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60칙 운문화상의 주장자
“산하대지는 곧 ‘나’…다른 데서 찾지말라”
〈벽암록〉 제60칙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 주장자가 변화하여 용이 되어 천하를 삼켜버렸으니,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擧. 雲門, 以仗示衆云, 仗子化爲龍, 呑乾坤了也. 山河大地甚處得來.
주장자는 자신이자 ‘한생각’…
한생각이 용 만들고 천하도 삼켜
운문화상의 법문은 〈운문광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운문종의 조사인 운문화상은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당말의 선승으로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을 비롯해 18회나 등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어느 날 법당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것이다. 주장자는 선승이 항상 몸에 지니는 7가지 생활도구의 하나로서 길이가 7척 정도의 나무지팡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잘 사용하는 선승으로 평가하며, 임기응변에 능숙하고 자유자재한 작가로 학인들을 움켜쥐고(把住) 놓아 주는(放行) 교화수단과 중생들의 번뇌 망념을 차단하는 방편의 지혜(殺人刀)와 지혜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活人劍)도 뛰어나다고 착어하고 있다. 〈벽암록〉 22칙에 설봉화상이 남산의 맹독을 가진 독사를 대중에게 제시하였을 때 운문은 주장자를 들고서 응답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이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여 천하를 꿀꺽 삼켜버렸다.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법문이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였다”는 말에 원오는 “무슨 용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가. 주장자는 주장자 그대로 괜찮지 않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사실 주장자가 용이 되지 않아도 된다. 주장자가 천지를 삼켰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주장자는 자기자신의 주장자이며 본래면목의 주장자이다. 원오가 ‘수시’에 “소위 제불과 중생이 본래 다름이 없는 일심(一心)의 당체이며 산과 강이 자기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일체 만물과 자기는 하나인 것이다. 산하가 즉 자기이며 자기가 곧 산하인 것이다. 차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심의 분별심이다. 그래서 〈신심명〉에는 만법일여(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화엄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독특한 모양과 존재하는 그대로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만물과 서로 상즉(相卽)하며, 하나의 사물은 일체의 만물을 포용하면서도 그 독자성의 하나는 만물과 서로 상입(相入)하고 있다고 설한다. 즉 자기라는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공간인 시방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라는 하나는 일체의 만물을 포용한 만법의 근원인 것이다.
사실 주장자라는 이름도 임시로 붙인 것이며, 운문화상 자신이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생활도구이기에 편의상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제시하여 설법한 것이다. 자신의 손과 발과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처럼, 선승의 주장자나 생활도구도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혜로운 도구이기 때문에 주장자는 곧 자기 자신인 것이다.
운문화상이 주장자가 “하늘과 땅(乾坤)을 삼켜버렸다”는 말에 원오는 “천하의 납승들의 목숨(性命)이 보존하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이미 주장자가 삼켜버렸기 때문에 주장자의 목숨 그 밖에 납승의 목숨이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천하의 납승도 주장자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과 강과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말에 원오는 “시방에는 벽도 없고, 사면에는 문도 없다. 동서남북 사유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미친 소리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기 주장자가 온 우주를 모두 삼켜버렸기 때문에 장벽도 없어졌고, 관문도 없는 무한의 공간이 단지 하나의 주장자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제불도 없고 중생도 없는데 산과 강과 대지가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만약 주장자라는 대상에 집착하면 또다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몸 밖에 다른 것도 없다(身心一如 身外無余)”라고 주장한 혜충국사의 말로 입증하고, 또 중생이 마음과 사물에 대한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전등록〉 제10권에 전하는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의 유명한 법문을 인용해 주의 주고 있다. “장사선사가 말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종전의 식신(識神:분별의식)에 의지하여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의 오랜 세월동안 생사 망념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한다.’”
식신(識神)은 〈기신론〉에서 분류한 중생심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인데, 미오(迷悟), 법성(凡聖)과 생사와 열반을 차별하는 분별의식이다. 불심의 본각(本覺)은 진망(眞妄)과 미오(迷悟)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다르지 않는 불이(不異)인데, 중생심과 불심을 대조해 분별하는 것은 중생의 차별심이다. 참선 수행자가 이러한 불법의 진실을 잘 체득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분별하는 중생심(識神)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신(識神)은 불법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한 생각이며, 무량겁이라는 긴 세월에 생사망념에 윤회한 미혹한 중생심의 근본인데,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이 식신을 본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읊었다. 주장자와 자기는 하나이며, 만물과 자기는 본래 하나인데, 상대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중생심(식신)인 것이다. 자신이 젓가락을 갖고 식사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식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자를 갖고 시방의 일체 만물을 자신의 생활공간과 도구로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니” 본칙의 공안을 이 한마디로 읊고 있다. “복사꽃 떨어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 하랴” 춘 삼월 복사꽃이 필 때 붉은 꽃잎이 용문(龍門)의 물위에 떨어질 무렵, 고기가 몰려와 용문 삼단의 폭포를 뛰어 올라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고사를 토대로 해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하는 말에 대해 설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장자는 주장자로 무엇이 부족한가? “꼬리를 태운 놈이라고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삼단의 폭포를 뛰어오른 용은 천화(天火)가 잉어로 살던 시대의 유물인 꼬리를 불로 태워버린다고 하지만, 구름과 안개를 마음대로 움켜진 살아있는 진짜 용은 꼬리를 태우거나 용문의 폭포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 용은 원래 용인데, 망상의 꼬리를 제거하지 않아도, 폭포를 뛰어올라 진짜를 추구하지 않아도 그대로 건곤을 삼킨 천진불인 것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용이 못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 소냐” 용문의 폭포를 오르지 못한 낙제한 고기(중생)나 뛰어 오른 용(부처)이나 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일미(一味) 평등한 것인데 무슨 정신없이 슬퍼하고 실망하며 낙담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는 “이것으로 법문은 다 했다”고 하며 주장자가 용이 되어 건곤(乾坤)을 삼킨 공안의 이야기를 끝낸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이해했는가. 이해하지 못했는가. ‘곧바로 깨끗하고 산뜻해야 한다’ 산뜻하고 깨끗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본래 청정한 모습을 읊고 있다. 보고 듣는 사물에 조금도 걸림없이 흐르는 물에 땀에 젖은 얼굴을 씻는 것처럼 깨끗한 경지에서 본래 청정한 불심에 계합한 경지를 말한다.
“다시는 지저분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 앞의 산뜻한 본래 청정에 반대된 분별 잡념에 떨어진 중생심에 떨어지지 말라는 충고이다. “72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1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 주기 어렵다.” 분별망상에 떨어진 중생은 72 방뿐만 아니라 150 방망이를 쳐도 용서할 수 없다. “돌연 선사(설두)가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의 주장자에 얻어 맞을까봐 걱정하던 대중도 안도의 한숨을.
성본
[출처] [벽암록] 제60칙 운문화상의 주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