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 하린 (시인)
29. 상상 테마28 - 미술용어를 바탕으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소재나 모티브가 갖는 특징과 상상 적용 방법
우선 미술과 관련된 단어들을 아는 대로 나열해 보자. 덧칠 팔레트 캔버스 소묘 드로잉 스케치 크로키 에스키스(밑그림) 그로테스크 색감 색맹 팝아트 미술관 입체성 전위 조각 회화 필법 화첩 전시회 기획 반예술 액자 배접 명도 채조 스펙트럼 원색 모사 그래픽 명암 누드 설치 직선 곡선 벽화 수묵 수채 농도 브론테 묘사 터치 배치 비대칭 구도 척도 콜라주 데칼코마니 데콜라주 장식 추상 디자인 미니얼 위조 기교 문양 무늬 문신 판화 음각 전각 야수파 인상주의 에콜 에튀드(습작) 여백 12색 15색 24색 물감 크레파스 색연필 윤곽 원근 피사체 큐레이터 모델 숙련 자동기술법 소품 장르 점묘 조형 상감 화가 박제 키치 타블로 파스텔 원본 화풍 포스터 몽타주 등이 적힐 것이다.
그런 다음 간절한 상태에 놓인 개별자(화자 또는 시적 대상)를 설정하자. 이제 상상 게임을 하듯 이질적인 것과 위에서 제시한 미술 관련 용어를 섞어보자. ‘신은 왜 나에게 절망만을 덧칠하고 있을까’ ‘봄의 팔레트엔 연두와 노랑이 가득한데 내 슬픔은 왜 암흑으로만 치달을까’ ‘꿈이 몰래 스케치한 나의 무의식을 해석한다’ ‘이별의 에스키스’ ‘달은 내 어두운 마음만 읽어내는 색맹인 게 분명하다’ ‘태양의 그로테스크’ ‘고독을 증언한 입체성’ ‘당신을 보면 왜 내 몸속에 전위가 꿈틀거릴까’ 등과 같이 표현하면 된다. 이제 묘한 뉘앙스를 풍기거나 나만의 존재론적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정황(상황)을 선택한 후 시를 써보자.
‘미인도’ ‘초충도’ ‘세한도’ ‘자화상’ ‘초상화’ 등과 같이 특정 그림 명칭을 모티브 삼아서 쓰는 방법도 좋다.
필자의 시를 통해 그 소재가 어떻게 상상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세한(歲寒) / 하린
손을 떨면서 먹을 간다 농도가 짙어지는 속도가 보이기 시작하자 풍경이 정갈해진다 나는 왜 지금 여기를 증명하려 하는가 이야기들이 플롯을 껴입고 눈앞에서 선명해지려는 걸 왜 방치하는가 종이는 한 폭의 광장 야사(野史)를 멈추지 않게 하는 연대 오늘 밤 눈동자가 들끓고 후일담이 번식하는 것을 막을 순 없다 숨소리가 문장이 되고 아린 생각이 구절이 되어 당신들을 향해 뻗어가는 걸 거역할 수 없다 첫 바둑돌이 놓일 때처럼 첫 문장을 내려놓는다 꼬리를 물 것인가‘ 자를 것인가? 독설들을 떠올려선 안 된다 필체에 신경 쓰다가 문체를 놓치고 여기에 몰입하다가 저기를 은폐하면 더더욱 안 된다 어둠 속에 전설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안다 끝없이 소요한다, 탕진한다 찰나를 통과하며 소용돌이친다 갈등과 갈등이 섞여 혼돈을 부추겨도 나는 절정에 빠지면 속수무책이 되는 사람 쓸쓸해서 황홀하고 황홀해서 더 많이 아픈 사람 그러니 오래전 백지를 사랑했던 나는 영원히 미완성이다 닫힌 미래형이 아니라 열린 과거형이다 ―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1단계 - 스스로 점검하기 –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세한(歲寒)’은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를 기본 모티브로 해서 창작한 작품이다. 어느 날 필자는 이 그림이 겨울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한여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라한 집 한 채 주위에 고목 몇 그루가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이 그림이 한여름에 그려졌다니 놀라웠다. 극적인 대비 속에서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생활의 고난과 자신에게 귀한 책을 선물한 제자 이상직에 대한 변함없는 의리와 절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필자는 이 그림을 그릴 때 김정희의 심리 상태를 상상해 보았다. ‘세한도’ 그림 자체가 가진 상징성보다는 그림을 그릴 당시 김정희가 가졌던 자의식이나 마음상태에 관심을 더욱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설정한 후 밀착성 있게 다가갔다. 유배 생활을 오래 할 때 다가올 수 있는 극한의 고독과 외로움을 극복해 내려는 올곧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췄다. 자신만의 미학적 정신을 구현하려고 문인화를 그리는 김정희와 하나가 되는 상상은 매력적인 체험이었다.
따라서 이 시의 장점은 바로 상상적 체험을 통해 과거 속 인물과 하나가 되어 밀도 있게 미학적 체험을 한 것이다.
2단계 -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미학성과 ‘자의식’을 점점 강화하면서 시상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동원된 객관적 상관물(현상)은 문인화를 그리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천천히 긴장감 있게 진술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동원된 단어나 구절이 ‘먹을 간다’ ‘농도가 짙어진다’ ‘종이는 한 폭의 광장’ ‘문장’ ‘구절’ ‘필체’ ‘문체’ ‘백지’ ‘미완성’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을 활용해 최대한 극적인 심리 상태 위주로 시가 진행되다 보니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행위에 스토리를 입히는 효과를 드러냈고, 정황을 분명하게 하면서 화자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3단계 -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서 제일 많이 신경 쓴 부분이 상상적 체험이다. 1000년 전의 문인인 김정희와 최대한 하나가 되기 위해 눈을 감고 빙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가 아니라 ‘난 김정희다. 오늘 난 세한도를 완성할 거다’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되어 몰입성을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나온 표현들이 “나는 왜 지금 여기를 증명하려 하는가/ 이야기들이 플롯을 껴입고/ 눈앞에서 선명해지려는 걸 왜 방치하는가”부터 마무리에 내려놓은 “나는 영원히 미완성이다/ 닫힌 미래형이 아니라 열린 과거형이다”까지이다. 모든 부분이 김정희와 되어 주체적으로 발화되도록 빙의 상태가 흘러갔다.
또한 미학적 정신을 도도한 선비 정신으로만 규정하지 않으려 했다. 솔직 담백하게 갈등적 상황과 미학적 전신이 뒤섞이게 했고 그로 인해 나타난 심리적 문양을 밀도 있게 풀어내려고 했다.
* 또 다른 예문
화가 뭉크와 함께 /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끓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동화同化야 도 동화童話의 세계야 저 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 199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밤의 드로잉 / 채선
상상만으로 외설스러워 희망은 자꾸 이불을 끌어 덮지만 나의 잠은 늘 알몸이지 겹겹 안개에 둘린 알전구 같아 숨겨진 것도 아닌 지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 때론, 이끼의 빛깔로 습습하게 자리를 적시기도 하지 어둠은 천의 눈동자들이 훔쳐보는 진공 같아서 나는 늘 불을 켜두네 알몸은 가벼운 행장, 부끄러울 것은 없어 한낮의 불길처럼 뜨거울 뿐이니까 외설스러운 건 다만, 가면을 쓰는 일 상상만으로도 절정에 이르는 길을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다 홑이불에 감긴 곡선을 그릴 줄 안단 말이지 -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겨울호
드로잉 / 김서하
A4 용지에 원을 하나 그렸지 기준점으로부터 파문이 번지는 게 보였어 아다지오, 아다지오, 리듬이 지나간 후 나도 단일폐곡선을 따라 빙빙 돌았지 달아나는 설계도처럼 흘러내리는 데생처럼 파문은 중점을 끌고 표류했지 달리의 시계처럼 모든 시간이 다 휘어진 후 삭망과 삭망 사이 보름달이 일그러졌고 달의 흉터에 살짝 구름이 엉겨 붙었지 변신을 꿈꾸던 나는 끝내 울지 않고 침전을 반복했어 하루에 한 뼘 실선을 아껴가며 지웠어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귀결점처럼 한 선만 남아야 동그라미는 결정되고 말겠지만 결코 원형감옥 같은 것은 떠올리지 않았지 책상 밑은 온통 구겨진 동그라미 A4용지에 원을 하나 더 그렸지 멈추지 않고 단번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독주를 시도했어 녹아내리는 눈사람에게도 회전은 필요하지 그러니까, 내가 완성하려던 것은 시작이라는 한 점이었지 - 『가깝고 먼』, 교요아침, 2019.
- 출처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09)
* 하린 시인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1998년 〈광주매일〉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 청마문학상(2011), 송수권시문학상(2015), 한국해양문학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현재 중앙대 문화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시 창작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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