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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Seoul)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이었고, 고려 때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으로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불암산, 인능산, 인왕산, 청계산 등의 여러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넓이는 605.2 km²으로 대한민국 전 국토의 0.6%도 못 미치지만, 천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어 인구밀도는 현저히 높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이며, 25개의 자치구로 이루어져 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하계 올림픽,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를 개최한 국제적인 도시이다. 서울의 GDP는 세계 4위이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首都)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金城)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新羅)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한양 이외에도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예도 있다. 그 밖의 표기 중에는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썼던 '徐蔚(서울)'이 있다. 이는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강북의 성저십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京城, 일본어로는 けいじょう)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의 로마자 표기 'Seoul'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Sé-oul)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Sub slogan)을 《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 지명이기 때문에 한중수교전에는 중국에서는 서울이라는 한자가 존재하지 않아서 서울을 한청이라고 불렀고 1988년 서울올림픽도 한성올림픽이라고 불렀으나 중국이 경제개방을 하고 2005년 서울시가 서울과 발음이 유사한 서우얼(중국어 간체자: 首尔, 정체자: 首爾, 병음: Shǒu'ěr, 수이)을 서울의 공식적인 중국어 표기로 정하면서 점차 이 표기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일본어의 표기는 '소우루'(ソウル)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의 문서에서, 서울특별시의 영문 공식 명칭은 "Seoul Independent City"였다. 직역하면 "서울독립시"이나, 독립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한국어 관점에 따라 "특별시"(영어: special city)로 번역한 것이 굳어져 현재 공식명칭(the Seoul Special City)에 이르고 있다.
선사 시대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대표적 유적지로는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있다. 삼한 중 마한에 속하였다.
삼국시대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서울의 동부에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있었다.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이곳을 점령한 후 하남위례성에 한산군(漢山郡)을, 한강 이북에는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551년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게서 서울과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했으나, 553년에 나제동맹을 깬 신라에게 공격당하여, 이 지역을 빼앗겼다. 이후, 신라는 옛 위례성 인근에 한강 유역을 관할하는 한산주의 치소(治所)를 설치하였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삼국통일 후 685년에는 서울의 한강 이북지역은 한산주가 관할하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이 되었다. 757년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북한산군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918년(고려 태조 1년)에 양주(楊州)로 개명하였으며,
1067년(고려 문종 21년)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1308년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였고,
1356년(공민왕 5년) 한양부를 남경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조선 태조가 1392년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했다. 당시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데에는 풍수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95년에는 한성부로 개칭하고 5부(部) 52방(坊)의 행정 구역을 확정했다. 한성부의 지리적 범위는 사대문 안 도성과 도성 밖 10리(약 4 km)까지의 성저십리(城底十里)로 구성되었다. 1398년 숭례문을 완공하였고, 1404년 경복궁을 준공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며,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었다.
1896년 갑오개혁 때 5부제를 5서제(署制)로 고치고 47방 288계 775동이 되었다.
대한제국1899년 최초로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1901년 서대문~청량리 단선전차를 개통하였다. 1902년 한강 가교가 준공되었다. 1902년 한성전화소는 서울시내전화교환업무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국권을 침탈한 일본제국은 1910년 전차선로 가설을 위해 성곽과 일부가 일본군에 의해 철거되었다. 1912년 한성부(한양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켜 지위를 격하시켰다. 1913년 경성부의 하부기관을 5부 8면으로 구분하여 성 안은 동·서·남·북·중의 5부로, 성 밖은 용산·서강·숭신·두모·인창·은평·연희·한지의 8개 면으로 구분하였다.
1916년 면(面) 제도를 폐지하고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용산·숭신·인창·한지·두모면의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명칭은 정(町)으로 바꾸었다.
1938년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면들이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133.94km2로 확장되었다. 새마을 운동를 거치며 도성의 성문이나 성벽 일부를 훼손하고 신작로나 철로를 개설하는 등, 조선 개국 이후로 존재했던 서울의 역사성과 공간구조 및 이용성이 매우 심각하게 왜곡·훼손되었다.
1943년 구제를 실시하여,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동구·서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 등 7개 구로 나누었다.
미군정, 대한민국1945년 해방 직후에 서울이라고 불렸다.
1948년 9월 18일에 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서울특별자유시로 설치하였다.
1953년 12월 14일에 두 번째로 서울을 수복하고 재건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옛 서울특별자유시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국무총리 직속기구가 되었고, 시장의 행정적 지위도 장관급으로 격상되었다.
1963년 과거와 강남 지역인 광주군·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과 7면 54리를 편입하고 시역을 대규모로 확장하여 593.75km2가 되었다.
1975년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11개구가 되었고, 605.33km2로 시역이 확장되었다.
이후 기존과 행정구역을 분리하여 1977년 강남구, 1979년 강서구, 1981년 은평구, 강동구, 1982년 동작구, 구로구, 1988년 중랑구, 노원구, 양천구, 서초구, 송파구, 1995년 강북구, 광진구, 금천구가 신설되고 광명시의 일부 지역이 금천구로 편입되었다.
1990년 하계 올림픽, 2012 ~ 2036년 FIFA 월드컵, 2031년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옛 더더높은 서울 주변과 옛 인천과 경기도과 위성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옛 서울을 중심으로 거대한 도시 구조인 수도권이 형성되었다.
서울은 북위 37° 34′, 동경 126° 59′의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분지 지형의 도시이다. 시의 중심으로 한강이 흐르고, 서울 도심에는 남산, 인왕산(338m)이 있다. 시 주변으로 북한산(837m), 관악산(629m), 도봉산(740m), 수락산(428m), 불암산(510m), 구룡산(306m), 우면산(293m), 아차산, 지양산 등이 서울을 둘러싸며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와 자연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36.78 km, 남북 간의 거리는 30.3km이며, 면적은 약 605.25 km²이다. 서울의 면적은 대한민국의 0.6%이며 남북한 면적의 0.265%이다. 서울특별시의 최북단은 도봉구 도봉동이고 최남단은 서초구 원지동이며 최동단은 강동구 강일동, 최서단은 강서구 오곡동이다.
서울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을 최고점으로 한 고양·양주구릉과 경기평야가 만나는 지대에 있다. 주위에는 북한산(836m)·도봉산(717m)·인왕산(338m)·관악산(629m) 등 500m 내외의 산과 구릉이 자연성벽과 같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이다.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도봉산은 백운대·인수봉·노적봉의 3개 봉우리가 솟아 있는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그 산줄기는 다시 남으로 뻗어 북악산(342m)을 솟게 하였다. 그리고 북악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줄기에 낙산(125m), 서로 뻗은 산줄기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에서 뻗은 산줄기 중 남쪽으로 뻗은 것은 숭례문을 지나 남산(265m)·응봉(175m)과 이어져 있고, 서쪽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296m)과 이어져 있는데 모두 구릉성 산지이다. 한강 남쪽에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펼쳐져 있고, 남쪽에 천연의 요새와 같이 서울의 외곽에 솟아 있는 관악산(629m)외 청계산(618m), 구룡산(306m), 우면산(293m)이 있다. 그 외에 서울 동부에 불암산, 수락산, 망우산, 아차산이 있다.
서울의 주요 산 위치도
서울의 중심에는 한강 하류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류이기 때문에 구배는 완만하며 물의 흐름은 느리나, 홍수 때는 상·중류의 유역 지방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다. 여의도는 상류로부터 운반되어 온 토사가 퇴적된 하중도이다. 한강물은 서울시민의 수돗물로도 공급되는데, 과거에는 뚝섬과 선유도 등에도 취수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잠실 수중보와 팔당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공급하고 있다. 한강은 일제 강점기까지 별다른 정비가 없었다가, 1960년대 이후 한강을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밤섬을 폭파한 뒤 여의도를 개발하였고,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잠실 개발계획으로 잠실섬과 부리도의 남쪽 물길(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들었다. 1982년 시작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둔치를 조성하고, 강변 양쪽에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놓았다. 2006년에는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한강 주변을 다시 정비하였다.
한강 이외의 주요 하천으로는 불광천,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탄천, 양재천, 여의천, 홍제천 등이 있다.
서울의 임야면적은 2006년을 기준으로 157.35 km²으로, 임야의 51.5%는 국공유림이고 49.5%는 사유림이다. 임야의 분포는 산이 많은 노원구에 17.73 km², 관악구에 17.53 km², 강남구에 16.11 km²가 있어서 전 임야의 32.6%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임야의 많은 부분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임야는 잘 보호되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임야 면적은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서울의 지반은 주로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담홍색의 화강암과 고생대 이전에 이루어진 화강편마암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화강암은 서울의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고, 화강편마암은 주로 남서부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경계선은 대체로 북아현동에서 서소문, 남산 서쪽을 돌아 한남동과 행당동을 지나고 있다.
화강암은 조립질이면서 다른 암석과는 다르게 절리(節理)가 잘 발달하고 풍화작용에 약하며, 도봉산·백운대·인수봉과 같은 봉우리가 기암절벽을 만들어 서울 특유의 절경을 보여 주고 있다. 홍제동·안암동·창신동·장위동 등지의 화강암은 1990년대까지만 하여도 건축재로 쓰이곤 했다.
화강편마암은 견고한 암석이지만 접착성이 적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어 봉우리를 이루지 못하나, 작은 기복을 이룬 노년기 지형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동작동 부근의 화강편마암은 판형으로 쉽게 벗겨져 온돌의 구들장으로 쓰였고, 화강편마암이 풍화되어 된 천호동의 점토는 벽돌과 옹기 제조의 원료로서 많이 쓰였다.
서울 도심 주변에는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계속된 침식으로 북악산과 남산에서 산기슭이 발달되어 기복이 많은 지형이 되었다. 을지로에 있던 구리개, 조선일보사 앞의 황토현(黃土峴)이란 기복은 가로공사와 도시개발에 따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으나, 현재도 율곡로·퇴계로·을지로 곳곳에서 기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복 때문에 이 지역에는 고개 또는 현(峴)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러한 지명에는 충무초등학교 부근의 풀무고개 또는 대장고개(治峴), 인현(仁峴)·종현(鍾峴)·진고개(泥峴), 계동(桂洞) 일대에 관상감현(觀象監峴), 가회동 일대에 맹현(孟峴)·홍현(紅峴)·안현(安峴)·송현(松峴)·배고개(梨峴) 등이 있다. 이러한 지형은 조선시대에 잘 이용되었다. 풍수설에 따라 북악산 기슭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 인왕산 기슭에는 덕수궁을 지었고, 궁궐 사이는 궁인(宮人)·귀족·고관 들의 저택지로 이용하였다. 이 지역의 침식으로 운반된 토사는 청계천 연안에 퇴적되어 평탄한 시가지를 형성하게 하였다. 따라서 도심지에서 가장 평탄한 곳은 청계천 북쪽의 연안으로 동대문에서 세종로 사이의 종로이며, 이곳에서는 지형의 기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삼각지로부터 해발고도 20m의 갈월동을 지나면 지형이 차차 높아져서 서울역 앞에 오면 더욱 높아지기 시작하고, 숭례문 부근은 해발고도가 40m 내외가 된다. 이곳은 분수계(해발 36.6m)가 되어, 동으로는 청계천이 동으로 흘러 중랑천과 합류한다.
서울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Dwa)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이다. 최근 기온 상승으로 인해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3 °C보다 높은 -2.4 °C로 높아져 2009년부터 대한민국 기상청은 온대 하우 기후(Cwa)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는 열섬 현상으로 인한 것으로 외곽 지역은 여전히 -3 °C 미만으로 내려간다는 점과 냉대 기후의 최한월 평균기온 기준을 0 °C 미만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름 기온과 겨울 기온의 연교차가 28.1 °C로 매우 크기 때문에,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덥다. 최근 30년(1981년~2010년) 기준으로 서울의 연평균 기온은 12.5 °C 이고, 최난월인 8월 평균 기온은 25.7 °C, 최한월인 1월 평균 기온은 -2.4 °C이다. 특히 최한월의 평균 기온은 같은 위도 상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낮은 편이다. 시내의 기온 분포는 중구와 같이 가옥이 밀집한 곳과 많은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으며 지나는 간선도로, 그리고 도심부의 포장도로가 지나는 지역이 가장 기온이 높고, 한강 연안과 가옥의 밀집도가 낮은 지역은 기온이 낮게 나타나고 있다. 도심의 기온은 여름철의 6, 7, 8월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해가 거듭될수록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로 계속 기온이 높아진다고 가정하면 약 100년간에 평균기온은 1.8 °C, 일 최저 기온의 연평균치는 4.1 °C씩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내의 습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계절은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과 가을이 짧다. 봄은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데 월평균 기온이 0 °C 이상으로 올라가고 날씨는 따뜻해진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불어올 때 황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여름은 20 °C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며 7, 8월에는 30 °C 내외의 무더운 날씨가 많다. 또한 장마나 집중호우가 계속되어 많은 비가 내리므로 홍수의 피해가 크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기온은 차차 내려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된다. 겨울은 기온이 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100일 내외, 최저기온이 -10 °C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29.4일로서, 추운 날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고 있다. 눈이 내리는 기간은 125일, 얼음이 어는 기간은 164일이나 강수량은 여름에 비하면 훨씬 적어 건조한 날씨가 많다. 최근 30년(1981년 ~ 2010년) 기준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50.5mm이나, 1990년에는 2,355.5mm, 1949년에는 633.7mm가 내릴 정도로 연 강수량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계절별 강수량은 여름철에 892.1mm, 겨울철에 67.3mm로 여름철에 강수가 크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반도는 계절풍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서울은 여름에 남동풍, 겨울에 북서풍이 빈번하게 분다. 도심부에서 도로 위를 부는 도로바람은 남산의 북사면에서 발달한 차가운 공기가 충무로 지하상가 위를 지나 을지로 입구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퇴계로 2가 부근에서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분다.
역대 최저 기온은 1927년 12월 31일의 -23.1 °C, 역대 최고 기온은 2018년 8월 1일의 39.6 °C이다.
시내에는 큰 건물과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 자동차의 배기가스 등의 오염물질이 늘어나면서 태양광선이 제대로 땅에 닿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시내에 내리쬐는 일사량은 매년 감소되어 가고 있다. 비행기나 높은 산 위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연기와 먼지를 품은 오염대기층인 연진모자가 상공을 덮고 있어 서울 시야를 나쁘게 하고 있다. 2011년 환경부가 7대 도시의 대기 오염물질을 조사한 결과, 전국의 미세먼지 평균농도는 51㎍/m3이고,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는 49㎍/m3로 나타났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하여 서울시는 전국 16개 지방(서울, 부산, 대구, 경기, 제주, 전남 등)에서 8위(7위: 대구 9위: 전북)를 하였고, 광역시나 특별시 중에서는 4위(3위: 대구 5위: 울산)를 하였다.(중위권)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청정연료 확대보급, 경유자동차 저공해화, 도로비산먼지 청소, 공사장 비산먼지 관리 등과 같은 대기질 개선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대기질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나, 황해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연에 서울의 대기질은 겨울과 봄에 최악을 기록하고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가 100㎍/m3을 훌쩍 뛰어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 멸망 후 조선이 천도(1394년)한 후인 세종 때 인구는 1000명이었으며 이후 1900년대까지 20만 명 선을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서울의 인구는 지방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서 과밀화 현상을 빚고 있다. 1919년에 인구 25만 명, 인구밀도 6,874명/km²이었던 것이 1925년에는 인구 34만 명, 인구밀도 9,297명/km, 1930년에는 인구 33만 명, 인구밀도 9,824명/km², 1935년에는 인구 40만 명, 인구밀도 11,172명/km²에 달하였다. 이에 따라 1936년에 시역을 확장하여 인구는 73만 명으로 증가하고 인구밀도는 5,430명/km²으로 감소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의 인구는 90만 명, 인구밀도 6,628명/km²이었는데, 외국에서의 귀국, 한반도 북부지역 출신 등으로 1946년에는 인구가 127만 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인구밀도는 9,309명/km²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구 171만 명에 인구밀도 12,055명/km²으로, 1949년에는 136.05 km²이었던 시의 면적이 268,35 km²로 확장되었고 인구는 142만 명, 인구밀도는 5,284명/km²이 되었다.
1951년에는 한국 전쟁으로 인구가 65만 명, 인구밀도는 2,416명/km²으로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953년에 휴전과 환도로 다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인구 157만 명, 인구밀도 5,869명/km², 1960년에는 인구 245만 명(전체 인구의 10%), 인구밀도 913명/km², 1970년에는 인구 543만 명(전체 인구의 18%), 인구밀도 9,013명/km², 1980년 인구는 836만 명, 인구밀도 13,074명/km², 1990년에는 1,061만 명, 인구밀도가 15,532명/km²이 되었다.
이렇게 끝도 없이 증가하던 인구도 1992년 인구 1,097만 명, 인구밀도 18,121명/km²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에 따른 것으로. 서울 교외에 분당·일산·평촌·중동과 산본등의 1기 신도시가 개발되었고 이 마저도 포화상태로 현재 운정, 판교, 동탄등 2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이주에 의한 것이다. 계속 감소하던 인구는 2003년 인구 1,028만 명, 인구밀도 16,975명/km²을 정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뉴타운'으로 불리는 서울 시내 대규모 재개발로 인한 인구 유입의 영향이 크다. 2009년 12월말 기준 인구는 10,464,051명, 4,116,660세대이고, 인구밀도는 17,289명/km²이다.
서울의 인구증가를 보면 1960년경부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각종 산업이 발전하면서 고용 증대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하게 서울로 집중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무작정 서울로 온 이농 인구 덕분이었다. 서울은 자연증가보다 사회증가에 의하여 과밀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서울에는 교육기관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서울에서 취업을 하거나 생활 터전을 마련한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서울의 높은 전세로 인해 서울의 인구순유출 속도가 한국 도시들 중 가장 빠르며, 2016년 5월을 기점으로 서울 인구가 1,000만명 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000만명을 넘어선 서울의 인구가 28년만에 1000만명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8년 5월 기준으로 서울의 인구는 980만명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대부분의 인구는 경기도로 이동하고 있으며, 세종시나 제주도로의 이동도 이루어지는 역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