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간증 -
저는 '술'로 인해서 바람 앞에 등불처럼 인생을 크게 망칠뻔한 여러 번의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대적 원수는 그렇게 '술'로 저의 인생을 망치게끔 꾀했지만 하나님은 저로 하여금 '술'로 인해 '이기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만나게 하셨습니다.
1990년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며 "아들아 나랑 같이 교회에 나가면 어떻겠니?"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저는 왠지 모르게 어머님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의 화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요 어머니 저도 좋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를 가면 좋겠습니까?" 물어보자 어머니께서는 망설임 없이 "요즘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가 소문이 자자하더라 거기를 가자꾸나" 하시는 것이 아마도 저에게 말을 꺼내기 전부터 미리 생각해 두셨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사실 네 외가 쪽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란다" 고백하셨습니다. 당신이 3대째이고 제가 4대째라는 겁니다. 저의 어머니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 외조부모님들로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과 결혼할 것을 권고받았지만 어머니는 운명하실때까지 끝내 예수님을 거절하셨던 아버지와의 삶을 선택하셨답니다.
결국 1978년 어머니 나이 47세에 아버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홀로 별거생활을 시작 하셨지요 대적 원수는 그렇게 부모님의 가정을 사정 없이 파산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1990년 제 나이 서른 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거센 풍랑 가운데 파선되기 직전이었던 저와 위로 두 분 형님, 이렇게 아들 3형제 가정을 모두 주 예수님의 몸된 교회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외조부모님의 간구를 기억하고 계셨으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때를 따라 저의 어머니와 아들 삼형제를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 부모님 -
저의 아버님은 육군 부사관으로 장기 복무하시며 강원도 포천(저는 1960년 이곳에서 출생했음), 전북 전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논산 제2 훈련소에서 20년만에 전역을 하셨는데, 2021년 92세를 사시다가 6. 25 전쟁에 참전하신 공로로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2년 뒤에 어머님 역시 92세의 일기로 소천하신 후, 정부의 국가유공자 시책에 따라 먼저 아버님이 안장된 대전 현충원에 함께 안장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릴 적부터 부모님 두 분이 자주 심하게 싸우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안타깝게 지켜보며 살았습니다. 저보다 3살, 8살 많았던 작은 형과 큰 형은 멀리 다른 지방에서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기에 7살 아래인 여동생과 저와 부모님 두 분이 함께 살았습니다.
보통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하면 한 쪽이 수그러들어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저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왠만해서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강성(?)이셨습니다. 싸움이 끝나면 결국 '체력'이 약한 어머니의 상처가 더 깊었던 것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의 몸이 많이 상하셨고 끝내는 그 휴유증으로 크게 고생을 하셨습니다.
- 어린 시절 -
난생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과 공포로 패닉을 경험한 것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4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만일 심장이 멈추고 죽으면 그 후로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순간 머리 속이 마치 흰도화지처럼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공포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날 이 후로 몇 날 며칠을 공포의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포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만일 그때 복음을 들었다면?).
중학교를 입학할 즈음 어머니는 약간의 빚을 내어 넉넉한 크기의 집을 한 채 장만하시고선 그 집을 여러 개의 방이 있는 구조로 개축한 뒤 여관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살던 소재지가 '충남 논산군 연무읍'이었는데, 이 지역은 군사도시로 군인이나 훈련소에 면회객들을 상대로 술집이나 집장촌 등이 주변 여타 지역들보다 즐비하게 구축되어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관 역시 평상시 근처에 있는 "육군 제2 훈련소" 면회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주중이나 주말 가리지 않고 사병들이 외출외박을 나와 여관에 방을 잡고 집장촌의 아가씨들을 불러다가 유흥을 즐기는 장소를 제공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군인들에게는 대실(숙박)료를 몸을 파는 여자들에게 소개비(?)를 받아가며 업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문제는 약 10개의 객실이 있는 환경 안에 가족(아버지, 어머니, 저와 7살 어린 여동생)의 생활공간이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여동생은 많이 어렸다 치더라도 저는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어떤 필요(?)에 따른 모든 외부 심부름은 모두 제 몫이였습니다.
살던 '연무대'라는 도시의 분위기가 그래서 그랬는지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인지하거나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한 환경 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말 뭐가 뭔지를 모르고 약 6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부모님 두 분이 어린 자식들을 그같은 환경 안에 두고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았는지를 조금 짐작할 수는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위로 한 분 뿐인 언니(이모)에게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적지 않은 돈을 사채업자에게 빚을 내어 빌려 주었는데 이모가 그 돈을 값지 못하고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것이 부부 사이에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빚쟁이들에게 시달리자 아버지는 20년 이상 장기복무 후에 평생 받을 수 있는 연금을 포기하고 퇴직금을 일시불로 수령하여 어머니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발생시킨 빚을 해결하셨던가 봅니다.
이같은 사건이 생긴 후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불화가 더욱 심해졌고 자주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 사는 것에 지쳐 술을 드시고 취할 때면 저에게 "너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너희 아버지와 헤어져 살 것이다"는 밀씀을 자주하시곤 했습니다.
그같은 상황 속에서 참으로 어머니가 감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큰 형이 군생활을 마치고 약 2년간 원양어선을 타고 나서 집에 돌아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술에 취하여 어머니에게 손찌검(뺨)을 했던가 봅니다. 저는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큰 형에게 뺨을 심하게 맞은 어머니가 마음이 상해 술을 드시고 저를 찾아 붙들고선 "내가 여태까지 남편한테 맞고 살았던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자식한테까지 이렇게 매를 맞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펑펑 우시며 신세를 한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저는 연무기계공업고등학교 화공과 3학년 2학기를 서울에 있는 구로공단 염직공장에서 현장실습을 마치고 1978년 2월 12일 어머니와 여동생의 축하를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서울에서 생활하던 중 어머니께서 결국 주변 아무에게도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종적도 없이 집을 나가 버리신 것입니다.
저는 그 뒤로 어머니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주변에서 어머니를 알만한 사람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다녀보았지만 끝내 어머니의 행방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지난 삶을 철저하게 끊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제 인생의 방황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초래한 아버지와 큰 형에 대한 원망과 한편으로 어떤 형제들보다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던 저였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여동생마저 팽개친채 행방을 감춘 어머니에대한 원망을 매일 술로 해결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셨는지 여관을 팔아 정리를 햐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여관을 정리해 팔아 생긴 목돈을 사기를 당해 다 털려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 역시 이제는 겨우 여동생을 데리고 단칸 삯월세 방을 얻어 살며 생계유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저보다 3살 연상의 깊히 사귀고 있다 생각했던 사람에게까지 절교를 당하고 참으로 마음을 의지할만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술에 취해 아무하고나 시비를 걸고 싸우며 형편없이 막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음 한 편에서 이렇게 살다가 막다른 길에 이를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고 결국 논산 제2훈련소에서 군생활을 마치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육군 통신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현실 도피를 하였습니다.
논산 제2 훈련소에서 4주 훈련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속초 대포항에 위치한 22사단 56연대 예하 4대대본부 통신병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여 군 생활을 하던 중 여태껏 저의 인생을 저주하고 훼방하고 죽이려 들던 세력이 다시 손길을 뻣치는 사건이 군생활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하루는 근무하던 대대본부로 신병들이 막 도착해 내무반에 짐을 풀고 있었습니다. 신병들의 바로 위 고참병이었던 저는 그들이 군에 오기 전 살던 지역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신병이 제가 군입대하기 전 사귀다가 절교를 당한 그녀의 동네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혹시 그녀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와의 자세한 관계를 모르던 그 신병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녀가 논산에서 개인택시업을 하는 자신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암담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군대로 피신해 있는 저를 흑암의 세력은 그냥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하게 나마 이성을 붙들고 있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날밤 저는 군부대 철조망을 월담해 사온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내무반 바닥에 엎드려 정신을 잃고 있는 제 위로 통신대 선임하사가 찬물을 쏟아부어 저를 깨웠습니다.
그렇게 군생활의 저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대대본부 통신대 서무병 보직을 맡은 저는 대대본부 예하 해안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각 4개 중대와 2곳의 레이더 기지에 문서화된 암구호를 전달해 주기 위하여 석 달에 한번씩 외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슬비가 약간씩 내리던 날, 저는 암구호 문서 행랑을 어깨에 메고 예하 '중대본부' 방문을 마치고 본부로 귀대하던 중 우연찮게 들어간 가게 안에서 군에 입대하기 전 가정의 불화로 집을 나가 행방이 묘현한 저의 어머니의 인상과 비슷한 가게 주인 아주머니를 본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성을 잃고 임무 수행 중에 해서는 안 될 술을 다시 입에 댔고 취해버렸습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본부 위병소로 겨우겨우 비틀거리며 들어오던 졸병을 고참병이 그대로 통과시켜줄리가 만무했습니다. 형편없이 취한 저를 정신차리게 하려고 거칠게 다루는 고참병에게 반항을 했던 저는 위병 근무를 서기 위해 휴대했던 고참병의 M16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앞이빨이 부러지고 즉시로 부대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다음 날, 대대본부 중대장은 술이 깬 저와 당시 위병 근무를 서다가 폭행해 다치게한 고참병에게 당시 빡세기로 악명 높았던 22사단 56연대 '군기교육대'에 2주 동안 입소하여 군기교육을 받고 복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실 저는 '영창'을 보내도 할말 없을 정도의 큰 잘못을 범했지만 대대장(설영길 중령)님의 감면으로 2주 간의 군기교육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군기교육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여 앞이빨이 부서져 빠진 채 생활하던 저를 대대장님이 부르셨고 저에게 휴가를 내주시며 당신이 잘알고 있던 서울의 한 치과병원으로 보내어 의치를 만들어 끼워 넣고 다시 정상적으로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이로 인해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 '설영길 대대장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군생활 8개월만에 15일의 첫 휴가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막상 첫 휴가를 나왔지만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여동생과 삯월세 방에 살고 있던 아버지(부사관 시절 아버님은 논산 제2 훈련소 수용연대 '당시는 군에 입대할 장병들을 열차로 각 지방에서 실어와 훈련에 들어가기 전 잠시 수용하는 부대' 주임상사로 소위 끝발이 있는 시절을 보내셨음)의 바닥으로 추락된 생활을 보는 것이 너무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마음을 식히고 달랠겸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가 목이 말라 음료수를 사려고 들어간 가게 안에 지난 날의 그녀(?)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운명의 장난 같았습니다. 그녀가 이미 결혼 했다는 사실을 신병에게 들어 알고 있던 저는 그저 간단한 안부 인사만 나눈 채 도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물을 나와 뒤돌아 보니 옥상 위로 갓난 아이 천기저귀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신속히 그곳을 돌아나온 것은 매우 잘한 행동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을만큼 복잡해져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군복을 입은 상태로 들어간 포장마차에서 술에 취했고 그 모습에 더 이상 술을 팔지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포장마차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던 것까지는 어찌어찌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양손, 양발 사지가 군 헌병대 철장 안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헌병대원이 이제 좀 술이 깨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네가 술 취해 어느정도로 이성을 잃고 발버둥을 쳤으면 그런 상태로 너를 묶어 놓았겠느냐"며 제가 술 취해 내뱉은 온갖 욕설과 고함소리를 녹음해 놓았다가 들려 주었습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헌병대 책임자가 "이제 그만 나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내보내더군요. 지나서 알고보니 아버님이 헌병대로부터 연락을 받고서는 헌병대에 영향력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저를 풀어주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저는 정신을 차려서 어머니와 관련된 소식을 알만한 사람들을 다시 한번 수소문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중 정말 감사하게도 평소 어머니를 가깝게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 한 분이 군복을 입고 찾아와 하소연을 하던 제가 정말로 안되 보였던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어머니의 연락처를 살며시 건네 주며 "자네 어머니가 누구에게도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내가 어떻게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가로 막을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얼른 어머니를 찾아가 만나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 그분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해 어머니의 이름과 인상을 말하며 여기에 살고 그분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듣고 있던 그 여자 분의 반응이 묘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알 지 못한다'고 또는 '알고 있다' 이러지 않고 저에게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한 뒤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하는 말이 "찾고 있는 그분이 전에는 이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안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어느 곳으로 가신지는 알고 계십니까?" 물었더니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와닿는 느낌이 있었지만, 재차 물어보기가 민망해서 "알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 한참을 주위를 배회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고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잠깐만 기다려 보시라"고 말을 한 뒤 다시 안으로 들어간지 얼마 뒤 그렇게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어찌되었던 간에 어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의 고통과 아쉬움을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 깅원도 홍천에서 육군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둘째 형에게 어머니의 소식과 연락처를 알려주고 부대로 복귀하여 전보다는 밝은 마음으로 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한번은 서울에 생활하시던 어머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주소지는 맞는데 어머님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제게 편지가 왔습니다. 읽어보니 저의 어머니가 부탁하여 편지를 보낸다면서 "이제 자식들과도 인연을 끊고 당신을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니 이제 자식들도 당신을 찾지 말아달라"는 저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같은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어머니를 놔드려야 겠다"는 결심을 가졌고 그 뒤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내려 놓았으며 다시 어머니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등병, 일병, 상병 계급장을 달고 어느 정도 군생활에 적응이 되어가는 시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근무하던 부대가 해안 경비 임무를 마치고 강원도 동부전선 지금의 '통일전망대'가 있는 최전방 GOP 철책 감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대의 이동 계획이 하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GOP 철책근무 투입에 부적합한 사병들을 착출해 철책근무에 투입시키지 않고 예하 후방부대로 전출 시키는 일에 제가 착출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군의 명령을 받아 원치 않게 그동안 고락을 같이하던 부대 동기들과 선,후임병들을 떠나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야만 했던 당시 심정은 그야말로 비참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부대 중대본부로 전출이 되어 새로운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바뀐 환경에 익숙해져갈 무렵 하루는 중대장이 저를 행정반으로 부르더니 "자네 통신병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P-77 무전기 다룰 줄 알아?" 묻기에 네, 다룰줄 압니다! 했더니 "지금 바로 무전기 메고 나를 따라와"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M16 소총 탄알 30발이 들어있는 탄창 2개를 주면서 자신의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저는 자세한 영문을 모른 채 그저 M16 소총과 무전기를 등에 메고 실틴을 휴대한채 중대장의 뒤를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대가 위치한 곳이 최전방은 아니었지만 해안 군사작전지역이었기에 아마도 중대장은 순찰을 나가면서 통신병이었던 저를 기억하고 무전기와 실탄을 휴대케 하고 동행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뒤따라 가던 저에게 뭔가 볼일이 있는지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며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중대장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데 건물 안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빠르게 가게로 들어가 수통에다가 소주 2홉 한 병과 4홉 한 병을 부어 담았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군인 수통에 6홉의 술이 담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건물에서 중대장이 나왔고 함께 중대본부로 복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탄이 들어있던 탄창 2개는 서랍 안에 넣어 놓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취침에 들어 가기전 잠시 휴식 시간에 저와 비슷한 시기에 군에 입대한 동기 친구를 한적한 밖으로 불러내 수통에 담긴 술을 거의 다 마셨던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양의 소주를 긴장을 풀고 갑자기 마신 탓인지 통제력을 상실할 정도로 빠르게 취했습니다. 그리고 뭐에 씌웠는지 저는 행정반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30발 실탄을 꺼내 소총에 장전하고 그동안 눈밖에 나있던 후임병들을 내무반 안으로 모이게 하고 소총 노리게를 움직여 실탄이 장전된 총구를 후임병들 향해 겨누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뇌리에서 실탄이 발사되지 못하게 안전핀을 잠궈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감과 동시에 안전핀을 밀어 잠궜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버렸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직후 당직 하사관이 달려왔고 제 손에 들여있던 소총에서 탄창을 붙리하고 확인해보니 29발만 들어있는 것을 알고선 나머지 한 발을 찾아내기 위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저의 뺨을 후려쳤던가 봅니다 "야 실탄 한 발 어디다 두었어!" 외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지만 저는 다시 정신을 잃고 새벽이 되어서야 깨어났습니다.
아침 일찍 당직 하사관으로부터 보고 받았을 중대장이 저를 중대장실로 부르고나서 하는 말이 "야 너 빨리 네 짐싸서 나와!" 그리고 중대원들과 분리를 시킨 뒤 저를 대대본부로 다시 전출을 보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저로 인해 발생했지만 당시 제 자신 스스로 조차도 의아스러게 생각할 정도로 이 사건을 가지고 저를 징계시키려는 어떤 한 마디의 소리나 움직임을 당시 부대 대대장및 중대장 등 어떠한 상급자들에게서도 발생한 적이 없이 그날 사건은 정말 소리없이 덮여져 버렸습니다.
그때로부터 약 4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사건이 가끔 생각에 떠오를 때면 저는 깊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합니다. 그리곤 생각합니다. 마귀는 저의 인생을 그때 아예 끝장을 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지옥의 문 앞에서 건져내 살려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끈질기게 저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후로 부대 주변 마을로 벼베기 민원봉사를 나갔다가 주민이 제공한 술을 마치고 취해 어느 집 마루 아래 쓰러져 있던 저를 발견하고 부대에 신고하였고 이런 저를 통신대 소대장이 리어카를 빌려 저를 실어다 부대 안으로 옮겨다 놓은 사건, 또 부대 체육대회를 마치고 'PX'에서 맥주를 상자채 몰래 사서 마시고 취한 뒤 육사 출신 중대장에게 대들었다가 5분 대기조를 출동시켜 포박시켜 끌어다 놓고 죽지 않을만큼 두들겨 맞은 사건, 자잘한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난탓인지 잘 기억 조차 나지 않습니다.
전역하는 날 대대장에게 신고를 마 치고나서 대대장이 저의 손을 잡으며 했던 말이 또렷이 생각납니다. "탁병장, 자네가 이렇게 무사히(?) 군생활을 마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어 정말 기쁘다!"
현실을 도피할 생각으로 군에 지원 입대를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귀는 어찌하든 죽이려고 달려들었고 하나님은 저를 긍휼히 여기시어 죽음 가운데서 옮겨내사 영생이 있는 길로 이끄셨습니다. 아멘!
2부 - 군 생활을 마치고 나서
첫댓글 사실 제가 올해 만 나이로 65세가 됩니다. 그동안 결혼해서 3자녀를 키우며 2002년부터 현재까지 약 23년을 특별한 쉼없이 법인택시영업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앞으로 몇 년 더 하나님께서 일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나머지 삶을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인도를 구하며 이번 2월 한 달을 잠시 직장 일을 내려 놓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 제대로의 간증을 해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도 걸렸고 이 기회에 지난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긍휼히 여기셨으며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는지를 되돌아 보고 정리도 할겸 어제 저녁 밤새 간증 내용을 추스려 써보았습니다. 워낙 글을 길게 쓰는 재주가 없고 보통 힘든 것은 아니였지만 주님께 은혜와 지혜를 구하며 써 보았습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간증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간증을 읽었습니다 술로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네요 하지만 주님의 보호가 있음을 찬양합니다
아멘!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