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 시간 밖에 허락되지 않았던 새우잠은 결국 제대로 자지 못 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질 수 없는 불쾌한 진동이 벽을 타고 내려와 나를 감싸고, 그것은 그대로 바닥으로 반사되며 나를 다시 흔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억지로 감았던 눈을 부스스 풀었다. 빈사상태였던 오감이 제대로 작동하자 묵혀있던 누더기 모포의 냄새부터 코끝을 찔렀다. 모포를 걷어내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함께 있던 이들도 더 이상 자지 못했는지 눈을 퀭하니 뜨고 있었다. 흔들림은 더 가까워지고,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취하거나 저 기괴한 굉음과 진동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에 길들여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부실한 콘크리트 벽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진동 속에 묵음이 불러오는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들은 얼핏 보면 평온 해 보였지만 퀭한 눈이 담은 동공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들은 분명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색하지 않는다. 익숙해져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냄새 나는 모포 자락처럼 말이다. 이 말없는 불안도 아마 그러한 것이리라. 진동과 굉음 속의 침묵은 모순적이고 불합리했다. 그런 갓잖은 모습에 조소가 나왔지만 도저히 비웃을 수가 없었다.
“어제 밤에 서면이 중공군에게 떨어졌다.” “….”
대대장이 말했다. 중대 규모는 될까, 상급부대는 어디이고 소속이 어딘지도 불분명한 이름뿐이고 허울뿐인 부대의 대대장이었지만 그는 분명 대대장이었다. 계급은 대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 그는 대대장이었다. 서류뿐인 상급부대이건, 실제 존재했던 상급부대이건 분명 어떻게든 존재했던 상급 제대는 그를 최고참으로 남겨둔 채 소멸했다. 그래서 그는 대대장이 되었다. 우리가 소속된 사단은 사라졌기에 그가 사단장이면서 연대장이라 참칭해도 할 말이 없었다. 뭐가 어찌 되었던 상관없었다. 그가 군단장을 참칭하건 군사령관을 참칭하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모든 허울뿐인 수사 따위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위 대대장은 건조하게 그 말을 뱉은 뒤 침묵했다. 어차피 말을 해주지 않아도 알았다. 서면을 지키고 있었던 건 몇 개의 패잔 대대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미 없는 연대를 묶어 만든 ‘자칭 사단’이었다. 자칭 사단이었지만 부대원은 천명도 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부여된 사단번호는 7이었다. 화천과 춘천에서 중공군의 파도와 함께 사라진 칠성부대의 사단부호를 물려받았다. 그것은 사단의 한 축을 이루는,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부대의 단대호가 7사단의 8연대였기 때문이고 듣기로 춘천에서 살아온 ‘연대 깃발’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했으며, 국군의 끈질긴 항전을 상징한다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8연대 병사는 서면을 거쳐오면서 한 명도 보지 못했고 그 ‘자칭 7사단’ 인원들도 8연대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허울뿐인 그 사단은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중공군과 우리 사이엔 아무도 없었다. 예견된 일이었고 곧 다가올 일이었다. 대대장은 말을 이었다.
“서면이 함락되었기에, 중공군 부대는 부산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최고사령부에서 오늘 새벽에 전문이 내려왔다. 읽어주지.” “부산항은 미군선박을 통한 국민들의 소개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 범내골과 전포를 잃으잃으면 모든 것이 끝임. 서면-전포 지구를 방어하는 모든 국군 용사들은 반드시 현 위치를 사수하고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 부산지구 방어사령관 겸 제 1 야전군 사령관 중장 정일현” “양정역을 버리고 우리도 거기로 갑니까?” 어떤 이가 대대장에게 물었다. “아니. 조금 달라.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대대장이 답했다. 잠깐 뜸들인 그는 말했다. “금일 09시 부로, 우리는 군 최후의 공세를 개시한다.” “….” “부산항으로 가는 중공군의 공세를 조금이라도 늦춘다. 현 축선 모든 병력이 공세에 들어간다.시청 방어에 돌려졌던 부산에 남은 마지막 전차 두대가 자원했고 공격에 참여한다.” “..”
반응은 무덤덤했다. 하룻밤 사이에 사령관이 대장에서 중장으로 바뀐 건 아무래도 좋았다. 늘 상 있는 일이었으니까. 우리 대대장도 이름뿐인 대대를 이끄는 대위지 않은가. 중공군의 주공은 서면의 남쪽으로 향 할텐데 어쩌면 이곳에 남는다면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지 모른다. 사실상 자살이었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무표정하고 퀭한 표정을 지은 채 가지각색의 자신의 개인화기를 묵묵히 부여잡았다. 한숨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시한부의 심정일까 아니면 도망가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용단일까? 그들에게선 일말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 또한 어느새 삭아버린 탄알집을 확인하고 구식 카빈소총의 노리쇠를 당기고 있었다. 나도 나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되자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주먹밥 따위를 먹다 만 우리는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났다. 대대장이 들어왔고 자칭 타칭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수군거렸다. 양정과 서면 옆 부전역을 잇던 지하통로는 몇 일 전 서면이 공세를 받기 시작할 때 무너뜨렸다. 우리는 단독군장과 낡아빠진 방탄복, 그리고 소총을 챙긴 후 역사로 올라갔다. 승강장부터 역사까지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미처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마치 거대한 노숙자의 소굴과도 같았다. 시민들은 앉은 채로 허공을 응시하다 우리를 올려다 보았다. 연민일까 동정일까. 그들은 그런 시선으로 우리를 올려다 보았다. 사람들의 그러한 표정은 우리가 바다로 내몰리면 내몰릴수록 많아졌다. 그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 우리도 안다. 하지만 적응하고 싶어도 적응 할 수 없었다.
역사에서 나오니 어지러운 바리케이트 사이로 펼쳐진 조잡스러운 방어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사이에 병사들이 바리케이트와 쌀포대로 만든 조잡한 진지를 등지고 앉아있었다. 대충 거치된 구식 57미리 무반동총은 축 처진 채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 아래에 녹슨 바주카포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그 옆으론 m1919 기관총이 총열이 빠진 채로 거치되어 있었다. 방어진지의 기댄 민무늬 전투복의 한 노병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제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병사가 자신의 몸집만한 브라우닝 소총을 안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엔 적이 뿌린 삐라와 국군의 프로파간다가 어지럽게 흐드러져 있었다.
“귀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빛나는 무공을 세웠음으로 헌법 규정에 의거하여 인헌 무공훈장을 수여함” 바리케이트 뒤쪽에서, 몇 명의 병사들이 도열한 채 장교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고 있었다. 그 옆에선 병사가 훈장이 가득 담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한 병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난 뒤 그에게 훈장증을 되돌려받고 다음으로 훈장을 받는 병사에게 들려주었다. 훈장증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훈장증은 세사람을 거치고 나서야 다시 장교에게 돌아왔다. 조잡하게 찍어낸 훈장은 꾸러미에 담긴 채로 뿌려졌다. 이윽고 지면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온 사방의 장갑이 찌그러고 그슬린 전차 두대가 도착했다. 한대는 k-1 전차였고 나머지 한대는 놀랍게도 k-2 전차였다.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생각했었는데 차체에 ‘시제 2호’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불타는 창원에서 빼왔다고 했다.
우리는 서면대로의 시작인 송상현 동상을 공격 집결지로 삼았다. .양정과 초읍, 연지동등 서면 주변에 잔존한 모든 부대가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공세에 나섰으며, 전차를 동반한 우리는 일종의 후속적 주공이자 초월부대였다. 공세가 서면의 북쪽에 집중되어 있을 때 우리는 단 시간안에 서면사거리 안으로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성공할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적의 매복조의 사격과 동시에 현실이 되었다.
선두에선 k-1 전차의 포탑에 섬광이 번쩍였다. 후속하던 k-2 전차는 연막을 터뜨리며 포와 기관총을 쏘아댔다. 하지만 적이 어디에서 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장을 빠르게 주파해야 했으나 우리는 곧바로 돈좌 되었다. 적의 대전차 미사일과 로켓이 우리가 방패막으로 삼는 가여운 엄폐물로 향해 날아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적이 어디있는지 찾지 못했다. 암흑 속에서 싸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군데 섬광이 보이는듯한 건물에 카빈 소총을 쏘았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피난민을 바다 넘어로 보내야 한다고 자원했다던 k-1전차의 전차장은 불타는 포탑에서 상체를 마치 다 빼내지도 못한 채 불에 타올랐다. 그의 코에서 끓어오른 체액이 몸 밖으로 빠져 나와 쏟아졌다. 선두에선 전차와 그 주변으로 한 ‘타칭 첨병 중대’는 고립되었다. 적의 박격포가 쏟아지자 우리 중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대대가 양분되었다. 우리가 할수 있는건 박격포를 피해 건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고립된 그들은 부숴진 차들 뒤에 웅크린 채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구원할 수 없어.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K-2 전차에 포탑에 로켓포가 스쳐 지나가 송상현 공 동상을 부숴버렸다. 동상의 파편이 광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들은 후퇴 할 수도 구원을 바랄 수도 없다. 동상의 머리가 우리 앞으로 굴러왔다. 고립된 그들은 당황하지도 절망에 빠진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체념했다는 듯 무표정했을 뿐이다. 사이로 무언가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자유대한 만세!”
그들은 엄폐물을 넘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지막 남은 전차 한대도 탑재된 모든 화기를 전방으로 쏟아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포연과 폭음 속에서 그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함성이라기 보다는 울부 짖는 것에 가까웠다. 광장의 낙엽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을 바람에 나뭇가지가 웅웅거렸다. 그 사이를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갔다. 그리고는 하나 둘 낙엽과 함께 저버렸다. 총성과 함성 비명과 굉음소리가 진동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황홀하기 까지 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카빈탄 몇발을 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마지막 공세는 실패했다.
우리는 다시 양정역으로 돌아왔다. 대대장은 중위가 되어 있었다. 대대는 이제 스무명이 채 남지 않았다. 부산진구와 그 인방의 병력들은 모두 시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중국군은 이제 부산항에 거의 도달했고, 그들은 이제 정치적인 선전물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양정역을 버리고 시청으로 걸어갔다.
“부산지구 방어 사령관 이낙현 소장이다. 모든 병사들은 현 위치를 반드시 고수하라 반복한다 모든 병사들은 현 위치를 기필코 고수하라.” “숨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승리의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라 우리가 밀려나면 모두가 쓰러져 ---“ 999k에서 나온 사령관은 이젠 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 그는 부산에 있긴 한 걸까? 그의 말을 끝으로 군가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독전가라기 보다는 절규처럼 느껴졌다. 시청이 가까워지기 시작 할 즈음에, 추락한 전투기 한대가 대로에 처박혀 있었다. F-15K 전투기였다. 추락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훤히 들어난 제트엔진의 팬 블레이드가 방금 끈 선풍기마냥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콕핏 속에선 탈출하지 못했는지 조종사가 계기판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있었다. 다 감기지 못한 그의 눈이 길가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마치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짓이겨진 얼굴 탓인지 나를 노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왜 죽지 못했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해 걸었다.
시청 주변엔 적어도 양정역 보단 훨씬 정교한 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든걸 쥐어짜낸 모양새였다. 금정산과 황령산 등지에서 저항하던 병력을 포함해 부산진구 근교의 싸울 수 있는 모든 병력이 집결했다. M47 전차가 토치카가 되어 포탑만 내 놓은 채 시청 앞에 놓여있었다. 전차병들은 포탑에 콘크리트를 발랐다. 대로변엔 K-1 전차가 한대 서 있었다. 중위가 전차가 남아있냐고 물었다. 차체 옆에 앉아 있던 전차병들은 이 전차가 K-1A1 포탑과 K-1 차체를 결합한 잡종 K-1으로 구동계통이 고장나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전차병들은 차체 주변으로 모래 포대를 쌓았다. 군기를 해하는 소위 ‘겁쟁이’라 불리는 자들은 전봇대와 가로수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담당구역을 할당 받았다. 시청 안이었다. 우리는 해병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드디어 K-2 소총을 받았다. 그들은 해병 1사단의 잔존병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처음 중공군을 맞았고 부산까지 내려왔다. 해병들은 K-2 소총을 머리위로 들어올리며 군가 불러댔다. 그들의 사단은 반토막이 났지만, 겉보기론 그들은 사기가 충천한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 북쪽에서부터 수많은 부대를 바꿔가며 내려온 나만큼 실전을 겪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에도 아직 투지 따위가 남아있겠거니 생각했다. 예비군으로 소집된 후, 행정적인 부대를 거친 뒤 한자리 숫자의 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때는 나도 군가를 부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낙동강에 있을 때는 두 자리 숫자의 이름 모를 동원사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때부터 내 말수는 줄어들었다. 부산에 와서는 내가 무슨 사단에 편제되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병 그들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군가를 쥐어짜고 있었다. 시청내부엔 경찰들도 소총이나 권총 따위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내에서 보던 경찰 복 그대로를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뭔가 언벨런스 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우리가 있던 양정이 떨어졌고 곧이어 시청에 당도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방어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손수레가 이리저리 다녔다. 그 안엔 위스키와 브랜디 따위의 양주들이 들어있었다. 인근 주류 매장과 마트 등지에서 털어온 것들이라 했다. 종이컵에 양주가 따라졌다. 헤네시 꼬냑이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딱 한잔씩 허락 되었다. 빈 병 들은 바로 수레에 담기어져 화염병을 만드는 곳으로 보내졌다. 몸이 따뜻해졌다 병사들은 간만에 서로 웃어댔다.
--- 계단아래로 케이투 소총을 난사했다. 올라오던 중공군은 급하게 몸을 움츠렸다. 내 앞에 서 있던 경찰이 38구경 권총을 쏘다 중공군의 대응사격에 고꾸라져 계단 아래로 쳐박혔다. 해병과 나는 계단을 벗어나 복도에 있는 바리케이트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 바리케이트에 있는 병사가 계단의 문을 노려 유탄을 쏘았다. 계단 옆 게시판에 걸려있던 종이들이 흩날렸다. 건물은 진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자주포를 코앞까지 끌고와 시청을 향해 직사를 하고 있었다. 적의 공격헬기는 여유롭게 시청근처를 날면서 창문 근처에 알짱거리는 모든 것들을 향해 기관포와 로켓탄을 퍼부었다. 구루케이를 통해 같은 층 다른 바리케이트가 뚫렸다는 절규가 들렸다. 해병 둘과 나는 개인화기를 들고 계단의 중공군을 피해 다른 통로로 윗 층으로 올라갔다. 26층, 부산시청의 끝이었다. 잔존한 모든 병력이 26층으로 올라왔다. 시청 곳곳에서 남아있던 잔존병력들의 소리는 더 이상 구루케이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탄약이 부족했다. 가진게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죽은 경찰의 품에서 38구경 권총을 꺼내들었다. 권총의 파지법 하나 제대로 몰랐지만 빈총보다는 나았다.
“자랑스러운 국군 용사 여러분 전쟁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중공군 헬기가 시청주변을 돌며 방송하는 선전문구가 귓가를 때렸다. 그 헬기는 사격을 받았는지 더 이상의 방송은 하지 못했다. 계단 밑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공군이 올라 왔다. 그들은 최후의 최상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동무들, 남조선 동무들 이제 다 끝났습세다 그만하라오 ! 항복하면--” “좆까 빨갱이 새끼야 !”
중공군중 누군가가 소리치자 어느 예비군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웃었다. 중공군 쪽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중공군은 잠시 숨을 고르는듯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시청 끝 층에 남아있는 모든 기자재를 쌓은 뒤 남아있던 마지막 위스키를 나눠 마셨다. 중공군이 공세를 포기한 걸까? 혹시 시청을 깃발을 꼽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무너뜨리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금 계단 밑이 웅성거리며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끝이자 우리의 끝이라는걸 직감했다. 누군가가 애국가를 불렀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따라 제창했다. 그리고 애국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누군가 ‘가스!’라고 외쳤다. 그 연기 사이로 흑복을 입고 이것저것을 덕지덕지 붙인 검은 소총을 든 중공군들이 들어왔다. 방독면을 쓰고 연기사이를 뚫고 온 검은 존재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하나둘 적탄에 스러졌다. 나와 함께 계단을 올라온 해병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소리를 질렀던 예비군은 눈을 부릅뜬 채 피거품을 뿜어대고 있었다. 다른 해병이 애국가를 이어 부르며 울부짖으며 저항하다 고꾸라졌다. 미쳐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이 피와 함께 섞여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38구경을 들었다. 하지만 미처 한발도 쏘지 못한 채 어깨의 격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나는 그제서야, 거기에 이르러서야 종말이 왔다는 걸 실감했다. 낙동강에서 후퇴할 때도, 서면에서 후퇴할 때도, 오늘 양정에서 후퇴할 때도 어쩌면 나는 모든게 끝나간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중공군은 시청 옥상에 오성홍기를 걸었다. 이렇게 나의 전쟁은 끝났다.
중공군은 오성홍기를 건 뒤 분노에 차 쓰러진 병사를 걷어차며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쓰러져 있던 나는 위스키를 한잔 더 마실걸 하고 생각했다. 눈을 질끔 감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중공군 장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고함치자 중공군 병사들은 물러나고 중공군 군의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어깨를 붕대로 감싸 맨 나는 정신이 돌아오자 다른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시청아래로 내려왔다. ‘잡종 k-1’은 포탑이 뜯겨나간 체 불타고 있었고 토치카화된 M47은 해치가 모두 열린 채 버려져 있었다. 바리케이트는 모두 무너져 있었고 얼룩무늬와 초록 픽셀무늬의 병사들이 내 팽겨져 있었다. 중공군 헬기가 다시 돌아다니며 항복을 촉구했다. 그것은 우리에겐 마치 제사상 앞의 조의문 처럼 들렸다. 중공군은 시청 계단 아래에서 우리에게 태극기를 밟고 지나갈 것을 요구했다. 애국가를 제창했던 우리는 저항이 무색하게 눈치를 보며 그 말을 들었다. 중공군이 비웃었다. 나를 바라보던 F-15K의 조종사의 눈이 생각났다.
근방의 한국군의 포로들은 모두 부산 시민공원으로 모였다. 우리는 공원 광장의 잔디밭에 정렬했다. 중공군 장교가 소리를 지르고 북한출신인지 조선족 출신인지 하는 부사관이 웅얼거렸다. 우리는 그곳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선족 부사관이 그런 우리들에게 갑자기 라디오를 들고 와 볼륨을 키웠다.
“친애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 자랑스러운 국군 동지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압도적인 적을 맞아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비록 중과부적으로 우리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지만 국군 용사 여러분의 분투는 영원히 기억 될 것입니다. 우리 방어 사령부는 2020년 10월 17일 22시를 기점으로 모든 전투행위를 중지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금일 22시를 기점으로 모든 전투행위를 종결 할 것을 명령합니다. 대장 이낙연”
중공군들은 그들의 무전을 통해 중국어로 된 무언가를 동시에 들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소총을 쏘아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것을 듣고 몇 시간 만에 대장이 된 이 사람은 부산에 같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전쟁도 대한민국의 전쟁도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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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부산시민들은 하나 둘 그들의 은신처에서 나왔다. 거리는 일단 대충 치워졌다. 우리는 포로 수용소로 향할 줄 알았지만, 어찌되었는지, 행정상의 오류가 있었는지, 아니면 아무런 가치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부산에 내버려졌다. 전투복을 벗고 부서진 쇼 윈도우 속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금정산 일대와 기장군 일대에서 항복을 거부한 병사들과 중공군간의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못해서, 죽지 못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군인으로 취조 받을까 전투화도 벗어버린 내 자신을 환멸했다. 길거리에서 중공군 병사가 한 여성시민의 자전거를 빼앗고 있었다. 그 뒤의 한국군 헌병이 여성을 타일렀다
“그.. 아가씨 이분이 자전거를 사신다니까..”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요! 제발 말 좀 해주세요!”
하지만 중공군은 기어이 완력으로 자전거를 빼앗았고 여성을 향해 동전 몇 개와 지폐 몇 개를 던졌다. 여성은 울었고 헌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경멸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혐오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뭘 보냐고 소리치며 가버렸다. 나라는 사라졌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제 중국 인민이 되는 것인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낙동강부터 짓이겨오던 두통이 심해졌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패전한 조국의 군인으로서 세상에 내던져 졌다. 훈장도 위로도 감사도 치료도 없다. 머리가 아파왔다.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총탄소리 같기도 했고 말소리 같기도 했다. 15k의 조종사가 웅얼거렸다. 왜 죽지 못했나. 나도 모르게 그의 물음에 답하며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아무도 없는 서면대로를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 아래로 중공군의 하얀 삐라가 눈처럼 내려왔다.
첫댓글 지구 최후의 날 기계 를 원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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