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8. 상상 테마27 - 1인분 또는 1인용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혼자다. 단독자인 셈이다. 인간은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런데 혼자라는 감정에 오랫동안 젖어있는 것도 싫어한다. ‘우리’나 ‘식구들’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식사를 자주 하게 될 때, 타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할 때 ‘1인분’과 ‘1인용’은 서러움을 암시해 주는 단어가 된다.
이번 장에선 그런 ‘1인분’과 ‘1인용’ 단어를 활용해 상상을 펼쳐보자. 두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간절함을 내포한다. 그러니 화자나 시적 대상이 가진 간절함에 상상을 입혀보자. 그럴 때 예기치 못한 단어를 붙여보면 상상이 자동적으로 발동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1인분의 어둠’ ‘당신을 부추기는 1인분의 슬픔’ ‘1인분의 노래’ ‘1인분의 아버지’ ‘1인분의 가을’ ‘1인분을 위한 당신의 이별’ ‘1인분의 애도’ ‘1인용 후회’ ‘1인용 죽음’ ‘1인용 풀밭’ ‘1인용 바람’ ‘1인용 바닥’ ‘1인용 반성’ ‘1인용 눈물’ 등의 구절같이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이 만들어지면 시가 자동적으로 샘솟게 된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방부제 / 하린
이혼을 했다
오늘부터 토막이다
상하기 전에 투명 봉지에 넣고 밀봉해줘
태연하게 웃으며 싱싱한 척을 했다
3일 내내 비린내가 진동했고
일요일엔 패배자를 위로하기 위해 전도사들이 왔다
제기랄, 혼자 해도 될 기도를 두 손 꼬옥 부여잡고 했다
냉장고엔 유통기한을, 기름통엔 조절 능력을 채워 넣으며
신은 절대 이혼 같은 건 안 한다고 주절거렸다
저녁엔 불순물처럼 놓여 독주를 마셨다
참고 또 참는 방부제가 되고 싶은데
더 이상 썩어 들어갈 비참은 없을 거야, 확신했는데
토막 난 곳에선 피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비밀번호가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걸
바뀐 비밀번호에 익숙해지면서 깨달았다 ―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2019.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이혼을 한 화자가 토막 난 1인분의 감정에 쌓여 있다. 이혼한 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1인분의 감정’. 그 감정의 문양을 표현하기 위해 이 시를 썼다. 이혼한 지 오래된 화자의 감정이 아니라 이제 막 이혼한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기에, 괜찮은 척하는 심리와 불안을 조금씩 느끼는 심리를 섞어서 시를 전개해 나갔다. “태연하게 웃으며 싱싱한 척”을 하며 화자는 “참고 또 참는 방부제가” 되려 한다. 하지만 주변 사물들이나 사람들이 혼자라는 것을 자꾸 부각시켜서 ‘비참’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자는 “불순물처럼 놓여 독주를” 마시는 것이다.
이 시에 적용된 장점은 냉철한 직관력을 통해 솔직 담백하게 이혼한 화자의 심리를 표출한 점이다. 언술한 내용이 윤리적 발화가 아니라 자의식에 의한 솔직담백한 발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혼한 화자의 존재성이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객관적 상관 현상은 생선 이미지다. “오늘부터 토막이다 상하기 전에 투명 봉지에 넣고 밀봉해줘 태연하게 웃으며 싱싱한 척을 했다 3일 내내 비린내가 진동을 했고”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잘려나간 생선 이미지가 화자의 상태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화자가 괜찮은 척을 하고 싶은 심리도 반영했다. 또 하나의 상관물은 방부제이다. 썩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방부제. 그 방부제를 통해 “썩어 들어갈 비참”을 맞이하기 싫은 화자의 심리를 나타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기 극적으로 하기
필자는 이혼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상상적 체험을 통해 이제 막 이혼한 화자의 심리 상태를 상상했다. 토막이 된 듯한 느낌과 괜찮은 척하는 심리, 그럼에도 혼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식이 없는 상태의 이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심리가 끼어들지 않게 이혼의 이유를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온전히 화자의 심리 상태를 솔직 담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 또 다른 예문
당신의 캐리어 / 김미소
가능한 은신처입니다 내장을 비우고 영원히 잠드는 법을 모색합니다 공원으로 진입하는 바퀴들 씨앗이 돋아날 궁리 중입니다 머리를 내민 채 표정을 물색 중입니다 당신에겐 밤으로부터 발급받은 여권이 놓여 있습니다 1인용 패키지, 동행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젠 날짜 변경선을 넘고 넘어 오랫동안 흘러갈 수 있습니다 환승을 위한 절차는 간단합니다 캐리어를 내려놓고 무사 귀환을 기도합니다 남겨진 환송객들을 위해 당신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주 잠깐 망설입니다 눈을 감고 이산離山하기 좋은 날씨라고 중얼거릴 때, 새들이 날아갑니다 꽃을 한 송이씩 미는 꽃들로 나를 들켰다는 기분이 뜨겁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하늘 아니면 육지이고 안전하고 빠른 이동만이 최선입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잡념이 하나씩 떨어져 내려 이곳과 저곳의 차이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하루는 더 길고 격정적입니다 풍경의 끝에서 플래시가 터져 나옵니다 발가락은 구부린 그대로 박제합니다 어떤 포즈가 적당합니까 지퍼를 열고 그늘과 그늘 사이, 무릎을 구겨 넣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고 우리가 무덤 속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당신에게 몸을 돌리며 속삭입니다 당신, 우린 저 소리를 못들은 체하자고*. 배웅과 마중과 환송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영혼을 잠들게 하는 밤이 완성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묘비명 변용. - 2019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1인용 상자 / 김미정
이렇게 시작하는 상자도 있을까 던져졌다 발길로 차였다 움직이는 것들이 멈춰서 얼음이 되거나 녹아버릴 때가 있어 너무 고요해서 세상 소리들이 투명해질 때 숨을 뱉는 것을 잊어버린 숨을 쉬거나 다시 펴도 흉터만 남은 빈 상자들이 쌓여간다 차인 데 또 차여 폭발하듯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나는 가끔 상자였다 시끄럽고 캄캄한 이름을 불러봐 누군가의 눈빛이 바닥이 되는 순간 손을 맞잡은 모서리가 아프다 예고 없는 불안을 쓸어 담다 나뒹구는 표정들 언제나 어둠은 단호했다 - 《시현실》 2019년 여름호
나는 모든 1인분이다 / 이기영
한, 장, 한, 장 수신호를 완성해 가던 여름이 가지 끝에 이르고 다시 낯선 계절에게로 방향을 틀 때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지겹도록 일관적이어서 어제 같고 무덤 같아서
지겨웠다
나는, 내 목덜미를 타고 도는 불굴의 의지였으나 마지막 구호였으나 밤사이 붉은 장미를 짓이겨 버린 발자국이었다
나의 1인분의 모든 어제와 1인분의 모든 감정과 1인분의 맹독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1인분의 발자국들로 번질 때, 1인분의 농담이 1인분의 멀미가 되지도 못하고 1인분의 입술이 1인분의 심장으로 퍼지는 저녁
나의 1인분과 너의 1인분은 아무리 섞여도 2인분은 아니다
예리한 칼날은 두께를 버리고 모든 틈으로 드나들 수 있다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1인분의 두께를 가졌으므로 어떤 2인분도 될 수 없으므로 -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어제처럼 묻지』, 걷는사람, 2020.
1인용 / 주영금
오늘부터 1인용이다
1인용 햇살 1인용 어둠 1인용 식탁 1인용 밥솥 뒤척임과 상관없는 더블침대 일탈을 꿈꿨던 자발적인 독립의 완성이다
잠을 엎지른 채 탕진하고 일어나 나는 나를 질책한다 혼자인 나를 확인시켜준 적막에게 인사한다 표정 없는 독백과 방백 사이를 먼지들이 내내 서성인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인스턴트 식품처럼 나는 서서히 부패되어 가고 있다
40시간째 보온상태인 밥솥을 연다 찰기 하나 없이 변색되어 와글와글 달라붙어 너의 처량함을 대변하고 있다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사물들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분위기를 먼저 알고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때 식욕마저 분리시켰다면 좋았을 텐데
무능과 무기력 무책임을 차려놓고 밥을 먹는다 애써 참으며 씹고 또 씹는데 보고 말았다 얼룩진 식탁 유리 아래에 미처 버리지 못한 사진들을 채우지 못한 4인용 식탁의 잔상들을... - 《열린시학》 2018년 봄호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저자(하린 시인) 약력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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