫는 말을 사세고연(事勢固然), 사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가 명백함을 일컫는 말을 사리명백(事理明白), 일을 함에는 신속함을 중요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사귀신속(事貴神速), 이미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지차(事已至此), 여러 가지 사변이 자꾸 일어나 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사변무궁(事變無窮)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