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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북한 김정은. 러시아 푸틴, 러시아 보드토니치 우지기지서 정상회담
2019년 낙태전문 의사 자택에서 태아사체 2246개 발견
사망한 낙태전문 의사의 자택에서 태아 사체 2246개가 발견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일리노이 경찰은 북부 윌 카운티의 졸리엣에서 2019년9월3일 사망한 낙태전문 의사의 집에서 의학적으로 보존된 태아 사체를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윌 카운티의 보안관실은 9월13일 밤(현지시간) “사망한 낙태전문 의사 울리히 클로퍼의 가족들이 전날 검시관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의사의 자택에서 문제의 사체를 발견한 사실을 알렸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9월3일 사망한 클로퍼는 인디애나주의 한 낙태 시술 의원에서 오랫 동안 의사로 일해왔으며 주 정부가 이 병원의 면허를 2015년에 취소하면서 병원은 문을 닫았다. 클로퍼는 2016년 11월에 인디애나주 의사면허 위원회로부터 면허 정지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할리마 야쿱(말레이 계) 전 국회의장 싱가포르 첫 여성 대통령 됨
2010년 '안중근 유해 발굴 헌신' 김영광 전 의원 별세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광(79) 전 의원이 2010년 9월 1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김 전 의원은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장, 10대(유정회)·11대(국민당, 전국구)·14대(민자당, 경기 송탄·평택) 의원을 지냈고, 한일의원연맹 운영위원장, 헌정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김 전 의원은 특히 지난 30년 가까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10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안중근 유해 찾기를 시작해 안 의사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뤼순(旅順)에 11차례나 찾아가는 등 중국 30여회, 일본 20여회, 미국 3~4회 등을 방문해 관련 증언과 자료를 수집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이사장으로도 활동했으며,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국권이 회복되거든 내 뼈를 조국에 묻어달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기 전까지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했었다.
2008년 인도 뉴델리 쇼핑가에서 다섯 차례 연쇄폭탄테러 사망 23명
2005년 제4차 북핵 6자회담 개막(베이징)
2005년 조계종 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 입적
2002년 태풍 ‘루사’ 피해 입은 전국 1917개 읍·면·동에 ‘특별재해지역’ 선포
태풍 루사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전국 일원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됐다.
이에 따라 태풍 ‘루사’로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은 16개 시도 203개 시군구의 1천917개 읍면동이 특별재해지역에 포함됐다.
정부는 13일 오후 14개 부처의 차관들이 참석한 재해대책위원회를 열고, 피해발생지역 내 주민들이 공평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전국 일원에 대해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해줄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이를 재가했다.
이근식(李根植) 행정자치부 장관은 “이번 태풍으로 전국에 걸쳐 7조7000억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해 일부 지역만 특별재해지역으로 선정할 경우 형평성 문제가 있고 효과적인 재해수습이 곤란해 전국 단위의 지정을 건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특별재해지역에는 지난 달 4~11일 집중호우로 침수피해를 입은 경남 김해시 한림면, 함안군 법수면, 합천군 청덕면도 포함됐다.
정부는 일단 추석 전까지 파손된 주택에 대해 500만원, 침수 주택에 대해 200만원, 80% 이상 피해를 입은 농어민에 대해 500만원씩 특별위로금을 먼저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소요되는 총 지원금 중 70%인 5조5000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놓았으며, 나머지인 30%인 2조2000억원은 지방비와 융자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2000년 내셔널지오그래픽지, `흑해가 7500년 전에는 담수호였다`고 발표
흑해의 나이가 7500살로 판명됐다. 7500년 전까지 담수호였던 흑해는 지중해의 바닷물이 흘러들어 바다로 변했으며, 이 대범람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홍수신화를 탄생시켰다는 학설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가 발견됐다.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 탐사팀은 터키의 시놉에서 약 193km 떨어진 흑해 해저 95m 지점에서 7500여년 전 주거지 유적을 발견했다고 2000년 9월 13일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흑해의 수면이 현재보다 168m 낮았으며, 7500년 전까지 흑해에서는 민물조개가 살았다는 탐사팀의 1999년 조사결과와 일치했다.
학자들은 유럽의 빙하가 녹으면서 지중해의 수면이 높아졌고, 보스포러스 해협이라는 천연 댐이 막아내던 지중해의 해수가 2년 동안 흑해로 흘러들어 담수호를 바다로 변모시켰다고 설명했다.
1997년 이인제 경기지사,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선언하고 신한국당 탈당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국내 최초의 국제 영화제인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1996년 9월 13일 부산시 해운대구 수영만 요트경기장 앞 야외극장에서 개막됐다.
개막식은 외국초청 인사들과 국내의 영화계-문화계 인사들, 시민 등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됐다. 개막영화로는 그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비밀과 거짓말`(마이크 리 감독)이 밤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야외극장에서 6층 건물 높이의 초대형 스크린에 상영됐다.
부산영화제는 이를 시작으로 21일까지 시내 부산극장 등 7개 극장과 수영만 야외극장에서 7개 부문에 걸쳐 초대된 31개국의 극영화와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등 최신 화제작 1백70여 편을 상영했다.
개막식에는 김영수 문화체육부 장관 등 문화 관련 단체장, 김지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등 영화계 인사들, 정계 인사들과 개막영화 `비밀과 거짓말`의 주연배우인 블렌다 블리신을 비롯한 외국의 영화배우, 감독 등 3백여 명의 귀빈이 자리를 함께 했다. 영화제 기간 중 18만4071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4억8277만원의 입장수입을 올렸다
1993년 이스라엘-PLO 평화협정 서명
이스라엘과 PLO간의 평화협정이 1993년 9월 13일 오전 11시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평화협정에 서명, 중동평화의 새 장을 열었다.
이날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등 관련 당사자 수뇌와 각국 외무장관, 외교사절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PLO의 아부 마젠 아랍-국제담당 국장이 양측을 대표해 서명했다. 조인식은 전세계 1백여국에 생중계됐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평화협정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와 가자지구에 대한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협정,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실체 승인 등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다
1991년 고영환 콩고주재 북한대사관 1등서기관 귀순
199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7대 대통령) 이상룡 선생 등 유해5구 환국
1988년 정부 공산권국가와는 최초로 헝가리와 상주대표부 설치에 합의
1986년 제31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개막 (서울)
1985년 미국 공군, 위성공격무기실험 성공 발표
1983년 한국-요르단 정상 공동성명
1982년 4차 한국-인도네시아 자원협력위원회 서울서 개막(~15일)
1982년 경북대 경남섬천서 1억년 전의 공룡화석 발견
1982년 스페인 여객기, 말라가공항 이륙직후 추락으로 승객등 77명 사망 실종
1980년 정부, 중공업 2단계 통합조정 단행
1978년 국어학자 이극로 북한에서 사망
국어학자 이극로 선생이 1978년 9월 13일 북한 평양에서 85세로 사망했다.
1893년 8월 경남 의령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만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독일 유학길을 떠났다.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이극로는 1929년 귀국, 조선어연구회에 몸담았다. 조선어학회로 개명한 이 단체에서 주간으로 활동한 이극로는 조선어사전 편찬, 한글맞춤법 제정, 외래어 표기, 표준어 사전 등에 관여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조선어학회 사건’ 주모자로 6년형을 선고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는 이후 조선어학회 회장,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 등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좌우갈등의 한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평양으로 간 후 그곳에 눌러앉은 것은 이극로의 이름을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한 계기가 됐다. 북한에서 조국전선중앙위 의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 위원장 등 요직을 거쳤다. 저서로는 1947년 출간한 ‘고투 사십년’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75년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7백 명 추석 성묘차 첫 입국
1975년 포항지역 무장공비사건
1974년 국립천문대 발족
과학기술처(지금의 과학기술부) 산하에 국립천문대가 설치되었다.
국립천문대는 천문학에 관한 연구와 천상관측 및 역서 편찬, 표준시의 결정 및 시보(時報)에 관한 사무를 주목적으로 설치된 천문연구 국가기관이다.
출범 이후 행성․태양․항성․은하․외부은하․우주 등에 관한 관측과 이론연구, 우주전파연구, 인공위성의 궤도와 천체역학 연구, 천문기기 개발연구 등을 추진했으며, 대민업무에 있어서는 일력자료 발표, 역서 편찬, 표준시의 결정, 음․양력 대조증명발급과 천문지식의 홍보 등을 수행했다.
소백산천체관측소의 24인치(61㎝) 반사망원경과 20㎝ 굴절망원경을 관측장비로 사용해오다가, 1985년말 충청남도 대덕연구단지로 옮기면서 새로이 지름 14m의 ㎜파(波) 관측용 전파망원경을 설치했다. 1986년 3월 14일 기구직제를 폐지하고, 그 업무와 기능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로 이관했다가 1991년 10월 17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천문대로 바뀌었다.
1999년 5월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우주천문연구부․보현산천문대․소백산천문대․대덕전파천문대 등을 운영한다.
1973년 인탐 캄보디아 총리 피난
1970년 우익 쿠데타로 집권한 캄보디아 론놀 정부의 인탐(IN TAM) 총리!
1973년 오늘 인탐 총리는 크메르 루즈군의 공세를 피해 태국으로 도피합니다.
수천명의 캄보디아 국민들도 인탐 총리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로부터 2년뒤인 1975년 캄보디아에 공산정부가 들어서자 인탐 총리는 태국 북부에 피난민 정착촌을 만들어 2천여명의 캄보디아 국민들과 함께 거주합니다.
태국정부는 국경을 봉쇄하고 캄보디아 난민들의 유입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생존을 위한 피난민들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1972년 서울에서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린 지 만 14일만에 서울에서 개막되었다.
이범석 한국적십자사 수석대표는 개회연설을 통해 적십자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회의 진행을 강조했다.
김영우 한국적십자사 총재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그리고 고려대 교수인 김준엽 한국적십자사 자문위원등의 축하연설이 이어졌다.
양측 대표들이 이견 접근을 위해 노력했지만 평양에서의 3차 회담과 또다시 서울에서 개최될 4차회담의 일정 등을 담을 합의문서를 교환하고 2차회담을 마무리 했다.
또한 3차 회담부터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절차를 빼고 바로 의제토의에 들어가자고 합의했다.
1971년 임표, 비행기 추락사
1971년 9월 13일 새벽, 중국 공산당 부주석 겸 국방부장인 임표와 당 정치국원인 그의 아내 섭군, 그리고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겸 공군 작전부 부부장인 그의 아들 임입 등 9명이 탑승하고 있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중형 제트기 ‘트라이던트 256기’가 몽골 운도르한에 추락했다. 공군기는 불탔고 탑승자 전원은 사망했다.
‘256기’는 중국 하북성 북대하의 산해관 공항에서 새벽 0시 32분 경에 급히 이륙한 공군기였다. 조사결과 ‘256기’는 연료가 떨어져 불시착하려다 실패해 추락한 것으로 밝혀졌다. 임표가 탑승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몽골은 영공침범만을 중국에 항의했으나, 중국 정부는 사과의사만 전달했을 뿐 임표의 탑승 사실은 비밀에 부쳤다.
임표 추락사 후 11일이 지난 9월 24일 임표를 따르던 군 참모총장 황영승과 3명의 부총장인 오작헌, 이작붕, 구회작이 구속됨으로, 문화대혁명 때부터 강청 등 4인방과 또 다른 한 축을 담당, 중국 전역을 혼란케 했던 임표 시대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사후 그의 사인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문화대혁명을 배후에서 지시한 모택동마저 문화혁명이 통제불능 사태로 발전될 기미를 보이자 이를 수습하려 했지만, 임표가 계속적으로 문화혁명을 강행하려 했다는 점. 또한 모택동에 대한 지나친 아부와 충성이 다른 경쟁자들에 의해 견제당해왔다는 점 등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모택동의 후계자가 되려고 무리하게 시도를 하다 모택동마저 그로부터 멀어져갔다. 이에 부인, 아들 등과 합세해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중국 탈출을 시도하다 이날 화를 당한 것이었다.
임표 사후 중국 공산당은 1971년 12월부터 이듬해인 1972년 7월에 걸쳐 ‘임표 반당 집단의 반혁명 정변을 분쇄한 투쟁’이라는 자료를 세 차례나 당 내부에 배포해 임표가 쿠데타를 시도하다 도주한 것으로 공식 평가했다.
1971년 월성 해안 침투간첩 사살사건
해병대 병력이 경북 월성 해안에서 공비3명을 발견, 교전 끝에 2명 사살.피해(경상 2명)
1968년 알바니아,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탈퇴
1966년 전국 뇌염환자 2,948명 사망 573명
1964년 서울에 집중호우. 사망 194명, 실종부상 319명, 가옥 9,263여동 등 피해
1962년 브라질 다 로차 내각 총사직
1961년 레오폴드 빌에서 유엔민사책임자, 유엔이 무력으로 카탕카의 분립을 종결지어 15개월 간에 걸친 카탕카주 문제는 사실상 종식되었다고 발표
1959년 서독대통령에 류브케 취임
1959년 중국-인도 국경분쟁문제에 관한 결의 채택
1956년 세계보건기구(WHO), 원자방사능이 인류유전에 유해한 것으로 결론
1955년 서독-소련 국교수립
1952년 북해서 나토군 대연습 개시
1943년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에 취임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이집트 침공
1928년 이탈리아 심리소설의 선구자 이탈로 스베보 사망
1924년 신석우 조선일보 인수(사장에 이상재-부사장에 신석우)
1924년 9월 13일 30세의 우창 신석우가 8만5천원을 주고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중국 상해 조선인 독립운동계에서 맹활약하던 그는, 조선조 말 경무사를 지낸 부친 신태휴로부터 물려받은 전답과 전 재산을 내놓고,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는 조선일보의 재정을 살리고, 사람을 모으고, 지면을 혁신시켰다. 조선일보는 신석우의 인수로 재도약 계기를 마련했으며 사장으로 민족의 스승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대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조선일보를 인수한 그 해 3월 이상재 사장이 별세하자 그는 33세의 나이에 사장에 취임, 계속되는 정간으로 빚어지는 격심한 신문사 운영난에도 불구하고 배일 논조로 일관,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다. 신석우의 활약은 일제하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 활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1927년 2월15일 오후7시 서울 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신석우는 사회를 맡았고 홍명희가 개회를 선언했으며 이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신석우는 민세 안재홍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상해로 탈출했다.
신석우는1920~3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목이었다. 신석우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제정말고도 임정 초대총리에 이승만 추천, 임시헌장에 병역 포함 등을 관철시키는 등 초기 임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94년 의정부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를 졸업한 그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 `아등(我等)의 소식`이라는 유인물 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광복때까지 십수년간을 이국에서 머무르다 광복 후 귀국, 1949년 8월부터 대만의 주중화민국 대사를 1년 4개월동안 지낸 후, 1953년 조용히 우리곁을 떠났다. 민족을 위해 일한 이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기 한권 남아 있지 않다.
1923년 스페인에 군사쿠데타, 리베라장군 바르셀로나 점령
1922년 김익상(金益相) 의사 의거
평남 강서출생.
김 의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설움을 안고 중국에 망명, 독립 운동가들의 모임인 철혈단에 가담해 오성륜, 이종암 등 동지들과 협의하여 1922년 오늘 중국을 시찰하기 위해 상해에 온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이 의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김의사는 일본 관헌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암살당했다.
1914년 미국 오르간 제작자 호프 존스 사망
1910년 독립운동가 이재명(1909년 12월 명동성당서 이완용을 난자하고 체포됨) 사형 집행
1894년 프랑스 작곡가 엠마누엘 샤브리에 사망
1886년 미국의 교육자 겸 작가 알레인 로크 출생
1874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쇤베르크 출생
1873년 독일군, 프랑스에서 철수
1872년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사망
1871년 청일수호조약 조인
1849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완성
조선 헌종15년(1849) 홍석모(洪錫謨)가 편찬한 우리 나라의 연중 행사 및 풍속을 설명한 책이다.
정월에서 12월까지 1년간의 행사와 풍속을 23항목으로 분류한 것으로써, 세시기(歲時記)중에서 가장 섬세하다
1847년 미군, 멕시코의 차풀테펙 요새를 점령
1819년 독일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태어남
1800년 정조(正祖 ; 1752.9.22 – 1800.9.13)사망
조선 왕조 제22대 왕.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
비(妃)는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이다.
선왕의 탕평택을 계승하여 당쟁의 격화 억제에 힘썼고, 91년 신해교난(辛亥敎難)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규장각을 설치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서적 편찬에 힘을 기울여서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대전통편(大典通編)><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간행하였고, 친히 찬수한 <팔자백선(八子百選)><오경백선(五經百選)> 및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출간하였다.
특히, 악형금지,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 폐지, 자휼전칙(字恤典則) 반포 등으로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능은 수원의 건릉(健陵)이다.
1598년 펠리페3세,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으로 즉위
1592년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 사망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몽테뉴가 1592년 9월 13일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철학과 고전에 열중했다. 보르도와 파리에서 교육받았고 법관을 거쳐 궁정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5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몽테뉴의 영주가 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영주이면서도 농민이나 정원사들과 대화 나누기를 즐겼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가 건너온 시기이기도 했지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심각한 대결구도에 빠져들었지만 그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견지했다.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한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에세’라는 책을 출간했다. ‘에세’는 그를 상징하는 ‘수상록’의 원제이기도 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에세이의 어원이기도 하다. 몽테뉴는 젊은 시절 쾌락주의적 천성과 싸우며 스토아적 금욕주의에 빠져들었던 법조인 겸 관료였다. 그리고 점차 경륜을 쌓으며 자유로운 인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회의주의자였지만 ‘절대적인 완성’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무엇보다 그가 육체와 정신의 쾌락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양성과 유연성, 평범함을 높이 평가했다는 데 있다.
1395(조선 태조 4) 도성축조도감 설치
81년 제10대 로마제국 황제 티투스 사망