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지성, 한평생 요순시대를 꿈꾸다 필암서원을 찾아서 뛰어난 학자 군주인 인종대왕이 등극한 지 8개월째에 붕어하자 그의 죽음이 결코 병사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하서 김인후. 약원의 처방전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자고 요구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고 거절당하자, 인종의 죽음에는 반드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믿고, 뛰어난 군왕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패악한 정치에 몸담을 수 없다고, 35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관계를 미련 없이 떠난 사람이 바로 하서였다. 인종의 이복 아우 명종이 등극하고 그의 생모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무서운 독재가 진행되고, 을사사화가 발발해 어진 학자나 선비 벼슬아치들이 온통 살육의 화란에 빠지자, 혹자는 하서가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미리 점치고 낙향하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이상이나 이루고자 했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요순시대의 신하들처럼 뛰어난 어진이들이 임금을 보필해 참다운 요순시대를 만들자는 꿈을 접고 세상을 등지고 낙향할 때의 그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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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가 후학들을 가르쳤던 필암서원(筆巖書院)의 전경. | 사진작가 황헌만 |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절로 늙사오리(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패악한 정치에 분노해 세상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온 하서의 ‘자연가(自然歌)’라는 시조다. 후손 김시서(金時瑞)는 호가 자연당(自然堂)인데, 글 잘하는 사람에게 의뢰해 국문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김시서는 하서의 5대손이니 집에서 전해오는 시조를 애송하다가 자신의 호를 ‘자연당’이라 하였으니 다른 견해도 있지만 그 시조의 작자가 하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연 속에서 노닐면서 자신의 수양과 인격함양으로 도학자에 이르고 미래의 지도자가 될 후학들을 가르쳤던 하서의 유적지인 생가와 필암서원과 묘소를 찾아갔다. 후손 김재수 교수와 김진석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청랑하기 그지없는 가을 하늘과 황금빛 들판을 구경하면서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와 맥호동 일대를 살펴봤다. 진리란 그렇게 연착하는 기차인가. 하서가 세상을 떠난 그 날짜의 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 그만한 평가를 받은 도학자의 현양사업은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서 사후 8년째인 1568년에 제자 조희문(趙希文)이 쓴 <하서전집> 서문을 보면 일찍부터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징)에 의해 1561년, 하서 타계 직후에 가장(家狀)까지 지어졌으나, 국가적 현양이나 후학들의 찬양 작업은 먼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사후 110년이 넘은 1662년에야 박세채(朴世采)에 의해서 행장(行狀)이 완성되고, 필암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이 그 해인 1662년인 현종 3년에야 내려졌다. 우리가 찾은 필암서원(筆巖書院). 당대의 명필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로도 명성이 높은 서원이다. 대원군 시절에 전라도 일대의 모든 서원이 다 훼철되었으나 오직 이 서원만은 그대로 보존된 호남 제일의 서원이다.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은 옛날에는 지원현이었다. 그 지원현이 폐현되면서 옮겨온 관아의 건물로 지었다는 ‘확연루(廓然樓)’는 조선의 어떤 서원에도 없는 필암서원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란다. 신실에 동재·서재가 격식에 맞게 갖추어져 있었고, 더구나 근래에 성역사업이 이룩돼 광활한 서원의 광장이 공원으로 꾸며졌고, 기념관이나 유물관이 새로 건립되어 규모로는 세상에 없는 우람한 서원이었다. 하서의 도학정신과 학덕이 탄생 500주년(2010)이 다 되는 금년에야 빛을 보는 셈이니, 역시 진리는 연착하는 기차와 같지 않은가. 하서의 묘소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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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의 신도비(神道碑).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대맥동(大麥洞:麥湖洞)에는 하서가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의 터가 그대로 있었다. 하서가 생전에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만 근래에 복원돼 옛 정취를 보여줄 뿐, 생가는 빈터만 남아 있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하서의 부모 묘소와 하서의 묘소가 있는 울산김씨의 선산이 있다. 입구에 당대의 학문과 정치의 대로(大老)였던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우람하게 서 있고, 묘소도 초라하지 않게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묘의 바로 앞에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표(墓表)의 글을 새긴 비가 서 있어서 그의 일생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기막히는 사연이 있었다. 생가의 백화정이나 묘소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보면 산과 산 사이에 계란같이 둥그런 조그마한 산이 있다. 그 산이 바로 난산(卵山)으로 인종의 제삿날이면 하서가 그 산속에 들어가 통곡했다는 통곡단(痛哭壇)이 있었다. 하서의 애제자 송강 정철은 하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하서가 죽은 뒤 추억하는 글에서 인종의 제삿날에는 반드시 ‘난산’에 올라가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 내용이 담긴 ‘난산비(卵山碑)’가 세워져 있는데, 정조 때 윤행임(尹行恁)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묘소와 생가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난산, 거기서의 통곡이 하서를 다시는 정치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고 또 평생 동안 임금을 그리워하며 도학을 닦으며 자연과만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해줬으니, 어떻게 보면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문묘에 배향 서울에는 종묘(宗廟)와 문묘(文廟)가 있다. 이씨 왕조의 종통(宗統)을 이은 제왕들의 신주를 모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 종묘이고, 유교(儒敎)의 창시자인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을 모시고 우리나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8명의 어진이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 문묘이니, 바로 학문과 사상의 상징이다. 신라 때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때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퇴계와 율곡 등 14명이 배향된 곳이다. 퇴계·율곡 등은 오래전에 배향됐건만 하서는 많은 선비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요구가 강력했으나 결실을 못 맺고 지연되고만 있었다. 하서가 타계한 뒤 237년이 되는 정조 10년(1786)에야 하서가 문묘에 배향된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일찍부터 하서의 학문을 접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그런 학자가 배향의 절차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필암서원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라는 교서를 내려 절차에 맞게 배향 고유제를 지냈다.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분이 바로 하서였다. 퇴계가 그렇게 찬양했고,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이 그처럼 숭앙했던 하서의 배향이 그렇게 늦었음도 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라도 그런 절차가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도학자의 일생 2010년이면 하서 탄생 500주년이다. 이황·유성룡·김성일 등의 500년 400년은 세상이 그렇게 요란했는데, 하서의 500년은 아직도 조용하다. 도학(道學)·문장(文章)·절의(節義)를 모두 제대로 갖춰야만 참다운 도학자다. 비록 하서의 높은 철학사상인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라는 글과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이라는 글이 일실되어 하서 학문의 진면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해도, 이미 알려진 <천명도(天命圖)>나 많은 도학문자나 도학시(道學詩)에서 나타나 있듯이, 하서는 도학에 뛰어났고 문장도 탁월했으며 임금과 나라를 걱정했던 애국적인 절의정신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송시열의 <신도비명>은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다. 패악의 정치에 분노해 정계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와 자연시와 우국시를 읊었지만, 요순시대를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생애가 바로 하서의 삶이었다. 실록의 정사(正史)에도 명확히 기록했듯이 그는 시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다. 시로 의분을 달래고 술로 끓는 가슴을 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북대 김기현 교수의 주장대로, “시는 어두운 사회에 깨어 있는 지성의 아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 의의를 지녔으며, 술은 그의 도의정신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파격이었다”(<하서 김인후의 도학과 절의정신>)라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에 탐닉하고 술에 세상을 잊으면서도 그는 절대로 예의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관(史官)의 평가를 기억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패악의 정치시대에 세속의 권력에 합류하지 않고,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위해 자신을 지키며 높은 사상과 철학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도학자다. 하서야말로 자신을 자학한 삶이 아니라 도의를 몸소 지켜 나라와 인민을 보전할 철학적 기반을 닦으며 살았던 일생이었다. 조선 500년에 도학과 절의를 하서만큼 크게 앙양시킨 사람은 많지 않다. 문장가들이야 많았지만 마음에서 얻어낸 철학과 사상을 실제의 삶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권력과 부를 미련 없이 뿌리치고도 예의 법규에 벗어나지 않게, 시와 술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삶을 몇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조대왕은 문묘에 배향을 마치고 하서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증직하고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했으니 “바름으로 남을 굴복시켰다(以正服人)”는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7<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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