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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 1
행 7:1-8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 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행 7:1-8 / [스데반의 설교]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물었다. `이 고소 내용이 사실인가?' 2) 그러자 스데반이 대답하였다.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하란으로 옮겨 가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살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그리고 그에게 그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나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수리아의 하란으로 가서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곳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5) 그러나 그에게는 손바닥만한 땅도 주시지 않았고 또 자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장차 ㄴ) 이 땅이 전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ㄴ. 창17:8) 6) 그 후손들이 ㄷ) 이 땅을 떠나 400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에 가서 노예로 살게 되리라는 것도 일러주셨습니다. (ㄷ. 창15:13) 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ㄹ) `내 백성의 나라가 옛날과 같이 부흥될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이 직접 나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살 것이다. 그들을 건드리며 공격하는 백성이 있으면 내가 즉각 나서서 그들에게 더 무서운 형벌을 내리겠다'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ㄹ. 창15:14,출3:12,렘30:20) 8) 하나님께서는 또 그때 할례의 예식을 아브라함에게 정해 주시면서 그것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자손들간에 계약을 맺는다는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본장은 앞장(행 6:8-15)에 이어서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며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1) 제사장 가야바는 스데반에게 그를 고발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유대인들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행 6:13-14).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내용으로 고발하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피고인 스데반에게 최후 진술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옮기셨느니라(2-4). 스데반은 대제사장이 묻는 질문에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침착하고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모세와 그의 율법을 중시했지만 스데반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언급하고 있습니다(행 6:11, 14). 아브라함이 하란에 오기 전 메소보다미아 곧 갈대 사람의 땅에 살고 있었던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자 그를 장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서 가나안으로 가게 되었습니다(창 11:32-12:5).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5-8) 아브라함은 먼저 가나안 땅 세겜으로 갔습니다(창 12:6).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창 12:7) 벧엘 동편으로 옮겼다가(창 12:8)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돌아왔습니다(창 13:3).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75세에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52년이 지난 137세가 되었을 때(당시 사라의 나이 127세) 비로소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소유로 주신다는 것과 그 후손이 나그네가 된다는 것과 그곳에서 다시 나온다는 것과 할례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언약을 믿고 이삭에게 할례를 시행했으며,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열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적용: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와 형님 같은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조금만 서운해도 보지도 않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버리고 관용을 지닙시다.
존 워너메이커는 183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변두리의 가난한 벽돌공 아들로 태어나 근면한 노력으로 미국 최초로 백화점을 설립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백화점 왕'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노년에 사랑하는 손자에게 자신의 성공비결을 편지에 써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근면,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귀, 말과 행동의 진실함이 고귀함을 만든다. 유능, 일을 신속하게 잘 처리할 능력이 필요하다. 명예, 작은 일에 소홀히 하지 말고 큰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재물, 위 네 가지 덕목을 실천하면 재물은 알아서 따라온다. 행복,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이 있다.”
호크마 주석
=====7:1
이것이 사실이냐 -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거스렸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었다(6:14).당시의 재판 관례에 따르면 피고에게는 고소한 내용에 대해 변명할 수 있는 기회가주어졌다. 그래서 재판장인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고소내용에 대한 사실성 여부를 공식적으로 물었다.
=====7:2
여러분 부형들이여 - 어떤 학자들(Alford, Hervey)에 따르면 스데반이 이설교를 70인역(LXX)을 바탕으로 하여 헬라어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지방에서도 헬라어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식자층(識者層)에서는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스데반 자신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유대인이며 종교지도자들이었고 또 스데반 자신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설교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는 히브리어로 설교했을 가능성이 높다(Meyer). 이 설교가 어떤 언어로 행해졌던간에 본문에 드러나 이 설교의 내용의 독창성과 특이성 또는 그 의미의 심오함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한편 여기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는 말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호칭이다. 특히'부'(父)의 헬라어 '파테레서'(* )는 공회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며'형'(兄)에 해당하는 '아델포이'(* )는 모든 참관자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Lenski). 공회원들이나 고소자들은 스데반을 배교자로 몰아붙였으나 스데반은분을 내거나 욕설로 맞서지 않고 정중히 예의를 갖추고 있다. 아브라함이...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본구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이는 갈대아 우르를 말함, 창 11:31)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창 12:1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다. 이 같은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번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 베푸신 약속을 거듭 되풀이 하신것으로 이해된다(Lenski). 이러한 견해에대해서는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도 동의하고 있다. 여기서 '영광'은 히브리어로 '쉐키나'(* )로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말이다(출 16:7, 10;24:16, 17;33:18, 22;40:34, 35;레 9:6, 23). 이 표현은 시 29:3에서 인용된 것으로 스데반은 이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하나님과 구약성경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서로 동일한 분이심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제약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7:3
네 고향과 친척과 친척을 떠나...땅으로 가라 - 여기서 '내가 네게 보일 땅'이란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한다. 스데반의 논지(論旨)는 이 땅 자체는 '영원한 도성'의 예표로서 의의를 지닐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라는 것이다. 즉 스데반은 보다 핵심적인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는 둔감하면서 외형적 성지 숭배 의식에 젖어 있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경책하고 있는 셈이다.
=====7:4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 창 12:4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고 하란을 떠났다. 유대 신학자 필로(Philo)도 동일한 진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연대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70세때 출생했으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의 나이는 205세였으며 구약 성경에 따르면이 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 그러나 실제로 데라가 죽을때 아브라함은 145세가 되어야하므로 결국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 전에 하란을 떠난 것으로 진술되어야한다. 그래서 P문서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브라함이 데라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고 가정한다. 그렇지만 성경내.외적 증거 자료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후에 하란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데라의 나이에 따른 연대기적 차이는 여전히 남게 된다.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라가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데라가 70세에 첫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아브라함을 낳은 나이를 130세에 낳았다고 가정하면 연대기적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7:5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이 땅을...약속하셨으며 - 혹자에 따르면 스데반이 여기서 아브라함이 매입한 막벧라의 밭과 굴을(창23:16,17)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래서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遺業)을 주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나 막벧라의 밭과 굴은 매장지로서의 목적을 가진것이지 유업의 목적으로서 소유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것이 약속으로 주어졌고 그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것은 그의 자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땅을 유업으로 주고 큰 민족을 이룰것이라'(창 12:2,3)는 말씀은 75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믿기어려운 약속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믿기 어려운 약속을 믿었다는 이 사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롬 4:16-22).
=====7:6
그 씨가...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한 기간을 400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출 12:40은 430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400년이라는 기간을 스데반은 창 15:13에 근거하여 말했을 것이다. 이 400년과 430년의 차이는 유대인들의 수자 개념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들은 정확한 수자를말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 주로 개략적으로 말한다(삿 11:26). 즉 430년은 400년보다정확히 표현한 것이며 400년은 개략적인 연대를 나타낸 것이다.
=====7:7
저희가...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당신의 계획과 섭리가 나타난다. 이 구절은 출 3:12에서 인용된 것으로 출애굽기에서는 '이곳'이 '시내산'이나'호렙산'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약속의 땅'이나 혹은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으로보여진다.
=====7:8
할례의 언약을...행하고 - '할례의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그의백성으로 삼으시는 약속의 증표(證標)다. 스데반이 이 언약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1)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과 (2) 이 언약은 단순히 의식거행의 차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51절).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것은 출 4:18-26의 주제 강해 '할례와 신앙'을 참조하라.
< 설 교 >
아브라함 언약의 역사
사도행전 7:1-16 / 김영규 목사
스데반의 설교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데반은 지금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판장인 공회 의장, 대제사장 가야바가 스데반에게 질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냐?”(1) 스데반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고발자들은 스데반의 혐의를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성전 모독죄이고, 둘째는 율법 모독죄입니다.(행6:13) 스데반의 죄목은 예수님에게 씌웠던 죄목과 똑같습니다. 성전 모독죄는 예수님이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신 것을 왜곡한 것입니다. 율법 모독죄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역시 왜곡한 것입니다. 그 때에도 공회는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재판장도 스데반을 재판한 재판장과 같은 인물입니다. 예수님에게 덮어씌웠던 죄를 스데반에게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공회에 답변하는 대신 이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 이외의 설교로는 성경에서 유일한 평신도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목숨을 건 장엄한 설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복음은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이방으로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 설교는 복음의 진로를 바꿔 놓은 역사적인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설교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에 대한 구약의 역사적인 배경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원 역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를 부르셔서 구원을 약속하심으로써 구원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구원 계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또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그 계시가 성취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인 공회 앞에서 그 점을 辨證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된 족장들의 역사입니다.(1-16절)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모세의 율법보다 우선됨을 주장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그렇게 신격화 하고 신성불가침으로 여기지만 실상 모세의 율법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구원 언약입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이 된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 때문입니다. 둘째 부분은 모세를 통한 구원 역사입니다.(17-43)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태를 책망합니다. 모세를 따르던 백성들은 40년 동안 항상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수시로 대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만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다윗 솔로몬 시대까지의 성전의 역사입니다.(44-53) 유대인들은 예수님이나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헐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매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진정한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오늘은 이 세 부분 중에 첫 번째 부분인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스데반은 먼저 아브라함의 역사를 말씀합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2-4) 스데반은 공회원들을 향해서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부릅니다. fathers and brothers! 같은 혈육이요, 같은 가족이란 뜻입니다. 스데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이나 공회원들이나 같은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언급한 첫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 즉 구원 언약의 우월성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선민 유대인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구원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신성시 하지만 모세보다 더 신성시해야 될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순서상 아브라함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하나님 말씀의 순서도 아브라함이 먼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하시고 그 다음에 모세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우선적인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모세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겼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보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모세를 모독했다고 스데반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중요한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 아브라함 약속 때문에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이 잘못한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아브라함 언약보다 모세의 율법을 더 앞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점은 사도 바울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모세의 율법으로 구원 언약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구원 언약을 돕는 위치에 있는 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의 우월성은 모세에게 매달린 유대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언급한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의 교만을 책망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제자이기 이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받은 것이지, 모세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 아닙니다. 즉, 선민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이지,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선민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랑하려면 모세를 자랑하지 말고 아브라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하려면 율법을 자랑하지 말고, 구원 언약을 자랑해야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선민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났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공장 공장장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도 가장 먼저 받을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똑똑해서 인가요? 아브라함이 착해서인가요? 아니면 아브라함 가문이 좋아서인가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바로 선민이 된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 세계 밖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받은 구원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1-13) 인간의 조건이나 어떤 상황도 고려된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버림받고 아벨은 선택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은 버림받고 이삭은 선택받았습니다. 에서는 버림받고 야곱은 선택받았습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외모입니까? 학벌입니까? 지능입니까? 前科 유무입니까? 財力입니까?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택하신 것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7:7-8)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자랑할 뿐입니다. 혹시 내가 남보다 율법을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 인간적으로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내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 때문에 남을 정죄한다면 너무나 큰 잘못입니다. 지금 스데반을 재판하는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로 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으로 남들을 정죄합니다. 자기는 은혜로 구원받고 남은 율법으로 정죄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남들을 율법으로 열심히 정죄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지금 공회원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정죄합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왜 정죄합니까? 그리고 죄 없는 나를 잡아서 모세를 모독했다고 죽이려 합니까? 정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한 아브라함
구원 언약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자녀로 만든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 언약은 단순히 하나님 자녀로 만들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구원 언약은 성도 삶의 근거입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이 구원 언약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의지하고 산 사람이 아니라, 구원 언약을 믿고 의지하고 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를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언약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5-8)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는지 보세요. 아브라함은 일평생 아무 소유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땅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 하셨지만 아브라함 당대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이주했습니다. 다시 하란을 떠나라고 하셔서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원주민들이 있을 뿐, 아브라함은 농지든지 집지을 땅이든지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이주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지만 땅은 여전히 원주민 손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그 땅에서 유일하게 자기 소유를 삼은 것은 자기가 죽어서 묻힐 매장지뿐이었습니다. 자손도 마찬가집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혹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리라 하셨지만 20년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땅도 없고 상속자도 없는 인생!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항상 앞날을 낙관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를 복주리라.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흔들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항상 강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자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 하고 남에게 내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선민의 확실한 표식, 즉 구원의 표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는 자손 대대로 몸에 선민의 표식을 새기는 겁니다. 그 표식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식에 담긴 구원 약속이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믿음은 연약한 단계에서부터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외아들을 제물로 바칠 정도로 굳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부르셔서 점점 그 믿음을 성숙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적든지 많든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자손에게 계속되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이후 400년이 지나도록 그 자손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손들은 애굽에 가서 400년 동안 땅도 소유도 없는 노예 생활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그들의 삶을 지탱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필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들로 그 땅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손으로 창대하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율법 때문에 지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 때문에 모든 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현재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믿고 의지하면서 참고 견디세요. 참고 견디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도 시험에 든 우리를 이기기까지 참고 견디십니다. 그래서 필경은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13-15)
요셉이 야곱 가족을 구원하다
스데반은 아브라함 얘기를 하면서 마지막 족장인 요셉의 얘기로 말씀을 맺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야곱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선지자요 구원자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열 한 별과 해와 달이 요셉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장차 요셉의 형제들과 부모까지 요셉의 손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꿈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이 꿈을 몹시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요셉이 감히 형들의 우두머리가 되다니? 형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전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때에 형들이 요셉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다!”(창37:20)
하나님은 요셉에게 계시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야곱의 형제들은 자기 동생이 애굽의 총리인 줄 모르고 그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인 줄 알면서도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 그 자손 모두를 애굽으로 불러들여 평안히 살도록 축복해 줬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형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여러 면에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우선 형제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이 시기하여 노예로 팔았습니다. 죽음에 내 몰린 겁니다. 요셉은 아무 잘못도 없이 종살이를 하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셉을 높여서 천하제일의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모든 죄를 용서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부모형제와 그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 모든 흉년 중에 생존하도록 축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요셉의 구원자 역할을 거부했던 형제들이지만, 두 번째 요셉을 대면했을 때는 모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습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이러한 요셉 형제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창50:18)
이제 스데반 얘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스데반은 지금 요셉 얘기를 통해서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과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선지자 됨과, 구원자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으라고 구덩이에 던지고,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야곱 가족을 구원하셨다. 이제 너희들도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 분을 통해서 너희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내게 물었다. 내가 율법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했느냐고? 그러나 나는 잘못이 없다. 오히려 참 구원자인 예수를 전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심문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심문하라! 내 죄를 묻지 말고, 너희 자신의 죄를 물어라!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아야 한다!”
우리는 율법의 자녀가 아니라 언약의 자녀다
오늘 우리는 율법의 자손이 아닙니다. 언약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제자들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자손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언약은 용서하고 구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도저히 하나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세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첫째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셋째로,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7:1-50 / 이명규 목사
오늘은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을 통하여 그리고 설교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같이 보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나의 믿음의 태도와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 어려운 환경과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기도하였지만 낙심하였고, 불안하였고, 의심하였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깨달아 하나님을 알았을 때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듯이 희망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환경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에 낙심이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예레미야애가3:3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15살된 [마가레트]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목이 아파서 어느 날 병원에 가보았더니 급성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부모들이 너무나 괴로워서 속으로 울면서 말을 못합니다. 4개월 시한부 인생인데 부모들이 말을 못하다가 마지막에 이제는 알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지 5분이 지나고 난 후에 [마가레트]가 마치 그 고통을 극복하고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고 하던 [제임스 D. 로스]라고 하는 불가지론자가 신앙의 인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가레트]라는 전기를 썼습니다. 마가레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확신하였고 또한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환경을 이기고 문제를 이기고 하나님안에 있는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확신함으로 모든 환경과 시련과 핍박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8:38을 보십시오!
인생의 노년에 노인으로서 감옥에 들어가있었을 때에도 그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십니까? 디모데후서1:12을 보십시오!
“이를 인해 내가 또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
한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
실 줄을 확신함이라.” 는 말씀같이 노년에 감옥에서 그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능히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확신하고 있으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기 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아브라함을 통해서)
1. 약속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기 위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불렀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곳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당시에 갈대아 우르는 보석 세공품이 발달되어 있었고, 그 지역에 도서관과 대학도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적인 수준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입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 홀로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축복을 약속하였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사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룰 때 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2. 당신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레미야33:2-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한ㄴ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와 만나 말씀하시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는 달리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의 삶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약속하신 축복을 이룰 때 까지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믿고 따랐을 때도 인도하였고,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그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도하였습니다.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와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언제까지 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룰 때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이 있다면 그 약속이 이룰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년에 [윈스틴 처칠]은 자신의 모교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교장이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역사적인 순간이다. 윈스틴 처칠은 가장 훌륭한 연설가이다. 그의 연설을 모두 받아 적도록 해라. 잊을 수 없는 연설이 될 것이다.”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처칠은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Never Give Up! “Never Give Up! “Never Give Up!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는 이 말만을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습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실망했지만 교장은 이 연설이 처칠의 가장 훌륭한 연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연설은 처칠의 특성인 끈기가 한마디로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끈기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다른 나라들이 모두 항복했을 때에도 영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서 하신 약속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약속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믿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귀한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장서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9-19)
(요셉을 통하여)
스데반의 설교중에 그 당시 가장 뛰어났던 국가의 국무총리까지 올랐던 노예 소년 요셉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매혹적인 모자이크 그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셉을 통하여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보다 앞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9절-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목적지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저 계속과 골짜기이지만 주님은 그 너머를 보십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을 어려움도 알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구덩이에 헛디뎌 빠지지 않게 우리들 앞서 인도하십니다.
인생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러나 길을 아는 분이 옆에 있다면 그 길이 아무리 황량한 광야길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광야와 같은 인생을 지나가야 하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신실하게, 우리 보다 앞서서 그러나 때로는 먼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린 그분의 인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아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우리 앞에 있을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보다 앞서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앞질러 가려 마십시오, 따라가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씩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105편 17-19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차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을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비전, 축복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보다 앞서 인도하십니다. 요셉처럼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찬송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3.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1.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환경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국법으로 죽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1-22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히브리인들의 아이들은 다 죽이는 그 환경에서 더 이상 모세의 부모가 숨길 수 없어 하나님을 의지하며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버렸으나 하나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40이 되어 애굽사람을 죽이고 도주하였을 때도 가장 좋은 곳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여 보호하였고, 80이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광야40년동안 생활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78:52,53절 말씀입니다.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우리가 홍해 속으로 들아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가시면 그곳이 안전한 곳입니다.
4.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고통스런 이 시대에서 우리가 내가 주의 인도를 받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1. 우리는 주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비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당신은 최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계십니까?
우리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 당황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무의미한 반복적인 사이클에 너무나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까닭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린 이렇게 사는 거에요,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회사에서 직장에서 일하고, 그리고 시간되면 퇴근하고 그냥 그렇게 우리는 반복적인 싸이클에 익숙해져서 내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구체적인 기도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바꿔 말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 인생에 새로운 꿈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주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좀 도와 주십시요. 주님 좀 인도해 주십시요. 이런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열망을 주 앞에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어느날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의 비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환상을 본 것입니다. 환상을 보자마자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꿈이, 그 비전이 그들의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주께서는 끊임없이 약속을 되풀이 하십니다. 말세에 내가 나의 종 들에게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러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
꿈을 주시는 하나님, 비젼을 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찬란한 꿈과 비젼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달리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눈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비젼을 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다면 먼저 이 비젼을 봐야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젼을 보는 순간 내 인생을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아직도 내 인생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시다. 내가 살아야 할 그리고 내가 걸어가면서 해야 할 내 인생의 마지막 계획이 남아있다. 이 계획이 이룰 때 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 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2.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기 위해서 의지해야 할 그 중요한 . 방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들었듯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자신을 부르시고, 주시는 사명의 말씀을 들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5.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당신은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이스라엘백성들- 우상숭배
41절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 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
다윗 - 하나님의 처소를 짓기를 사모함
44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이 모세 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6절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 하나님의 성전을 지음
당신은 어떻게 대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시고 그 축복을 이룰 때까지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영광의 하나님. 나타나시다
김상복 목사 / 행 7:1-8
최근에 미국에는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대한 큰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론이란, 우주와 생명체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고도의 지적 존재가 디자인하여 생겨났다는 학설입니다. 우리의 눈을 봅시다. 그 생김새나 각막구조를 살펴보면 최고의 기술로 만든 그 어떤 렌즈보다 더 뛰어납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흐른다 해도 눈과 같은 정교한 조직이 우연히, 또는 저절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어느 학자는 확률적으로 볼 때 이런 세밀한 구조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우주와 자연과 생명체에는 엄청난 디자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설계는 오직 지식과 지혜로 과학을 꿰뚫고 있는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 도브의 교육위원회에서 이 학설을 과학교과서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논쟁 후 투표에서 져 축출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주에 미국의 CNN 뉴스 등 여러 매스컴을 통해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과학교과서에 두 학설의 과학적 증거를 모두 실어 학생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지적 설계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적 설계론을 종교로 보고 왜 과학교과서에 종교를 넣으려 하느냐며 전국적으로 재판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물론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도 있지만, 주된 입장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화론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가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가스로 충만해있었으며, 이 가스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압축되고 폭발(Big Bang)하여 물질들이 흩어짐으로써 하늘에 수십억 개의 별들이 생겨났고 지구도 그때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시대기의 부글부글 끓는 화합물의 혼합체(primordial soup)에 번개가 내리치니 거기서 유기물질이 생겨났고, 우연히 단세포생명체가 생겨나더니,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더니, 어느 날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지요. 이처럼 진화론이 내세우는 증거들이 서로 잘 연결되지 않고 그 과정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요즘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성인들도 진화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진화론을 믿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 중부지방인 인디애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주제로 토론회를 열기 위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과학자 한 분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적 설계론자와의 토론회에 나서는 진화론 학자를 찾기가 아마 힘들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인디애나에 있는 대학들과 과학관련 연구소들의 과학자들에게 토론자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과연 그의 말처럼 아무도 나서지를 않아 결국 토론회가 아닌 초청강연회가 되고 말았지요.
지적 설계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벽돌 수백만 장을 공중에서 떨어뜨린다고 저절로 할렐루야 교회 건물이 지어질 수 있을까요? 건축에 대한 설계사의 아이디어와 계획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죠. 또 설계를 이해하고 그대로 시공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됩니다. 원숭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아무리 오래 자기 맘대로 두드린다고 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오겠습니까? 셰익스피어라는 지적인 천재가 있었기에 리어왕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와 생명체와 우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이 있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매순간 선택해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에 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골프치기로 선택한 사람은 골프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선택하며 삽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선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얘기합니다. 대제사장은 “이것이 사실이냐?”(행7:1)며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 뒷부분을 보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했다느니, 모세 율법을 다 고치겠다고 했다느니 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신 적은 있으며, 모세율법의 참 뜻을 바로잡아 설명하신 적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여 죽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스데반마저 죽이기 위해, 없는 말은 만들고 있는 말은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참과 거짓 중에서 거짓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필요한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진화론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는 싫으니 하나님 없이 우주를 설명해야 했고, 그래서 그저 생명이 저절로 생겨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렇게 저렇게 진화되었다고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설명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설득적인 학설인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는 진화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창조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체가 우연히 저절로 생성되었다는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바늘 끝보다 작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합쳐지고 거기에서 무려 206개의 뼈가 생성되는 일이 어떻게 저절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 안에 미국전역을 세 번이나 왕래할 정도로 긴 핏줄과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너무도 절묘하게 연결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는데, 어찌 이를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가 생성되던 자리에 우리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지만, 두 주장 중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 설명을 한다고 판단되는 지적 설계론에 정당성을 실어주기 시작하자 진화론자들은 반발하고 나섭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 대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열두 지파, 요셉, 모세 및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할례 등 장구한 역사 이야기를, 예수님을 죽이고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해줍니다. 그 긴 설명의 요점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두 갈래의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한 사람과 불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절). 여기에서 “부”는 어른들이요, “형”은 형제들입니다. 즉 동족과 친척과 동창생들을 말합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부를 못했거나 무식하거나 옛날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책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다. 현대인이라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가 속이 상해서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만 현대인이냐? 우리도 현대인이다. 당신이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타는 것처럼, 우리도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탄다. 어떻게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당신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사람은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내가 구식이란 말인가? 당신처럼 나도 박사학위가 있으며, 오히려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당신의 학위가 내 학위보다 더 오래 됐다.’ 이렇게 썼습니다.
신앙도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며 순종하며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이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과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따르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12:4). 75세에 옮기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분당에서 수지로 옮기라면 괜찮겠지만, 한국을 떠나 저 케냐로 가라 한다면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26년을 살다가 51세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저의 그 때 사진을 보며 웃기도 하지만, 제가 아직 젊었던 51세에 한국에서 재출발하라 했을 때도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 2년2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75세에 떠나라고 했는데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는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로 노인들이 “아멘!”하시는 것 같네요. 최근 60을 바라보는 어떤 집사님의 출판사 개업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신이 났습니다.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언제나 떠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2. 노예들과 노예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400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6절) 하였습니다. ‘그 씨’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키고, ‘다른 땅’은 애굽을 가리키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누가 여러분을 고생 시킵니까? 나는 고생을 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평생 모든 일에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선과 의와 섬김을 선택해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있고 축복의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7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마지막에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사람들이 절대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많은 선택을 통해 결정을 해야 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도 아브라함처럼, 일평생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사 예수 믿게 하신 그 목적이 내 삶에서 현실적으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입술에 선택되어야 합니다.
4.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할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8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를 시작했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하여 몸을 깨끗하게 해줬습니다. 할례란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아들인 줄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입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영원히 축복하신 아기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좋은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할례도 받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이 계시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세례는 간단한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거나 완전하다거나 부족함을 극복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인지라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혹시 담배를 끊지 못해서 세례를 안 받고 계십니까? 담배는 몸과 상관있지 세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에 결단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세례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금연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5.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례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있고, 아브라함의 집안에 사라와 하갈이 있으며, 이삭이 있는가하면 또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언제나 두 길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기 때문에 지난주에도 수십 명이 폭탄테러로 죽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이 세 개의 호텔에서 폭탄을 터트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살립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 것인지 직접 선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있는가하면 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두 그룹이 섞여 있습니다. 요셉이 있는가하면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동생을 죽이려 하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사람을 죽이는 부류가 있고, 요셉처럼 고난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가족과 부모형제들과 애굽과 이스라엘을 살린 것처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살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뜻을 선택한 우리들은 요셉과 같이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하며 살기 바랍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새롭게 선택하십시오. 영원한 천국의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선과 의와 사랑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매일 매일이 선택입니다. 여호수아가 “오늘날 택하라” 하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대답한 것과 같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선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
이정익목사 / 행 6:3-6
오늘은 장로 취임 및 장립, 권사 취임 임직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임직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려 합니다. 그리고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직분자들도 자신의 직분을 잘 감당했으면 합니다. 임직은 위로부터 오는 소명입니다. 임직자들은 진지한 마음으로 이 직분을 받고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위치가 되면 혹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그런 자격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고, 또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과연 이런 직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이 직분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에는 누구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전에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하고 또 임직 후에는 그 중심이 더욱 익어가야 합니다. 직분자는 마음가짐이나 자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그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성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개종해 오는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밀려들어오는 성도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놓치는 일들이 생겨났고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래서 제도를 개혁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집사를 선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를 관리하는 것은 그들에게 맡기고 말씀전파에만 전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집사 7명이 선출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때 집사를 선출하는 기준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3절 말씀에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만은 헬라어로 “프레레스”(preles) 라는 말입니다. 이는 “가득 차서”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 충만의 기준을 “철철 넘침”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은 “성령의 의지 속에 내가 머무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은 내 의지, 내 생각, 내 판단의 기준, 내 중심이 성령에 기준을 둔 상태를 말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전까지는 모든 것의 기준이 내 기준, 내 판단, 내 생각, 내 뜻 대로였다면 지금부터는 내 중심이 아니고 성령의 중심으로, 생각으로, 판단으로, 주장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직분자는 이 기준으로 변화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역할 때, 헌신할 때 내가 축소되고 하나님의 뜻이 커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영적 생활은 내 지식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내 의지, 내 생각이 앞서면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가 흔들리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분자는 먼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내 생각, 내 중심,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중심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충만한 삶입니다.
지혜 충만한 사람
또 본문에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지혜의 원천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지혜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꾀입니다. 요즘 보이스 피싱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얼마나 감쪽같이 속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공직에 있는 사람조차도 쉽게 넘어갈 정도입니다. 그로 인해 통장에 들어있는 돈을 감쪽같이 빼앗긴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교묘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그 보이스 피싱으로 돈을 빼간 사람들의 돈을 또 뺏어간 사람들이 붙잡혔다고 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입니다. 지혜의 첨단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사람의 꾀입니다. 즉 아래로부터 주어진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을 “소피아”(sopia)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온 지혜, 소피아입니다.
오늘 세상을 보면 위로부터 온 지혜보다 아래로부터 주어진 꾀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매일 속았다는 뉴스가 터져 나옵니다. 꾀는 자기 유익을 우선합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이어서 공동체에 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줍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직분자가 지혜가 충만한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직분자는 위로부터 온 지혜가 있는 자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매사 하나님 뜻을 우선하게 되고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교회공동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소피아의 지혜가 덕을 쌓는 지혜입니다. 모두를 섬기고 헌신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직분자는 말 보다 언제나 이 지혜가 앞서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자와 지혜 충만한 자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사람
본문에는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칭찬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직분자는 먼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직분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고 좋아합니다. 그의 말이라면 믿고 그의 판단이라면 존중합니다. 그런데 다 그렇게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늘 까칠해서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람 의견이라면 한번 더 재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칭찬받지는 못할망정 비난받고 살겠습니까? 더구나 직분자가 그렇게 비난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직분자는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는 그 직함에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함 속에는 예수가 들어있고 하나님이 들어있고 교회가 들어 있습니다. 직분자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한사람 개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직함은 함부로 받을 일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으면 받지 말아야 합니다. 감당할 만큼 믿음을 성숙시킨 후에 받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는 인정받습니다. 믿음생활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가서, 사회에 가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장로를 선출할 때 그 분이 다니는 직장에 가서까지 투표하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직분자는 물론 교회 안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서도 그곳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직분자가 칭찬까지는 못 받아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임직을 하게 되면 한가지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평안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안수를 받게 되면 각오를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을 포기하고 개인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호화로운 삶도 유행을 따르는 삶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직분을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잠 다 자고 평안 다 누리고 유행 따라 살 것 다 살면 어떻게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직분자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향상하는 자세입니다.
향상하는 삶
직분자가 되면 누구나 처음에는 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력도 하고 수고도 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면 타성에 젖게 됩니다. 직분에 안주하고 그 직분을 과시하기도 하며 권위적이 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것을 자신은 모릅니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예민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보기에 역겨워지는 것이고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3가지 자질을 가진 7명의 집사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관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나서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7절에는 교회가 점점 왕성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뿐 아니고 허다한 제사장들도 믿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교회 조직정비가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의도한대로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성공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7명의 집사들이 사도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그 7명은 집사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후 그들의 모습이 월등하게 발전하고 향상하여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 스데반은 특별하였습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병자들을 고치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죽기 전까지도 그는 전도를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출애굽을 말하다가 “광야에서 백성들이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다 죽었지 않느냐 당신들도 회개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심판받으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듣다가 화가 나서 돌을 들어 스데반을 내리쳤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서는 문이 열리면서 주님이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려다 보셨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내가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더 열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또 빌립은 성령에 충만하여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공무를 마치고 마차를 타고 귀로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빌립은 “빨리 가서 성경을 가르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내시는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통해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우던 내시는 조금 가다가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자 “나에게 세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 직분이 무엇이든 몫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직분을 가지고 폼 잡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 직분을 감당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께서 그렇게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성령이 나를 움직이게, 일하게, 전하게, 사역하게 하십니다. 그동안 직분 받은 분들과 오늘 임직하는 직분자들 모두에게 권합니다. 직분을 받고 유기하거나 감당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 직분을 받고 폼이나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먼저는 사람들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고 다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가지고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에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말에나 행동에나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성에 젖지 않도록 늘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교만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려운 일은 먼저 나서서 시행하고 솔선수범하여야 합니다.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허드렛일이나 힘든 식당 봉사에 앞장서십시오. 섬기십시오.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매사 성령께 의존하십시오. 그러면 승리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한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장로도 아니었고 집사나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도 감동적으로 직분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은 직책입니다. 산헤드린 의회 의원은 그 사회의 유지였고 지도자였습니다. 그 당시는 누구도 그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3년 동안 공생애를 위해서 동분서주할 때 그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다닐 때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박수 받을 때 요셉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는 그 때, 유대법에 의하면 저물기 전 빨리 시신을 무덤에 장사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한 상태였고 그 주위에는 여인들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 일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하고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도 이 일을 누가 처리하는가 보자하고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리마대 요셉이 나섰습니다. 마가복음 16장 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의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의 제자였다는 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제자인 것은 누구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숨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그 아리마대 요셉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딱 나서서 궂은 일을, 어려운 일을, 아주 위험한 일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그는 빌라도를 찾아가 담판하여 예수의 시체를 인수해서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공개하고 나서면 당장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날로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일신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서야 할 시점을 알았을 때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용감하고 과감하게 나서서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설사 불이익이 주어진다 해도, 정치생명이 끝난다 해도, 일신상의 어려움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각오하고 턱 나서서 난제를 풀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그 장례를 치루고 난 후에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후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은 다 뭐했느냐, 예수님 장례를 누가 치루었느냐, 내가 치루지 않았느냐, 내가 장례를 치룰 때 너희들은 어디 갔었느냐, 그때 당신들은 어디 가서 숨었었느냐,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냐, 당신들이 할 일을 내가 다 하지 않았느냐”하고 공치사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일을 자랑하거나 내세우거나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궂은 일을 다 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직분을 잘 감당하십시오. 일을 수행할 때 늘 주님께 묻고 행동하십시오. 늘 주님께 묻고 판단하고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살피십시오. 나를 세우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는 모든 일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행 7장 8절 / 양향모목사(광성교회)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가도 사회도 가정도 내 자신도 이런 약속과 약속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도 백성들 사이의 약속을 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사회도 규약이나 제도들을 통하여 서로간의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도 부부간의 약속과 가족들 간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들은 공통적으로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가 그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삽니다. 약속을 서로 잘 지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려면 좋은 가정이 되려면 또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면 모든 사람들이 이 약속을 지킨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나 자신도 약속을 지키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런 약속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또 그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주시면 인간은 그 약속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풍습대로 자기가 생각해서 옳은 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 반복해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시고 또 언약을 믿는 사람들이 받은 복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신 하나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스데반이 창세기 17장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는 것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자 그 언약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이삭이 야곱을 낳았고 야곱이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좀 더 자세하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할례의 언약을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할례 언약을 언제 받았는지를 살펴보면 왜 이렇게 언약을 주시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도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기들의 생각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의 약속이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처음 약속은 에덴동산에서의 약속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을 허락하시고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만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각할 때 그 약속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탄의 유혹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자신들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는데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못 먹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노아 홍수 때의 이야기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들이 너무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들을 만드셨음을 후회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방주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비가 오지 않는 세상에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홍수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고 방주를 만들고 거기 들어가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하냐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서 만든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면 탑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고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래의 큰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지 못할 것임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실천할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 되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따라 살기를 좋아했습니다.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했지만 가나안보다 살기 좋은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바로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세상의 풍습대로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 생기지 않으니까 자기 집에서 키운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씨에서 나온 자손으로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에게 들어가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고 그 아들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고향을 떠났고 10년 동안 아이가 없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종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셨는지 그 후 15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15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할례언약을 주시고 그 약속을 다시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이 할례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였음에 대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 인간들과 다른 전능한 하나님인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질책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만드시고 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기록을 믿지 못합니다. 특별히 좀 배웠다는 지식인들은 알량한 그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을 믿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동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풍습을 따라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하였음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있는 사람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 약속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지저분하게 인간의 생각대로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였고 사라가 90세였으니까 물론 지금 우리의 나이로 비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동안 아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불가능한 일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믿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약속들을 주십니다.
아브라함도 원래 이름이 아브람이었으나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라도 원래 이름은 사래였으나 사라로 바꾸게 하시고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의 남자들에게 포피를 베게 하는 할례의식을 행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그 약속들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약속의 상징들을 만들어 주시면서 제발 약속을 잊지 말고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마다 사라를 부를 때 마다 그 이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나는 열국의 아버지다, 민족의 어머니다) 남자들이 자신의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순히 이 약속을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때도 믿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궁시렁 거립니다. 내 나이 이미 99세고 아내도 90세라 이미 생리도 멈춘 후인데 무슨 나와 아내 사이에 아이가 있단 말인가 믿는다고 대답은 하지만 글쎄 되어 봐야 되는 것이지 하고 진짜 믿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자가 내년 이만 때쯤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웃었다고 했습니다.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 이름이 이삭인데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믿음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어떻게 믿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약속들을 해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나가시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점점 강해졌고 드디어 완전한 믿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이 할례언약 이야기를 하는 이유
스데반이 지금 자기 생명이 달린 재판을 받으면서 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며 왜 할례언약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복음만 선포하면 되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할례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할례를 받고 할례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할례의 의미를 잘 모르고 할례만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표식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셨으니까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말고 다른 민족들처럼 살지 말고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러 세우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을 주실 것과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과 세상 만민들이 그의 자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가나안 땅인 영원한 천국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나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에 대한 자부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만 할례를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고 그 후손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약속이 성취되어서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서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런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그와 맺었던 할례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그 할례언약의 의미가 무엇인 줄 알고 그 할례언약을 통해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을 교훈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할례가 지금 우리가 받은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언약을 주시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때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 -16).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그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도 아브라함의 때처럼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중요하게 보이고 미래의 일보다는 지금 현재의 일들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일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또 그 하나님 나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증거들이 없어서 불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기가 힘이 듭니다.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는 하지만 약속을 꼭 이행한다는 보증이 없기 때문에 믿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훈련을 시켰고 오늘날 우리도 그런 훈련을 통하여 강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의 영원한 하나님나라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훈련을 통해서 이 믿음을 더 튼튼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야 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은 세상 풍습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적으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일에 올인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 교회를 중심으로 헌신하면서 사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 일이 더 중요해 보이고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연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힘들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말씀대로 살아보아야 합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믿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약속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언약을 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는 세례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가나안 땅을 차지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나라에서 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를 사모하며 기다리며 그 나라를 향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믿음으로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행 7장 8~16절 / 황유석목사(은혜교회)
사도행전을 설교하다 스데반의 설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사도행전을 설교하려고 한다.
지난주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보내는 장면까지 설교했다.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를 묵상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이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했다. 아브라함의 종은 왜 물을 직접 떠먹지 않고 리브가에게 부탁했을까? 우물이 앞에 있었는데.., 그리고 리브가 입장에서도 처음 본 사람이 그런 부탁을 했다면 충분히 ‘저기 우물이 있으니 떠 먹으세요’라고 말하고 갈길 가면 그만인데.., 리브가는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종의 부탁을 받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아브라함의 종에게 주었고, 그가 몰고 온 약대들에게도 물을 먹였다. 어떤 분이 약대들이 먹는 물의 양과 당시 두레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연구했는데 리브가가 약대들을 물 먹이는데 3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리브가는 세상적으로는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 처음 본 사람, 나이 많고, 여행을 오래 해서 초라해 보이는 나그네가 물 좀 달라고 했을 때에 외면하면 그만인데 리브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그가 몰고 온 약대에게까지 물을 먹인다. 그것도 3시간이나 낭비하면서..
그런데 리브가는 어리석어 보이지도 않는다. 리브가가 나그네와 약떼들에게 물 먹이는 일을 마친 후에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게 준비해 온 보물을 주었고, 이삭의 아내로 선택했다. 리브가는 좋은 것을 얻었다. 보물도 얻었고, 남편도 얻었다. 리브가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을수 있었을까? 리브가에게는 복을 담을 수 있는 ‘친절과 봉사’라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브가를 묵상하면서 내 인생을 돌아봤다. 나이 많고, 여행을 오래 해서, 행색이 초라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에게 왔듯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에게 온 사람은 없었을까? 그런데 내가 좀 더 친절하지 못하고, 좀 더 섬겨주지 못해서 리브가가 받은 복이 나에게 거의 다 왔다가 없어진 것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인사>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친절과 봉사’라는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지를 확인하신다. 그리고 복을 주신다. ‘친절과 봉사’는 음식점이나 택시 회사의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다. 이번 한주간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정말 많다. 왜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특별한 은혜, 남다른 축복을 이렇게 많이 주셨을까? 우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친절, 그리고 봉사가 복을 받을수 있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그 그릇에 복을 담아주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나? 지금보다 조금만 더 친절하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봉사하는 인생 살기를 바란다. 친절과 봉사의 수준만큼 하나님이 복을 담아주실 것이다.
<행7:8>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서 이삭을 낳았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12아들 중 11번째가 요셉이다. 요셉은 꿈이 있는 아들이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9절> 그런 요셉을 형제들은 시기 질투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 질투한 것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평생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시기는 뼈를 썩게 하고,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뼈는 피 만드는 공장이기 때문에 건강의 기본인데 시기하고 질투하면 뼈가 망가지고 결국 건강이 무너진다.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뼈의 양약이라’고 말한다. 또 ‘선한 말은 마음의 양약이라’고 말한다. 시기 질투로 몸을 망가뜨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즐거움과 선한 말로 건강한 인생 살기를 바란다.
또 시기는 인생을 추하게 만든다. 리비아 사막에서 경건하게 살고 있는 수도사를 유혹하려고 사단이 별짓을 다했다. 그럼에도 죄에 빠뜨릴 수가 없었다. 거듭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대장 마귀 曰 “너희들 방법은 너무 조잡해”라고 말하며 경건한 수도사에게 가서 귀속 말로 한마디 했다. “당신 친구가 이번에 주교가 되었어.” 수도사는 금새 얼굴 표정이 확 바뀌었다. 시기심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사용하는 최고, 최후의 무기이다.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방법이 있다.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함으로 극복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외모를 말하기도 하지만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 다 사라지기를 바란다. <찬양> 아름다운 마음들 ~
본문을 보라. 시기한 사람이 잘됐을까? 시기 받은 사람이 잘됐을까?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돈도 생겼다. 이제 아버지가 요셉만 예뻐하는 모습을 볼 일이 없어졌다.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이 승리한 것일까? 아니다. 나중에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 시기하는 사람이 잘되는 일은 없다. 열심을 내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사랑과 시기이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도 열심을 내고,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도 열심을 낸다. 겉으로는 똑같은 열심이지만 열심의 동기가 시기심인 사람은 어떤 순간이 오면 푹 주저앉는다. 어떤 일을 하든 동기가 사랑이기를 바란다.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이 죽였다고 거짓말 하고, 나중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자기들이 별것도 아닌 시기심 때문에 종으로 팔아버린 요셉이 국무총리인 것을 알고 두려워 떤다. 시기심, 질투심과 상관없는 은혜로운 인생 살기를 축복한다.
시기심이 마음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순종해도 딱 한가지는 순종을 못한다. ‘웃는 이와 함께 웃는 것.’ 이것은 순종이 불가능하다. 시기심이 있으면 절대 웃는 이와 함께 웃을 수가 없다. 이런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한다. ‘목사님, 저는 시기심 그런거 없어요.’
내가 시기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군가 ‘잘됐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어떤 마음이 드냐? 를 보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시기심이 있나, 없나를 알 수 있다.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진심으로 너무 좋다면 나는 그 집사님은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하는 일이 잘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음이 좋지도 않고, 편치도 않고, 그렇다고 꼭 기분이 나쁜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 마음에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 3월 첫째 주일, 우리 교회에, 우리 각사람의 심령에 하늘의 불이 임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성령의 불로 불태워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땀 흘리며, 힘을 다해, 가진 은사를 사용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는 동기가 시기가 아니라 사랑이기를 축복한다.
<9절> ‘ ~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하나님이 한가지 질문을 주셨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하나님은 왜 요셉이 형제들에게 종으로 팔리도록 가만두셨을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리는 것을 막아주시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자 했을 때에 하늘의 불을 떨어뜨려서 형제들을 혼내줘야 하는게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파는 것을 가만두셨다.
<10절> 하나님은 나중에는 요셉을 ‘그 모든 환란에서 건져내 주셨다.’ 이왕이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기 전에 건져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요셉 입장이었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면 왜 내가 억울하게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굽에 팔려가야 했을까? 왜 하나님은 그걸 막아주지 않으셨나요?’
사실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고 하면서’ 왜 지금 나의 아픔, 눈물, 고난,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나요? 하나님, 졸고 계신가요? 주무시고 계신가요? 아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는 것을 가만두셨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자 하나님도 그곳에 같이 가셨다.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것을 가만두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마치 못보신 것처럼 가만두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싫어서, 미워서.., 도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내가 힘든 걸 못 본척 하고 가만두실까?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신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데는 반드시 겪어야 할 고난이 있다. 고난 없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난이 없이 큰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난이 없이 위대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하나님과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자기 자녀가 고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가정에서 위대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야단맞는 것도 못 견딘다고 한다. 자녀가 직장 다니면서 상사에게, 사장님에게 이런저런 일로 야단맞았다고 하면 본인보다 부모가 못 견딘다. ‘감히 내 아들을 야단쳐.. 관둬. 거기서 월급 주는거 엄마가 용돈주마.’ 그러니 나이는 먹어가는데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식 이쁘다고, 어디가서 꿀리면 안된다고 좋은차 사주고, 좋은 옷 입힌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자식 사람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부모가 가진 돈으로, 부모가 가진 인맥으로, 부모가 가진 힘으로 조금만 도와주면 자녀가 지금 당하는 고난을 잠시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식 사람 만들기 힘들다. 예전에는 돈으로 군대를 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 부모의 노력이 과연 진정 자식을 위한 일일까?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 일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었은즉.’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시키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 입학시키시고, 그 고난학교에서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시키시고,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다 배우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서 졸업시키실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새벽예배 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특별새벽기도회도 아닌데 새벽예배를 나온다. 또 ‘십일조 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십일조를 내기 시작한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 그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 것이다.
[고구마 전도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기동 집사님의 간증에 ‘주일날 설악산에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김기동 집사님은 그 고난을 통해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 주일날은 놀러가면 안되는구나. 주일날은 예배해야 하는구나.’
고난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을 훈련시키는 것이라면, 고난은 하나님이 몸을 치시고, 물질을 치시고, 인간관계를 치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훈련방법이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은 전부 다 고난학교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고난학교 졸업장이 있는 요셉을 하나님은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셨고, 고난학교 졸업장이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지도자로 세우셨다. 지금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고난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이 고난학교를 입학한 것이다. 요셉은 고난학교를 입학한 후에 다양한 고난을 만나면서 순종을 훈련받았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이 교장선생님인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배웠다. 마치 고난을 당할 때마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것 같았다. ‘너 이것도 순종할 수 있니, 이것이 견딜 수 있니?’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은 요셉에게 고난학교 졸업장을 주셨다.
모세, 40살이 되어서 고난학교에 입학했다. 동족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고난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80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난학교 졸업장을 주셨고, 하나님은 고난학교 졸업장을 받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지도자로 사용하셨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물질’로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을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고난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남편, 아내, 부모..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난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주변에 고난학교 재학중인 학생이 있는가?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는 잘 준비된 말보다는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낫다.
사람이 고난 없이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고난은 지금만 힘들다. 고난은 지금만 아프다. 때로 하나님은 나를 요셉처럼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가만두실 때도 있다.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고난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신 후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서 졸업시키시고 애굽의 국무총리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지도자로 세워주실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 당시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제자를 뽑고자 제시한 시험은 아주 이상했다.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 대부분의 제자 지원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한 제자 후보생이 배추를 거꾸로 심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曰 “나는 당신들의 아이큐 테스트를 한 것도 아니고, 판단력 테스트를 한 것도 아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순종 테스트를 한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하고 계신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종종 만난다. 그것을 다 머리로 이해할려고 애쓰지 마라. 일단 순종하라. 그러면 나중에 이해가 될 것이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는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형제들의 시기질투로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을 숭배하는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큰 민족을 만들 뜻’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 70명만 살 수 있는 텅빈 땅이 아니었다. 이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지만 후손들이 조금 생기면 가나안 사람들이 와서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시고 야곱의 온 가족을 애굽 안에 있는 고센 땅으로 집단 이주하게 함으로 그곳에서 급속도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센’이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돌보신 것처럼 돌보아주셨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모세를 중심으로 애굽을 탈출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은 남자만 60만이 넘을 정도의 인구가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고난학교에서 40년 동안 순종을 배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남자만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에 가게 하셨고, 결국 가나안의 모든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점령하게 하셨다.
요셉이 경험한 고난, 모세가 경험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누군가 애굽에 먼저가야 했고,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형제들의 시기질투라는 가슴 아픈 모습으로 애굽에 갔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요셉이 형제들에 시기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고난은 하나님이 막아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은 순종을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단 한번도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필리핀에서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이유로 한국으로 나오게 하셨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를 파송한 선교단체와의 작은 오해로 헤어지게 만드셨다. 몸이 좀 건강해진 후에 여기저기 부교역자 이력서를 냈더니 오라는 데가 한군데도 없었다. 결국 먹고 살아야 하니 신문배달하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 잡으시더니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주셨고, 아무 준비없이 탄생한 것이 수원은혜교회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건강으로 치지 않으셨다면 나는 지금 필리핀에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의 이간질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나를 파송한 선교단체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부교역자 이력서를 냈을 때에 나를 받아준 교회만 있었다면 나는 절대 개척을 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었다면 절대 수원에서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수원은혜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다같이>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어떤 고난을, 얼마나 겪었는가? 내가 겪은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10대 때에 나는 교회가 싸우는걸 봤다. 어린 마음에도 싸울 일이 아닌걸 갖고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올라와 다니면서 교회를 안다니기로 결심했다. ‘교회에서 싸우는게 정말 싫었기 때문에..이런데를 내가 왜 다녀.’ 돌아보면 내가 어릴 적에 그런 일을 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내가 수원은혜교회 담임목사로서 ‘싸우지 맙시다. 싸우면서 일하려면 일하지 맙시다’를 틈만 나면 외치는 이유는 내가 어릴 적에 교회가 싸우는걸 보고 ‘저건 교회가 할 짓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도 목회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싸우지 않는 것, 화평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 정말 싫어하고, 싸우는 것 정말 싫어한다. 싸우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싸우면서 어려운 사람들 더 많이 도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예배당 크게 지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전세계 5대양 6대주 선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우리 학생들, 청년들 유럽 단기 선교 보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아무 소용없다. 형제간에 싸우면서 부모님에게 용돈 500만원씩 주면 부모님이 기뻐하실까? 성도들끼리 싸우면서 목사님 양복 비싼거 사 드리면 목사님이 그걸 기뻐할까? 나는 지금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싸우는걸 보면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떤 사람은 고난을 원망하면서, 탄식하면서, 불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때를 예배와 기도로 버텨내는 사람도 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요셉은 억울했지만 마음에 한을 품고 살지는 않았다. 사실 요셉은 한을 품고 살만한 억울함과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요셉은 마음에 한을 품고 살지는 않았다. 요셉이 그런 엄청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한을 품지 않고 살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요셉은 고난을 본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 모범생이었다.
요셉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것, 그래도 할수 있을거 같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는 나 같으면 한번 정도는 하나님에게 뭔가 말을 했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 요셉과 내가 수준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어떻게?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었고, 고난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같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회개하라. 그러면 고난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기 위해서 주신 고난은 예배와 말씀, 기도와 믿음으로 버텨야 한다. 매순간마다 순종의 답을 적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힌트, 고난은 영원하지 않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요셉은 30살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동안의 고난이 영광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의 영광으로 바뀌었다. 고난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도 끝이 있다. 고난의 끝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면 앞으로 어느 정도 복을 받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옆사람> 제가 어느 정도 복을 받을 것 같으세요?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난은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 놓는다. 만일 지금 당신이 당하는 고난이 당신의 시선을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았다면, 땅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겨놓았다면 당신은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한 목사님이 남선교회원들과 단합대회를 갔다가 배가 뒤짚어 다 죽고 자기만 살았다. 장례식을 다 치룬 후에도 마음이 견딜 수 없어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강대상에 엎드려 울다 자다 기도하다를 반복했다. 어느날 환상 중에 한 장면을 봤는데 장례식장에서 목사님이 조문객을 받는데 옆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또 한 번은 기도하는 중에 ‘네 팔을 한번 꼬집어 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꼬집자 온 몸이 다 아팠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고통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계신 것이 아니라 같이 울고 계시고, 같이 아파하고 계신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
행 7:1-8 / 우인택 목사
<2025년 표 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교회”(살전 5:16-18)
<2025년 실천목표>
1. 영적인 무성장증을 극복합시다
2.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합시다
3.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밖으로까지 넘치게 합시다
오늘부터 상고할 7장은 스데반 집사가 공회에 모인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설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과 작은 씨족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요셉’과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성막을 전해준 ‘모세’와 성전을 건축한 ‘다윗’과 ‘솔로몬’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면서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을 절대시하던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율법보다 먼저 있었고,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고, 구원은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에게 주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앞으로 7번에 걸쳐 스데반의 설교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성전으로부터 얻는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하여 상고합니다.
1. 다함께 1절 읽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
여기에서 ‘이것’은 11절에 기록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고 한 거짓 증인들의 말이 사실이냐는 뜻입니다. 이때 스데반은 거짓 증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에 충분히 자기를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재판하는 이 일을 오히려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1) 먼저, 그는 복음을 전하되 2절에,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하며 부드럽고 친근하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부형’들이란 ‘부모 형제’라는 뜻입니다. “부모 형제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지 않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 그들의 시조인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기 전에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언급한 것은, 당시 그들이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질만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말문을 열자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말에 주목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아브라함을 이야기할까?”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다니 이상하다며 일제히 주목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전도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관심 있어 하는 것으로부터 말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첫 걸음입니다.
2) 그리고 이어서 스데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자신들만 구원받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만을 특별한 땅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시조인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메소보다미아’였다고 말씀했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만나주신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이방 땅 ‘메소보다미아’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통해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창조주이시고, 유대인들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 우주 만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해 하나님의 품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또 ‘탕자의 비유’를 통해 그들을 잠시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잃어버린 바 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섭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성도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사업가 또는 근로자라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정치인이라면 바른 정치를 함으로써 국민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사라면 가르치는 아이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가정주부라면 자신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목사라면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혼란한 이유는 성도 각자가 주어진 삶의 환경과 여건 속에서 이러한 어두움 앞에서의 빛의 역할을, 부패한 곳에서의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본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2025년 첫 주일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이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2025년에는 영적인 무성장증을 극복하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12:1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리고 2-3절에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이러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셔서 간 그곳에는 아브라함이 발붙일 땅이 없었습니다. 이미 주인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물질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식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오직 말뿐인 약속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약속은 먼 미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그가 가진 것과 같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의심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반론이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임을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믿음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나병이 나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지도, 그들의 몸을 만지시며 치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말로만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달려가면서 그들의 몸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믿고 순종할 때, 그때 믿음이 삶의 현실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정확한 뜻이고, 이러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입니다(창 15:6).
오늘, 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2025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성도로서의 선한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3.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고향을 떠나면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법천지라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그런데도 고향 친척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 우상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수 24:2, 이스라엘의 성경 주석 미드라쉬).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던 그 땅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환경이 중요함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일생을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에 대하여 성경은 히브리서 11장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으며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땅에서는 자기가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언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그의 삶에는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라도 과거에 세상에서 즐기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서 11:15에 그 이유에 대하여 그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 땅의 부귀영화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고귀하고, 가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발붙일 땅도, 약속하신 자식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믿는 모든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삶도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삶을 즐기기 위해 산과 바다로 해외로 떠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봉사의 기회로 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자기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과 욕망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자제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받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섬기기 위하여 높아지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의 주제는 술과 쾌락과 권력과 돈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랑과 섬김과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약점과 잘못에 대하여 흉을 보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사는 이유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삶이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는 한 마디로 먼 미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산 삶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만이 그 약속의 열매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2025년 새해 첫 주에 이러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교회 밖으로까지 넘치게 하리라” 결단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2025년 첫 주일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교훈을 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듯이 저희도 믿음으로 인정받는 2025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되, 영적인 무성장증을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밖으로까지 넘치게 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를 위해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부어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영광의 하나님, 나타나시다
행 7:1-8 / 김상복 목사
최근에 미국에는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에 대한 큰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지적 설계론이란, 우주와 생명체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고도의 지적 존재가 디자인하여 생겨났다는 학설입니다. 우리의 눈을 봅시다. 그 생김새나 각막구조를 살펴보면 최고의 기술로 만든 그 어떤 렌즈보다 더 뛰어납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흐른다 해도 눈과 같은 정교한 조직이 우연히, 또는 저절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어느 학자는 확률적으로 볼 때 이런 세밀한 구조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우주와 자연과 생명체에는 엄청난 디자인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설계는 오직 지식과 지혜로 과학을 꿰뚫고 있는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 도브의 교육위원회에서 이 학설을 과학교과서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논쟁 후 투표에서 져 축출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주에 미국의 CNN 뉴스 등 여러 매스컴을 통해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과학교과서에 두 학설의 과학적 증거를 모두 실어 학생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지적 설계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적 설계론을 종교로 보고 왜 과학교과서에 종교를 넣으려 하느냐며 전국적으로 재판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물론 도저히 알 수 없고,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도 있지만, 주된 입장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화론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가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가스로 충만해있었으며, 이 가스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압축되고 폭발(Big Bang)하여 물질들이 흩어짐으로써 하늘에 수십억 개의 별들이 생겨났고 지구도 그때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시대기의 부글부글 끓는 화합물의 혼합체(primordial soup)에 번개가 내리치니 거기서 유기물질이 생겨났고, 우연히 단세포생명체가 생겨나더니,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더니, 어느 날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지요. 이처럼 진화론이 내세우는 증거들이 서로 잘 연결되지 않고 그 과정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요즘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성인들도 진화론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진화론을 믿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 중부지방인 인디애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주제로 토론회를 열기 위해 지적 설계론을 주장하는 과학자 한 분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적 설계론자와의 토론회에 나서는 진화론 학자를 찾기가 아마 힘들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인디애나에 있는 대학들과 과학관련 연구소들의 과학자들에게 토론자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과연 그의 말처럼 아무도 나서지를 않아 결국 토론회가 아닌 초청강연회가 되고 말았지요.
지적 설계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벽돌 수백만 장을 공중에서 떨어뜨린다고 저절로 할렐루야 교회 건물이 지어질 수 있을까요? 건축에 대한 설계사의 아이디어와 계획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죠. 또 설계를 이해하고 그대로 시공할 수 있는 각 분야의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됩니다. 원숭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아무리 오래 자기 맘대로 두드린다고 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오겠습니까? 셰익스피어라는 지적인 천재가 있었기에 리어왕 같은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와 생명체와 우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이 있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매순간 선택해야 할 대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에 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교회에 온 것입니다. 골프치기로 선택한 사람은 골프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선택하며 삽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선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얘기합니다. 대제사장은 “이것이 사실이냐?”(행7:1)며 사실을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 뒷부분을 보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했다느니, 모세 율법을 다 고치겠다고 했다느니 하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신 적은 있으며, 모세율법의 참 뜻을 바로잡아 설명하신 적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여 죽였던 그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스데반마저 죽이기 위해, 없는 말은 만들고 있는 말은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참과 거짓 중에서 거짓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을 선택할지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에 필요한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진화론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는 싫으니 하나님 없이 우주를 설명해야 했고, 그래서 그저 생명이 저절로 생겨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렇게 저렇게 진화되었다고 믿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선택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해 설명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설득적인 학설인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는 진화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창조론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체가 우연히 저절로 생성되었다는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바늘 끝보다 작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합쳐지고 거기에서 무려 206개의 뼈가 생성되는 일이 어떻게 저절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몸 안에 미국전역을 세 번이나 왕래할 정도로 긴 핏줄과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너무도 절묘하게 연결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는데, 어찌 이를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가 생성되던 자리에 우리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지만, 두 주장 중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 설명을 한다고 판단되는 지적 설계론에 정당성을 실어주기 시작하자 진화론자들은 반발하고 나섭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이 사실이냐?”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 대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열두 지파, 요셉, 모세 및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할례 등 장구한 역사 이야기를, 예수님을 죽이고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해줍니다. 그 긴 설명의 요점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두 갈래의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한 사람과 불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절). 여기에서 “부”는 어른들이요, “형”은 형제들입니다. 즉 동족과 친척과 동창생들을 말합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부를 못했거나 무식하거나 옛날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현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책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다. 현대인이라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썼습니다. 그것을 읽고 제가 속이 상해서 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만 현대인이냐? 우리도 현대인이다. 당신이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타는 것처럼, 우리도 커피 마시고 자동차를 탄다. 어떻게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당신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다. 현대인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날 사람은 받아들인다는 말인가? 내가 구식이란 말인가? 당신처럼 나도 박사학위가 있으며, 오히려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당신의 학위가 내 학위보다 더 오래 됐다.’ 이렇게 썼습니다.
신앙도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며 순종하며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그 음성을 듣고도 순종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이 이야기를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하는 사람들은 그 축복과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따르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12:4). 75세에 옮기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분당에서 수지로 옮기라면 괜찮겠지만, 한국을 떠나 저 케냐로 가라 한다면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26년을 살다가 51세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대해서는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저의 그 때 사진을 보며 웃기도 하지만, 제가 아직 젊었던 51세에 한국에서 재출발하라 했을 때도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 2년2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75세에 떠나라고 했는데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는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로 노인들이 “아멘!”하시는 것 같네요. 최근 60을 바라보는 어떤 집사님의 출판사 개업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신이 났습니다.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언제나 떠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로, 노예들과 노예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400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6절) 하였습니다. ‘그 씨’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키고, ‘다른 땅’은 애굽을 가리키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왕이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생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생을 시키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생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누가 여러분을 고생 시킵니까? 나는 고생을 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평생 모든 일에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선과 의와 섬김을 선택해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있고 축복의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7절)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마지막에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사람들이 절대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많은 선택을 통해 결정을 해야 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도 아브라함처럼, 일평생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사 예수 믿게 하신 그 목적이 내 삶에서 현실적으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입술에 선택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는 할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8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를 시작했습니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하여 몸을 깨끗하게 해줬습니다. 할례란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하시는 아들인 줄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입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영원히 축복하신 아기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좋은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할례도 받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이 계시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세례는 간단한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거나 완전하다거나 부족함을 극복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인지라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영생의 선물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혹시 담배를 끊지 못해서 세례를 안 받고 계십니까? 담배는 몸과 상관있지 세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에 결단하여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하고 세례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금연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로,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례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가 있고, 아브라함의 집안에 사라와 하갈이 있으며, 이삭이 있는가하면 또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언제나 두 길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기 때문에 지난주에도 수십 명이 폭탄테러로 죽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이 세 개의 호텔에서 폭탄을 터트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살립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 것인지 직접 선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있는가하면 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두 그룹이 섞여 있습니다. 요셉이 있는가하면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동생을 죽이려 하다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사람을 죽이는 부류가 있고, 요셉처럼 고난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가족과 부모형제들과 애굽과 이스라엘을 살린 것처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살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뜻을 선택한 우리들은 요셉과 같이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선택을 하며 살기 바랍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새롭게 선택하십시오. 영원한 천국의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선과 의와 사랑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매일 매일이 선택입니다. 여호수아가 “오늘날 택하라” 하는 자기 질문에 스스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대답한 것과 같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선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행 7:1-8 / 김좌근목사
서론: 지난 주일은 행 6:8-15을 본문으로해서 ‘스데반의 체포’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스데반은 집사로 선택을 받아 구제하는 일이 원래의 임무였지만 복음을 전하고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유인이라고 불리워지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스데반의 지혜와 권능을 이기지 못하니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공회 앞으로 잡아오게 했습니다. 스데반의 죄목은 율법과 성전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생활을 예수님 안에서 기쁨으로 살 때, 우리의 얼굴에도 복음으로 인한 평안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배운 교훈입니다. 오늘은 본문은 행 7:1-8입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서 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과 성전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오늘은 그 설교 중에서 첫 부분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에 우선한다는 사실과, 그 약속을 주신 그대로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도 하나님의약속에 기초를 두고 믿음으로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 (1-8):
1. 공회 앞에 서 있는 스데반의 얼굴을 본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즉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한 것과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모세의 율법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성전을 헐고 율법을 고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라를 배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 스데반을 고소한 사람들과 한편이면서 사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가끔 일어납니다.
2.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으로 ‘한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창17:5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민족의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으로 자기들의 모든 사고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메소보다미아, 즉 지금의 이라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는 그 메소보다미아 땅이 문명이 발달했고 우상 숭배가 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고향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5. 아브라함이 비록 큰 실수도 했지만 그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발붙일만한 땅도 안 주시고 자식도 안 주시고 오직 말로만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 15:6).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아브라함이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단지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게됩니다. 롬 4:18-22 보시면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본 적이 없고 예수님을 만져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보고 믿는 것입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말씀들도 설사 이해가 잘 안되고 계산이 잘 맞지 않지만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복을 주고 또 복을 주실 것입니다 (히 6:13-15, 13:5). 특히 우리 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그것이 크고 확실한 복이 될 것입니다.
6.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창 15:10-14 참조). 사백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고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생 중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따릅니다.
7. 그 후에 그 나라에서 나와서 이 가나안으로 와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8. 이 언약에 대한 표적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창 17:9-10). 이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모세가 율법을 받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보다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갈 3:15-17). 그런데 이 구원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어졌으니 더이상 할례나 율법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서 이 사실을 더 공부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자기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기 지식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니 지금 기독교가 미국에서 소수계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있었지만 그의 위대한 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약속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우리와 우리 후손이 복음의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
행 7:1-8 /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브라함 이야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혈연 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과 순종이 구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부르신 분이십니다. 2절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는 문명이 발달한 도시국가이고, 우상을 숭배하던 곳 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하고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다른 거짓 신들을 빈자리에 채워 놓음으로써 참 신이신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환경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그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현실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자신의 생존과 생계와 건강과 안전과 즐거움 등 오직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땅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약속들을 기다렸을 때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자기 인생 속에서 눈에 띄게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아브라함 때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여러 위험에서 건지셨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99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협조하려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도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중 그의 생애 동안 주신 것은 후손에 대한 약속 중에서도 이삭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5절이 말하는 대로 아브라함은 발붙일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 많아지게 될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거기서 구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들이 어떻게 이뤄질지 드러날수록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와 별 상관이 없다고 실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당장 어떤 성취나 혜택을 주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생 동안 얻어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왜 약속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이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으로 결코 나을 수 없는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분명 이루시겠구나’하고 믿음이 생기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약속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이스라엘 땅과 나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후손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터전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언약의 큰 그림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에서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에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이루시는 일의 깊고도 원대한 크기를 생각할 때에 자신의 주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나를 생각하시고, 긴 시간 속에 잠깐 사는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좁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을 여깁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의 현실적인 만족을 얻을 때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 기쁨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상의 모든 기쁨도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노벨상을 받고, 금메달을 따고, 우주에 가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인생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세상을 확실하게 주도해가고 계신 것을 보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생애 동안 그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이뤄질지를 보고자 고대했던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영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행복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영광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이 짧은 인생 동안 뭔가 이루려고 하는 것, 자기 경험 범위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체 우주 역사의 시간 중 극히 짧은 부분, 순간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세상을 바꿔 놓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짧은 생애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시면서 그가 자기 인생 안에 갇혀 있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살아볼 수 없는 먼 미래까지 아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자기 현실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하나님을 믿도록 언약을 통해 이끄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분, 완전한 본을 보여주신 분, 완전한 길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
행 7:1-8 / 김영제 목사(하늘기쁨교회)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브라함 이야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혈연 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과 순종이 구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부르신 분이십니다. 2절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는 문명이 발달한 도시국가이고, 우상을 숭배하던 곳 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하고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다른 거짓 신들을 빈자리에 채워 놓음으로써 참 신이신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환경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그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현실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자신의 생존과 생계와 건강과 안전과 즐거움 등 오직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땅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약속들을 기다렸을 때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자기 인생 속에서 눈에 띄게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아브라함 때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여러 위험에서 건지셨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99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협조하려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도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중 그의 생애 동안 주신 것은 후손에 대한 약속 중에서도 이삭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5절이 말하는 대로 아브라함은 발붙일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 많아지게 될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거기서 구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들이 어떻게 이뤄질지 드러날수록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와 별 상관이 없다고 실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당장 어떤 성취나 혜택을 주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생 동안 얻어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왜 약속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이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으로 결코 나을 수 없는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분명 이루시겠구나’하고 믿음이 생기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약속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이스라엘 땅과 나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후손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터전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언약의 큰 그림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에서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에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이루시는 일의 깊고도 원대한 크기를 생각할 때에 자신의 주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나를 생각하시고, 긴 시간 속에 잠깐 사는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좁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을 여깁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의 현실적인 만족을 얻을 때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 기쁨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상의 모든 기쁨도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노벨상을 받고, 금메달을 따고, 우주에 가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인생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세상을 확실하게 주도해가고 계신 것을 보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생애 동안 그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이뤄질지를 보고자 고대했던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영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행복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영광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이 짧은 인생 동안 뭔가 이루려고 하는 것, 자기 경험 범위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체 우주 역사의 시간 중 극히 짧은 부분, 순간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세상을 바꿔 놓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짧은 생애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시면서 그가 자기 인생 안에 갇혀 있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살아볼 수 없는 먼 미래까지 아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자기 현실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하나님을 믿도록 언약을 통해 이끄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분, 완전한 본을 보여주신 분, 완전한 길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행 7:1-8
by 우루사야
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도들이 동역자 7명을 세웠습니다. 그 이후로 7명 중 한 사람 스데반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공의회는 스데반과 논쟁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간밤에 잡아 몰래 심문하였으며, 베드로와 요한도 잡아 옥에 2번이나 가두었습니다. 모두 무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무리한 주장으로 잡아둔 전력이 있었습니다. 오늘 스데반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약속이 이뤄지는 것들을 확인하게 되는데,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또 성령께서 어떤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하게 하시는지 살펴보며, 우리에게도 세상을 향해 우리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말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소망해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스데반은 공의회원들 앞에서 긴 변론을 시작하는데 누가는 이 기록을 굉장히 많은 분량으로 세세하게 적습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아브라함때부터 솔로몬때까지 대략 1500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훑습니다. 그러면서 순종했던 믿음의 이스라엘 조상과 불순종한 조상들을 대비하면서 마무리에는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면 항상 믿지 못하고 자신의 교만으로 불순종하는 이들이 있는가 반면,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금 이라크 부근 문명지 대도시에서 살다가 비문명지인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고향에서의 가업, 친척이라는 인프라보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겁니다. 그런 그에게도 불순종의 위기는 다가왔었다고 스데반은 말해줍니다. 5-7절입니다.
이 말만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굉장히 김칫국을 잘 마시는 분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 한명이 없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획을 짜놓으십니다. 자녀뿐만 아니라 자녀로 대가족을 이뤄 후손들로 번성하게 될 것이고, 땅이 지금 하나도 없는데 이 가나안 지경을 후손들이 차지하게 될것이라고 말이죠. 이 나라는 한번은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인데, 하지만 다시 탈출하여 나와 가나안 땅에서 나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 말이죠. 그러나 스데반과 공의회원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역사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런 하나님의 한두발 정도가 아니라 천년 앞을 내다보시며 계획하시고 이뤄가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공의회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의회원들은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준비하셨고, 그 메시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침내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처음부터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고 믿는 이들도 있는데, 스데반은 과연 공의회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지요. 여러분, 공의회원들은 김칫국 마시는 하나님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을 믿어야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준비하는 삶, 순종의 삶 살아야 하겠습니다. 물질과 안락을 향해서 살아가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하며 회개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영혼을 구하는 삶을 향해서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삶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8절입니다.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라는 표식으로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고, 그 결과 99세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어 후손으로 이삭, 그 이삭은 아들 야곱을 통해서 12아들을, 그리고 그 12아들은 12지파로 번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도 분명 이뤄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그 약속도 우리는 믿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사람을 살리며 마지막날을 향해 준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