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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삼희 논설위원
환경부와 질병관리본부가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고자 361명에 대한 8개월의 조사 결과를 밝혔다. 127명은 '인과관계 거의 확실', 41명은 '가능성 크다'는 것이다. 이 168명 중 75명은 사망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1995년 시장에 나와 2011년 여름까지 17년 유통됐다. 뭣 때문인지도 모르고 죽거나 앓았던 미확인 피해자는 수없이 더 많을 것이다. 이 비극(悲劇)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2011년 4월 12일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을 맡고 있던 호흡기 내과 고윤석 교수는 임산부 몇 명의 증상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정체불명 폐렴이었는데 기도에 가까운 쪽으로 염증이 집중됐다. 같은 병원 소아청소년과 홍수종 교수가 몇 년 전부터 비슷한 소아 환자들로 애를 먹던 일을 떠올렸다. 아산병원은 곧 고 교수, 홍 교수를 중심으로 '신종 중증 급성 호흡부전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홍수종 교수가 맨 처음 증상이 같은 소아 환자를 발견한 건 그로부터 5년 전인 2006년 2월이다. 폐가 찢어져 있었는데 도대체 치료가 먹혀들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도, 2007년 겨울에도 그런 환자들이 들어왔다. 다른 병원도 알아보니 비슷한 사정이었다. 2007년 연말 아산병원·서울대병원·세브란스·삼성서울병원의 4개 병원 소아호흡기 담당 교수들이 모였다. 그 자리엔 질병관리본부 담당 과장도 나왔다. 뾰족한 수를 찾아내진 못했고 유사 환자가 있을 경우 기관지 내시경까지 해서 최대한 규명해보기로 했다. 홍 교수는 2008년 15명(7명 사망) 사례를 모아 소아과학회지에 '본격 역학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논문을 실었다. 전국 사례를 모아봤더니 2006~2008년 23개 병원에서 환자가 78명 생겨 36명이 사망했다.
고윤석 교수팀은 2011년 4월 25일 질병관리본부에 임산부 환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정식 촉구했다. 그때까지 아산병원에서만 임산부 환자가 8명 확인됐고 4명이 사망했다. 질병관리본부는 5월 10일 역학조사팀을 가동해 8월 31일 가습기 살균제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제품 판매가 중단됐다.
그 무렵 가습기 살균제는 20여종이 나와 연 60만개가 판매됐다. 살균제 원료를 공급한 업체에서 살균제 제조회사들에 보낸 '물질안전보건 자료'엔 '분진이나 증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공정에선 (작업자들이)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전국 수백만 명이 그런 유독 물질이 섞인 미세 수증기 입자를 하루에도 몇 시간씩 허파 속으로 삼켰다.
안모씨 부부가 2009년 낳은 아들이 5개월여 만에 호흡 곤란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가 숨졌다. 2010년 9월 다시 아들을 봤는데 둘째 역시 석 달 만에 같은 증상으로 떠나보냈다. 첫째가 죽은 후 원인을 모르는 바람에 둘째가 태어난 뒤에도 계속 가습기 살균제를 썼던 것이다. 가습기 피해자는 공식 확인된 168명의 수십 배가 될 수도 있다. 안씨 못지않은 사연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세계 환경 독성학 교과서에 한 장(章)으로 다뤄질 만한 문제다. 2007년 말 서울의 큰 병원 소아과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할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질병관리본부 관계자가 비상사태로 판단하고 바로 움직이기만 했어도 비극의 상당수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