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지계(移禍之計)
허물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 계책이다.
移 : 옮길 이(禾/6)
禍 : 재화 화(礻/8)
之 : 갈 지(丿/3)
計 : 꾀 계(言/2)
출처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077回
유비(劉備)가 서촉(西蜀)으로 들어가면서 관우(關羽)에게 형주(荊州)를 맡겼다. 관우는 형주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손권(孫權)은 형주를 차지하고자 노심초사하다가 여몽(呂蒙)의 계책으로 관우를 사로잡고 형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손권은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관우의 거친 욕만 듣고 참형을 내렸다. 이때 장소(張昭)가 말했다. "지금 주공이 관공 부자를 해쳤으니 강동에 화가 닥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저 관우와 유비는 도원결의(桃園結義)할 때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誓同生死)했습니다. 지금 유비는 양천의 병력을 이미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에 제갈량의 지모가 있고, 장비와 황충과 마초와 조운 같은 맹장이 있습니다. 만약 관우 부자가 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병력을 일으켜 힘을 떨쳐 복수할 것입니다. 아마 동오가 대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손권이 놀라면서 계책을 물으니, 관우의 목을 조조(曹操)에게 보내어 유비가 조조를 의심하게 하면 된다고 했다. 손권은 목관에 관우의 수급을 담아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관우의 수급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운장이 이미 죽었으니 이제 내가 발을 쭉 뻗고 자겠구나(夜眠貼席)."
그러자 한사람이 나와 말했다. "이것은 바로 동오의 화를 우리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此乃東吳移禍之計也)."
조조가 그를 보니 주부 사마의(司馬懿)였다. 그 이유를 묻자 사마의가 말했다. "옛날 유비와 관우와 장비 세 사람이 도원결의할 때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지금 동오가 관우를 해치고 나서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고의로 수급을 대왕께 바쳤습니다. 유비의 노기를 대왕에게로 옮겨 동오를 공격하지 않고 위를 공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리어 중간에서 편하게 일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昔劉 關 張三人桃園結義之時, 誓同生死. 今東吳害了關公, 懼其復讎, 故將首級獻與大王, 使劉備遷怒大王, 不攻吳而攻魏, 他卻於中乘便而圖事耳.
동오의 계책을 안 조조는 향나무로 관우의 몸을 만들고 머리를 맞춰 대신(大臣)의 예로 장사를 지내 주었다.
■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중국 원나라의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장편 역사 소설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오나라의 손호가 항복하여 천하가 통일될 때까지의 사적을 소설체로 풀어 서술하였다. 중국의 사대 기서 가운데 하나이다.
'연의(演義)'라는 말은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여기저기서 전해져오는 야사와 전설 등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요즘말로 '팩션(faction; 사실과 허구가 섞인 영화나 책 등을 말함)'이다.
우리는 '삼국지(三國志)'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소설을 뜻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진(晉)나라 때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를 의미한다.
진수의 삼국지는 중국역사의 초기를 다룬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라고 한다. '삼국연의'도 수호지(水滸誌),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기서(奇書)'이다. 삼국지와 삼국연의가 각기 역사와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명(明)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지었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청(淸)나라 때 모종강(毛宗岡)이 엮은 것이다.
나관중이 지은 연의는 총 24권 240칙(則)이었다. 이것을 모종강이 부친인 모윤(毛綸)과 함께 120회로 대폭 수정했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는 그에 어울리는 시를 추가하였다. 우리가 읽는 삼국연의는 대부분이 12회분을 한 권으로 편집하여 총 열 권으로 완성되어 있다.
자, 그럼 삼국연의를 펼쳐보자.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시작이라구? 아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사(詞)'라는 노래아다. 사(詞)는 시(詩)의 변형이다. 시는 운율이 엄격하게 맞아야 하고 정형화되어 있어서 읽기 위주였다. 하지만 사(詞)는 '노래하듯 부르는 시'이다. 즉, 요즘의 대중가요인 셈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노랫말을 지을 수 있었다. 노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춤이다. 사(詞)도 춤을 곁들이며 불렀다고 한다.
시(詩)가 당(唐)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라면 사(詞)는 송(宋)나라 때 유행한 문학 장르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진국의 문화는 서로가 따라서 배우려고 한다. 오늘날 전 세계가 K-팝을 따라 부르며 한류문화에 열광하듯이, 송사(宋詞)도 서로가 따라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우리의 고려시대 선비들도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송사를 원어로 한 곡조씩 부름으로써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럼, 우리도 한 번 따라 불러볼까?
滾滾長江東逝水
장강은 넘실넘실 동쪽으로 흐르는데
浪花淘盡英雄
영웅은 물거품처럼 다 사라졌구나
是非成敗轉頭空
시비 성패도 한갓 공허한 것이로다
靑山依舊在
청산은 옛날 그 자리인데
幾度夕陽紅
노을은 몇 번이나 붉음을 반복했던가!
白髮漁樵江渚上
강가의 어부와 나무꾼은 백발이 되었어라.
慣看秋月春風
가을 달 봄바람은 어느 때나 보는 것,
一壺濁酒喜相逢
한 병 탁주로 반갑게 마주 앉아
古今多少事
고금의 숱한 일들을
都付笑談中
모두 다 우스개이야기로 흘려버리세.
삼국연의의 서사(序詞)인 이 노래는 명(明)나라 때 양신(楊愼)이 지은 '임강선(臨江仙)'이라는 사(詞)의 일부분이다. 그는 중국의 역사를 10개의 단계로 나누어 노래로 묶은 '이십일사탄사(二十一史彈詞)'를 지었습니다. 모종강이 서사로 활용한 노래는 제3단인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노래' 부분이다.
내용을 음미하면 삼국연의를 다 읽은 듯한 느낌이다. 인간의 역사는 부귀영화도 의미 없는 일이고 오직 노자(老子)적 삶인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다분히 해탈의 경지에 있다. 또한, 이 노래는 삼국연의의 첫 회에 나오는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라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응축시켜 놓았다.
양신(楊愼)은 왜 이런 가사를 지었을까? 양신은 명나라 중기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한림원수찬(修撰)이 된 촉망받던 학자였다. 그런데 세종(世宗)이 자신의 생부(生父)를 황제로 추존하려고 하자,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세종은 양신에게 형벌을 가하고 운남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양신은 그곳에서 3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유배 중에도 100여 종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70세가 넘어 촉(蜀)땅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여전히 죄인이었다. 촉망받던 신하에서 한 순간에 죄인이 되어 변방으로 내몰린 양신(楊愼). 그가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던 것은 노장사상에의 심취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참담한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종강(毛宗岡)은 왜 양신(楊愼)의 이 노래를 넣었을까? 모종강도 젊어서부터 글을 잘 짓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가 시력까지 잃은 것으로 봐서 건강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세상을 볼 수 없다면 삶 자체가 암흑인 것이다. 자연히 인생도 무의미하다. 그리하여 모종강 스스로도 절절하게 공감한 양신의 이 가사를 대하소설의 응축본으로 맨 처음에 배치한 것이라면 너무 엉뚱한 생각일까?
■ 정사 <삼국지>로 둔갑한 소설 삼국연의 (1부)
중국을 과대포장한 나관중의 소설을 역사로 알고있는 한국인들
213년 고구리 산상태왕은 주통촌의 소후에게서 얻은 아들 교체(동천태왕)를 태자로 책봉한다. 그리고는 얼마 후 고구리 주변의 국제정세는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된다. 한나라에서는 헌제를 옹립했던 조조가 216년에 위왕(魏王)이 되어 제위까지 넘볼 수 있는 최고 권력을 쥐게 되었으나,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는다.
그러던 조조가 220년에 죽고 9개월 후 아들 조비는 헌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해 황제가 되어 위(魏)나라라 칭했다. 중국의 상징 한나라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이듬해 한 왕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촉(蜀)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라 했고, 229년 손권이 오(吳)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드디어 중국에서는 후한이 나뉘어져 위(魏), 오(吳), 촉(蜀)의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조비가 세운 위나라는 45년 후인 265년 사마의(중달)의 손자 사마염에게 왕위를 넘어가 진나라가 세워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서진(西晉)이라 한다. 유비가 세운 촉한은 42년 후인 263년 아들 유선이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항복하고, 손권의 오는 51년 후인 280년 사마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위·오·촉 삼국 모두 인간의 수명보다도 짧은 초미니 집단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 중국의 삼국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 민족의 나라들은 고구리가 900년, 백제 678년, 신라 992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렇듯 인간의 수명보다도 짧은 역사 속에서 어찌 문화의 창달과 사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으리오! 오로지 서로 속이고 죽고 죽이고 하는 무질서 속에서 황금만능의 혼탁한 세상만이 중국에 존재했던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는 황건의 봉기부터 후한이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서진으로 통일될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서로 위서 30권, 촉서 15권, 오서 20권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기>나 <한서>처럼 인물위주로 씌어졌으나 연표를 담은 표(表)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는 없고, 단대사(斷代史)를 나라별로 저술해 새로운 형식의 사체(史体)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보고 쓴 역사서이다. 위나라 왕들을 본기로 했으며 촉과 오의 왕들은 열전에 편입시켰다.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라 기록했고, 오의 왕들은 주를 붙이거나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진수가 살던 진나라가 위나라에게 선위를 받아 세워졌기 때문이다.
정사로 둔갑한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
우리나라에서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중에서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판매되고 있는 책인데, 그 내용은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와는 많이 다르다. 한국의 삼국지는 명나라 초 천재소설가 나관중이 지은 '삼국연의'의 내용을 번역한 책이다. 연의(演義)는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에 내용을 보태서 재미나게 설명한 책이나 창극'이라는 뜻이다.
나관중은 삼국연의의 앞머리에 "진나라 평양후 진수가 남긴 역사기록을 후학 나관중이 순서에 따라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청나라 역사가 장학성은 "칠실삼허(열 중 일곱은 사실이고 셋은 허구)"라고 했듯이 오리지날인 정사 삼국지가 없었다면 소설 삼국연의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삼국연의는 만화로도 그려지고 전집류로 팔리고 있는데, 독자가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소설의 내용을 정사(正史)로 오인해 왜곡된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사실 문제가 많은 책이다. 앞으로는 소설 삼국연의를 읽으면서 '주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허구'라는 개념을 가지고 읽어야 소설로 인해 사라져버린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연의를 구별해서 팔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나관중은 원말 명초 시기를 살았기에 한족이 이민족인 몽골에게 지배당한 현실을 비통해했고 명나라는 이러한 한족들의 추락된 사기를 진작시키고, '동이역사의 말살'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년 전에 사라진 한족이 세운 촉한을 이상형으로 삼아 소설로 각색하도록 했다. 즉 소설 삼국연의는 한족의 정통성을 기치로 내걸고자 유비의 '촉한 정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삼국연의는 '촉한 정통'의 기준에 따라 촉한의 인물들을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반면에 '위서 동탁전'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개혁가로 기록된 동탁은 중국의 변방인 롱서 임조(陇西临洮)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설에서는 희대의 패륜아로 매도되고 양아들인 여포에게 공격받아 죽는 한심하고 못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건안문단을 선도한 시인이자 문학과 사상의 진흥에 앞장서 정사 삼국지에 '문치의 제왕'으로 기록된 조조가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하고 교활한 간웅(奸雄)으로 탈바꿈되고, 유능한 정치가이기는 했지만 군사는 잘 쓰지 못했던 촉한의 제갈량이 신출귀몰한 군사전략가로 변신한 데에는 이러한 '촉한 정통'이라는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 삼국연의에 나오는 명장면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관우가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베고 문추를 단칼에 죽이는 장면과 오관참장(五關斬將), 왕윤이 초선을 이용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장면,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영입하는 과정, 장비가 장판교에서 고함 한마디로 적장을 죽이고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을 불러들여 화공으로 조조가 100만 대군을 잃는 내용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 삼국연의를 읽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조조와 위나라는 계속 패전만 거듭하고 유비의 촉한이 자주 이기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국의 통일은 당연히 촉한에 의해 이루어졌어야함에도, 실제로 삼국은 나중에 위나라를 이은 서진에 의해 통일된다. 그 이유는 바로 삼국연의가 소설 속의 허구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명나라는 위, 오, 촉의 역사를 마치 중국대륙 전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과대포장하여 당시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소설 삼국연의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정작 피해자인 한국인들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마치 실제로 일어난 역사인양 착각하고 있으며, 그 소설에 매료되고 환호하는 이 슬픈 현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정신을 죽이는 소설 삼국연의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팔리면 안 되고, 적벽대전과 같은 영화도 상영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역사에 대한 무지함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올바른 역사의 진실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동탁(董卓)의 고향 농서(陇西)는 어디인가?
정사 삼국지에 동탁(董卓)은 농서군 임조현(陇西临洮)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조는 '사기 몽염열전'에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 장군과 30만 명을 보내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 여리이다"는 기록이 있어,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농서군에는 수양현과 임조현 등 11개현이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陇西郡 롱서군) 秦置。莽白厌戎。户五万三千九百六十四,口二十三万六千八百二十四,有铁官、盐官。县十一:狄道(적도),白石山在东。莽曰操虏。上邦,安故,氏道,《禹贡》养水所出,至武都为汉。莽曰亭道。首阳(수양),《禹贡》鸟鼠同穴山在西南,渭水所出,东至船司空入河,过郡四,行千八百七十里,雍州浸。予道,莽曰德道。大夏,莽曰顺夏。羌道,羌水出塞外,南至阴平入白水,过郡三,行六百里。襄武(양무),莽曰相桓。临洮(임조),洮水出西羌中,北至枹罕东入河。《禹贡》西顷山在县西,南部都尉治也。西。《禹贡》嶓冢山,西汉所出,南入广汉白水,东南至江州入江,过郡四,行二千七百六十里。莽曰西治。
중국은 동탁의 고향인 임조를 중국의 변방이라는 표현을 쓰며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지명 이동을 통한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농서가 어디인지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은 '사기 권61 백이열전'에 붙인 후대 학자들의 주(註)를 보면 알 수 있다.
1)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와 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 夷齊餓於首陽山 在隴西首)", 같은 기록에 전하길, "농서군 수양현으로 지금의 농서에 수양산이 있다(隴西首陽縣是也 今隴西亦有首陽山)"는 기록이 있으며,
2)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 河曲之中)."
3) 허신의 '설문'에 전하기를,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說文云首陽山在遼西)"는 기록이 있다.
위 세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와 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농서이고, 그곳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동쪽으로 90도 꺾이는 코너인 산서성 서남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이와 숙제의 무덤은 '대청광여도' 등 고지도에도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2002년 그곳에서 백이와 숙제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이 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바로 그곳이 고대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경계였던 진장성의 서쪽 끝인 임조(농서=적조)이고, 고구리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가끔 중국에게 빼앗기기는 했으나 줄곧 우리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곳 농서 출신 동탁과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동 해현(河東解縣) 출신 관우는 고구리 사람으로 한나라에 들어가 활약한 역사인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 정사 <삼국지>와 다른 소설 삼국연의의 내용 (2부)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를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 때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고 있다. 과연 어떠한 내용들인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탁군에서 돗자리 장사를 하던 유비와 푸줏간을 하던 장비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관우가 만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며 나이순으로 의형제를 맺어 유비가 첫째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관우가 160년생이고 유비는 161년생으로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더 많다. 따라서 나이순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허구인 것이다.
또한 도원결의는 정사 <삼국지>에 없는 허구이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유비가 고향에서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잠자며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면서 적과 싸우는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세 명은 의형제가 아니라 침상을 같이 쓸 정도로 친밀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였던 것이다.
2) 도원결의를 맺은 3인은 대장간으로 가서 유비가 쌍칼, 관우가 82근 청룡언월도, 장비가 장팔사모라는 무기를 의뢰해 사용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82근이면 약 18kg이 넘는 무게인데, 그 언월도를 관우가 자유자재로 휘둘렀다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든다.
관우가 사용한 무기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에 2군데 간단한 언급이 있다. 첫째 관우가 안량을 찔러 죽였고, 둘째 노숙과의 만남에서 칼을 들고 일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남조 양나라 때의 <고금도금록>에는 “관우가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 두 자루를 만들고 만인적(萬人敵)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전투에 패해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속에 던졌다."라는 기록이 있어 관우의 주 무기는 청룡언월도가 아니라 바로 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여포가 방천화극(方天畵戟)을 휘둘렀고 장비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다. <중국병기사고>에 "한나라 때는 극(戟)의 제작이 성행하였고, 모(矛)가 그 다음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한서>나 <삼국지>에도 언월도처럼 긴 자루가 달린 대도(大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한나라지에서도 대도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
중국 기록에 언월도(偃月刀)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며, 언월도는 북방민족의 무기로 소개하고 있다. 나관중이 소설 <삼국연의>를 쓰면서 관우에게 청룡언월도를 쥐어준 것은 그가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언월도뿐만 아니라 청룡은 동쪽의 수호신으로 동이(東夷) 즉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원소가 주축이 된 반동탁 연합군이 공격해오자 여포는 동탁에게 자신이 출전해 연합군을 상대하겠다고 제의하나, 화웅이 연합군을 막는 데는 자신 정도로도 충분하다면서 출전하기를 청한다. 화웅에게 연합군의 포충, 손견의 수하 조무, 원술의 부장 유섭, 한복의 부하 반봉 등이 당하자 연합군에서는 아무도 선봉으로 나서길 꺼려했다. 이를 지켜보던 관우가 출전해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단 1합 만에 베고 돌아왔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는 연합군의 일원인 손견이 양인에 도착하자, 동탁은 호진을 대독호로 삼고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감독하게 해 손견과 맞서게 했다. 화웅은 도독에 임명돼 호진의 부장으로 출전했다. 양인 전투에서 손견이 동탁의 군사를 크게 쳐부수고 화웅은 화살에 맞아 죽어 효수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화웅은 관우에게 단칼에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4) 정권을 잡은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해 폭정을 계속하자, 왕윤은 자신의 수양딸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과 수양아들 여포를 이간질해 두 사람 사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여포가 동탁을 죽일 결심을 굳히자, 왕윤은 동탁에게 사람을 보내 헌제가 선양하려 하니 궁궐로 들어오게 해 여포가 동탁을 죽였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왕윤이 동탁을 암살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일이 들통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여포가 평소 잘 대해주던 왕윤을 찾아가 이에 대해 상의하자, 왕윤은 동탁 암살계획을 이야기하고 여포에게 가담할 것을 권유해 결심을 받는다. 헌제를 위한 잔치가 열리자 왕윤은 동탁을 주살하라는 거짓조서를 여포에게 주어 궁궐로 들어오던 동탁을 죽이게 했다.
여포가 양아버지 동탁의 시녀와 사통한 것을 왕윤의 수양딸 초선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으로 바꾸어 묘사했는데, 이 가공의 인물인 초선(貂蟬)은 양귀비, 서시, 왕소군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4대 고대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을 봐도 중국의 역사는 가공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반동탁 연합군을 이끌었던 조조와 원소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원소의 부장인 맹장 안량이 조조의 부장 송헌과 위속을 단칼에 죽이고는 서황마저 30합 만에 격퇴시키자 다급해진 조조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관우를 출전시켰다. 관우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 적토마를 타고가 안량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고 소설 삼국연의에 묘사되어 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여포의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적토마는 관우가 패해 생포되자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적토마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적토마를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해볼 때 그때까지 오래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에는 원소의 부장 안량이 조조 휘하의 유연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자 조조가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한다. 관우가 멀리 있는 안량의 군기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 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관우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인 것은 사실이나,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조의 부장들을 압도적으로 이긴 안량을 관우가 단번에 베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의 맹장 안량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사연이 숨어있었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의 무공을 높이 평가해 죽이지 않고 편장군에 임명하고 후히 대접했으나, 관우는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공을 세워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갚은 후 여기를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당시 관우가 조조 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비가 원소에게 “"관우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 우리 편으로 올 것이다"고 말하자, 원소는 안량에게 관우를 보면 공격하지 말고 유비의 말을 전하라고 명했다. 안량은 관우를 보자 반갑다고 인사하며 뭔가 말하려는데 관우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안량을 기습해 찔러 죽이고는 그 목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 관우의 무공을 엄청나게 부풀린 소설 삼국연의 (3부)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 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어낸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고 있다. 과연 어떠한 내용들이 있는지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다.
6) 원소의 맹장 안량이 관우에게 어이없이 당하자, 이번에는 안량의 의형제격인 문추가 원수를 갚기 위해 출전한다. 소설 삼국연의에 따르면, 문추가 공격해오자 조조 휘하의 장료와 서황이 출전한다. 문추는 두 장수가 포위하는 것을 보고는 화살을 쏘아 장료의 투구 끈을 맞춰 떨어뜨리고, 다시 다가가던 장료가 타고 있던 말이 문추가 쏜 화살에 맞아 낙마하고 만다.
장료가 위험해지자 서황이 급히 나서서 구해주고는 문추와 몇 회합을 겨루었으나 힘에 부치자 도망치고 만다. 문추가 병력을 이끌고 서황을 추격할 때 관우가 중간에 나타나 문추를 가로막는다. 문추는 관우와 응전했지만 채 2합도 되지 않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겁을 먹고는 말을 돌려 도망친다. 관우는 빠른 적토마로 달려가 머리 뒤에서 문추를 내리쳐 말에서 떨어뜨린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의 기록은 다르다. 안량이 전사하자 원소는 기병대장 문추를 유비와 함께 조조 진영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군수물자를 미끼로 문추를 유인했고, 문추의 군사들이 군수물자를 얻느라고 흩어지자 진영이 어지러워졌다. 이때 조조가 6백 기병을 거느리고 문추군을 공격해 대파했으며 문추도 혼전 중에 전사했다.
이 장면 역시 촉한의 장수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조 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해 효수당한 문추의 목을 관우가 적토마를 타고 달려가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도망가는 문추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고 달리 묘사했던 것이다. 즉 이 장면은 완전 허구인 것이다.
7) 관도대전 이후 유비의 편지를 받은 관우는 조조에게서 떠나 유비에게 가기로 결심한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관우가 조조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고 유비에게 가는 도중 5개의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차례로 단칼에 베면서 돌파하는 장면을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이라고 한다. 유명한 고사성어로 불리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없고 나관중이 각색해 지어낸 부분이다.
관우는 낙양으로 가는 관문인 동령관에서 증명서를 요구하는 공수를 단칼에 베고, 낙양을 지키던 태수 한복과 맹탄을 죽이며, 사수관의 진국사에서는 자객들을 모두 죽이고 수문장 변희마저 죽인다. 형양에서는 태수 왕식을 단칼에 베고, 마지막 관문인 활주관에서는 하후돈의 부하 진기를 베고는 배를 구해 황하를 건너게 된다.
유비에게로 가는 도중 관우는 고성을 지키고 있던 장비를 만난다. 장비는 관우를 조조의 부하로 오해해 장팔사모를 휘두르나, 관우가 조조의 장수를 베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자 오해를 푼다. 유비는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를 설득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어 관우를 만나게 되고, 조운(자룡)을 얻고 여러 장수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소설에는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는 없는 내용으로 허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관우가 주군 유비를 만나기 위해 조조의 곁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조조는 사로잡은 관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주며 자신의 부하가 되기를 회유하나, 그럴 때마다 관우는 "조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고,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해 양무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날 때 조조가 내린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유비에게로 향했다. 조조의 측근이 추격하려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쫓지 말라’고 타이르며 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소설의 내용과 같은 오관참육장과 같은 불상사는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소설에서처럼 관우가 5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조조 휘하의 수문장들을 모조리 참살하려 했다면 조조가 그를 조용히 보내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강한 장수와 병사를 보내 자신의 장수들의 목을 벤 관우를 응징했을 것이 당연하다. 즉 오관참장은 나관중이 지어낸 100% 허구의 소설 속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8)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는 뛰어난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몸소 누추한 곳이라도 찾아다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소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은 유비가 찾아올 때마다 일부러 자리를 피했으나 3번이나 찾아오는 정성을 받아들여 유비를 돕기로 결심해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비는 서서의 추천으로 제갈량을 만나러 간다. 처음 가을에 찾아갔으나 동자만이 있었으며 제갈량이 여행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겨울에 다시 찾아갔으나 역시 제갈량을 못 보고 그의 친구들과 장인과 아우만 보고 왔으며, 이듬해 봄에 찾아가자 마침 제갈량이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깨기를 기다린다. 그러자 동행했던 장비가 화를 내며 집에 불을 지르려 했고, 결국은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 촉서 유비전>에서는 이러한 삼고초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제갈량전>에 "서서가 제갈량을 추천하며 '그 사람은 이쪽에서 만나러 가야하며, 불러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부디 장군께서 몸소 가셔서 대면하도록 하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유비가 몸소 가서 세 번째에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제갈량도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에서 "선제께서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모옥을 방문하시어 천하형세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에 감격해 선제를 모실 것을 맹세했습니다."라는 언급이 있어 세 번이나 제갈량의 초옥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나 소설 속의 내용은 과장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위략'에서는 "제갈량은 형주가 조조에게 공격받는다면, 유표로서는 버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북상해 번성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 뵈었다. 하지만 유비는 당시에 제갈량을 몰랐고, 그가 젊다는 것을 보고 그저 식객이 되기를 원하는 정도로 생각해 특별히 말을 걸지도 않았다" 는 기록이 있어 소설 속의 삼고초려 내용은 과장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9) 조조가 100만 대군으로 유비를 장판까지 추격해오자 다급해진 유비는 도망가면서 장비에게 20명의 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지시했다. 소설 삼국연의에서는 장비가 숲속에 말 20마리를 묶어놓은 후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먼지를 일으켜 복병이 많은 것으로 위장했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장비는 장판교 위에 필마단기로 서서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라고 호령한다.
장비의 고함소리에 조조의 장수 하후걸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낙마하고 장비에게 덤비다 죽임을 당하자 조조군은 추격을 멈추고 돌아간다. 덕분에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고, 이후 장비가 다리를 불태워 끊어버린 것을 알고는 조조군은 유비의 사정이 급박함을 알고는 다리를 다시 만들어 추격을 개시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는 장비가 고함을 질렀다는 기록은 없고, “물가에 다리를 끊고 20기만 앞에 있자 물러났다.”고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조의 장수는 하후패였는데, 삼국연의에서는 하후패가 훗날 촉한에 귀순해 촉한을 위해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그가 낙마한 것이 아니라 하후걸이라는 가상의 장수가 낙마한 것으로 묘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기대승이 “지난번 (전하께서) 장필무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연의에 있다고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래 되지 않아 소신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는 것으로 보아 장판교에서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적장이 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관우가 문추를 죽이고, 유비를 만나러 가면서 5개 관문의 수문장을 참했다는 오관육참장은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없는 허구 그 자체이다. 장판교에서의 장비의 고함에 적장이 낙마하고 죽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인 것이다. 이렇듯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소설 삼국연의의 크라이막스는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인 것이다.
■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삼국연의의 적벽대전 (4부)
작은 전투를 백만대군이 동원된 전쟁으로 과장한 소설 삼국연의
이민족의 계속된 지배로 인해 침체된 한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륙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의 역사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명나라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든 소설 삼국연의에는 정사 <삼국지>에 없거나 각색된 명장면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이 촉한의 장수들 특히 관우의 무공을 부풀리고 있다. 그 크라이막스가 바로 허구와 과장으로 가득찬 적벽대전이다.
나관중의 황당무계한 역사소설인 삼국연의의 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드라마가 최근 한국에서 계속 상영되고 있다. 중국 CCTV에서 만든 대하드라마 ‘삼국연의’와 ‘삼국’은 한국 공영방송에서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탄 적이 있고, 여러 케이블방송에서 계속해 돌아가며 재방영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소설 삼국연의는 최근 5년간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져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조자룡의 일대기를 그린 ‘용의 부활’, 관우를 그린 ‘명장 관우’, 조조에 대해 그린 ‘황제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백미는 단연 ‘적벽대전’이라는 영화이다. 1부가 흥행에 성공하자 2부가 만들어져 한국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 ‘적벽대전’은 제작비가 무려 약 800억 원이나 든 대작인데 한국에서도 상당액이 투자되었다. 나관중의 황당무계한 과대망상 소설인 삼국연의의 크라이막스를 영화로 만드는데 한국에서 투자했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행위는 개인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중국의 역사왜곡에 동조하겠다는 것으로 간접적인 매국매족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의 정신이며 혼인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중국에서 정책적으로 지어낸 소설에 우리 한국인들은 환호를 보내며 열광하고 있으며, 또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주고 심지어는 이런 허황된 영화에까지 큰돈을 투자하는 무지함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국민들의 역사인식이 없고 황금만능주의에 눈이 멀었다 해도 그렇지 이러한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 삼국연의 속 적벽대전의 내용
장판 전투 이후 조조가 물러가자 제갈량이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시킨다. 손권은 조조와 전쟁할 것을 결심하고는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노숙을 군사로 삼아, 적벽에서 유비·손권의 동맹군 10만과 조조의 100만 대군이 맞붙게 된다. 물량으로는 조조군이 훨씬 유리했으나 유비·손권의 동맹군이 지략으로 조조의 대군을 전멸시킨다는 것이 소설 삼국연의의 내용이다.
100만 대군을 적벽에 배치한 조조는 주유와 친분이 두터운 장간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말도 못 꺼낸다. 장간은 조조군의 수군도독 채모와 장윤이 주유와 내통한 편지를 발견하고는 가지고 도망간다. 편지를 읽은 조조가 노하여 채모와 장윤을 죽이고는 새 수군도독을 임명한다. 그 가짜편지는 유능한 적장을 없애기 위한 주유의 술책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장간을 다시 보내지만 주유는 기밀편지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장간을 산속 외딴집에 가둔다. 그곳을 탈출하던 장간은 방통을 만나 조조에게 데려가 천거한다. 방통이 어떤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던 조조는 융숭히 대접하고는 수군배치상황을 보여주며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방통은 조조군이 수전 경험이 없어 배 멀미를 하고 있다면서 배를 서로 연결하라고 제언하자 조조는 즉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 역시 주유와 제갈량의 연환계 계략이었다.
유비의 휘하에 있다가 모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로 온 서서는 주유가 연환계를 쓰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평소 잘 아는 방통을 만나 자신이 살 길을 묻자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허창으로 돌아가 대비하겠다"고 조조에게 보고하라고 알려줘 서서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한편 제갈량은 안개가 많이 낀 날을 택해 짚으로 덮은 배들을 이끌고 가서 조조군이 쏜 화살 10만개를 수거해 돌아온다.
장간이 가져온 편지가 주유의 계략임을 알게 된 조조는 억울하게 처형된 채모의 동생 채중과 채화를 주유에게 가짜로 투항시킨다. 하지만 조조의 계략을 알아차린 주유가 오히려 고육계를 쓰고자 황개와 감녕을 처벌한다. 이 모든 것은 조조를 속이고자 주유가 벌인 연극이었다. 이를 알 리가 없는 채중·채화는 이러한 상황을 알리며 황개·감녕이 배를 타고 투항할 거라고 보고한다.
조조가 이들의 투항을 받아들이자, 주유는 각 부대에 전선 300척씩을 배치하고 각 부대 앞에 20척의 화선을 앞장세워 모두 1,200척으로 공격을 준비한다. 아울러 제갈량은 주유에게 동남풍이 불지 않으면 자신을 죽여도 좋다는 서약을 쓰고는 하늘에 기도해 바람의 방향을 조조군으로 향하게 만든다.
제갈량은 주유가 동남풍을 이용해 화공으로 묶여있는 조조군의 배들을 불태우면 대부분 전멸할 것이며, 전의를 상실해 도망가는 조조를 잡기 위해 조자룡을 오림에 매복시키고, 장비에게는 이릉으로 가는 길을 끊기 위해 호로곡 어귀에 매복하게 했으며, 유기를 무창에 매복시키는 작전지시를 마치려고 한다.
그러자 관우가 나서며 왜 자기에게는 임무를 주지 않느냐고 따지자, 제갈량은 관우가 조조에게 은공을 입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조조를 잡더라도 그냥 살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관우는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하면 군법에 의해 처형해도 좋다는 서약을 하고는 화용도로 가서 조조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노장 황개가 조조에게 투항하는 척 하면서 다가가 선단에 불을 붙이고는 돌진해 들어간다. 조조군 수채에 불이 붙자 연환계에 의해 모든 배가 타버리고 조조군은 몰살당하고 만다. 조조는 소수의 군사만 거느리고 탈출해 오림으로 후퇴하다가 주유군과 조자룡이 기습해오자 이릉으로 도망간다. 도중에 호로곡에서 매복하고 있던 장비가 기습하자 조조는 다시 도망간다.
조조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일 정도로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100만에 달하던 엄청난 대군도 화용도 인근에서는 단지 100명만 남아 조조를 따르고 있었다. 화용도로 가는 도중 갈림길이 나타났다. 큰 길 너머에서는 연기가 안 나는데 작은 길 너머에서는 모닥불을 피운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조가 작은 길로 가려하자 병사들이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자 "이는 제갈량의 함정이다. 작은 길에 불을 피워 큰 길로 유도하려는 계책이다. 그러니 작은 길로 가자."라고 대답했다. 갈림길의 작은 길 너머에 모닥불을 피운 제갈량의 계책에 허허실실 계책에 밝은 조조가 속아 넘어간 셈이다. 제갈량은 조조가 잘못된 판단을 하게끔 유도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작은 길로 가면서 조조는 “주유와 제갈량은 꾀가 없어! 나 같으면 여기다 군사를 매복시켰을 텐데 말이지. 그랬으면 우리 모두 죽는 거 아니겠나?”라고 말했고, 그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매복하고 있던 관우가 나타난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조는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한다. 관우는 자신이 조조를 살려보내면 군법에 의해 처형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에 조조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기 때문에 차마 조조를 죽이지 못하고 그냥 살려보내고 만다. 이 장면 역시 관우는 신세를 갚을 줄 아는 의리의 사나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관우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제갈량은 군율대로 관우를 참하려 했다. 그러자 유비가 나서면서 관우는 자기와 한날한시에 죽기로 도원에서 결의한 의형제 사이이니 관우를 죽이려면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며 눈물로 호소하자 난처해진 제갈량은 관우를 참하라는 명령을 취소한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조조는 남은 군사 27명을 이끌고 허창으로 돌아간다. 주유는 여세를 몰아 형주에 있는 조조군을 공격하고 이후 1년간 조조와 손권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 삼국연의(三國演義)의 10가지 뛰어난 문구
첫째, 인중여포, 마중적토(人中呂布, 馬中赤兎) : 사람중에는 여포, 말중에는 적토마
8개의 글자로서 두가지 사물을 찬양하고 있다. 나중에 관우가 적토마를 얻기는 하지만, 관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도 작가는 여포의 팬이었나보다.
둘째, 마씨오상, 백미최량(馬氏五常, 白眉最良): 마씨중에 다섯 아들이 있는데, 흰눈썹을 가진 자가 가장 뛰어나다.
마씨 집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고, 여기에는 사람들이 다 아는 마량, 마속이 들어간다. 마량은 재능이 특출하여, 유비가 서천에 자리잡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그러나 너무 빨리 죽는다. 마속은 지혜가 뛰아나서, 제갈량의 칭찬을 받는데, 아쉽게도 나중에 잘못을 저질러 가정을 잃어버린다. '읍참마속' '백미'와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왔다.
셋째,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 온몸을 바쳐 최선을 다하고 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출사표>>는 제갈량이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누가 썼는지는 불문하고, 여기의 국궁진췌, 사이후이는 바로 제갈량의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제갈량이 나중에 여섯번 기산에서 출병하였으나 어떨 수 없이 회군하던 때의 심정을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넷째, 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 이미 주유를 낳았으면서, 어찌 또 제갈량을 낳았단 말인가.
<<삼국연의>>에서 주유는 마음이 좁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병이 깊어 곧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입으로 마음으로 이러한 느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어서 제갈량의 지기를 높이고, 스스로의 위풍을 깍는 일이 되고 말았다.
다섯째, 자룡일신도시담야(子龍一身都是膽也) : 조자룡의 온 몸은 담(쓸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조운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평가이다. 원인은 삼국연의에서 조자룡은 작자가 중점적으로 묘사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나올 때마다 영웅의 풍모가 있고, 이기지 못한 전투가 없다. 그러나 유비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자룡이 자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라다녔는데도 그의 담량을 알면서도, 평소에 그저 그에게 양식, 풀이나 나르게 하고 전장을 청소하게 하고, 가족의 잡일을 맡겼다. 정말 영웅을 몰라본 소치이다.
여섯째, 복룡,봉추이인득일, 가안천하(伏龍,鳳雛二人得一, 可安天下) : 복룡(제갈량), 봉추(방통)의 두 사람중 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사마휘는 제갈량과 방통을 잘 보았고, 일찌기 제갈량을 강상(강태공), 장량에 비유했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해도 놀라운 것은 없다. 두사람은 모두 경천위지할 경륜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전혀 과분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것은 유비가 두 사람을 다 얻었음에도, 천하를 얻지 못하였으니...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곱째, 내사부결문장소, 외사부결문주유(內事不決問張昭, 外事不決問周瑜) : 국내일을 결정하지 못할 때는 장소에게 묻고, 외교일을 결정하지 못할 때는 주유에게 물어라.
손책은 당시에 패기가 넘치면서 책략이 부족한 점을 드러네곤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었다. 죽음에 임하여 손권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사실은 그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소가 대외적인 일을 할 때는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얘기를 하였고, 주유가 내부일을 처리할 때는 손권의 여동생을 멍청하게 유비에게 시집보내는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자기의 일을 처리할 때는 제대로 잘 처리하였다.
여덟째, 생자당여손중모(생자당여손중모):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같이 낳아야 한다.
어릴 때 삼국연의를 보면, 이 말의 뜻을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손권을 칭찬하고, 손권을 욕하지 않는 것일까? 조금 큰 이후에야 이 말을 깨달았다. 조조는 사실 손권의 부친인 손견과 같은 배분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외에 조조가 보기에 손권은 부친의 기업을 제대로 보존하여, 원소나 유표처럼 패가망신하지 않아ㅏㅆ다는 것이다. 나중에 송나라때 신기질이 손권을 좋아하여 자기의 송사안에 이 말을 집어넣었다.
아홉째, 천하영웅, 유사군여조이(天下英雄, 惟使君與操耳) : 천하의 영웅은 오로지 그대와 나 뿐이다.
개인적으로 조조가 한 모든 말 중에서 이 말이 가장 뛰어나다. 이로써 유비로 하여금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리게 하고, 하늘도 천둥이 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천기를 누설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가 이렇게 말한 것은 시험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유비에게 속아서, 자기가 태어난 이래 가장 정확하게 말했던 이 말을 부인하는 것이 아쉽다.
열째,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 : 평화로운 시기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로다.
이 말은 조조의 일생을 정의한 것일 뿐아니라 조조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매우 좋아했는데, 그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지 않았을까. 그에게 황제가 된다고 하지 않았는데, 바로 왕망, 동탁처럼 황제위에 오른 후에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
▶️ 移(옮길 이, 크게 할 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벼화(禾; 곡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겹치다, 많음의 多(다)로 이루어졌다. 곡식의 이삭이 넘실넘실 물결 치는 모양에서 '넘실넘실 자라다'에서 '옮기는 일'을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移자는 '옮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移자는 禾(벼 화)자와 多(많을 다)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多자는 고기를 쌓아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다, 이'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移자는 본래 모를 옮겨 심는 것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벼의 생육을 높이기 위해서는 볍씨를 모판에 일정 기간 성장시킨 후에 논에 옮겨 심기하는데, 이것을 이앙법(移秧法)이라고 한다. 그래서 移자는 '모판을 옮겨 모내기 한다'라는 뜻을 가졌으나 지금은 단순히 '옮기다'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移(이, 치)는 중국 한대(漢代)부터 있었던 공문서(公文書)의 한 가지이다. 동등(同等)한 관청(官廳) 사이에 주고받던 공문서로, 때로는 격(檄)과 더불어 포고문(布告文)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이문(移文), 이서(移書) 등의 뜻으로 ①옮기다 ②늦추다 ③옮겨 심다, 모내기 하다 ④바꾸다, 변하다 ⑤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연루(連累)되다 ⑥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⑦붙좇다(존경하거나 섬겨 따르다) ⑧버리다 ⑨알리다, 핑계를 대다 ⑩흔들다 ⑪우러러 보게 하다, 그리고 ⓐ크게 하다(치) ⓑ많다(치) ⓒ남아돌다(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할 위(僞),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다. 용례로는 움직여 옮김을 이동(移動), 살던 곳을 떠나 딴 곳으로 옮겨 가서 삶을 이주(移住), 사물의 소재나 주소를 다른 곳으로 옮김을 이전(移轉), 집을 옮김을 이사(移徙), 서로 옮기어 바뀜을 이체(移替), 식물 따위를 옮겨 심음을 이식(移植), 남에게 옮기어 줌을 이양(移讓), 무덤을 옮김을 이장(移葬),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백성을 옮기어 살게 함을 이민(移民), 옮기어 감을 이행(移行), 한 교도소에서 다른 교도소로 수감자를 옮김을 이감(移監), 다른 곳으로 옮겨 보냄으로 재판하기 위하여 죄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함을 이송(移送), 딴 곳으로 옮기어 감을 이거(移去), 모내기로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일을 이앙(移秧), 다른 곳으로 다시 알리는 것 또는 그 공문이나 통첩을 이첩(移牒), 돈이나 물건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줌을 이급(移給), 자기의 집이나 논밭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김을 이매(移賣), 일이나 형편이 차차 옮아 가거나 변해 감을 추이(推移), 위치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전이(轉移), 물건을 실어 날라서 옮김을 만이(輓移), 남몰래 옮김을 밀이(密移), 다른 나라에 옮겨가서 사는 백성을 이주민(移住民),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하늘을 옮기고 해를 바꾼다는 뜻으로 간신이 정권을 농락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이천역일(移天易日),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남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우공이산(愚公移山), 갑에게 당한 노염을 을에게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당한 노염을 전혀 관계없는 딴사람에게 화풀이 함을 이르는 말을 노갑이을(怒甲移乙),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하우불이(下愚不移), 각자가 깨닫고 마음에 새기어 변함이 없는 일을 일컫는 말을 각지불이(各知不移), 남산을 옮길 수 있다는 뜻으로 굳게 마음먹은 결정 또는 결심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남산가이(南山可移) 등에 쓰인다.
▶️ 禍(재앙 화)는 ❶형성문자로 旤(화)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보일 시(示=礻; 보이다, 신)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문책(問責)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咼(화)로 이루어졌다. 신의 문책, 타박 등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禍자는 '재앙'이나 '화를 입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禍자는 示(보일 시)자와 咼(화할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咼자는 앙상한 뼈와 입을 함께 그린 것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咼자가 '재앙'을 뜻했었다. 금문에서는 신이 내린 벌을 뜻하기 위해 示자가 더해지면서 지금은 禍자가 '재앙'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禍(화)는 (1)모든 재앙(災殃)과 액화(厄禍) (2)몸과 마음에나 또는 일에 뜻밖에 당하는 불행(不幸)이나 손실(損失) 등의 뜻으로 ①재앙(災殃) ②재화(災禍) ③사고(事故) ④허물 ⑤죄(罪) ⑥재앙(災殃)을 내리다 ⑦화를 입히다 ⑧해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액 액(厄), 재앙 앙(殃), 재앙 재(災),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복 복(福)이다. 용례로는 재앙과 복을 화복(禍福), 재앙을 가져올 근원을 화근(禍根), 재앙과 환난을 화난(禍難), 재앙과 난리를 화란(禍亂), 재앙에 가까이 가는 단계를 화제(禍梯), 재앙의 원인을 화인(禍因), 화를 일으킬 실마리를 화단(禍端), 재변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고 잠겨 있는 기틀을 화기(禍機), 매우 심한 재액을 화변(禍變), 좋지 못한 일을 화사(禍事), 재앙이 벌어지는 빌미를 화색(禍色), 재앙을 주는 신을 화신(禍神),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화심(禍心), 참혹한 재화를 참화(慘禍), 전쟁이나 난리로 말미암은 재앙을 병화(兵禍), 화를 남에게 넘겨 씌움을 가화(嫁禍), 흉악한 재앙을 흉화(凶禍), 재앙을 불러들임을 고화(賈禍), 집안에 일어난 재앙을 가화(家禍), 화를 면함을 면화(免禍), 전쟁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재앙을 전화(戰禍), 병으로 말미암아 입는 재앙을 병화(病禍), 화를 당함을 봉화(逢禍), 남의 일로 말미암아 뜻밖에 당하는 재앙을 비화(飛禍), 재앙이 바뀌어서 오히려 복이 됨을 이르는 말을 화전위복(禍轉爲福), 화복이 꼰 노와 같이 서로 얽혀 있다는 뜻으로 재앙이 있으면 복이 있고 복이 있으면 재앙도 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화복규묵(禍福糾纆), 화나 복이 오는 문은 정하여 있지 않다는 뜻으로 스스로 악한 일을 하면 그것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 되고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이 복이 들어오는 문이 된다는 말을 화복무문(禍福無門), 재앙이 되는 것은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라는 말을 화종구생(禍從口生),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오게 됨을 이르는 말을 화불단행(禍不單行), 죄화를 입은 집안의 자손을 일컫는 말을 화가여생(禍家餘生), 화나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임을 이르는 말을 화복동문(禍福同門), 화란이 생기는 것은 다 덕이 없는 탓임을 이르는 말을 화생부덕(禍生不德), 화는 망령되이 이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화가 도래함은 다 그 원인이 있음을 이르는 말을 화불망지(禍不妄至), 재앙은 악을 쌓음에 인한 것이므로 재앙을 받는 이는 평소에 악을 쌓았기 때문임을 일컫는 말을 화인악적(禍因惡積)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計(셀 계)는 ❶회의문자로 计(계)는 간자(簡字)이다. 言(언)과 十(십)의 합자(合字)이다. 말(言)로 묶음(十)씩을 헤아려 센다는 뜻이 합(合)하여 계산하다를 뜻한다. 言(언)은 말, 十(십)자는 千(천)으로 쓴 자형(字形)도 있으며, 十(십)이나 千(천)은 우수리 없는 수이고, 計(계)는 수를 소리내어 헤아리며 정리하여 나가다, 계획하다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計자는 '세다'나 '헤아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計자는 言(말씀 언)자와 十(열 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十자는 긴 막대기를 그린 것으로 숫자 10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숫자 10을 뜻하는 十자에 言자가 결합한 計자는 1에서 10까지 말(言)로 셈한다는 뜻이다. 쉬운 셈은 간단히 말로 계산을 할 수 있으니 計자는 그러한 의미가 담긴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計(계)는 (1)어떤 명사 아래에 쓰이어 그것을 계량 또는 측정하는 기구나 계기임을 나타내는 말 (2)합계(合計)나 총계(總計) (3)꾀 등의 뜻으로 ①세다 ②셈하다, 계산하다 ③헤아리다 ④꾀하다 ⑤수학 ⑥산수 ⑦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셈 수(數), 꾀 책(策), 셈 산(算)이다. 용례로는 수량을 헤아림을 계산(計算), 바둑을 다 둔 후에 집 수를 계산하는 일을 계가(計家), 분량을 계산하는 일을 계량(計量), 수량을 재는 각종 기구를 계기(計器), 부분 끼리의 합을 다시 몰아서 친 셈을 누계(累計), 수효를 헤아림을 계수(計數), 촌수를 따짐을 계촌(計寸), 꾀가 막히고 힘이 다하였다는 뜻으로 더는 어떻게 할 방법과 수단이 없다는 말을 계궁역진(計窮力盡), 계획하여 보나 소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계무소출(計無所出), 계책이 들어맞지 아니함을 계불입량(計不入量), 꾀는 있으나 쓸 만한 데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계무소시(計無所施), 먼 앞날까지 내다보고 먼 뒷날까지 걸쳐 세우는 큰 계획을 일컫는 말을 백년대계(百年大計),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김을 이르는 말을 망자계치(亡子計齒),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계책을 일컫는 말을 목전지계(目前之計),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 아무리 생각해도 풀 만한 계교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백계무책(百計無策), 천 가지 방법과 백가지 계책이라는 뜻으로 온갖 꾀를 이르는 말을 천방백계(千方百計)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